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전통문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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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승주군 서면 중앙교회) 박영석 이남식 이오봉 조미애 진삼전 최은정 등이 있다.
이들은 진도출신도 있지만 진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이 자연스레 진도문협
에 가입한 실태로 보여진다. 직장이 옮겨지면 한두해 지나 자연스레 멀어지는 경
향이 있다.
..진도타래시문학회
94년 7월 7일, 석가정 김영승 김민재 송용식 김주상 김상균 6명에 의해 결성되었
고, 98년 첫 창간호를 낸 진도타래시문학회는 아예 처음부터 진도에 정착해 살지
않거나 진도출신이 아닌 사람은 배제하는 회원 규정을 적용했다.
..전남대학교 사회교육원 진도캠퍼스 문학반
진도에 전대 사회교육원이 들어서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문학수업을 받
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문학반이 결성되고 여기에 진도문협에 가입된 회
원들을 비롯 평소 문학에 관심있던 군민들이 가입해 수강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모임을 갖고 회보를 만들어 회원작품을 품평하고 감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네거리 문화파 야담
90년대 중반 진도읍 네거리를 중심으로 철마산 가마골, 진도향교, 문화예술회
관, 오랑언론문화사, 대륙상회와 5일 시장 소전 막걸리집 등을 순회하며 일군의
지역문인들이 모임을 갖고 작품발표와 현장 품평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는 작가
곽의진과 진도출신은 아니지만 경남고성출신 시인 이상원, 김권일, 박남인, 이창
준, 정형철(작고. 공무원), 광주출신 장주섭(교사. 진도에서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등이 자주 모였다.
..목회자출신 작가
권희로(목산문학. 침례교회). 정자리 출신 작가 송용식(유고시집‘사람아 사람아
아 사람아’발간.진도타래시후원). 현재도 조도 관사도침례교회의 김성문(여.진
도문협)이 시를 쓰고 있으며 주로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문예창작에 몰두하는 경
향이 있었다.
진도의 문학인 중에는 글과 그림을 함께 하는 이들이 많은 점도 한 특성이다. 이는
소치 이래 자연스레 남종문인화의 영향력 때문인 듯하다. 현재도 진도미협과 진도
문협에 동시 가입한 회원들이 무림 박진설, 인천 김민재 등이 있으며 출향 예술인
중에는 화제 자체가 격조 높은 선시의 경지를 내 보이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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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박 종 호>
3.2 음악
3.2.1 진도 민속음악의 역사 개관
진도의 전통음악이라고 하면 대개 민요와 무속음악, 풍물 등을 들 수 있다. 진도사
람들이 구한말 혹은 개화기의 외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주로 이 분야의 민속음악들을
많이 전승 보존시켜왔기 때문이다. 민요의 고장 혹은 민속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이
유도 여기 있다. 대표적으로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도지정 무형문화재를 중
심으로 다양한 민요와 민속놀이들이 전승되어 온다. 민요에서는 부녀요로 분류되는
흥그레 타령류와 아리랑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는 산아지 타령 등의 타령류, 그리고
서남해 도서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둥덩에타령류의 타령을 들 수 있다. 또,
두레 일에서 파생된 노동요 및 노동풍물을 비롯해 세시풍속과 관련된 매굿 등이 활
발하게 전승되어 왔다. 물론 중요한 맥락은 당골을 통해 전승되어 온 무속음악이다.
무속음악은 역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남도음악의 진수 혹은 정수로 알려질 정도로
그 음악적 면모를 과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흔히 명인으로 불리는 진도의 많은 사람
들이 무계 출신이라는 점이 이를 증거 한다.
진도음악의 전통에 관한 문헌 자료는 굳이 대입하자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書東夷傳) 마한조까지 거론할 수도 있으나, 보다 직접적인 기록은 1759년(영조
35년) 『여지도서』에 장악원 악공 1명, 악공보 10명, 악생 2명이 진도의 관속으로 있
었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고 본다. 이후 1871년(고종 8년) 『진도부읍지』에 취수(吹手)
12명, 기녀 4명이 관속으로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미 이 시기 훨씬 이전부터 진도
에 삼현육각의 악기편성과 악사들이 존재했거나 활동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 고 문 헌 ┃┃┃┃
◆ 정만조, 『은파유필』, 1896.
◆ 허련, 『소치실록』, 『운림잡저』, 『운림수록』,
◆『진도군향토사자료집』(진도문화원, 1994)
◆『진도군지』(진도군지편찬위원회, 1976)
◆『옥주의 얼』(편찬위원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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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그러나 진도음악을 거론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헌은 무정 정만조(茂亭鄭萬朝,
1858~1936, 한말의 학자, 일제강점기 관료, 1895년 八月逆變, 十月誣獄에 연루되어
1896년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907년 12월 사면되었다)가 지은 은파유필(恩波遺筆)
을 들 수 있다. 이 기록 중에서 강강술래를 읊은 시구(詩句)와 팔월 한가위의 풍속을
읊은 시구(詩句)들이 대체로 음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 1896년에 한가
위를 읊은 싯구를 보면 아래와 같다. “북을 치고 노래 불러 즐거운 농악소리/ 멀리는
쟁쟁하고 가까이는 흥겨웁네/ 짙은 안개 남쪽기슭 산허리에 둘러있고/ 감우는 푸른
들판 몰려 오는구나/ 옛날풍속 되살려 북장고 울리는데/ 갸날픈 피리소리 같이 어울
린다/ 북소리 멈추자 환호성 더 높으니/ 질그릇 동이에 탁주가 무르익는구나.”
이후 1908년에 진도읍의 한명이(韓明履, 일명 한참사로 불림, 1886~1967)가 중심
이 되어‘진도협률단’이 꾸려진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원각사가 해체된 것이
1906년임을 전제하면 매우 이른 시기에 국악공연단을 꾸린 셈이다. 특히 진도에서
의 활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박영효(朴泳孝,
1861~1939) 궁내부대신의 위안공연을 갔다고 하는데, 당시는 농악, 민요, 창극 등이
주 레파토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제보: 진도읍 박석주, 의신면 향교리 김은선,
조사: 허옥인)
일제강점기의 신청과 예기원(예기조합)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진도에서 흔히 거론
되는 젓대(대금)의 박종기, 창(소리)에 최상준, 박동준 등이 이곳 예기원 출신으로 알
려져 있다. 이외에 진도에 판소리를 보급하였던 신치선과 강강술래 초대 예능보유자
였던 양홍도 등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신청의 장(長)이었던 채다인의 부친
채상준과 풍물의 대가로 알려진 박동준 외 4 형제들도 거론된다. 이곳 출신들이 이
후‘아성창극단’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되는데, 양태옥 같은 이는 비무
계로 신청에 출입하여 이후 북놀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다. 한편 진도읍과
오일시에 초가로 지은 예기조합을 두고 활동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대개 기악, 창악,
농악, 무악의 전수와 걸립이 행해진다.
해방후에는 송일 정의현이 진도최초의 국악원을 설립한다. 1957년 전국 군단위로
는 최초로 국악협회 지회를 승인받고, 자택인 진도읍 서외리에 진도국악원을 설립하
게 된 것이다. 같은 해 150여 쪽에 달하는 국악교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배재학당
에서 서양음악을 공부한 경력을 활용해 국악에 접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진도
국악원의 강사로는 김활량(고흥출신), 최일원(전주 출신), 이병기(진도 군내 출신),
김득수(진도읍), 시조에는 이정식, 무용에는 양태옥(진도 군내 출신) 등을 자비로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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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빙하였고 가야금은 정의현이 맡아 후진양성을 하였다. 이곳을 통해 이임례(현재 광
주시 판소리 예능보유자), 손판기 명창, 한순자 명창, 안득윤 명창, 함양옥 명창, 강
숙자 명창(명창 한승호의 부인), 박옥진(김성녀의 모친) 등이 배출되었다.
김득수 같은 경우는, 1946년에 설립된 <국극협회>의 멤버로 참여하기도 했으나,
당시 적자운영으로 3개월 만에 해산되기도 한다. 같은 해 전국적으로 <국극사>, <국
극협회>, <조선창극단>, <김연수창극단> 등 5개의 창극단체가 설립된 점을 보면 일
찍부터 진도출신들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단
체는 광주에서 <국국협단>으로 개칭하고 활동을 시작했는데, 김득수, 양상식 등이
참여하게 된다. 또 <김연수창극단>의 멤버로는 박병두를 중심으로 박보아, 박옥진
형제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신청 출신들이 꾸린 <아성창극단(我聲唱劇團)>은 서남해 도서지역을 순회하면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단장은 당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던 박준육의 부친
박종복(朴鍾福)이 맡았으며, 김득수, 양상식, 박후성, 박보아 등이 참여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당시 <아성창극단>의 높은 위세에 대해서는 꾸준하게 회자되어 온다.
>> 강강술래(옛사진) >> 진도씻김굿(옛사진)
>> 남도들노래(옛사진) >> 다시래기(옛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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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재민동포 구제를 목적으로 <공화창극단>이 결성되어 <돌아오
라 반도야>라는 창극을 공연하게 된다. 단장은 진도읍 쌍정리의 허전(1910~)이 맡았
으며, 서남해 지역을 순회공연 했다고 한다. <공화창극단>의 공연 내용으로는 승무
와 명창들의 소리, 남도민요, 창극 등이 있다. 이 당시 신치선, 이병기 등이 활동하였
다. 한편 신청농악은 걸립을 통해서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박동준, 박남준 등이 상
쇠를 맡았고, 설북에는 고법 기능보유자였던 김득수의 아버지 김행원, 설장고에는
채백주, 조리중에는 김북동 등이 있었으며 기악부분은 김해천, 한운용, 박경준, 이순
이 등이 있었다. 창악부분에는 박보아, 박옥진, 오가네, 박종익 등이 기량을 연마했
고, 무속에는 박선내가 있었다.
기악 또한 광범위한 애호인 그룹을 형성하며 전승되었다. 가야금은 예기조합의 김
진권(1892)을 중심으로 장통일(1916), 김해천(1902), 임태호(1914), 박경준(1892), 박
석주(1900), 양태옥(1919), 정의현(1920), 장성천(1922), 박만흠(1926), 이추월(임
례)(1931) 등이 연마를 했다. 산조아쟁의 경우, 이병기 등을 중심으로 채다인(1912),
양태옥(1919), 강한수(1927), 채계만(1914), 이해룡(1940)등이 전승해왔다. 해금의 경
우, 남사당 노랑쇠를 통해 전해졌다는 설도 있으나, 앞서 진도음악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았듯이 삼현육각의 대표적 악기임을 고려한다면,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덕순(1897) 등이 거론된다. 퉁소는 진도에서‘퉁수’라고 부른다. 박
종기와 허자선(1881~1956)을 중심으로 허장수 등 10여명이 거론된다. 피리는 무속
음악에서 활용도가 큰 악기인 바, 의신면 김대언을 중심으로 김해천(1902), 강한수
(1929)등이 거론되며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김귀봉과 씻김굿 보유자 박병원 등이 계
승하고 있다. 대금은 박종기(1879)를 중심으로 그의 부친 박덕인, 조부 박헌영 등이
원조격으로 알려져 있고 박병천의 자녀 박한영이 대표적으로 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기악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산조아쟁의 등장으로 인하
여 무속음악의 해금도 타 악기로 대체되어 진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용은 임참사
의 아들로 알려진 임태호가 자택에서 교습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51년 양승언(梁承彦) 군수 때 서울 수복 기념으로 각 면 대항 강강술래 경연대회
가 진도중학교(현 진도군청) 교정에서 열린 점을 참고하면 문화재 지정 훨씬 이전부
터 진도는 강강술래를 비롯한 민속예능들이 광범위한 분포를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1959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진도문화원은 진도민속음악의 보존과 부흥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8년에는 국악협회가 다시 설립된다. 또
1969년 시작된 문화원 주관의 소치문화제는 갖가지 민속경연을 면별, 단체별로 행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다시 1974년 4월 17일 옥주문화제로 이어졌는데,17) 이것이
17) 옥주문화제는 1967년 제 1
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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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1975년 군민의 날로 바뀌고 현행 진도아리랑 축제로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77년 4월 영등축제가 진도문화원 주관으로 열렸다. 당시 강강술래, 남도들
노래, 진도씻김굿 등이 공연되었다. 이후 1981년부터 진도군으로 주관처가 이관되어
현재의 영등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재 지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64년부터 무
형문화재가 지정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65년 2월 15일에 강강술래가 진도
최초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진도씻김굿, 1973년에는 남
도들노래, 1985년 다시래기가 각각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7년
에는 진도만가와 진도북놀이가, 2001년 9월에는 남도잡가가 전남도지정 무형문화
재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문화재 지정은 후대의 진도사람들이 민속음악을 잘
갈고 닦은 역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 살펴본 선조들의 저력과 맥락 속에서 탄생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소 산발적으로 생긴 듯한 이러한 일련의 국악 조직과 단체들은 사실 현재의 진도
민속음악을 발전시켜 온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각종 대
회에서의 수상 실적이나 공연 등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1984년에는 무형문화재
전수관이 설립되어 문화재
중심의 전수활동이 활발해
지기도 하였다. 1986년에
는 진도군립민속예술단조
례가 제정되었다. 이어 문
화원 주관의‘진도군립예술
단’이 문화재 중심으로 활
동하다가 1994년 리틀엔젤
스 공연을 기점으로 진도군
립민속예술단이 창단된다.
