2기 '모험' 다섯 번째 - ＜돈 키호테＞

[시로군]

막막한 고전읽기@물푸레 2기 모험

5차 모임 <돈 키호테(Don Quixote)>

201201011 THU

0. 세르반테스

주변인. 평생 체제에 순응했고 체제 속에서 출세하고자 했으나 주류에 들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름. 귀족 출신이긴 했으나 가난한 귀머거리 의사의 아들로 정상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22세에 군대에 들어가나 5년 간 포로 생활을 거쳐 33세에 귀국. 58세의 나이에 <돈키호테>를 쓰기 전까지 20년 간 가난한 생활, 먹고 살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함. 그 사이 두 차례 투옥되기도.

1. 돈키호테는 광인인가?

표결에 부친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나는 일단 돈키호테는 ‘광인’이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지겠다(참고로 '광인'이라고 규정된 이는 그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현실에서 돈키호테와 같은 존재를 만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나 장광설에 흥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측불허의 '행동'들은 두렵다. 말이나 생각만으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 말과 생각을 정말로 실행하는 건 다른 문제다.

어쩌면 마음 단단히 먹고 그의 모험에 동참할 수도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그렇게 결정적이지도 않고 단지 내게 사소한 피해가 닥치는 순간--이 오면, 나는 그를 배신하고 경찰이나 병원에 넘기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

2. 돈키호테는 숭고한 이상주의자인가?

사라져가는 기사도, 정의, 분별 등등...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돈키호테의 장광설은 굉장히 매력적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목숨을 내걸고 신봉하는 ‘기사도’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렇다. 기사는 자신의 처지를 우선 돌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약한 자, 자유를 박탈당한 자, 억압당한 자의 편에 서기를 우선시한다. 그가 신봉하는 ‘기사도’란 분명 시대착오적인 가치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무훈을 세우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는 ‘편력기사’란(이점, ‘편력기사’는 무협의 ‘협객’들과 닮았다) 중세 봉건사회를 지나 절대왕정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던 17세기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에 대한 여러 해설들은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본다. 즉 돈키호테는 “숭고한 이상을 갖고 현실에 맞서 싸우는” 존재이며, 반면 산초는 현실주의자인데, “두 인물이 하나로 합쳐져야만 총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돈키호테> 해설 참조). 아마도 이런 해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풍차를 향해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에서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건 아무리 좋게 봐도 미친 짓이다. ‘이상’이란 그것이 ‘이성’에 토대를 둘 때 ‘이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성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을 경우, 그건 이상이 아니라 ‘환영’에 이끌린 미친 짓이 아닐까?

3. 사회 풍자

물론 그렇다고 <돈키호테>가 한 미친 인간을 조롱거리와 놀림거리로 삼는 유머 모음집은 아닐 것이다. 대개의 고전들이 그렇듯 <돈키호테> 역시 당대 사회를 적절히 풍자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시각으로 <돈키호테>를 읽기 전에 당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를 헤아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책 뒤편의 작가 연보를 보면 알 수 있듯, 세르반테스가 활동한 시기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용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즉 중세 봉건질서를 벗어나 근대로 접어든 무렵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의 활동시기가 셰익스피어의 그것과 겹친다는 점도 흥미롭다(세르반테스는 세익스피어와 같은 해, 같은 날에 죽었다). 또한 본문을 읽어보면 당시 기사문학이 꽤 인기를 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직 새로운 형식과 미학을 갖춘 근대 문학이 등장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인데, 여러 문학사가들이 <돈키호테>를 근대 문학의 시초로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르반테스 본인 스스로 ‘나는 근대문학을 할 거야’라고 작심하고 소설을 썼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당시 널리 유행하고 인기를 끈 기사문학에 대한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사문학에 무분별하게 빠지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그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다. <보바리 부인>의 보바리가 로맨스소설에 빠져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플로베르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각종 예능 프로그램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적용이다. 허구와 실제를 완벽히 혼동하는 돈키호테와 허구임을 잘 알지만 일시적 위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드라마 등을 시청하는 우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4. 욕망의 삼각형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책만 읽다 보니 머릿속이 푸석푸석해지는가 싶더니 결국은 이성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머릿속이 책에서 읽은 마법 같은 이야기들, 즉 고통과 전투, 도전, 상처, 사랑의 밀어들과 연애, 가능치도 않은 갖가지 일로 가득 차버린 것이었다. (40)

