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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아, 오성산
2000년 6월 21일, 우리 답사팀 일행은 전북 군산을 지나 옥구 변두리 지역을 달리고 있었다.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중에 마지막 코스를 향해 가고 있는 길이었다.
전북 옥구는 전북의 북서부, 금강 만경강의 하구로 둘러싸인 반도와 서해의 도서를 포함한 지역이다. 옥야다구(沃野多溝). 비옥하고 기름진 들판과, 들판 사이로 도랑이 많다고 해서‘옥구’라는 지명이 생겼다. 나의 관심은 옥구에서도 오성산으로 향해 있었다. 2박 3일의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중 마지막 코스였으므로 남은 곳은 고수부님이 최후를 맞이한 오성산밖에 없는 까닭이다.
운전하는 성도는 운행 중에도 왼편 차창 밖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쪽을 향해 눈길을 던지곤 하였다. 다른 성도들 역시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듯하였다. 차는 어느 한적한 들판 길로 들어섰다. 이따금씩 비릿한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가운데 나는 운전자의 눈길이 어딘가를 향해 우우우 달려가는 것을 눈치 챘다. 나를 포함한 일행의 눈길도 동시다발적으로 따라 붙었다. 거대한 교각 같은 사각의 콘크리트 기둥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전북(군산시 성산면)과 충남(서천군 마서면)을 잇는 연장 1.8킬로미터(방조제 1,127m, 배수갑문 714m)의 금강하굿둑이다. 넓고 길고 큰 금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2006년 답사 때는 아예 금강하굿둑을 지나 맞은편 휴게소로 가서 식사를 했다. 70여 년 전 활동했던 고수부님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행이 왜 (1990년도에 완공된) 금강하굿둑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듯 눈길을 주고 있는가?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금강하굿둑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가운데 일행이 탄 차는 오른쪽 산길로 꺾어 들었다. 오른편으로 야트막한 산 중턱을 깎아 세운 거대한 원형 건물의 금강철새 전망대가 보였다. 금강하구는 바람도 머물다 가는 넓은 갈대숲과 어우러져 새로운 철새도래지로 각광받고 있다. 금강철새전망대를 중심에 놓고 부챗살 모양으로 둥그렇게 휘돌아 능선을 끼고 얼마나 갔을까.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차는 양쪽 들판 위로 놓여 있는 도로 위를 달렸다. 2006년 답사 때 가이드가 오른편으로 몇 두락의 논을 건너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 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고민환 성도님 집터입니다. 고민환 성도는 원래 저기 왼편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태모님이 당신집을 지으라고 명을 하셔서 오른편에 있는 바로 저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태모님 선화(仙化) 후에 고민환 성도가 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현재는 고민환 성도 손자가 살고 있구요. 정산 채용신 화백이 그린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차는 조금 가파른 언덕길을 차고 올라갔다. 고갯길을 돌아서니 왼편으로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가이드가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알 것 같았다. 오성산! 증산 상제님이 이곳 오성산에 와서 여러 차례 천지공사를 집행하였고 고수부님 역시 오성산 산신을 치하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천지공사를 행하였다. 우리는 바로 그 오성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넓은 밭을 두고 왼편 산기슭에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성산면 큰골마을이다. 차는 그 마을을 향해 그믐달처럼 휘어진 도로를 그네 타듯 돌아서 빠져 나가는 듯 달려가는가 싶다가 좀 심하다싶을 정도로 좌회전을 했다. 오른편으로 긴 능선을 끼고 큰골마을 진입로에 들어섰다. 진입로 끝에서 곧장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편으로 나사처럼 휘돌아 다시 왼편으로 빙글 돌아가니 제법 울창한 숲이 앞을 막고 있었다. 숲 속으로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뚫려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차가 잠시 멈추었다. 운전대를 잡은 성도의 표정에는 알싸한 감개가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2003년 6월 3일, 그리고 2006년 6월 18일 답사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오성산 초입이다. 이곳이 바로 고수부님이 당신의 파란 많은 한 생애의 긴 겨울철을 보냈던 곳이다. 숲속으로 오르는 길목에 서서 나는 한 인물을 생각했다. 1999년에 처음 만난 두 인물 중의 한 인물이다. 이후 8년 동안 나는 얼마나 애타게 당신을 찾아다녔던가. 지금 나는 당신을 찾는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태모 고판례 수부님.