1997년 진도향토문화회관이 준공되면서 같은 해부터 <토요민속여행>이라는 공연
이 상설화되었는데, 전국적으로 성공한 사례로 회자되는 편이다. 한편 2004년 7월
에는 국립남도국악원이 임회면 상만리 여귀산 자락에 완공되면서 이제 진도의 민속
음악뿐만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음악을 논하거나 연행하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따
>> 진도군립민속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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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라서 진도군립민속예술단 및 국악협회 등의 지역 국악예술단체와 국립국악원의 상
호 연결을 통해 바야흐로 진도민속음악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이같은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진도에서 민속음악의 명인으로 불릴 사람들은 너무
나 많다. 또 이들이 전승하고 보존해 온 민속음악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국립남도
국악원까지 이어지는 진도민속음악의 발전를 꾀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적어도 진도민속음악을 갈고 닦아 온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 정도는 기억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판단에서, 박병훈이 정리한 진도민속음악인의 이름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박종기(朴鍾基) - 대금 산조의 시조, 임회면 삼막리, 진도아리랑을 재창조했다고 알
려져 있음
신치선(申致先) - 지산면 인지리, 의신면 초사리, 명창 신영희의 부친, 창악, 판소리,
연극에 능함
박경준(朴京俊) - 진도읍 쌍정리, 진도국악원 강사, 가야금, 창악, 시조에 능함
김해천(金海天) - 진도읍 서외리, 진도국악원 강사, 가야금, 피리, 세납에 능함
박덕인(朴德寅) - 임회면 삼막리, 은파유필에 기록됨, 박종기의 부친, 창, 피리, 젓대,
무용에 능함
채백주(蔡伯珠) - 의신면 송정리, 설장고, 상모, 피리에 능함, 호남에 두루 명성을 떨침
박동준(朴東俊) - 의신면 송정리, 상쇠, 상모, 피리에 능함, 호남에 명성을 떨침
이해룡(李海龍) - 진도읍 남동리, 진도읍 죽엽리에 거주, 남도들노래 후보, 이병기의
장남, 창과 아쟁에 능함
강한수(姜漢秀) - 의신면 향교리, 임회면 백동리, 창과 피리, 아쟁에 능함
설재천(薛在天) - 지산면 인지리 남도들노래 문화재, 민요
장성천(張成天) - 임회면 십일시 진도북놀이 문화재, 소리북, 설북
>> 국립남도국악원 >> 진도토요민속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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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헌성 - 일명 박성준
박옥주(朴沃珠) - 진도읍 쌍정리 목포국악원장, 징춤, 창
허자선(許子善) - 의신면 청용리 퉁수
이덕순(李德順) - 남사당노랑쇠 해금, 농악, 가야금
박호준(朴好俊) - 진도면 출신설 강사 小錚〔설쇠〕, 장고
김행원(金行元) - 진도읍 서외리 호남명성 농악, 설북, 북춤
박선내(朴先乃) - 진도읍 성내리 전국경연 최우수상, 무가, 씻김굿
김소심(朴小心) - 지산면 인지리(자 박병천), 무가, 씻김굿
박남준(朴南俊) - 의신면 송정리(자 박병원) - 가야금, 상쇠, 피리
한운룡(韓雲龍) - 진도읍 송현리(자 한영화) 대금, 피리, 쇠납, 쇠
박병기(朴秉基) - 의신면 송정리 (부 박동준) 서울예술원총무부장 삼성국악단단장
함양옥 - 진도읍 서외리(동생 함금선) 나이론극장단장, 창
신광천(申光千) - 의신면 청용리 청용농악 상쇠, 설북, 쇠
하권희(河權熙) - 임회면 광전리(처 박공녀) 강사, 고수
이태권(李泰權) - 진도읍 포산리(자 이애순) 강사, 고수, 무악
이병기(李炳基) - 군내면 정자리(처 이임례) 국악원 창지도, 창악, 민요, 판소리
박태주(朴太柱) - 지산면 소포리 강사, 농악, 설북
양홍도(梁紅兆) - 고군면 지막리 강강술래 문화재, 민요
김득수(金得洙) - 진도읍 서외리 인간문화재, 고수
양상식(梁相植) - 고군면 지막리 국립국악원 단원, 판소리, 창극
박종익(朴鍾益) - 고군면 지막리 판소리
구행룡(具行龍) - 군내면 정자리, 강사, 들노래, 사거리 박첨
최소심(崔小心) - 군내면 덕병리, 강강술래문화재, 민요
박병두(朴秉斗) - 지산면 인지리(박병천 종형), 國立국극단원 판소리
최귀선(崔貴善) - 조도면 상조도(일명 우물) 국립국극단원, 판소리, 설장고
채두인(蔡斗仁) - 진도읍 교동리 신청강사, 신청농악, 피리
김진권(金珍權) - 진도읍 교동리 신청강사, 신청고수
채중인(蔡仲仁) - 진도읍 성내리(채계만 부친)신청강사 가야금
임태호(任泰鎬) - 진도읍 남동리 개인지도, 명성, 가야금, 무용
조천환(曺天煥) - 진도읍 성내리(자 조규열) 개인지도, 명성, 설장고
한순자(韓順子) - 진도읍 동외리(한운룡의 딸) 부산국악원선생, 판소리
강숙자(姜淑子) - 의신면 향교리(한승호처) 강사, 판소리
최상준(崔相俊) - 진도읍 강사, 창악
김대천(金大川) - 군내면(자 김영심) 강사, 창, 가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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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진(李日進) - 군내면 목포시조대회 1등, 시조
손판기(孫判基) - 군내면 강사, 판소리명창
박창집(朴昌集) - 진도읍(일명 도추바) 강사, 고수, 무악
박임금 - 진도읍 월가리 강사, 창
신상수 - 의신면 초사리 강사, 창
허 희(許?) - 진도읍 춘향전의 마당쇠, 판소리명창
안득윤(安得允) - 고군면 제주에서 국악원 경영, 명창
조규영(曺圭英) - 고군면 대구국악원 지도, 명창, 민요
박대성(朴大成) - 지산면 송정리(부 박동준) 강사, 아쟁, 가야금
김소월(金小月) - 진도읍 강사, 승무
채태인(蔡泰仁) - 진도읍 소쟁, 장고
허장수(許長水) - 의신면 중리, 퉁소
주창민(朱창민) - 의신면 칠전리 강사, 창
허상근(許尙根) - 의신면 중리 강사, 창
명연수(明蓮洙) - 의신면 초사리 강사, 창
김대원(金大元) - 의신면 향교리(자 김모선) 강사, 피리
구춘홍(具春洪) - 군내면 분토리 강사, 장고, 다시래기
김국향(金菊香) - 진도읍 강사 창극
김상옥 - 개인지도, 장고
박색구(朴色口) - 의신면 돈지리
채자례(蔡慈禮) - 의신면 송정리(부 채백주) 진도명창, 무가
박서준(朴西俊) - 의신면 송정리(자 박옥란) 신청농업 창악, 피리
양두형(梁斗衡) - 신청농악 대포수, 농악
박종회 - 의신면 응덕리 일본XPO 등 공연, 열두발상모
박북준(朴北俊) - 의신면 송정리(박동준 형제) 강사, 창
박혜숙 - 진도읍 성내리(박병원의 누이) 강사, 창
채계만(蔡桂萬) - 진도읍 성내리 씻김굿문화재, 무악, 씻김굿, 아쟁
양태옥(梁太玉) - 진도읍 성내리 북춤문화재, 가야금, 북춤
박관용(朴寬用) - 진도읍, 북춤문화재 북놀이, 북춤
조공례(曺功禮) - 지산면 인지리 남도들노래문화재, 민요
김대례(金大禮) - 임회면 송정리 씻김굿문화재, 무가
박보아(朴寶娥) - 임회면 송월리(서울문화재 한갑득 처) 전국 순회 국립국악단
박병천(朴秉千) - 지산면 인지리 씻김굿문화재, 씻김굿, 북춤, 장고
강준섭(姜俊燮) - 진도읍 동외리 다시래기문화재, 창, 진도다시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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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신영희(申英姬) - 의신면 초사리 판소리 준문화재, 창, 민요
박옥진(朴玉珍) - 의신면 송정리 (자 김성녀) 창극
박옥주(朴沃珠) - 진도읍 동외리(부 박헌성) 목포옥주국악원장, 무속, 징, 춤
이임례(李任禮) - 고군면 지막리 전주대사습 대상, 창, 광주시 인간문화재
이완순(李完順) - 지산면 보전리 씻김굿 보유자, 무악
김귀봉(金貴奉) - 임회면 송정리 다시래기보유자, 피리, 무악
곽문환(郭文煥) - 군내면 송산리 다시래기, 민요, 창
박병원(朴秉元) - 진도읍 성내리 씻김굿 보유자 무악, 장고, 아쟁
강송대(姜松代) - 의신면 향교리 중앙초청공연 민요, 전남도 남도잡가 문화재
박병륜(朴秉倫) - 의신면 송정리, 북춤
김영심(金英心) 고군면(부 김대천) 강사, 무가
김영매(金英梅) - 고군면(부 김대천) 강사, 무가
이기덕(李基德) -의신면 향교리 진도아리랑보존회, 민요
박동률(朴東律) - 조도면 관사도리 강사 민요
함인천(咸仁天) - 의신면 원두리(처 채정례) 강사, 고수, 무악
정의현(鄭義鉉) - 진도읍 서외리 진도국악원설립, 고수, 가야금
김길선(金吉宣) - 지산면 삼당리 북춤 문화재, 북춤
김용순(金龍順) - 군내면 둔전리 강강술래문화재 민요
강성치(姜成治) - 의신면 향교리 강사 민요
조담환(曺淡煥) - 진도읍 교동리 다시래기문화재, 민속전수관 이사장 역임
김관우 - 고군면 석현리 북춤후보자 북춤
설재림(薛在林) - 지산면 인지리 만가후보자, 만가
김항규(金恒奎) - 지산면 인지리 만가문화재, 만가
박연준(朴連俊) - 고군면 오산리 강사, 민요
김주근 - 조도면 소마도리 강사, 조도 나배도 닻배노래
차병섭(車秉燮) - 의신면 신정리 목포국악원 선생, 고수
신천행(申天行) - 임회면 서낭리 개인지도, 창, 고수
박진언(朴鎭彦) - 의신면 칠전리 국악협회지회장, 창
박칠만(朴七萬) - 의신면 거룡리 진도민속예술단, 고수
손복동(孫福東) - 군내면 덕병리 덕병장승제회장, 농악
박만흠(朴萬欽) - 의신면 접도리 강사, 가야금
130+
제5부 문화와 전통
<이 윤 선>
3.3 미술
3.3.1 개요
예술의 고장 진도(珍島)! 예로부터 토양이 좋아 김치의 주재료가 되는 채소인 파와
배추, 무가 잘되고 사람들의 본성이 순하고 착하다. 또한 진돗개가 유명하며, 돌미
역, 구기자, 홍주는 이 지역 특산품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청정해역에서 나는 해
산물과 육지와 같은 도내(島內) 농경지역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여 육지와 다름 없
는 여유와 의식을 갖추었고, 생활 속에 소리로 흥을 돋우고 그 흥취에 시와 그림을
즐겨, 문화 속에서 살며 그 뿌리를 보여준 자랑스럽고 긍지를 느끼게 하는 예향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예술가와 장인들을 배출하고 전국 어디에도 문화수준이 앞서있는
선진 군(郡)으로서 모든 군민(群民)들의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특히 미술과 국악 분
야 등의 예술분야는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인재들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미래의 문화시대에 대비한 후진 양성 등에서도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진도의 미술은 조선조 후기 소치(小癡) 허련(許鍊)을 시작으로 하여 미산(米山) 허
형(許瀅), 남농(南農) 허건(許楗) 으로 이어지는 운림산방(雲林山房) 3대의 남종화(南
宗畵) 화맥(畵脈) 연결과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의 연진회와 소전(素?) 손재형(孫
在馨)의 서화단(書畵壇)의 중흥에 대한 노력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끼친 업적과 영향
┃┃┃┃참 고 문 헌 ┃┃┃┃
◆ 곽충로외, 『진도군지』, 진도군지편찬위원회, 1976.
◆ 노동은·이건용, 『민족음악론』, 한길문학예술총서3, 한길사, 1991.
◆ 양태옥, 『민속놀이 진도신청농악』, 운제전통기악연수원, 1993.
◆ 허순선, 『걸북춤』, 도서출판 금광, 1997.
◆ 황루시, 『진도씻김굿』, 문화재청, 화산문화, 2001.
◆ 박병훈, 『鄕田朴秉訓鄕土史資料論·文集』, 진도문화원, 2005.
◆『예향진도』全篇, 진도문화원, 1984~현재.