르네 지라르라는 프랑스의 비평가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는 저작에서 다뤄 유명해진 개념이 ‘욕망의 삼각형’이다. 그는 <돈키호테>, <보바리 부인>, <적과 흑> 등 다양한 소설을 예로 들며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려 하는데, 요약하자면 우리의 욕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매개(다른 사람)에 의해 발생하고 또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경우 돈키호테의 욕망은 그가 탐독한 기사 이야기에 의해 발생하며, 산초의 욕망은 돈키호테가 심어준 섬의 영주가 될 거라는 희망에 의해 발생한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 실은 나의 욕망(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심어진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의 명제는 사실 우리를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할 뿐더러, (이런 저런 공부를 통해 수긍하는 경우에도) 꽤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모든 개인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판단을 할 권리/의무가 있다” 혹은 “그러한 상태로 태어났다”라는 근대 철학의 명제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들은 모두 신분이나 종교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그와 더불어 사회 역시) 변화/진화(?)하는 과정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숨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정신분석학적 명제에 따르면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방하고 흉내 낼’ 다른 사람 전혀 없이 홀로 무인도에 남겨져도 그렇다(이에 대해서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확인한 바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율적 개인’이란 환상에, 자율적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낼 수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이 주권자이자 권력자인!) 민주주의 사회’라는 환상에 주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환상은 돈키호테가 품었던 환상과 그리 다른 종류가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환상이 아니라면 오늘날 ‘(중세나 세르반테스의 시대보다는 훨씬) 자율적인’ 개인들이 모인 이 사회가 여전히 불합리와 악덕, 그리고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불합리와 악덕, 억울함들이 개인의 자율성 또는 천부적 인권을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권력자들(보수정치인, 재벌, 혹은 미국(?)) 때문이라며, 권력자나 가진 자들을 성토하거나 희화화하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자기관리-성공-1등-세계제일에 대한 강한 환상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남을 컨트롤할 수 있거나 남을 없는 존재 취급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정과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그들’에 대한 성토와 희화화는 자주 자기비하나 ‘과도한’ 자기반성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시크릿>, 코엘료 등 자기계발서의 대유행, ‘1등 기업’ 삼성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 등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5. 모든 게 마법 탓!

여기서 돈키호테가 품었던 ‘이상’에 대해, 그의 이상주의자적 면모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품은 기사도의 이상은 실현되기만 한다면 전혀 나쁠 것이 없는 종류의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러한 이상을 실현할만한 역량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권력이나 재력, 또는 무력의 차원만이 아니다. 그는 “기사는 약자를 편들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만을 신봉할 뿐, 누가 약자 또는 악인인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자기 눈에 약자로 보이면 무조건 도움을 주려하며, 뒷일을 책임지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러한 무분별함 때문에 괜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상황이 꼬여 스스로도 위기에 봉착하게 되지만(물론 자업자득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 세계가 마법에 걸려 있는’ 탓이라 말한다. 모든 게 ‘마법사’ 탓이라면 개인이 책임질 일, 행동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변명 가득한 언행들, 그리고 무엇보다 (뼈아프지만) 틈만 나면 ‘사회 탓’을 일삼는 나 자신의 모습이 돈키호테의 마법 탓과 겹쳐지는 이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를 은근히 경멸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현실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거나 극히 적기 때문에) 금세 도태되고 말 존재로 여겨진다. 이상주의자는 어떤 행동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그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어떻게 보면 도박꾼에 가깝기도 하다. 자신의 삶 전체를 판돈으로 세계 전체와 도박을 벌이려 드는 무모하고 순수한 도박꾼.