1933년 동짓달 초닷샛날, 아마도 서해바다 저쪽 끝으로 검붉은 놀이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리라. 그날 그 시각에 고수부님은 바로 이곳, 우리 일행이 서 있는 오성산 초입에 도착했을 것이다. 용화동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이 기차를 타고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근처 어느 역(군산역이거나 개정역)에서 내려 이곳까지 왔을당신의 모습을 나는 생각했다. 한 여성의 몸으로 당신에게 붙여진‘크나큰 세 살림’을 맡아 감당하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터라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대흥리 첫째 살림 도장에서도 그랬고 조종리 둘째 살림 도장에서도 그랬고 용화동 셋째 살림 도장에서도 그랬듯이 믿었던 휘하의 간부신도들에게 배신을 당할 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인고의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더 이상 육신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 떠나왔으니까 수족인들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삭정이처럼 앙상한 몸. 이제는 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었다.
한 성도가 앞으로 와서 등을 내밀었다. 그 성도가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흥리 도장이나 조종리도장 시절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수부님을 모셨던 성도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성산 도장 가는 오솔길. 고수부님을 등에 업은 성도가 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두 걸음…. 고수부님을 등에 업었으나 새털같이 가벼운 당신의 육신에 그 성도는 온갖 회한이 사무치지는 않았을까. 그때 마을 사람들은 고수부님이 업혀서 올라가는 것을 보고“걸어서 올라가면 서로가 편할 텐데 다른 사람 힘들게 업혀가네”하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고수부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때 그 시절의 당신을 생각하면서 나는 주위 숲을 두리번거렸다. 가슴 저쪽 광활한 벌판에서 뜨거운 바람이 뭉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난 8년 동안 찾아 헤맸던 고수부님의 일생이 회한에 찬 까닭이다. 아아. 당신은 왜 그토록 모진 삶을 스스로 택하여 걸어야 했던가. 왜? 당신의 권능이라면 얼마든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을 텐데! 진정 왜? 그것이 당신이었다. 당신이 보여준 길이었다. 과연 거룩하지 아니한가.
좁은 숲 속 오솔길에는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좁은 경사로를 얼마나 올라갔을까. 마치 긴 동굴같은 숲속 길을 올라가는 동안 내 의식에는 계속 어수선한 상념들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다시 물었다. 수부가 무엇인가? 대답은 한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옥황상제의 반려자, 여성구원의 선봉장, 증산 상제님의 종통대권자, 후천 가을 대개벽기에 구원의 대도를 펼치게 될 종통연원자, 광구천하의 대도 살림을 맡아 여성 해원시대의 새 문화를 여는 천지의 여주인,‘ 해방과 자유의 첫 여인’으로서 큰 사역자, 남녀동권을 주창하는 여성해방가요 혁명가, 남녀동권시대의 우두머리 여성, 인류생명의 어머니, 천지의 어머니…. 고수부님에게 붙일 수 있는 호칭은 끝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거룩한 영광의 주인공이 또한 그렇게 모진 고난의 주인공이 되어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아아. 어머니. 결국에는 믿었던 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저기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되어 바로 이곳 심산유곡(深山幽谷) 구중심처(九重深處)로 들어와야 했단 말입니까. 인생의 한 겨울을, 저 춥고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한 겨울을, 눈이라도 쌓이면 인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저 위쪽 어느 숲 속에서 거미처럼 숨어 살았고, 결국 그곳에서 선화해야 했단 말입니까.
숲 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청아한 소리로 지저귀었다. 2000년 첫 답사 때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에 지나지 않았다. 2006년 답사 때는 콘크리트 포장이 되기는 했으나 좁고 울퉁불퉁한 것은 예나 다를 바 없는 산길이었다. 숲 속 위쪽 어딘가에서 목탁소리가 또록 또르르 들려왔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산속에서 인기척을 만나는 것보다 반가운 것이 또 있을까.