+131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이 현대를 사는 미술인들과 대중들에 지대한 문화적 역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그동안 한국미술사에서 진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은 누
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최근 서구 조형방식에 의한 문화지배는 기초교
육에까지 많은 악 영향을 끼쳐 정체성을 상실하고 혼란을 가져왔으며, 문화식민에
다름 아닌 구조적 모순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에 정체성을 찾고 우리 고유
의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진도미술인들의 적극적인 자세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
시 한 번 진도미술, 나아가 한국미술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에서 현재까지 우리 진도 미술인들의 역할과 노력을 다시 한 번 확인
하고 되짚어서 미래의 한국화단에 선인들의 빛나는 업적을 본받고 연구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본 지의 내용은 그러한 진도미술의 역사와 배경, 진도 미술의 현재와 미술인의 활
동상황을 살펴보고 진도미술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3.3.2 운림산방 3대와 진도미술의 역사적 배경
진도는 섬으로서의 지리
적 특성상 예로부터 육지와
멀지 않아 비교적 고급관리
와 사대부의 유배지로써 문
화적 배경을 만드는 장점을
제공했다. 추사(秋史) 김정
희(金正喜, 1786~ 1856)가
제주도 유배기간동안 만들
어낸 예술적 성과와 같은
영향을 만들어낸 계기가 된
것이다.
환경에 의한 인간의 적응은 유전적 요인과 함께 많은 특수성을 유발한다. 그런 특
성들이 자연스럽게 일반에 전해져 진도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소리와 그림을 일상생
활에 한 부분으로 여기게 된 계기가 된다. 한 예로 진도에 초임발령을 받았던 어떤
미술선생님 한분의 말씀을 소개하면, “진도에서 교직생활을 할 당시에는 몰랐지만
다음 발령지에 전근을 가서야 진도학생들의 미술에 대한 우수성을 발견할 수 있었
>> 운림산방 전경
132+
제5부 문화와 전통
다”고 한다. 이러한 미술적 환경이 조선 후기 소치일가 탄생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소치 허련(小癡許鍊
1808-1893)은 자는 마힐
(摩詰)이요 호는 소치(小癡
), 노치(老癡), 석치(石癡)이
이고, 휘는 유(維), 련(鍊)이
다. 그의 호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허련이 중국의 대
치(大癡) 황공망(黃公望) 그
림의 모사(模寫)를 잘 한다
하여 그보다 더 좋은 작품
을 남기라는 의미로 소치
(小癡)라 불렀다 한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표적 화가인 소치는 1808년(순조8년) 2월 7일 진도 향방이던 허각
(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과 취미
가 있었다. 28세 때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녹우
당에 좋은 그림이 많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녹우당에 선대로부터 귀하게 내려오는
서화첩을 통해 녹우당의 화풍을 감상하였으며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등 윤씨집
안 3대 화가의 서화를 접한 후 그림에도 법이 있음을 깨닫고 크게 감화하여 그림을
빌려 해남 대둔사에서 화본을 모사하여 연마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다성(茶聖) 초
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를 만나 수하에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을 보냈더니 초의선사를 통해 소치를 서
울로 올라오라 하니 32세 때인 1839년(헌종 5년)에 상경하여 추사의 문하에서 수학
하며 당(唐)나라 시인이며 그림에도 능했던 왕유(王維), 동원(董源), 거연(巨然), 이성
(李成), 범관(范寬), 이공린(李公麟), 왕선(王詵), 미불(米?), 미우인(米友仁) 등과 원말
의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과 명나라의 문징명(文徵明), 심주(沈周) 등을 배우고
추사의 서풍을 전수 받았으며 남종화(南宗畵)의 필법을 익혔다.
41세 때인 1848년 무과에 합격하고 42세 때에 처음으로 입신하여 헌종 어전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스승 추사 김정희가 1856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고향
인 진도로 내려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지었는데 이때 소치의 나이 49세였다. 이때
>> 소치 허련의 작품
+133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부터 운림산방에 살며 1893년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그림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소치실록, 소치묵연, 치거재초고, 시문집 등 다수가 있다.
미산 허형(米山許瀅1862-1938)은
소치의 넷째 아들로 운림산방에서 태
어나 15세까지 집안에서 잡일을 하며
성장하였으나 우연히 그린 그림이 아
버지 소치에게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하였다. 허형은 산수 사
군자(四君子)에 능하고 묵모란(墨牧
蘭)이 일품이다. 51세 1912년 강진병
영으로 이사하여 작품 활동을 하다
60세 1921년 목포 남교동에 자리를 잡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주 이사하였기에
뚜렷한 작품세계를 구축하지 못했지만 아버지 소치의 화맥을 아들 남농과 의재에게
전하였다.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
은 허형의 5남중 4남으로 목포 북교
초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이 뛰어
났다. 1927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후 22회까지 13회나 입선하였으
며, 1942년 일본 대동남종원전 입선,
1943년 운문암으로 일본 문부성전
입선, 1944년“木浦의 一隅”로 조선
미술전람회 특선 및 총독상을 수상하
는 등 남종화 3대의 예술혼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해방후인 1946년 남화연구원을
개원하여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며 1950년에는‘남종회화사’를 탈고하여 남종화
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국전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1976
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81년에는 할아버지 소치, 아버지 미
산, 그리고 본인 3대의 작품과 아끼던 수석 2천점을 목포시에 기증하였고 1982년 소
치의 숨결이 살아있는 운림산방을 복원하여 1987년 진도군에 기증하였다. 향년 80
세로 1987년 11월 5일 타계하였다. 저서로는『남종회화사』가 있다.
>> 미산 허형의 작품
>> 남농 허건의 작품
134+
제5부 문화와 전통
3.3.3 의재와 연진미술원
의재 허백련(毅齋許百練)
은 1891년 소치 허유의 종
고손으로 태어났고, 아버지
경언(景彦, 1870~1948)은
농군이었다. 그러나 집안형
편이 비교적 넉넉하여 어려
서부터 어려움없이 마을의
글방에서 한문공부를 할 수
있었고 당시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던 (1896~
1908) 당대의 대학자 무정
정 만 조 (茂亭鄭萬朝,
1858~1936)에게서 한문수업을 받는 최대 행운의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소치의 아들로 진도와 호남지역 일원에서 역시 직업화가로 활약하던 미산
(米山) 허형(許瀅)에게서 타고난 그림재질과 흥미로 묵화의 기초를 지도받기도 하던
소년 행민(백련의 본명)에게“의재(毅齋)”란 호를 지어준 선생이 무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소치의 화법과 정신을 본받아 그 테두리에서 그런대로 지역적 화명을 날리
던 미산에게서 받은 기초적인 기법 습득과 동경의 유명한 남종화가 고무로의 영향,
그리고 박물관에서 본 중국 본색의 남종화 명품들을 통해 깊이 자각할 수 있었던 정
신적 배경 등이 의제의 전통 남종화 세계 지향의 확고한 바탕으로 작용했다. 그는 중
국의 화론서와 기타 전문서적의 탐독 및 한시교양을 통해서도 자신의 전통적 화의
및 필격을 정립시키는 엄격한 태도를 나타냈다. 대표작으로는 <산수화>, <춘하추동>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계산청취>, <청백산수> 등이 있다.
의재는 1939년 광주 무등산 증심사 아래에 연진미술원을 개원하여 후학양성과 문
인화의 중흥에 힘썼으며, 무등산에 칩거하면서 도인처럼 말년을 지낸 작가의 제자로
연진회 그룹과 구철우, 김옥진, 조방원, 신영복, 곽남배, 박행보, 이창주, 양계남 등
이 있다.
연진미술원은 남도의 한국화 맥을 이어가고, 의제의 뜻에 따른 정신적이고 고일한
화풍으로 남종화의 정신을 추구했으나 의제의 야일한 정신과 더불어 화단에서 주축
>> 의재 허백련의 작품
+135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으로서 힘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것은 서울의 후소회가 학부출신들과 전문화가로
화풍을 형성하여 화단에 전면으로 나선 반면, 연진회는 지역적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문성보다는 여기로 하는 그림세계를 추구한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초창기 그룹들은 현재에도 전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3.3.4 소전 손재형(素? 孫在馨)과 한국 서화단의 중흥
소전은 1903년 4월 28일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에서 부호 옥전 손병익(玉
田孫秉翼)의 손(孫)이자 손
영환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소전이 여섯 살 때까지 당
시 유배 중이던 정만조선생
의 도움을 받아 서예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진도보통
학교 양정보통학교를 거쳐
외국어학원을 수료하여 20
대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 3회와 입선 8회를 거친 후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줄곧 역임하고 예총회장 예술원 종신회원,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화려한
경력과 아울러 건국초기부터 문예중흥에 대한 공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
하는 등 수많은 영광과 분망한 생활을 영위하다 1981년 6월 15일 운명, 대한민국 예
술원장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전은 추사 김정희 이래 고금서체(古今書體)의 특장점을 종합하여 새로운 현대 조
형미를 추구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고, 한글서체에 최초로 조형미를 부여한
서예가이기도 하다. 한국 서화단에 직간접적인 영향과 후학양성 등 조선중기 이후
천시 받던 예술가 위상을 드높였으며 수많은 업적과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30대에
이미 중견반열에 오른 소전은 각종 공모전과 조선서화협회이사 등 서예가로서의 활
동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42세(1944년) 때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동경까지
가서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歲寒圖)>를 경성제대 교수인 후지스카(藤?隣)로부
터 찾아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 진도소전미술관(문화예술회관)
136+
제5부 문화와 전통
1945년 해방이후 조선서
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
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활동
하며 이전 서도(書道)라 칭
했던 명칭을 일제 잔재라
하여 서예(書藝)로 개칭하
고, 46년 서울대에 출강,
47년 고향인 진도에 재단
법인 진도중학교를 설립하
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48년 대한민국 미술전람
회를 열게 되는데 이때부터
심사위원을 역임하여 국전 30년사에 수많은 영향력을 끼치며 서화단의 위상을 재고
(再考)하고 지역미술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사실 중앙서화단도 마찬가지
거니와 남도화단은 특히 소전에 의해 수많은 작가들과 후학들이 영향을 받아 성장하
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1958년(56세)에 제4대 민의원에 당선, 문교분과위원장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해
1967년 박정희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특별고문을 역임하며 1971년 제 8대 국회의
원에 당선되었으나 10월 유신으로 중도 해산되어 단명하고 만다.18)
소전의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의 교류는 서화단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바, 박
정희는 서화(書畵)를 좋아하여 소전을 서예스승으로 모실정도로 각별한 사이를 유지
했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대통령 박정희도 소전 스승 앞에서는 담배도 피우지 않을
정도로 예를 지켰다 한다. 당시 국가수반이 서화풍류가 있어 고서화를 중요시하고
예술가들을 우대하여 국가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서화가를 존경하고 서화를 즐기
는 황금시대를 만들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반증으로 군부가 막을
내리며 문민정부에 들어서 화단과 시장이 무너지고 서화가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어려운 상황이 연출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전은 조선중기
이후 화원제도가 없어지며 격하되었던 예술가들의 위상을 그 시절에 격상시키는 중
대한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본다. 그 이전 일부 부유층화가
들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팔도를 떠돌고 가가호호를 전전하며 힘들게
맥을 유지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소전은 단지 화단과 예술가들의 위상뿐만 아니
라 문화주권의 회복과 정체성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국민생활의 정신건강을
18) 김원익, 「소전 손재형 연
구」, 1993.
>> 소전 손재형의 작품
+137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위한 노력을 했다고 보여 진다. 이처럼 진도출신으로 운림산방 3대와 의재 허백련의
연진미술원, 소전 손재형 등은 한국화단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예술의 맥을 유지
하고 발전시켰으며 지역발전 나아가 대한민국 화단에 많은 업적과 역할을 한 것이
다.
3.3.5 출향작가들의 활동상황
한국화단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선배들의 영향으로 진도는 예
술의 고장으로 불리었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진행되
어 왔다.
현재 전국문인화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금봉 박행보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하철경
과 광주미술협회 지회장 박지택, 성남미술협회 지부장 김영실, 목포미술협회 지부장
곽창주 등이 진도출신 작가로 각 단체와 화단에서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위상을
드높이고 있으며 한국화에 백포 곽남배, 시경 박익준, 취련 허의득(이상 작고), 옥산
김옥진, 전정 박항환, 옥전 강지주, 직헌 허달재, 우림 김정욱, 동산 양용범, 포전 손
기종, 석현 박은용, 율산 주지환, 월성, 산정 최정칠, 우암 박용규, 박충호, 인재 박소
영, 우송 김영삼, 우암 이부재, 소석 구지회, 동외 정명돈, 소천 주영옥, 허기진, 하완
현, 허임석, 정석흔, 장현우, 윤남웅, 양홍길, 이득선, 박재흥, 김봉빈, 김영배, 김원
술, 박문수, 곽권일, 고진우, 박진현, 박창로, 박창수, 서진영, 양유경, 이연재, 이은
하, 이창훈, 정지현 하운수, 박도승, 곽미경, 김대진, 이화자, 정경래, 정경춘 등이 활
동하고 있으며, 서양화작가로는 이우진, 박문수, 박지택, 박주하, 김상영, 김재영, 박
승현, 박영현, 이장한, 하인택, 한부철 등, 그 외에도 조각에 하영생, 조대원, 박상권,
도자공예에 한석호(예원예술대학교 도예교수), 정지현, 이용철 등 수많은 작가들이
전국적으로 개인적인 활동들을 각자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서울에 진도미술인
모임인 그랑께회(회장 박창노)와 광주에 진도미술인회(회장 박덕규)가 출향작가들의
대표적 모임으로 눈에 띄는 활동을 해가 고 있다.