6. 기사도 정신, 수퍼히어로, 지표생물

지금까지 돈키호테를 비난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가 분별력을 갖추고 있지 않음을 강조했지만,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 과연 분별력일까 자문해볼 수도 있다. 분별력을 갖춰야 함을 핑계로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도움이 필요한 약자를 외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오늘날 대중문화에는 수많은 돈키호테 형 인물들이 존재한다. 다름 아닌 수퍼히어로들인데, 이들은 개인의 힘으로 전체 사회, 사회의 모든 악과 맞서려는 점에서 돈키호테와 닮았다. 히어로마다 역량의 차이는 있다. 아이언맨 > 배트맨 > 스파이더맨 순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량의 차이는 사소한 문제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중심에 두고 보면, 이들은 본질적으로 현대의 돈키호테들이다. 아이언맨은 정도가 심한 편으로 그 자신 전쟁무기를 공급하는 군수산업체의 수장이다. 그런가하면 배트맨은 자신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햄릿형’ 수퍼히어로의 모습을 보인다. 스파이더맨은 우연히 얻은 ‘그레이트 파워’만 믿고 설치다 자신의 역량으로 감당하기 힘든 위기를 겪는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개인이 감당해야할 책임의 한계를 묻는다. 어쨌거나 개인의 힘으로 사회악을 제거하려는 수퍼히어로물들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처럼 돈키호테 형 인물들이 21세기 들어 다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곤 하지만, “약자는 무조건 도와야지!”라는 숭고한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누군가의 존재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지.

마지막으로 돈키호테의 ‘광기’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푸코의 저서 <광기의 역사>, 사드 후작의 <미덕의 불운>, <소돔 120일> 등을 읽은 경험으로 광기에 대해 나름대로 열린 시각,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다. 광인들을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감금하는 건 근대적 사고 체계의 한계이자 인간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여겼다. 오늘날 광인-비정상인들의 목록은 한 없이 늘어나고 있고 그들이 차지하는 영역 역시 넓어지고 있다(성적 소수자, 외국인노동자, 대학강사 포함 비정규직노동자, 노숙인, 알바 등등).

다른 한편, 오늘날 스스로를 광인이라 생각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정신과 의사는 아니라해도) 누군가 정신적 측면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고전과의 대화는 정신적 상담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줄지도 몰라...’라는 기대가 ‘막독’ 모임으로 발걸음을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런 점에서 돈키호테라는 광인의 존재는 지표생물의 역할을 수행해준다. 생물학자나 환경학자들은 지표생물의 존재 여부로 어떤 지역의 환경 오염도를 측정한다. 이를테면 개구리는 환경 변화에 매우 민감한 동물로서 주변의 환경이 조금만 오염되어도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돈키호테와 같은 광인들의 광기를 (치료가 아니라) 이해하려 노력하고 다독이는 건, 그러기 위해 (장광설일지언정) 그들의 이야기에 일단은 귀기울이는 것, 무엇보다 장광설 속에 자리잡은 시대착오적 ‘이상’을 경청하고, 그걸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실어주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닐까.

단상들

* 돈키호테 = 오지랖의 제왕

** 삼천포식 구성 = 이야기는 물 흐르듯 전개되지 않고 종종 차단되어 삼천포로 빠진다.

[sarah vaughan]

책사이에 잘 접어서 껴놓고, 버들님 빌려드려서 다시 읽고 싶었는데, 모임 때는 별나라에 가 있었던 것인지...천천히 잘 읽고 갑니다. ^^ 르네의 책 시도하고 있어요.

[시로군]

르네 지라르 책 읽고 계신가 보네요. 저는 예전에 읽을 때 많이 어려웠는데, 언급되는 작품을 직접 읽은 후에 다시 보니 이해가 훨씬 잘 되더라구요. 다음 모임 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도 읽을 예정이니 잘 읽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