고수부님이 인생의 겨울철을 보냈던 오성산 도장이 있던 곳이다. 당시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오성산 도장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물론 도장 건물도 이미 남아있지 않다. 당시 도장터가 현재 암자로 변해 있는 절터인지 아니면 저 능선 너머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답사는 암자부터 시작되었다.‘ 성흥사(聖興寺)’였다. 깎아지른 듯 경사진 계단을 몇 개 밟고 올라서니 왼편으로 자그마한 법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2000년 답사 때는 공사 중이었다) 법당 처마 밑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주불로 모신 사찰 당우 중의 하나.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사찰의 중심이 되는 불전일 경우에는 보통 원통전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고수부님의 마지막 유적지에 관세음보살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는 것이 내게는 작은 위안이었다.
성흥사 경내 중앙에서 오른편에는 아마도 대처승이 살고 있는 듯 일반 가정집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요사(寮舍)가 삭막한 콘크리트 벽과 퀴퀴하게 먼지 묻은 합판 조각들을 드러낸 채 곧 쓰러질 듯 초라한 몰골로 서 있었다. 원통전 앞에서 요사 앞까지 이어진 마당은 수세미같이 좁고 길쭉했다.
오성산 도장은 고수부님이 옮긴 다음 해인 1934년 완공됐다. 풍수지리적으로 사자앙천형(獅子仰天型)이라고. 문자 그대로라면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 보는 형국이라는 뜻이겠다. 원래 이곳은 고수부님 도장이 있기 전부터 암자였다. 법당과 요사 사이에 서 있는‘성흥사연혁비(聖興寺沿革碑)’에 의하면 1844년 9월 9일 허경대사가 개산(開山)하였고 1898년 고청정심 보살이 중수하였다. 앗.‘ 연혁비’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법륜당’이라는 이름이 보였던 까닭이다. 누구인가.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금산사 미륵전 남쪽 보처불(補處佛)은 삼십삼천(三十三天) 내원궁 법륜보살(內院宮法輪菩薩)이니 이 세상에 고씨(高氏)인 나로 왔느니라. 내가 법륜보살로 있을 때 상제님과 정(定)한 인연으로 후천 오만 년 선경세계를 창건하기로 굳게 서약하고 세상의 운로에 맞춰 이 세상과 억조창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상제님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왔느니라.”하시니라. (11:20)
‘법륜당’은 고수부님의 불교식 당호(堂號)이다. 고수부님의 흔적을 발견한 나로서는 그나마 찾아온 반가움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도장은 다섯 칸 겹집 건물이었다고 한다. 나는 예순하고도 4년 전에 파란곡절을 뒤로 한 채 이곳에서 2년 동안 머물다가 선화한 고수부님을 숙연한 마음으로 떠올리며 아직도 어딘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 당신의 자취를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법당 건물을 몇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연혁비’뒤편‘산신각’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오성산 도장터 성흥사를 돌아본 나는 오른쪽 능선으로 갔다. 원통전에서 오성산 정상 쪽으로 50여 미터를 가면 봉우재다. 고수부님이 선화한 후 묻혔던 곳이다. 봉우재를 밟고 있는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차마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정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수부님이 공사를 보았던 옥녀봉에 섰다. 옥녀봉에 서서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 아래 저쪽에 고민환 성도의 손자가 살고 있는 성덕리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증산 상제님 어진과 고수부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 바로 그 집이었다. 멀리 뿌연 안개 사이로 금강을 막은 금강하굿둑도 보였다. 조금 전에 지나쳐 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시선을 고정했다. 산 아래에서 찬바람이 휙 불어왔다.
제34장 오성산‘오선위기’공사
“오성산은 동서양 기계통이니라. 또 오성산은 동서양 전기통이니 번개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리라. 오성산은 오선위기(五仙圍碁), 두 신선은 바둑 두고 두 신선은 훈수하고 갈 적에는 바둑판과 바둑은 놓고 간다.”(道典11:369:4~6)
오성산 도장에 도착한 다음 날 고수부님은 동지치성을 지냈다. 몸이 곧 쓰러질 지경이라고 해도 당신은 치성을 거르지 않았다. 이날 치성에 참석한 성도들은 용화동에서 고수부님을 모시고 온 김수응, 조학구 성도를 비롯해 수십 명 정도였다.