3.3.6 진도 관내의 미술활동
“진도 관내에서는 집집마다 골동품에 고서화가 있다.”80년대의 한 미술교사가 한
이야기로 그 교사의 친구가 진도에서 근무하는 것을 굉장히 부러워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실제로 어려서부터 어렵지 않게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고 예술에 대한 자연스
런 문화를 누리고 성장했으며, 그런 경험들이 많은 예술가를 배출하고 수준 높은 환
138+
제5부 문화와 전통
경 안에서 저력을 갖게 만든 것 같다. 이러한 문화는 미술에 관한한 교육 뿐 아니라
관과 유관 단체를 통하여 활동을 하며 군민 전체와 같이 호흡하고 있다 하겠다.
현재 진도에서 예술적인 맥을 이어가기위한 노력으로 한국예술문화 총 연합회 진
도지부(지부장 김용선)에서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을 통하여 진도관내 초, 중,고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악. 미술. 사진. 연예. 문학협회의 후원으로 예술아카데미를 운
영하고 있다. 또한 진도군의 지원을 받아 한국미협 진도지부에서 주관하여 진도를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진도의 전통적인 그림과 글씨를 직접 체험하게 하고 제작과
정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찾아가는 무료 서·화 체험장을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
요일 향토문화회관에서 갖고 있으며, 미술협회에서는 매년 학생실기대회를 개최하
여 올해로 15회를 맞고 있다. 이러한 대회를 통하여 많은 진도의 예술적 맥을 이어가
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진도군과 진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관내 미
술협회의 강사진으로 구성하여 매년 각급 학교에서 서·화 교육을 특기적성 시간을
통해 학교별 실시하고 있다.
진도미술제(진도미협전), 미협주관 영·호남교류전, 진도서협전 등 다양한 작품 활
동을 하고 있으며 관내 미술교사 모임인 사미회(회장 김용욱)에서도 매년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또한 각 학교에서는 특기적성교육시간에 서화교육을 중
점적으로 실시하여 유능한 미술인재들을 발굴하여 서울, 광주 등 각 지역으로 다양
하게 진학지도를 해서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진도출신 미술인들을 만들어 가는데 앞
장서고 있으며 예향 진도의 맥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 외에
도 진도 관내에는 서예학원이 무려 5개가 있으며 미술학원은 2개가 운영중이다.
현재 진도에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로는 한국화에 강공수, 김성룡, 김용
욱, 박병락, 박주생, 박진설, 이상은, 조재홍 등이 있으며 문인화로는 김경현, 김길
>> 향토문화회관의 서화 체험장 >> 진도미술제
진도 출신으로서 중앙 화단에서 괄목할만한 활동을 30여년 동안 하고 있는 미술CEO로
한국창작미술협회CEO /신미술대회 운영위원장 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현삼 선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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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록, 김민재, 김용선, 김재성, 박성화, 박태우, 장인권, 조근환, 조대진, 하태환, 황훈
정 등이 있으며 서예는 김미향, 박병승, 송태정, 신주생, 전영암, 허국선, 등이 있고
공예는 이항무, 조소에 허영미 등의 작가가 지역화단을 지키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
고 있다.
조선조 이전의 미술사적인 부분은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진도는 문인 사대부들의
귀양지, 유배지로서 지역민들과 문화적 특성을 서로 공유하며 교류하고 조선 후기
소치에까지 영향을 끼쳐 운림산방 3대와 의재를 통한 남종화(南宗畵)의 화의(畵意)
를 만들어냈으며, 소전 이후 문인산수화풍의 남도지역 전통 화맥(畵脈)을 형성하게
했다.
미술사적인 면에서 위에 서술한 몇몇 개인적인 견해는 야사(野史)로서 밖에 남을
수 없을지 모르나 진도출신 미술인들이 그동안 지난한 세월을 겪으며 흘러온 한국화
단에 한 축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타 지역에 비해 출중한 진도의 문화예술 역량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문화
가 살아있는 한, 한국 서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최근 한국의 서
<2006년 현재 진도관내 미술단체 현황>
<관내 서예 및 미술학원 현황>
학 원 명 학 원 장 명 비 고
고산 서예원 김민재
진 서예한문학원 양상필
석천서실 임봉길
아전서실 조규열
원창서실 이주림
선색 미술학원 명남숙
화니 미술학원 이혜란
단 체 명 인원 주 요 활 동 내 용 단체장명 비고
사)한국미술협회 진도지부 31
전국 소치미술대전 운영
학생 미술실기대회 실시
진도미술제(협회전)실시
영. 호남 미술교류전 실시
찾아가는 서.화 체험장 운영
박주생
사)한국서예협회 진도지회 25 회원전 실시 김민재
진도사미회 11 회원전 실시 김용욱
140+
제5부 문화와 전통
화단의 미래는 예전 선배들이 이루어낸 만큼 밝은 것은 아닐지라도 21세기 들어 글
로벌적인 문화 속에서 지역성과 민족성, 자기정체성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될 때 자
아를 실현하고 보다나은 미래를 선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진도출신 작가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선배들의 훌륭한 뜻을 본받아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속에 밝은 빛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미술인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겠으며
예전 소전선생이 국전 시절 지역의 미술부분에 공헌하고 많은 작가들을 양성했듯이
최근 각 단체에서 진도미술인들이 적극적인 활동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지역미술인에게도 중앙에 소외되지 않는 활동참여와 역할을 유도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좋은 작가들이 배출되어 한국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서화단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리라 본다.
<박 주 생>
3.4 사진
3.4.1 진도 사진의 역사
진도의 옛 모습은 사진으로 별로 남아있지 않고, 외국인에 의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진도의 사진은 1950년을 전후해서 옛 사진이 약간 발굴되고 있는 실정이다.
1959년에 천주교 광주교구 진도성당 신부로 온 주예레미아신부(1959. 06.
24~1959. 10. 24, 제 2대 본당, 아일랜드출신)가 2005년에 진도천주교 광주교구 진
도성당에 보내온 240여점의 진도 옛 사진이 진도성당에서 전시되어 보는 이의 감탄
을 불러일으켰는데, 주로 인물사진이 대부분이며, 많은 사진들이 천주교 조도교당
사진과 진도교당 사진, 그리고 명금 저수지 앞에 있었던 성당의 모습이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일본 동경대 인류학과 교수인 이또 아비또(伊藤亞人)교수가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서 1972년부터 현재까지 약 35년간 진도에 대한 많은 사진
┃┃┃┃참 고 문 헌 ┃┃┃┃
◆ 허영환, 「원당의 세한도」, 『서통 제9호』,서울 동방 연구회, 1979.
◆ 장영준, 「한국 전통 산수화의 흐름에 관하여-근대 6대가를 중심으로」,
◆ 김원익, 「소전 손재형 연구」,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1993.
+141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을 남겨 지금까지도 상만리 마을회관에 상설전시를 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매년 전
시회를 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1976년 진도를 방문했던 삐에르 랑디 주 프랑스
대사가 진도의 물갈라짐 현상을 보고, 현장사진을 프랑스 일간지에 소개하면서 모세
의 기적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도의 사진문화에 대한 시대적 변화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에 진
도읍 성내리에 장씨(성명조사요망)가 운영하던 사진관이 있었다. 1956년에 박병재
가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교육청입구 아래에서 늘봄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의신면출
신의 김영록이 진도읍 쌍정리에 사진관을 설립하였으며, 이북출신의 최치찬이 진도
군 조도면에 우미사진관을 운영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흥배가 진도
읍 쌍정리에 남문사진관을 운영하였고, 오유경이 진도읍 성내리에 솔사진관을 운영
하였다. 이남숙 선생은 22세의 젊은 나이에 진도읍 남동리(현 중앙병원 앞)에서 남
향사진관을 설립했다. 고군면 오일시에서는 조예환이 옛날사진관을, 박진춘이 중앙
사진관을 운영했다. 지산면 관마리에 사는 매곡 김좌언은 창문에 구멍을 뚫고, 담요
를 쓰고 사진인화를 시작했던 시기도 있었으며, 이때부터 마을단위 기록사진등도 촬
영을 하게 되었다.
1960~70년대에는 진도관내 사진관도 크게 늘었다. 진도읍 성내리에서 태양사진
관을 운영하던 오유경은 진도읍 지역의 사진관 5개소를 통합하여 솔사진관을 운영
하였다. 조맹환이 진도읍 사정리에서 청춘사진관을 운영하였으며 사진관을 성내리
로 옮기면서 영비디오로 명칭을 바꾸었고, 다시 교육청 아래로 옮긴 후에는 허바허
바사진관으로 변경하였다. 박기배가 형인 박흥배 선생의 사진관을 이어받아서 고려
사진관과 태평예식장을 운영하였다. 임회면 십일시에서는 여진호가 서울사진관을,
곽봉춘이 현대사진관을, 박영준이 십일시 장터쪽에서 등대사진관을, 박기정이 임회
면 석교리에서 신신사진관을, 곽영택이 지금의 석교농협 2층에서 경제사진관과 경
제예식장을 운영하였다. 고산의 이치영이 십일시 학생사건물에서 늘봄사진관(분점)
을, 임회면 용호리에서 한명모가 증명사진 인화를 했다. 의신면 돈지리에서는 박동
식이 제일사진관을, 박봉계가 조광사진관을 운영하였고, 옥대리 중리 마을에서는 이
기주가 의신사진관을 운영하였다. 군내면에서는 군내면 금골의 박종석이 금골사진
관을 운영하였다. 지산면 인천마을에서는 김휘방이 만호사진관을 운영하였고, 독치
마을에서는 김재성이 희망사진관을 운영하였다. 고군면에서는 조예환이 옛날사진관
을, 박진춘이 중앙사진관을, 유동근이 인물사진관을, 김성철이 명성사진관을 운영하
였다. 고군면 지수리에는 인성사진관이 있었고, 오상마을에서는 이광석이 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었다. 조도면에서는 고향사진관(십일시 현대사진관 분점)을 운영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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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아가씨 사진사 곽은자 등이 진도의 사진문화를 이끌어갔다. 진도 군내면 금골 출신
의 조규천선생(현 매직포토 부친)은 목포에 계시면서 시간을 내서 진도를 찾아 사진
을 촬영하는 열의도 가지고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진도에도 사진문화가 최고조에 달했다. 진도읍에서는 조
맹환이 청춘사진관과 현대예식장을 운영하면서 허바허바사진관으로 이름을 바꿔서
운영을 하였고, 이북이 고향이던 최치찬은 조도면에서 우미사진관을 운영하다가 서
울로 이사를 하였고, 이를 최진군이 인수를 하였다. 임회면에는 조도에서 이사한 곽
성훈이 귀빈예식장과 사진관을 겸하였다. 고군면에서는 명성사진관이 수협 2층에서
복지예식장을 겸했으며, 태양사진관의 오주남은 신협에 궁전예식장을 겸했다. 태평
예식장에 박기배과 허바허바사진관의 조맹환이 수협사무실 2층에 현대예식장을 운
영하였고, 지산면에서는 부산에서 사진업을 하다가 내려온 김영남이 수정사진관의
이름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진도에서 운영을 했던 사진관은 총 27개소로 조사가 되었으며, 진도읍에 7개소, 임
회면에 6개소, 고군면에 5개소, 의신면에 3개소, 조도면에 2개소, 군내면에 1개소,
지산면에 3개소로 조사되었다.
1) 진도 지역내 사진관 현황
조광사진관 박봉계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향교 1961년 543-4025
의신사진관 이기주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 중리 1970년대 광주로이사
등대사진관 박영준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십일시 1960년대
신신사진관 박기정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십일시 1960년대 신신당구장
사 진 관 운 영 인 지 역 명 운영 년대 비 고
고려사진관 박홍배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태평예식장 1960년대 박기배
태양사진관 오유경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궁전예식장 1961년
늘봄사진관 박병재 진도군 진도읍 조금리 1960년대
청춘사진관 조맹환 진도군 진도읍 사정리 현대예식장 1970년대 허바허바
뉴서울사진관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1960년대 진도고교사
고향사진관 곽은자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 1980년 약 2년
우미사진관 최진군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 1950년대 최치찬
인물사진관 조중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1960년대 전주로이사
남향사진관 이남숙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1961년 22세
옛날사진관 조예환 진도군 고군면 오일시 1960년대
중앙사진관 박진춘 진도군 고군면 오일시 1970년대
인물사진관 유동근 진도군 고군면 오일시 1970년대
명성사진관 김상철 진도군 고군면 오일시 복지예식장 1980년대
금골사진관 박종범 진도군 군내면 금골리 1960년대 1990년대
제일사진관 박동식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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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2) 현재 운영중인 사진관 현황
3.4.2 진도사진협회의 출범
진도사진협회는 진도사진동우회의 이름으로 1994년도에 설립되어 진도예총에 가
입함과 더불어 창립전을 성대하게 치르면서 진도사진동우회의 위상을 널리 알렸다.
