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에서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고 있는 표트르 대제
![]() 러시아에 절대주의를 확립하여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이가 17세기 의 표트르대제이다. 15세기 말 이반 3세 때 러시아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이반 4세에 이르러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는 황제(챠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 국가였다. 이반 4세는 비밀 경찰을 만들고 황제에 반항하는 귀족들을 억압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실한 신흥 귀족층을 키우는 방식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갔다. 또한 농민의 이동의 자 유를 박탈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이반 4세 이후에는 황제권 계승의 혼란에다 귀족들간의 갈등, 스테카라진의 반란 등 농민들의 반항으로 국가가 한때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1613년 로마 노프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러시아는 안정적인 발전 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 세기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러시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 성격이 강한 후진 국가였다. 또한 유럽 세계와도 별로 접촉 이 없어서 유럽과 직접 거래하는 곳은 백해의 아르한겔리스크뿐이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사람이 표트르 대제이다(1682). 표트르의 전 황제 표드르 (Fedor)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 황제 알렉세이(Alexei)의 두번째 왕비의 소 생인 열 살의 표트르가 황제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 누이인 소피아가 친위대의 도움으로 섭정을 폈다. 그러다가 1689년 표트르 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실권을 장악했다. 키가 크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표트르는 전쟁 놀이를 즐겼 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궁정이나 교회의 의식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 았다. 또 손재주도 뛰어나서 자신의 의자나 식기를 손수 만들었고 외과와 치과 의 진료 기술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표트르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대규 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자신도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 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여행 도중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서 직공으 로 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서구화를 통한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생활과 풍습을 서구화했다. 신하들은 몰론 자신의 긴 수염도 깍고 동양식 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강제로 시행해 수염을 자르지 않는 자에게는 `수염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 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 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시술의 도입에 힘 썼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발트 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 을 꺽어야만했다.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 했다. 이른바 `북방전쟁`(1700~21)이 시작된 것이다. 1700년 11월 나바르 강 전투 에서 패하는 등 초기의 전세는 불리 했지만 후퇴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한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뒤집 었다. 이 북방 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등 `서방으로의 창구`를 얻었다. 표트르는 북방 전쟁중에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도 재편하여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또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고 각군 사관학교 도 세웠다. 그렇지만 지속되는 전쟁과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표트르는 모든 것 에 세금을 부과했고 새로운 세원 마련을 위해 종래의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 설했다. 그는 또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여 보호 관세로 수입을 억제하고 면세 등 각종 특권을 제조업자에게 부여했다. 이러한 표트르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후 진성을 벗어나 비로소 유럽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제(the Great)'라고 불리게 된 표트르 1세는 북방 전쟁중 새로 건설해 수도로 삼은 페 테르스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자야치 섬에 요새를 세우고, 페트로그랏스키 섬에 주거지와 관광서 건물을 건설할 때 그는 자신이 살아 갈 작은 오두막 집 CABIN OF PETER THE GREAT를 3일 만에 손수 세우고 이곳에 6년 동안 거주한다
러시아 전통 가옥인 이즈바와 네덜란드식 가옥 형태를 절충한 모습으로 출입문의 높이는 1m82cm 천장까지의 높이는 2m5cm밖에 되지 않아 표트르 대제는 항상 이 안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는 유년시절 전쟁놀이를 많이 즐겼는데,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 저택을 짓고 "나의 아름다운 대저택"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방과 침데, 식탁이 전무였고 페치카ㄴ가 없어 난방과 취사도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표트르 대제는 나중에 이곳을 여름 별장으로 활용했다
자료출처:네이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