이로부터 태모님께서 오성산 도장에 은거(隱居)하시니 별다른 공사 없이 늘 도장에만 계시거늘 익산, 전주, 임피, 옥구 등지의 신도들이 종종 찾아와 문후 드릴 뿐이요 도장에는 고민환, 박종오, 이진묵, 고춘자, 이길수(李吉秀), 박종오의 아내 김종명(金鍾鳴) 등이 상주하며 태모님을 모시니라. 도장 살림은 민환과 종오가 내무를, 고찬홍이 외무를 맡아 유지하는데 살림이 어려워 어떤 때는 이진묵의 아내 고춘자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 태모님을 봉양하니라. (11:368)
오성산 도장으로 옮긴 며칠 뒤 고수부님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던 것 같다. 그날은 용화동 도장에서 겪었던 고초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고수부님은 “내가 너희 아버지 말씀을 안 듣고 가서 그랬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너희 아버지 말씀’이란 증산 상제님이 금구로 가면 (고수부님의) 몸이 부서질 것이라고 했던 말씀을 가리킨다.
얼마 후 고수부님은 공사를 보았다.“ 오성의 기령을 배합케 한다”고 하면서 먼저 오성산 기령을 통일하는 공사를 보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성산은 동서양 전기통이니 번개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리라. 오성산은 오선위기(五仙圍碁), 두 신선은 바둑 두고 두 신선은 훈수하고 갈 적에는 바둑판과 바둑은 놓고 가느니라.”
모든 천지공사가 그러하지만 핵심적인 짧은 몇 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진 고수부님의 공사가 난해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동서양 전기통’이란 무슨 뜻일까. 동서양을 환하게 불 밝히는 진원지로서 중심이 된다는 뜻은 아닐까.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내 세상에는 내가 있는 곳이 천하의 대중화”(2:36)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가 되는 고수부님 세상에는 고수부님이 머무는 곳이 곧 천하의 대중화로서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뜻은 아닐는지.
이 공사에서‘제주 번개를 잡아 쓰리라’는 것은‘제주 고씨’인 고수부님이 이 공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수부님을‘제주 번개’로 지칭한 것은 증산 상제님이었다. 고수부님은“수부 공사로 상제님과 만났을 적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노라. 수부, 잘 만났구나. 만날 사람 만났으니 오죽이나 좋을쏘냐.’하셨느니라”(11:20)고 회고했다.
주목되는 것은 다음 공사내용이다. 오성산이 오선위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여유는 없으나 원래‘오선위기 공사’는 1902년에 증산 상제님이‘회문산’에서 집행한 공사다. 그러니까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의 오선위기 공사의 재료가 되었던 회문산 오선위기의 다섯 신선[五仙]을 오성산의 다섯성인[五聖]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오성산 다섯 성인에 대해서는 뒤에서 얘기한다). 결론적으로 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오선위기 공사와 같은 맥락의 공사라고 할 수 있다.
해가 바뀌었다. 고수부님이 오성산 도장에 은거한 이후 맞이하는 첫 해다. 1934년 1월 13일, 고수부님은 박종오, 김수열, 채유중 성도를 불렀다.
“내가 오성산에 온 뒤로 몸이 부대껴서 편치 못하구나. 생각해 보니 상제님 영정을 모셔 오지 아니한 까닭이다.”
고수부님은 세 사람을 용화동에 보냈다. 용화동으로 간 성도들은 이성영을 만나“어진은 내가 모시리니 너희들은 어진을 개사하여 모시라”는 고수부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셔 왔다.
오성산 도장에서 고수부님은 주로 병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런가. 자신은 거동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주기 위해 쉴 틈이 없었다. 누구든 찾아와 질병의 고통을 하소연하면 금방이라도 쉬던 몸을 벌떡 일으켜 치유공사를 행하는 고수부님.