창립 1년 후에는 경남의 양산사진동우회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진도군과 양산시의
많은 단체들이 자매결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진도군을 알리
고, 진도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사진에 담아내는 역할을 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해
오고 있다. 1994년도 창립당시 회원수는 14인이었으며, 1995년부터는 지금까지 꾸
준한 활동과 교류사업에도 열과 성을 다해오고 있으며, 지금의 회원은 26명에 달하
고 있다.
1) 진도사진동우회와 양산사진동우회간의 교류사업
진도사진동우회의 박병하 고문과 이성교 전부회장이 해남 대흥사 일원으로 사진촬
사 진 관 운 영 인 지 역 명 운영 년대 비 고
현대사진관 곽봉춘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십일시 1970년 543-3722
늘봄사진관(분) 이치영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십일시 1982년
경제사진관 곽영택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경제예식장 1970년
귀빈사진관 곽성훈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귀빈예식장 1980년대
희망사진관 김재성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독치 1960년대 542-0108
만호사진관 김휘방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인천 1970년대 542-0059
수정사진관 김영남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독치 1983년 542-0346
인성사진관 조규영 진도군 고군면 지수리 1970년대 543-7629
27 개소
( 2005년 12월기준)
구분/
순번
사진관명 운영자 지 역 명 전화번호 비 고
1 태양사진관 오주남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542-1616
2 허바허바사진관 조맹환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544-2844
3 김영남스튜디오 김영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544-4782
4 매직포토 조대진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542-4041
5 만호사진관 김희방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542-0059
6 우미사진관 최진군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 542-5013
7 남향사 이남숙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544-2451
8 현대사진관 곽봉춘 진도군 임회면 십일시 543-3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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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영을 갔다가 해남터미널에
서 광주에서 버스편으로 보
내오는 사진기자재를 기다
리고 있던중 식사시간이 되
어 식당(해남읍 백포식당)
으로 갔었는데, 그때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
진작가분들을 보고 이야기
를 나누던 중 양산사진동우
회 지도위원인 장기덕과 남
학준임을 알고 대화 도중에
장기덕의 제안으로 진도사
진동우회와 양산사진동우회간의 교류를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당시 부회
장이셨던 김민환에게 알렸고, 완도로 촬영을 온 양산손을 진도로 모시고와서 진도촬
영을 권유했고 관광지를 두루 안내해주었다. 이렇게 진행되어온 교류는 1995년 5월
에 진도사진동우회에서 양산사진작가를 초대하여 합동촬영을 했으며 1995년 07월
15일에 양산사진동우회회장단이 진도를 방문하여 진도읍 성내리에 있는 진도스타 8
층 토속식당(지금의 남강모텔)에서 결연식을 가졌으며, 그 해 10월에는 진도사진동
우회원 박병하, 김민환, 이성교, 박인회, 김영남, 신재복, 박강휘 등이 양산을 방문하
여 합동촬영을 가졌다. 1995년 07월 15일 결연식에 참석한 진도사진동우회원은 회
장 박인회, 부회장 김민환, 총무 이성교, 회원 박병하, 김영남, 오주남, 박병성, 신재
복, 김희영, 한태철, 윤치영, 최광현, 박송수, 이현승, 박강휘, 김천문 등 16인이었으
며, 양산사진동우회에서는 회장 박정건, 지도위원 장기덕, 부회장 성상경,총무 남학
준, 감사 강호발 회원 성무경등 6인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진도사진동우회
와 양산사진동우회간의 교류는 년 2회 상호 방문과 년 2회교류전시 약속했으며, 10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한 교류를 이루고 있어 타의 모범이 되고 있다.
2) 진도사진협회 역대회장 명단
구분 성 명 재 임 기 간 년 수 비 고
초대 박 인 회 1994~1995 2 년
2대 김 민 환 1996~1997 2 년
3대 김 영 남 1998 1 년
4대 박 병 하 1999~2000 2 년
5대 박 인 회 2001 1 년
6대 신 재 복 2002-2006 5 년
>> 영호남교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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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3) 진도사진협회의 발자취
진도사진협회가 추진해온 각종사진
공모전은 제 1회 진도개 사진공모전
(2002년 10월 29)을 성공리에 마쳤
으며, 제 2 회 진도개 사진공모전
(2003년 10월 29일) 제 3 회 진도개
사진공모전(2004년 10월 29일), 제 4
회 진도개 사진공모전(2005년 10월
29일)까지 마쳤으며, 공모전 사진 전
시는 진도개 품평회 자리에서 2일간
씩 치러졌다.
진도사진협회는 존영사진촬영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제 1 회 진도 무궁화 사진
공모전과 제 1 회 전복사진공모전시와 같은 각종 공모전과 관광사진전시 등을 통해
진도군에서 추진하는 각종사진전시에도 빠짐없이 참여를 해 오고 있다.
<신 재 복>
3.5 연극·영화
3.5.1 진도 공연예술의 토양
진도를 한국의 대표적 예향(藝鄕)이라 하는 이유는, 그 근거에 대한 질문에 대부분
의 군민들이 나름대로 설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소리’에 있어서 진도는 육자배기의 고향이고 남도들노래가 국가지정중요무
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남도잡가가 전라남도지정중요무형문화재이다. 양홍도,
최소심, 조공례, 설재천 등 고인이 된 보유자 예술인과 현재 활동 중인 신영희, 이임
례, 강송대를 비롯한 수많은 후진들이 있으며 김하정, 박진도 등 가수도 많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할 때는 으레 소리가 있었는데 심지어 밭일을 하던 여인네들이
지나가는 남정네를 가로막고 노래를 불러야 통과시켜주던 사례는 진도 도처에서 있
었던 일이다. 음악 또한 진도사람들의 예술적 기본이 되어 마을마다 씻김 등 굿판이
벌어지면 마을주민들은 밤을 새워 굿판에 앉거나 서서 함께 판을 끌어갔다. 제모의
>> 진도사진협회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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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노래와 사설을 감상하고 악사들의 음악에 동화되어간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일할 때면 흥그레 콧노래나 타령으로 일손을 달랬다. 소리와 음악은 자연스럽게 춤
을 만들었다. 진도의 대표적 춤꾼으로 양길순을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진도사람
들은 음악감각이 좋아서 잘 놀고 몸동작이 귄지다.
진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출상장면은 처음 보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사람이
죽어서 운구를 하는데도 상여 앞에서 북을 치고 춤추며 노래를 흥겹게 부른다. 상여
를 맨 상도꾼들도 모두 후렴을 합창한다. 출상 자체가 하나의 연출이고 상도계 임원
들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그만큼 신경을 쓴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는 위의 들노래 씻김굿 외에도 강강술래와 다시래기가 있
고 전라남도지정도 남도잡가 외에 진도북놀이와 만가 그리고 진도홍주가 있어 예향
으로서의 진도다운 분위기를 갖춘다. 여기에 진도군 지정 무형문화재 제1호 진도아
리랑을 비롯한 많은 향토문화유산이 진도에는 산재해 전국적으로뿐 아니라 세계적
으로도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지방이 진도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진도예총은 국악, 문인, 미술, 사진, 연예협회를 두고 있다. 그런데 연극분과가 없
는 점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다. 이 분야의 개설이 요구된다.
3.5.2 진도의 연극
‘다시래기’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받는 데 대해 지정에
관여했던 이두현(李杜炫)
당시 문화재위원(연극분야,
전 서울대 교수)은 지정사
유를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연극역사는 외국
에 비하여 너무나 짧은데
진도에 가보니까‘다시래
기’라는 연극을 상가에서 전통적으로 해왔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한국에도 이
>> 다시래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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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러한 형태의 연극이 있었다니 참으로 다행스럽지요.”
‘다시래기’는 전라남도지정무형문화재 제20호‘진도 만가(輓歌)’와 함께 기본정서
를 검토해야 한다. 이들이 각각 상례(喪禮)에 따른 주검처리방식의 하나로서 사람이
죽어 슬픔으로 가득한 처지인데도 만가는 상도계원(喪徒契員)들이 운상(運喪)을 할
때 상여 앞에서 북을 치고 춤추며 노래 부르고 행진하는 것이고, 다시래기는 출상 전
날 밤 상가 마당에서 벌이는 한바탕 웃자는 희극이다.
모두 망자(亡者)의 인생이 완전히 끝나는 비통함으로 보지 않고, 이제 아주 좋은 저
세상으로 가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의 길에 들어섰음을 축하하자는 표현이다. 따라서
다시래기로 인해 침울하던 상가가 갑자기 잔치집 분위기로 변하고, 출상마당이 축제
화 한다. 결국 주민들에게 이들은‘굿’이 되는 것이다. 진도에서는 출상구경을“상여
굿 보러 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출상할 때 소리꾼의 선소리가 멋있고 악사들
이 재밌게 놀며 상도꾼들의 후렴소리가 크게 잘 어울리면 구경꾼들은‘상여가 걸게
나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풍속은 한민족이 죽음을 어떻게 해석, 수용했
으며 어떤 방법으로 처리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하겠다. 특히 진도의 출상풍습
은, 고구려 풍속이었고 조선조에 이를 금했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다시래기는 슬픔
에 찬 상주들을 위로한다는 것으로 가상자와 친족들 그리고 봉사 부부가 등장한다.
3.5.3 진도극장과 이동 영화사들
진도읍 성내리 00번지에 있던 진도극장은 제주도에서 극장사업을 하던 북한출신
김순천이 1948년 진도에 와서 한참사(한명이) 소유 땅을 임대하여 흙벽 양철지붕의
‘진도극장’을 세우고 16mm 미제 RCA영사기로 영화를 상영했다. 물론 당시는 흑백
영화였으며 극장에서는 가끔 연극도 했는데 거의 외지극단이었고, 이곳에서 1956년
진도초등학교 학생들의 연극작품‘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공연하기도 했다. 1950
년 6.25전쟁으로 인해 극장이 문을 닫은 뒤 김씨는 그 옆에 중국식당을 차리고, 그의
장남 김일원은 진도읍 북상리 박흥식의 누나와 결혼했는데 나중에 김씨일가는 서울
로 이사를 했다.
극장이 없어지자 서예가 손재형이 소유한 목포극장의 기사 박상용의 형 박재용이
16mm영사기 1대를 가지고 종사원5명과 진도에 와서 현지인 박종민(진도읍 북상리)
을 만나 가설극장 영화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영화와의 상영비율 1/3이던 외국영화
는 채봉이씨가 해설을 맡아 사람들은 그를‘변사’라 불렀다. 그는 오후에는 영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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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줄거리를 설명하면서 오늘밤 가설극장에 구경 오시라고 진도읍 서외리 바우냇가 언
덕이나 성내리 군강공원 동편 서편 등지에서 재밌게 마이크로 선전했다. 그는 외국
영화의 남녀노소간 모든 대사뿐 아니라 해설을 함께 하여 주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대표적인 외국영화로는 삼총사, 보물섬, 황야의 독수리, 황야의 무법자
등 액션물이 많았고 관객들은 전쟁 후의 영향으로 등장인물들을‘우리 편인지 저쪽
편인지’를 빨리 판가름하여 응원했다.
하얀 광목천으로 빙 둘러 가설된 노천극장은 어린이들에게 더욱 인기가 좋았지만
돈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위를 서성이게 했었다. 그러다가 포
장 밑을 몰래 끼어들어가는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재수가 없으면 감시원 앞으로
불쑥 나타나는 불운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즐거운‘실패한 영웅담’이 되곤 했다. 그
러다가 어떤 날은 영화가 끝날 무렵 포장이 거두어지면서 아이들에게 맛보기가 제공
되는 횡재의 기회도 있었다. 7개 읍면을 돌면서 2년쯤 지속하던 사업이 잘 안되자
박재용은 박종민에게 경영권을 넘겼고, 박종민은 영사기를 인수하여‘한양 영배사’
라는 이름으로 한국최초‘가설극장허가1호’를 얻어 김인제(진도읍 쌍정리)와 함께
사업을 계속했다.
가설극장이지만 정부허가가 있으니 전남도청에서‘대한뉴스’필름을 제공받을 수
가 있었고 이근현, 채동수, 박흥식 등 진도청년들이 적극 돕는 가운데 이들은 안채
봉, 홍갑수 등 명창을 초청해 명창대회를 열었다. 또 진도출신 박옥진의 우리국악단
을 초빙하여 1주일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변사 채봉이가 그만두자 외국영화는
해설이 불가능하여 한국영화만 상영하고 있을 때 이종춘(진도읍 쌍정리)이 함정용
미국 윌링사 16mm영사기를 사서 이동영화사를 또 만들었다.