같은 해 9월 7일, 오성산 도장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증산 상제님을 모셨던 김경학과 김영학 성도였다. 대흥리 첫째 도장 살림 이후 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성도들이 고수부님을 찾아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저희들은 모악산 수왕암에서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수련을 행하던 중에 증산 상제님의 성령이 나타나서 수십 년 동안 수부님과 막혀 지낸 것을 꾸짖었습니다. ‘이 길로 가서 너희들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지난 모든 일을 풀고 이전 정의(情誼)를 다시 계속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노구를 이끌고 일동을 대표하여 왔사오니 이전 과실을 모두 용서하시고 함께 가시어 앞으로 사흘 동안만 수련 법석을 주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김경학, 김영학 성도는 고수부님 앞에서 깊은 회오의 눈물을 흘렸다. 두 노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는 고수부님의 마음도 울적해졌는가 보았다.“ 지난 일은 한갓 꿈과 같을 뿐이나 칠십 노인이 이렇듯 먼 길을 와서 간곡히 말하니 내가 비록 건강이 허락지 못할지라도 멀리할 수 없구료.”
고수부님은 두 성도들과 함께 수왕암으로 갔다. 오성산 도장에 온 이후 첫 외출이었다. 수왕암은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대원사 암자로서 모악산 정상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증산 상제님이 대원사 칠성각에서 수도를 하였을 때 자주 오르내렸던 암자로서 아직도 증산 상제님의 체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수왕암에는 박공우 성도가 주창하여 김경학, 김영학, 이성영, 김수응, 이중성(李重盛: 1897∼1958) 내외 등이 모여서 수련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고수부님은 수왕암에서 사흘 동안을 머물며 그들의 요청에 따라 수련공부를 주재하였다. 그때 김수응이 신력을 얻어 풍운조화를 자유자재로 일으켰다.
9월 11일 수왕암을 출발한 고수부님은 금산사로 갔다. 잠시 금산사에 들렀던 고수부님은 용화동 교단에 도착하여 이틀 동안 머물렀다. 굳이 용화동을 찾은 것은 개사한 증산 상제님 어진을 확인하고 중요한 당부의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수부님은 이상호·성영 형제를 불러“개사한 어진이 많이 틀렸으니 다시 개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오성산에서 올 때 가져온‘용봉기’를 꺼내어 손수 꽂아 놓고“이 자리는 용화 세존의 꽃밭이 되리니 사람을 잘 맞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용화세존이란 여기서 미륵불을, 그러니까 증산 상제님을 가리킴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틀 뒤 용화동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은 다시 먼 길을 떠나 오성산 도장으로 돌아왔다.
제35장 선화(仙化)
태모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10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통해 창생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어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한(恨)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라. (道典11:416:8~9)
그해 9월,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 전날이었다. 고수부님은 갑자기“이 자손들을 어찌하면 좋으리요. 죽게되면 저희들이나 죽지 애매하고 불쌍한 우리 창생들을 어찌하리”하고 애통해 했다. 잠시 후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동쪽으로 향하여 앉게 하고 주문을 읽으라고 하였다. 그리고“살려내자. 살려 내자”하고 부르짖었다.
장차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에 수없이 죽어갈 이 땅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공사이다(11:385). 물론, 다음 공사 말씀에 유의한다면 후천 가을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공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장차 괴질(怪疾)이 군산(群山) 해안가로부터 들어오느니라.”하시고“그 괴질의 기세가 워낙 빨라 약 지어 먹을 틈도 없을 것이요, 풀잎 끝에 이슬이 오히려 더디 떨어진다.”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소병, 대병이 들어오는데 죽는 것은 창생이요, 사는 것은 도인(道人)이니 오직 마음을 바르게 갖고 태을주를 잘 읽는 것이 피난하는 길이니라.”하시니라. (11:386)
증산 상제님이 짜 놓은 후천 가을개벽 도수가 세 벌 개벽이라고 할 때 첫 번째 개벽은 병란(兵亂, 전쟁), 두 번째는 병겁(病劫), 세 번째는 지축정립이다. 그러니까 이 공사는 병겁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후천 가을개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도전』7:1∼92 ;『개벽실제상황』;『 천지성공』등을 참조하시오).
계속되는 공사도 같은 내용이다. 그날 공사를 볼 때 고수부님은‘억조창생’을 부르며“불쌍하다! 불쌍한 놈만 죽게 생겼다”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잠시 후 담뱃대를 좌우로 휘두르며“살려 내자!”하고,“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공각(空殼)이요, 일월도 무용(無用)이다”고 부르짖듯 외쳤다.
그해 10월 초에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를 불러“초 엿샛날 치성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고민환이 무슨 치성이냐고 물었으나 고수부님은 그냥“서둘러 준비하라”고 할 뿐이었다. 고민환이 정성을 다 바쳐 치성 준비를 마쳤다.
10월 초엿샛날 치성을 봉행한 뒤 고수부님은 갑자기“을해년에 임옥에서 땅 꺼진다”고 고함치듯 말했다. 이 공사는 1908년 증산 상제님이“임옥에서 땅 빠진다”고 한 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구체적으로 고수부님 당신의‘선화치성 공사’다. 여기서‘을해년’이라면 다음 해인 1935년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수부님이 당신의 선화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잇달아 후천 가을개벽 공사를 집행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가을개벽이 시급한 과제이며, 인류의 어머니로서 단 하나의 창생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1935년이 왔다. 고수부님이 56세 되는 해다. [세계사 연표]는 1935년 그해를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짜 놓은 전쟁 도수의 두 번째인 총각판(1937년 7월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 국토에서 전개될 중일전쟁,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 독일·소련의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항복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폭풍전야의 한 해였다. 국내적으로 그해 1월 조선총독부는 종교계 인사들을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기왕에 추진해 오고 있던 (종교부흥을 통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이 목적이었다.‘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소위‘심전개발운동’이란 일종의 정신계몽운동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1937년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감행하던 시기에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는 황민화정책의 전단계로 입안된 이데올로기 통제책이었다. 여기에는 친일 종교인들이 대거 동참하였다.
고수부님의 그해는 역시 병자들 치유 공사로 시작되었다. 2월 3일 시두(천연두)에 걸린 김제군 용지면 예촌리에 사는 황경수, 같은 달 13일 예촌리 사람 황일봉의 모친, 3월 29일 임피 술산 문명수의 아들, 김제 장산리 사람 유호열과 유남열, 7월 보름날 폐병에 걸린 옥구군 대야면 고척마을 사람 김완산, 9월 초사흗날 이름도 모르는 급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김제군 백구면 가전리 사람 서해식을 치유해 주었다. 아무리 많은 병자들이 찾아와 호소해도 고수부님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면 오는 대로 반겨주고, 원하면 원하는 대로 해주고, 가면 가는 대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루 빨리 병으로 고통 받는 창생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고수부님은 당시 남모르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다. 오성산에 온 이후부터 그랬다. 고수부님이 고민환에게 늘“내 집 지어라. 내 집을 어서 지어라”고 재촉하는 것은 그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고민환은 영문도 모른 채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날 고수부님은,
“내 일이 좀 바쁘구나. 오늘은 내 집을 구경해야겠다”고 하며 도장을 출발하였다. 성도들이 모두 따라나섰다. 옥녀봉에 이르렀을 때 고민환이 고수부님의 건강을 염려하여“어머님, 여기에서도 다 보입니다. 여기서 보고 돌아가십시다”하고 만류하였다.
고수부님은“그럴까?”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옥녀봉에서 성덕리 마을까지는 1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다. 고수부님의 건강상태로는 그 거리조차도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옥녀봉에서 아랫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고수부님은 한창 짓고 있는 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발길을 돌리는 고수부님은,
“날짜가 급하다. 내 집 빨리 지어라”고 말했다.
고수부님은 지금 당신의 선화와, 선화 후까지도 예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해 10월에 보았던‘선화치성 공사’가 고수부님 자신의 선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보고 있는 공사는 선화 후에 머물 집에 대한 공사다. 고수부님의 공사 대로 선화 후에 (고수부님의)진영이 그려지게 되었고, 그 진영은 증산 상제님 어진과 함께 바로 그날 옥녀봉에서 내려다보며‘내 집’이라고 말한 바로 그 집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해 10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가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그 시기에, 고수부님이 공사를 보고 있는데 아직도 강남으로 떠나지 못한 제비 한 마리가 문밖에 날아와 재잘거렸다.