경쟁상황에서 관객을 둘로 나누게 된 박종민과 이종춘은 합자로 일본에서 35mm
영사기를 구입했다. 시운전을 마치자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면소재지를 돌면서
홍보영화를 실비지원으로 무료상영 중 곡성극장에서 영사기를 임대해 달라는 요청
이 있어 그에 따랐다. 이후 박종민은 가설극장으로 곡성, 천안, 경기도 지방순회를
하다가 7년여 만에 진도로 돌아오고, 이종춘은 서화작품을 취급하던 중 작가가 되어
광주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이인재는 박종민이 이종춘과 손을 잡자 혼자서 영업을
했다. 뒤이어 강진사람으로 충무로에서 영화사를 운영하다 실패한 마동욱이 진도에
와서 수년간순회상영을 했는데 TV의 등장으로 사업을 마감하고, 결국 진도에서의
순회영화는 막을 내렸다.
+149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한편 김인제가 혼자 남자, 진도의 영화팬들은 진도에도 극장이 다시 생겨야 한다
는 의견들을 모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참사의 손자 한길삼이 옛 진도극장 자리
를 정승주(진도읍 동외리)에게 팔아 그곳이 대창여객 버스회사가 되고, 한길삼은 성
내리의 다른 땅도 팔아서 1962년 성내리 00번지에 옥천극장을 지었다.
옥천극장은 대표 한길삼, 전무 한창교와 한병수, 정재옥, 수표주임(기도) 김태화가
운영팀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 지은 극장도 16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막을 내리
게 되고 1978년에 문을 닫았다. 이 건물은 대창여객 대표였던 정승주의 동생 정승학
(목포거주)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극장은 가끔 변형된 나이롱극장이 한두 달 임
대하여 건강식품 등을 판매하는 약장사들의 사업장이 된 실정이다.
3.5.4 현대 연극
다시래기와는 별도로 진도사람들이 공연한 현대적 개념의 연극은 일제시대부터 나
타난다. 1925년 1월17일자 시대신문 보도에 따르면 1924년 12월에 진도읍에서 20세
이하의 소년들이 허행복(許行福)을 단장으로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 지방청년
단결과 자녀교육의 필요를 선전키 위해 각 면 마을을 돌며 ’계모의 악행‘이라는 각
본으로 순회공연을 했다. 이들은 호평을 받아 다른 지방순회도 예정했다는 것이다.
지산면 가학리 박석치(樸碩緻), 김희만(金熙萬)을 비롯한 청년들은 야학회를 설립
하기 위하여 소인극단(素人劇團)을 조직해 각 마을을 순회공연을 했다. 그 결과 이들
은 주민들로부터 의연금을 얻어 야학회를 세우고 진학이 어려운 아동과 부녀자들을
모집해 보통학교 수준의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야학회는 박석치, 김희만, 박일빈
(朴一彬), 신정순(申釘順)을 교사로 남학생 35명과 여학생 25명을 교육했다. 당시 의
연금을 낸 사람은 김흥근(金興根), 박석배(朴碩培), 한경택(韓京澤)이 각 5원씩이고
박재원(朴在元), 박상극(朴相極)이 3원씩 이양윤(李良允) 2원(이하 생략)이었다.
진도청년동맹은 회관건립을 위해 1928년 11월 상순부터 12월25일까지 전군순회극
단을 조직하여 1천여원의 거액을 만들었다. 이들은 진도읍에서만 한 번 더 공연을
하기로 했다.19)
조선일보 진도지국은 지국설치 기념과 군내 일반독자를 위해 조선영화‘먼동이 틀
때’, ‘장한몽’2편을 서울에서 가져와 정월 15일부터 4일간‘독자위안 활동사진대
회’를 가졌다.20) 또 1929년 10월19일‘활동사진 이중연쇄신극 아성극단’이 진도에
19) <조선일보>, 1929년 1월 17
일자.
20) <조선일보>, 1929년 3월 13
일자.
150+
제5부 문화와 전통
들어와 흥행하는 중 조선일보 독자에게는 특별대할인권을 발행하여 수 천 관객의 성
황을 이뤘다 한다.21)
1933년에 사회문제가 되었던 군내면 세등리에서 시골 마을주민들이 기획한‘지도
원의 강연’이라는 연극은 대본 배역 등 구체적 내용이 조사되지 않았지만 곽재술(郭
在述)이라는 이 마을 출신이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곽재술은 보성전문 법과에 입학
했다가 중도에 귀향하여 항일 사회운동을 했던 세등리 사람이다. 그는 1933년 10월
진도에 오자마자 조규선(曺圭先), 곽재필(郭在必), 박종협(朴鍾浹)과 함께 1934년 4
월 적색농민조합 결성식을 갖고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마을 서당에서 야학으로 문맹퇴치사업을 펴는 한편 학생들로 구성된 연극팀
으로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극‘지도원의 강연’을 공연
했다. 그러나 연극공연 후 당시 군내면장이면서 집안인 곽두인이 곽재술의 어머니를
세금을 안냈다는 구실로 구타하자 곽재술도 곽두인을 구타하는 사건이 생기고, 일본
경찰의‘야학’조사로 진도적색농민조합이 드러나 곽재술, 곽재필, 조규선, 박종협
등 4명은 기소되어 박종협은 3년, 그 외는 2년 6월씩 복역을 했다.
당시의 여건 아래서 진도의 연극은 사회운동에 기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무대공
연이 기획되었을 터이나 전체적으로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만 6.25 이후 진도
의 여러 마을에서는 어린이들까지도 연극에 관심을 보였다고 믿어지는데, 필자의 경
우 진도읍 북상리 집 마당 한켠의 지하대피소에서 이웃 어린이들과 함께 연극놀이를
했었다. 물론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일이라 구체적 내용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
다. 다만 어린이들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당시 철마광장이나 진도극장에서 공연된
연극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6.25 후부터의 공연물은 과거 항일 민족주의이념에서 반공이념으로 전환된 경향이
짙었다. 당시 진도주민들로 구성된 연극팀은 한병수(진도읍 남산리), 임정운(진도읍
성내리),김명엽(진도읍 서외리) 등이었다.
○ 박동준과 일제시대 진도출신 중앙 연예인들
일제시대 중앙무대에서 활동한 진도사람으로는 우선 박동준(朴東俊)을 꼽을 수 있
다. 그이가 한국의 현대국악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지만 그를 중심으로 정리한 글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21) <조선일보>, 1929년 10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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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박동준은 진도의 대표적
인 세습무계로써 1896년
진도에 유배되어 12년간 적
거했던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의‘은파유필(恩波
儒筆)’에 나타나는 신비한
예술인 박덕인(朴德仁)옹의
동생 덕춘(德春)의 손자이
다. 덕춘은 종수(鍾洙)와 종
삼(鍾三) 두 아들을 두었고
종수는 봉준(鳳俊) 쌍준(雙
俊) 탐준(貪俊) 3형제를, 종
삼은 동준(東俊) 남준(南俊) 서준(西俊) 북준(北俊) 네 아들을 낳았다.
진도에서 활동하던 박동준이 어떤 연고로 서울무대에 진출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로인해 두 딸 보아와 옥진이 일제로부터 해방이후까지 서울에 살면서 전국범위로
활동했으며, 대금 명인 박종기(朴鍾基)가 진도에서 서울로 진출하게 되었다.
여성국극계 자매스타의 언니 박보아는 1921년생으로 16세에 박종기를 따라 서울로
갔다. 그녀는 여성국극단인 동일창극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 거문고 명인 한갑득
을 만났다. 동생 박옥진은(1935년생) 언니와 함께 여성국극단원으로‘단종과 사육
신’의 단종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명성을 얻었다.
진도출신 국극계 활동가로는 조선창극단원으로 흥보전에서 놀보역으로 대표되는
양상식(1921년생), 희극연기가 두드러진 국립창극단원 허희(1932년생) 등도 있다.
참고로 씻김굿 예능보유자 박병원(朴秉元)은 박동준의 동생 남준의 아들이며, 박병
천(朴秉千)은 박동준과 7촌간이다.
박동준의 예술은 박옥진 이후 옥진의 딸 김성녀, 김성애, 김성아로 3대에 걸쳐 이
어진다. 박옥진의 건강이 심히 안 좋을 때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중앙대학교 창극단
을 데려와 공연하던 날 인사를 통해 김성녀 교수는 자신이 진도의 예술혼을 이어받
았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동준은 진도읍 성내리 소재 진도 신
청(神廳)에서 박진권, 채중인, 양홍도와 함께 후진들을 가르치며 일반인들에게도 소
리와 악기를 지도했는데, 그의 가야금과 육자배기는 멋을 아는 진도의 여인네들에게
>> 박동준 혹은 그의 후손들 공연장면
152+
제5부 문화와 전통
인기가 좋아 항간에‘누구 누구는 동준이 아들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고 고 이길성(진도읍 남동리 초대 진도원예조합장)이 말한 적이 있다.
○ 나이롱 극장
우선‘나이롱’은 천연섬
유에 대체된 화학섬유 나일
론이 등장한 이후, 가짜라
는 개념의 대명사로 통용된
접두어이다. 따라서 나이롱
극장은 가짜 또는 엉터리극
장이라는 뜻이다. 소리꾼을
포함한 예인들이 가난한 가
운데 대접조차 받지 못하던
시절, 그들은 단체를 구성
하여 자신들의 예술을 집합
승화시키면서 이를 하나의
경제체제로 운영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나이롱극장이다. 즉 유랑예술단인 셈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가운데는 이 예술단 출신이 많다.
그들은 가족단위로 참여하고 부부가 함께 공연했으며, 여기서 만나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도사람으로 대표적인 예가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강준섭이다. 그는 18세
때 같은 단원인 경상도 출신 17세의 김애선을 만나 결혼했다. 따라서 이 부부의 창극
연기경력은 가히 한국의 정상급이고, 이들은 현재도 진도에 거주하면서 진도군립예
술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요즘도 공연단체의 요청에 따라 출연을 하고 있다.
나이롱극장은 써커스단처럼 대형 천막을 치고 관람객을 입장시킨다. 옛날에는 유
료관람이었으나 요즘은 무료입장에 공연 도중 수시로 생활용품으로부터 건겅식품까
지를 판매하고 있다. 공연종목은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과 같은 창극으로부터
판소리, 민요와 더러는 줄타기 등 묘기를 보여줄 때도 있다. 단체는 현지인들의 호응
에 따라 2~3개월씩 한 곳에 머물며 공연을 한다. 나이롱극장 역시 TV가 등장하면서
손님들이 연속극으로 분산되었지만, 요즘도 시골에서는 노인 중심으로 관객이 모인
다. 그러나 단체가 상품판매에만 치중하여 지적을 받는 경우도 있다. 2005년 진도를
현지조사지로 하고 있는 일본 동경대학교 이토아비토(伊藤亞人, 문화인류학교수)는
>> 나이롱극장 공연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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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이 단체의 일본공연을 주선하기도 했다. 과거에 일본에도 이러한 단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년간 단체를 운영하던 진도출신 박문수는 이제 한국에서도 이런 단체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며 그 이유로 우선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말한다.
3.5.5 민요창극
2000년 진도군의 예산지원으로 막을 올린 연극‘또 하나 고려 있었네’는 우선 전
출연진이 진도사람들이었다는데 전국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진도출신 여류소설가 곽의진의 작품을 박영도 연출로 선보인 이 연극은, 진도군 관
내 각읍면 부녀자들이 농사를 짓다가 밤에 연습하여 만든 작품으로 진도사람들의 숨
은 연기력을 모처럼 발산시킬 기회가 되었다. 내용은, 1271년 삼별초 세력이 이끄는
진도의 고려정부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좌초될 때 배중손 장군과 동백이라는 진도아
가의 못 이룬 사랑을 묘사한 역사물 러브스토리였다. 이 연극은 서울에 가서 상영함
으로써 진도사람들의 탁월한 연기력과 예술혼을 널리 자랑하는 기회가 되었다.
2002년 우리나라 희곡 작가의 대가인 돌아가신 차범석이 쓴‘저 달이 지기 전에’
가 민요창극으로 무대 위에 올려졌다. 남사당패가 진도로 공연 오면서 펼쳐지는 러
브스토리로 이야기의 중심 축이다.
2003년 12월 27일, 진도
의 민속예술을 총집결한다
는 의미에서 진도아리랑 민
요창극‘아리 아리랑 날다
려가오’라는 작품을 공연
했다. 그 당시 진도군립민
속예술단 단장이었던 이윤
선이 연출하고 방송작가 출
신 김미경이 극본을 써서
진도 향토문화회관 대공연
장 무대에 올려졌다. 한 여
인의 삶의 질곡을 따라 가
면서 진도아리랑의 다양한 내용으로 관객에게 뜻을 전달하면서도 그 안에서 진도북
춤·진도씻김굿·진도다시래기·진도만가 등 여러 가지 뛰어난 진도 특유의 민속을
>> 연극 공연장면
154+
제5부 문화와 전통
함께 보여줌으로서 진도민속문화의 우수성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뒤이어 곽의진
작품‘바람의 상처’가 2006년 1월 향토문화회관에서 무대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다. 이 연극은 군사정권 시대 간첩사건으로 18년간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박동운(1945년생, 진도읍 쌍정리)의 억울한 처지를 묘사한 것으로, 박씨가 고문을
이겨내던 마지막 벼랑에서 어머니를 고문하며 간첩임을 시인하라고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대목이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다. 사실대로 그이가 사회적응
이 어려워 꿀벌을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이 극중에 나타난다. 고문담당이 속죄의 괴
로움 속에 살다가 우연히 피해자 마을에 와서 그들과 만나고 마을 여인과 결합하는
비약이 양자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성급함으로 남는다.