“오라. 너, 남주작(南朱雀) 왔느냐!”고수부님은 마치 사람을 대하는 듯 말했다. 또 한 마리가 와서 재잘거렸다.“ 오냐! 내가 이미 알고 있느니라.”
겉으로 보면 천지자연과 벗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있는 삶이다. 그러나 고수부님의 오성산 도장생활은 비참하기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극심해졌다. 고수부님의 오성산 도장시절은 도장 운영보다‘거미’처럼 은거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신도들의 왕래도 드물었다. 결국 오성산 도장은 유지 자체가 어려웠다. 고수부님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도장에는 양식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도장에서 부엌일을 담당하고 있는 성도가 아래 마을로 내려가 시주를 받아와 고수부님을 봉양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수부님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듯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나의 한(恨)을 다 이야기하자면…, 너희는 모른다”하고 회한에 찬 음결로 얘기하곤 하였다. 그럴 터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수부님의 생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한 많은 삶을 살았는지 논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수부님의 한을 다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고수부님은 고찬홍의 아내 백윤화(白潤華: 1895∼1972) 성도에게“27년 만에 근본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무슨 얘기인가? 『도전』에서는 이 27년에 대해‘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1909년부터 고수부님이 선화하게 될 1935년까지’라고 해석하고 있다.
고수부님이 오성산 도장에 온 지 2년이 되었다. 이무렵 고수부님은“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빨리 가야 너희들이 잘될 텐데. 너희들은 집안만 잘 지키고 있으라” 하고 말하곤 하였다. 그날도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향해 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내가 올 적에는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고 오리라”고 유언을 남기듯 말했다. 고수부님 자신이 다시 출세할 것을 예고하는 암시다. 증산 상제님도 어천 직전에 당신이 출세할 것을 유언하며 공사를 보았었다.
한 생애를 정리하는 사람은 사소한 곳까지 신경이 쓰이는가 보았다. 아니, ‘인류의 어머니’로서 후천 가을 개벽기에 죽어가게 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천지공사를 거의 다 보았다고 해도, 막상 인류를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 그리 자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해 10월 5일 부엌에 들어간 고수부님은 팔을 척척 걷어올리고 구정물통에 손을 쑥 집어넣어 휘휘 저었다.
“밥티 하나라도 조심을 해라. 사람이 먹는 것이란 천지가 안다.”고수부님이 부엌에서 일하는 김종명(金鍾鳴, 1880∼1977) 성도를 향해 말했다. 나뭇간으로 가서 땔나무를 돌아보던 고수부님은“야야, 나무도 아껴서 때라”하고 옆에 있는 이길수 성도의 등을 토닥거려 주기도 하였다.
밖으로 나온 고수부님이 여러 성도들에게 말했다.
“차후에 형편이 어려우면 너희들끼리 앉아서 너희 아버지와 나를 위해 보리밥 한 그릇에 수저 두 벌만 놓아도 나는 괜찮느니라.”
이어 성도들에게 목욕물을 데우라고 하였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성도들은 그날따라 고수부님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평소 찬물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몸은 비록 망가질 대로 망가진 채로 은거 중이었으나 성도들로서는 당신이 선화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목욕을 끝낸 뒤에 고수부님은,
“새 옷을 다 내놓으라”고 하였다. 일전에 성도들이 해 올린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요에 누운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를 불러 머리맡에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어 시간 후에 고수부님은,
“너희들이 마음만 잘 고치면 선경세계를 보게 될 것이언만…, 선경세계가 바로 눈앞에 있건만….”혼잣말처럼 말하고, 다시“잘 꾸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고민환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고수부님은“글쎄 말이네!”라고 할 뿐이었다. 이어서“내 자리 옆에 새 요를 하나 더 깔아라”고 한 뒤에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오시면 나도 올 것이요, 내가 오면 상제님도 오시리라”고 말했다. 물론 당신의 선화 이후 출세할 것을 다시 얘기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고수부님은,
“나의 머리에 손을 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증산 상제님 어진을 가리키며“너희 아버지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
세 번 거듭 말한 뒤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수부님이 선화한 것이었다.