연극공연 후 청문회가 열려 박동운, 그의 고모부 허현, 석달윤의 아들 등 이 사건으
로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의 고문실상 폭로와 박동운의 친구 이원기, 000변호사, 사
회 및 진행 등이 여러 측면에서 사건을 재진단 했다.
<박 주 언>
3.6 무용
진도의 무용과 춤에 대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
강술래의 기원으로 인용되
는 삼국유사의 기록까지 거
론될 수 있다. 대개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와 양서
열전(梁書列傳) 등의 기록
을 근거로 한다. 마한이 진
도가 속했던 지역이라는 점
에서 연관성은 더 높아 보
일 수도 있다. 이 기록을 통
해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춤추며 술 마시고 노는데, 춤을 출 때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서로
뒤를 따르면서 땅을 밟고 높이 뛰고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여럿이 함께 모
여 발을 구르면서 움직이는 형태의 춤이 현재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춤에 관한 형태
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밤마다 여럿이 모여서 노래하고 노는 것은 물론이고, 풍속
>> 춤추면 노는 장면(옛사진)
+155
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이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도망가고 유인하기도 했다는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고대
의 춤이 가지는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있게 해준다.
이같은 고대의 춤의 의미를 해석하는 편차는 다양하지만, 대개 남녀가 음주가무(飮
酒歌舞)하는 것은 제천 대회와 귀신제의(鬼神祭儀) 파제 후에 가무(歌舞)하는 것으
로, 신령의 효험을 획득하려는 음복(飮福)의식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새로운 소망성
취를 위한 축의(祝儀)이며 자아의 변이(變異) 재생의례라는 뜻이다. 한편으로 국중
제의시 손을 마주잡고 뜀뛰기하는 원무나, 남녀가 무리를 지어 창악(倡樂)과 가무를
즐기며 유인하는 일은 고대사회의 난혼(亂婚)으로 보기도 한다. 즉, 교접결합의 굿판
으로 구애와 짝짓기의 혼례라는 것이다. 원시종합예술 기원설은 대체로 이같은 사실
들을 근거로 한다.
한편, 『삼국지』마한조에 보면 마한에서는 5월에 곡식을 뿌리고 모두가 모여서 춤
을 추면서 신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또한 10월의 추수감사절 때도 마찬가지의 모임
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행사에는 소도라 하여 제사지역을 일정하게 정
하고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읍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선출해서 천신에게 제
사를 올리게 했는데, 이 사람들을 천군이라 했다. 제정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전
제하면, 이때의 천군을 당골에 비유해볼 수도 있는데, 당골이 주재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는 형태의 고대 춤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여러 사
람이 타악기를 들고 발을 맞추어 함께 춤추었다는 풍속은 농악 또는 두레로써 풍년
을 기원하는 군무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간단한
타악기 리듬과 소리에 맞춘 단순한 난무(亂舞)와 윤무(輪舞)와 같은 무형식성에서 음
주가무와 같은 민중춤, 탈춤, 북춤과 같은 형태를 갖춘 춤의 양식화가 이루어지기 시
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마한 이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소개된 백제악을 보면 고구려악과 같이 악사 4
인 중에는 횡적(橫笛), 공후(??), 막목(莫目), 무(舞)의 역할별로 되어 있어 악사에는
따로 춤꾼이 곁들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기록에도“백제에서는 5월, 10월에
후위(後魏) 이후의 연악과 같은 탁무를 추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농경춤 형식의
농악무가 초기의 형태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백제춤의 특징은 고구
려와 달리 중국 남조악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춤 문화를 영위하였다는 것과 비옥
한 농토를 가진 마한, 진한 땅에 건립됨으로써 남성들의 농악과 여성들의 강강술래
등의 소리춤이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춤의 전통은 삼국시대, 고려시
대, 조선시대로 전승되어 오면서 시대와 함께 호흡해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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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진도춤과 관련한 근대적 기록은 1896년 무정 정만조의 은파유필에서 찾아볼 수 있
다. 당시 무정이 만난 박덕인이라는 사람이 창, 가야금, 퉁소, 무용 등에 능한 악공이
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춤사위를 예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덕인을 예찬한
시구(詩句) 중에서 관련된 내용으로는, “빠른반주 나오면서 어깨미동 일어나니/ 뜨
락의 화초들도 같이 춤을 추는구나/ 춤추는 모양은 난간주렴에 비가 씻기는 것 같고
/ 옷깃 휘날리는 모양은 비단결 노니듯 한다/ 입으로 거문고 타고 손으로 노래하니/
보지 않은 사람들 그 누가 믿으리오/ 열두줄 조절하여 새소리도 내어보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래에 와서는 춤이 분화되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
다. 북춤 등의 악기춤을 제외한 순수한 한춤에 한정하여 본다면, 무속춤을 상당한 기
반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진도씻김굿에서 연행되는 춤이 많이 알려
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진도 사람들 모두가 춤꾼의 기질을 갖고 있어서인
지, 다른 분야만큼 전국적인 춤의 명인들이 배출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1987년 6월 15일에는 진도군민회관에서 박관용 진도북춤연구원 주최로
열린 <박관용 진도북춤발표회>를 보면, 현대 진도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때 강
준섭, 채계만, 정숙자, 김귀봉, 박병원, 이해룡, 박영태(당시 강진 거주, 진도 조도출
신 대금연주자), 박옥주(목포 거주, 징춤), 박용철(광주 거주, 바보춤), 김영준(광주
신라국악원장, 바라춤) 등의 국악인들이 몰려 공연하였다. 이를 통해서 보면 북춤뿐
만이 아니라, 대금, 징춤, 바보춤 등이 진도사람들을 통해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당골춤(세습무춤)과 살풀이춤
진도의 당골은 전통적으로 음악을 잘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따라서 무가뿐
만 아니라 춤에도 전문적인 기량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진도의 춤꾼으
로 알려져 있는 사람은 정숙자(1939~1991, 지산면 인지리)이다. 원래 충청도 출생으
>> 당골춤 >> 살풀이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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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로 씻김굿 가계인 박병천과 결혼하여 무업을 시작하였다. 본래 유랑극단의 단원으
로 진도에 들어와 박병천을 만나게 되었는데, 특히 제석굿의 중염불소리를 잘할 뿐
만 아니라 살풀이춤을 잘 췄다. 정숙자의 살풀이춤은 진도씻김굿의 지전춤으로‘지
전살풀이춤’이라고도 한다. 이후 후학들에게 전수되어 진도 내외에서 진도씻김굿을
배우거나 연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숙자류의 지전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살풀이춤은 조선 중기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의 발달이 활발해지면서 광
대예술이 발전되고, 이에 따라 창우(倡優)들이 창작한 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춤
의 핵심적인 형식은 손에 수건을 들고 남도무악인 살풀이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
이다. 이때 수건을 들고 추는 까닭은 춤을 만들어낸 창우들이 판소리를 할 때 땀을
닦거나 멋(발림)으로 사용한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고, 춤꾼이 자기의 감
정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전살풀이춤
은 씻김굿의 지전을 들고 추는 살풀이이고, 살풀이춤은 긴 무명베 수건을 들고 추는
살풀이를 말한다.
○ 보릿대춤(허튼춤)
춤 중에서 일반적으로 진도사람들
이 가장 즐겨 추는 춤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다른 지역에서는 허튼
춤이라고 부르는데, 진도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서는 보릿대춤이라고
부른다. 춤동작이 보릿대처럼 뻣뻣하
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튼춤
은 손발을 거칠고 절도있게 놀리면서
방향을 바꾸어 어지럽게 움직이며 추
는 춤을 말한다.
허튼춤은 사람이나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며, 농악이나 탈춤 또는 굿판이나 명절
놀이 때 추는 서민적인 춤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진도사람들이‘새끼줄 하나만 허
리에 질끈 동여매고 나와도 그렇게 멋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정한 형식이
없는 자유스런 춤, 곧 허튼 춤의 귄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즉 일정한 형식이 없이 흥
이 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추는 흥풀이춤이며, 악기는 삼현육각으로 반주장단을 하기
도 하고, 외장고와 구음만일 때는 주로 굿거리장단을 친다. 마당춤에서는 사물(四物:
>> 보릿대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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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징·북·장구·꽹과리)만으로 반주하기도 한다. 춤가락은 굿거리-자진모리-중모
리-중중모리-휘모리 등 다양하나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굿거리와 자진모리이다.
얼씨구 잘한다, 얼쑤와 같은 추임새를 해서 흥을 돋운다.
○ 어깨춤(허튼춤)
흔히 흥풀이춤이라고도 하는 허튼춤이다. 어떠한 자세에서든 앞으로 가거나 뒤로
걸어가면서 또는 제자리를 돌면서 주로 어깨만 움직이면서 추는 것이 특징이다. 대
체로 여성들이 즐겨 추며 특별한 기교가 요구되지 않으므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
다. 춤을 느리게 추는 경우에는 숨을 들이쉬면서 어깨를 위로 올렸다가 숨을 내쉬면
서 어깨를 밑으로 내리는 동작을 한다. 어깨춤을 빨리 추는 경우에는 어깨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그 반동으로 고개도 약간씩 좌우로 흔들게 된다. 유형에는 팔만 벌리고
추는 한량춤형과 신체의 어느 관절만을 부분적으로 움직여 추는 보릿대형, 어느 지
점에 신경을 집중시켜 긴장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푸는 덧배기형, 몸을 상하로만 움
직여 추는 홍두깨형, 엉덩이만 좌우로 흔드는 성무용형, 손을 좌우로 흔드는 어깨춤
형, 손바닥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는 허수아비형,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손춤형 등
이 있다.
○ 엉덩이춤(허튼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추는 해학적인 춤이다. 팔을 흔들면서 제자리에서 걷
거나 돌면서 또는 앞으로 걸어가거나 뒤로 빼면서 엉덩이를 좌우로 과장되게 흔들어
대면서 추는 춤으로, 성적(性的)이면서도 해학적인 맛을 풍기는 춤이다. 일정한 형식
이 있는 것이 아니고 흥에 겨워 추는 춤이므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유형에는
팔만 벌리고 추는 한량춤형과 신체의 어느 관절만을 부분적으로 움직여 추는 보릿대
>> 어깨춤 >> 엉덩이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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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형, 어느 지점에 신경을 집중시켜 긴장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푸는 덧배기형, 몸을 상
하로만 움직여 추는 홍두깨형, 엉덩이만 좌우로 흔드는 성무용형, 손을 좌우로 흔드
는 어깨춤형, 손바닥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는 허수아비형,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손춤형 등이 있다.
○ 막대기춤
팔을 옆이나 사선으로 펴서 추는 허
튼춤을 말한다. 한 손을 들고 추는 경
우와 양손을 들고 추는 경우가 있다.
손바닥을 앞으로 보이거나 밑으로 하
기도 하고 또 손가락을 벌리거나 손
가락 두 개를 펴고 박자를 맞추면서
추기도 한다. 보통 일자(一字)로 양손
을 편 채 앞뒤 또는 갈 지(之)자로 걷
거나 제자리에서 돌면서 추는데, 주
로 진도를 포함한 전라도 지방에서 춘다. 유형에는 팔만 벌리고 추는 한량춤형과 신
체의 어느 관절만을 부분적으로 움직여 추는 보릿대형, 어느 지점에 신경을 집중시
켜 긴장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푸는 덧배기형, 몸을 상하로만 움직여 추는 홍두깨형,
엉덩이만 좌우로 흔드는 성무용형, 손을 좌우로 흔드는 어깨춤형, 손바닥을 뒤집었
다 엎었다 하는 허수아비형,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손춤형 등이 있다.
○ 도굿대춤(절굿대춤)
절굿대가 상하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여 추는 춤이다. 손을 자유롭
게 움직이면서 무릎만을 굽혔다 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마치 절굿
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
하는 춤이다. 동작이 크지 않고 활달
하지 않아서 대체로 노년층에서 많이
추는 허튼춤의 일종이다. 이러한 허
튼춤은 사람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
라 다양한 명칭이 있다.
>> 막대기춤
>> 도굿대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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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 모방춤(곱사춤)
동물춤과 모방춤은 기본적으로 동
일한 춤이다. 춤의 생성은 동물과 기
타 다른 사물들을 가리키는 몸짓과
언어에서 춤으로의 이행이 명백하고,
또 동작의 리듬은 노동행위에서 배우
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쿠르트 작스
도“동물춤을 추는 종족들은 춤이 정
열적이고 다양한 동작을 하지만, 동
물춤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종족의 춤
은 몇개 안되는 동작만을 가지고 있으며, 춤 에 대한 정열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춤은 동물에 관한 춤이 많다. 특히 다시래기 제청에서는
십중팔구 곱사춤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허리나 배에 간단한 물건을 넣고 추는 모방
춤들이 많다.
○ 허수아비 춤
여기서 말하는 허수아비춤은 춤이
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깝다. 강강술래
할 때 으레껏 등장했던 놀이 중의 하
나가‘허수아비 춤’이다. 허수아비를
만드는 요령은 부엌재를 담는 부삽
(당글개)에다가 열십자로 비땅(부지
깽이)을 묶고 머리에는 바가지를 씌
우고 수건으로 감아 머리를 만든다.
여기에 저고리를 입히고 난 다음에
사람이 치마를 둘러쓰고 부삽자루를 잡고 춤을 춘다. 또 하나의 방법은 지게막대기
에다 비땅(부지깽이)을 열십자로 묶고 머리는 짚으로 싸서 수건을 씌운다. 저고리를
입혀 치마를 둘러쓰고 지게막대를 잡고 강강술래 놀이 하는 가운데로 들어가 춤을
춘다. 이 도깨비는 앉으면 앉은뱅이가 되고 들어올리면 야채비(키가 큰 도깨비)가 된
다. 춤추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걸음걸이 흉내에서부터 말솜씨 흉내
까지 다양한 재치로 밤새 놀았다고 한다. 이 허수아비 놀이는 보통 양편에서 두 개씩
의 허수아비가 나와 웃기며 노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 모방춤
>> 허수아비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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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3.7 행사
○ 진도문화원 각종 행사
지역고유문화의 계발·보급·보존·전승 및 선양, 향토사의 조사·연구 및 사료의
수집·보존, 지역문화행사의 개최, 문화에 관한 자료의 수집·보존 및 보급, 지역문
화에 관한 사회교육활동 등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진도문화원은 문화학교
운영, 문화활동사업, 향토유적지 답사, 삼별초 온왕제 봉행, 군민의 날 행사 지원 등
향토문화 계발, 보급 등 문화 활동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진도문화원 주요사업
<문화학교 운영>
- 수강시기 : 매년 상반기/하반기 운영
- 수강장소 : 진도문화원
- 수강내용 : 공예연구반(천연염색, 전통연, 한지공예, 짚공예 등), 상여소리반, 실
버문화학교 등 운영
<문화활동사업>
- 신명나는 장터굿(진도읍장 및 십일시 장터)
- 실버악단 각종 공연 참가
- 연날리기 체험 행사
- 진도문화 발간
○ 남도문화제 참가
사라져 가는 전통 문화예술의 발굴과 보존 전승 도모하고 전통 민요와 민속이 살아
숨쉬는 예향의 고장 이미지를 상징화하기 위해 해마다 진도군은 남도문화제에 참가
하고 있다. 2006년 11월 3일 제33회 남도문화제에 출연하여 지산면 소포 마을사람
들은 소포베틀노래로 남도문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남도국악제 출연
전통 민속놀이의 발굴 및 재조명으로 문화예술의 정체성 확립하고 문화 예술단체
┃┃┃┃참 고 문 헌 ┃┃┃┃
◆ 박병훈, 『鄕田朴秉訓鄕土史資料論·文集』, 진도문화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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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의 간접적 지원을 통한 향토민속 원형적 보존 도모하면서 민속 예술의 본고장인 진
도 이미지 제고에 기여하기 위하여 해마다 진도군에서는 남도국악제에 참가하는데
2005년 제28회 남도문화제에서는 종합 대상(문화관광부장관상 : 우승기)을 차지하
는 영예를 누렸다. 이는 바로 예향 진도의 명성 그대로 진도군민 모두가 예술인이기
때문에 얻은 결과이다.
○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해마다 11월2일과 3일 양
일간 진도향토문화회관 대
공연장은 전국 각지에서 모
여든 명창들의 소리로 분주
하다. 전통 민요와 민속이
살아 숨쉬는 남도예향의 이
미지를 상징화하며 남도민
요의 대표적인 고향인 우리
진도를 부각시키면서 남도
민요의 후진양성과 전통문
화예술의 전승발전 및 대중
화에 힘쓰기 위해 권위있는
대통령상을 마련하여 전국 각지에서 남도민요 경연을 통한 후진양성 및 전통문화예
술의 창달에 앞장서고 있는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명창부, 일반부, 노장부, 신인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 등이 있다.
○ 세시풍속놀이(지산면 소포리/의신면 사천리 : 매년 정월대보름)
정월대보름을 맞아 진도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전통 세시풍속놀이로 소포리와
의신면에서 매년 고향을 찾은 향우들과 마을 주민들 그리고 관광객들과 더불어 흥겨
운 한 때를 마련하는 행사이다. 횃불올리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농악놀이, 강강술
래, 진도아리랑부르기 등 다채로운 놀이가 펼쳐진다.
○ 진도미술제 및 제3회 영호남 미술교류전
미술협회 진도지부에서는 미술동호인들의 화합과 창의적 발굴을 도모하고, 군민들
에게는 다양한 미술문화의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진도미술제 및 영호남 미술교류
전을 개최한다. 관광진도의 홍보와 함께 예향진도의 예맥을 계승·발전시키는데 기
여한다.
>>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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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 진도군 미술전람회 개최
진도는 누가 뭐라 해도 뛰어난 예향으로 그림의 고장이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수
준 높은 미술작품 창작활동 기회부여로 예향진도의 예맥을 계승하고 능력 있는 작가
발굴로 예술인 양성하기 위한 진도군 미술전람회를 개최한다.
○ 전국소치미술대전
소치미술대전운영위원회에서는 우리 고장 출신의 남종화의 대가이신 소치 허련(許
鍊: 1808년~1893년)의 예술혼을 전승하고 역량있는 작가들을 발굴 육성하기 위해
2005년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미술대전을 개최한다.
○ 진도예술아카데미 교실
(사)예총진도지부에서는 국악, 미술, 문학, 사진, 연예 등의 분야별 이론 및 실기 교
육 강사로 생동감 있는 교육을 위해 진도예술아카데미 교실을 개최한다. 진도향토문
화회관에서 국악한마당, 분야별 작품전시회를 병행하며 군민과 함께하는 사회교육
의 장을 매년 하계와 동계로 나뉘어서 마련하는 진도예술아카데미는 군민 화합 및
군정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예향의 고장에 걸맞게 전통문화예술 계승 발전에 기여
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또한, 선인들의 얼을 이어 받아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향토
문화예술의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행사이다.
○ 청소년 국악교실/진도군 학생미술 실기대회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시·화·창·악 중심의 진도전통예능 교육을 활성화시켜 향
토 문화예술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전통예능 분야 중심
의 특성교육을 실시한다.
○ 찾아가는 시화전 및 군민글짓기 백일장대회
문인협회 진도지부에서는 청소년들에게는 창의적인 인성 및 감성교육에 기여하고,
군민들에게는 문학열을 고취하여 바람직한 여가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고자 찾아가는 시화전 및 군민글짓기 백일장대회를 개최한다. 입시중심의 공교육
에서 취약한 문학부문에 대하여 청소년의 문화감수성 배양으로 창의적인 인성 및 감
성교육에 기여하며 산업발달에 따른 국민소득의 지속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개인 삶
의 질이 부응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바람직한 여가 활용 동기를 부여하도록 만든다.
한편, 지식·문화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력양성의 기초적인 동기를 부여하여
일상생활에서의 문화적 삶을 통하여 윤택한 인생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행사의 가장 중요한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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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 영호남 합동 사진촬영 및 전시회
사진협회 진도지부에서는 사진동호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관광진도 홍보에
기여하기 위해 영호남 합동 사진촬영 및 전시회를 열어 관광객 유치 및 지역경제 활
성화에 기여한다.
○ 진도 해변가요제
신비의 바닷길 축제와 연계하여 관광 진도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하계 휴가철
관광객의 적극 유치로 지역경제 활성화 도모하기 위해 고군면 가계해수욕장에서
(사)한국연예협회 진도지부가 펼치는 가요제가 있다. 매년 8월초 시원한 해변가에서
열리는 신나는 해변가요제는 진도 바다를 젊음의 바다로 만드는 흥미로운 행사이다.
○ 한가위 노래자랑
(사)한국연예협회 진도지부에서는 귀성인, 직장인이 함께하는 한마당 잔치로 관광
진도 이미지를 함양하고 지역주민의 소득 창출과 애향심을 고취하면서 우리고장의
문화예술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지역민과 향우간의 화합에 기여하는 행사로 2005년
한가위 노래자랑을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향우들에게 진도의 혼
을 심어주고 지역주민의 소득 창출 및 귀성인, 진도인이 함께하는 화합의 장이 마련
되었다.
○ 한국전통무용경연대회
진도민속예술보존회에서는 전통한국무용 경연대회를 통해 한국무용 전승 발전과
예능 인력 저변확대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며 회원간의 상호 친목도모
와 한국무용 전승 발전을 위한 저변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한국전통무용경연대회를
개최한다.
○ 국제학술대회
진도학회에서는 국제학술회의로 관광진도의 해외홍보 효과 거양 및 국내 석학들을
통하여 진도이미지 홍보 효과를 드높이는데 기여하기 위해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 당산문학 출판기념회
당산문학회에서는 장애인들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삶의 애환을 문학으로 승화시
키고, 장애인들의 문학에 대한 창작 활동으로 세상을 밝게 바라보면서 굳세게 살아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당산문학을 발간하고 당산문학 출판기념회를 갖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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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문 화 와 전 통
문화
○ 단군대제봉행
진도단군숭모회에서는 숭모회원간의 화합과 단결력이 돋보이며, 우리 민족국가의
자긍심을 길이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초석을 위해 단군대제를 봉행한다. 우리 민
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
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개천절
행사인 단군대제는 지속적으로 정성껏 봉행해 오고 있다.
○ 석전대제(釋奠大祭)
진도향교에서는 공자를
위시한 5성과 공문10철, 송
조6현, 우리나라 18현에 제
례봉행하는 석전대제를 개
최한다. 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첫 번째 정
(丁)일에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의례행사로 39성현의 위패
를 모시는데 진도향교는 형
편상 위패를 5성(공자, 안
자, 증자, 자사, 맹자)과 한
국 18현(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송조 6현 중 주희, 정이만
모셔 총 5성(聖) 20현(賢)만 모신다.
○ 서예협회 회원 서예전
한국서예협회 진도지부에서는 회원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전시함으로써 서화인들
의 창작의욕 고취 및 전국 예술인들의 진도 방문기회 마련을 위한 서예전을 개최한
다. 이 행사는 관광홍보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예향진도의 서화예술을 발
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 진도세계평화제
진도는 한반도 서해와 남해를 연결짓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진도 연안 바다에는 전
사하거나 전사하여 바다에 수장된 군인들이 많다. 909년 후백제 견훤과 후고구려세
력 왕건, 벽파 앞바다 싸움에서 견훤 수군이 전멸했고, 1270~1271년 진도 삼별초와
>> 진도향교의 석전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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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문화와 전통
여몽연합군 전쟁으로 상호
간 많은 전사자를 냈다.
1350~ 1437, 공도기(空島
期)에 진도는 한 때 왜구들
의 본거지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1597년 음력 9월16
일,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명량해전으로 서로 많은 전
사자를 냈으며, 1894년 동
학항쟁 최후격전지로 진도
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에서도 진도는 갈매기섬을 비롯하여 많은 사망자를 냈다. 이처럼 진도는 그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바다 속에 떠돌고 있는 수많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이 있다. 진도평화제
는 이렇게 전쟁 중에 사망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대상으로 국적을 초월하여 수중
고혼을 혼건짐으로 맞이하여 씻김굿으로 원한을 풀어 드리고 합동제사를 모시는 행
사이다. 이는 전쟁의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풍요로운 땅과 바다를 가꾸며 살고 있는
우리 진도군민들이 인류 평화를 추구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지역 축제이다. 예로부
터 풍성한 전통 민속예술을 지니고 있는 우리 진도에서 진도평화제를 개최함으로써
훌륭한 전망공신(戰亡功臣) 선조들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무명전사자, 그리고 일
본·몽골·중국의 참전 전사자들까지 천도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이것은 전쟁
이 없는 평화로운 바다를 만들어 가자는 진도군민들의 염원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고
진도를 세계 평화의 성지가 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행사내용은 개최 시기마
다 조금씩 변동이 있다. 2001년 제5회 때는 토요민속여행·평화기도·혼건짐·소
후렌(想夫戀:임진왜란 때 징용되어 전사한 남편이나 아버지의 명복을 함께 비는 춤
으로 가고시마현 무형문화재)·일본 북해도 아이누족 위령의례·씻김굿·강연회·
오신굿·제사·상여굿·천도제·선부원종공신록 전시(임진왜란 때 7년간에 걸쳐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자들에게 선조 임금이 포상한 책을 전시)·해남 녹청자 전
시·진도 사진전 등을 공연했다.
이외에도 진도에는 찾아가는 시화전, 진도문학 발간 및 문학세미나, 소전 서예 전
국공모 대전(2004년 제1회), 어머니합창단 발표회 등 각종 사회단체와 문화예술 단
체가 개최하는 다양한 행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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