태모님께서는 천지신명과 억조창생의 어머니로서 10년 동안의 천지공사를 통해 창생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어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한(恨) 많은 세월을 뒤로하신 채 천상으로 떠나시니 이 날은 환기(桓紀) 9134년, 신시개천(神市開天)5833년, 단군기원 4268년, 을해(乙亥: 道紀65, 1935)년 10월 6일 축(丑)시요, 서력기원 1935년 11월 1일이니, 이 때 성수(聖壽)는 56세이시니라. 이 날 태모님을 곁에서 모신 성도는 고민환, 전선필, 박종오, 이길수 등이니 날이 밝아 수의를 수습하매 태모님께서 이미 횃대에 걸어 놓으셨더라. (11:416)
수석성도 고민환은 각처 성도들에게 고수부님의 선화를 알리는 부고를 보냈다. 고찬홍, 이진묵, 전선필, 문명수, 문기수, 이중진, 유일태, 오수엽, 조학구, 김수열, 김내언, 이재균 성도들이 달려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고수부님을 보고 성도들은 다만 잠자는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나흘 뒤 11월 9일, 성도들이 입관하려고 하는데 고수부님의 성체가 방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고민환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지난날 고수부님과의 사무친 정이 솟구쳐 올라 서럽게 통곡하였다. 도장 안팎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한참 후에 성체를 간신히 떼어 입관을 한 다음 오성산 북변(北邊)에 있는 봉우재에 장사를 지냈다.
제36장 선화 그 후
“이 뒤에 병겁이 군창(群倉)에서 시발하면 전라북도가 어육지경(魚肉之境)이요 광라주(光羅州)에서 발생하면 전라남도가 어육지경이요 인천(仁川)에서 발생하면 온 세계가 어육지경이 되리라.”(道典7:41:1~3)
고수부님이 선화한 지 여섯 달 뒤인 1936년 윤3월,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사망했다. 1932년 3월에 고수부님이‘선도 오세요 악도 오세’라고 하며 공사 본 대로 5년 만에 차경석이 사망한 것이었다. 그해 4월(양력), 일제는 전시체제에 따른 사상통제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증산계 교단운동을 준민족운동으로 규정하고 대폭압 명령을 내렸다. 대폭압의 철퇴는 교주 차경석이 사망한 보천교에서부터 가해졌다. 정읍경찰서장이 무장 경관대를 끌고 와 대흥리 본소를 접수하고 보천교 해체를 명령하는 한편 이후부터 2인 이상 집회금지와 1원 이상 금전수합금지 등을 엄명하였다. 또한 간부들을 소집하여 보천교 재산정리에 관한 전권을 빼앗아버렸다. 대흥리 보천교 본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보천교 간판은 뜯겨져 나갔고 교무행정은 금지 당했다.
보천교뿐만이 아니었다. 정읍경찰서장은 또한 무극대도교주 조철제를 소환하여 교단해체와 재산정리에 관한 전권을 강제 위임받았다. 귀가조치를 당한 조철제는 가족들을 거느리고 밤중에 줄행랑을 친 뒤 한동안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같은 시간, 김제경찰서장은 용화동‘동화교’간부들인 이상호·성영 형제, 임경호 등을 소환하는 한편, 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성도들의 교단인 증산대도교주 안내성, 태을교주 박공우 성도 등을 불러 교단해체와 포교금지를 명하였다. 이로써 초장봉기지세로 일어났던 크고 작은 교단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 지난 35년 동안 이 땅을 강점했던 일제가 물러갔다. 48년에는 비록 남한 단독이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50년에는 저 비극적인 민족상잔의 6·25전쟁이 터졌고 많은 원한이 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독재정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것을 깨우쳐 준 것은 성난 학생들이었다. 60년 4·19는 이 땅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위대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다. 61년 5월 16일 한밤중에 일단의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넘어와 장면정권을 무너뜨렸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두 달 뒤인 7월 25, 26일 오성산 기슭 봉우재에 고이 잠들어 있던 고수부님의 성골(聖骨)이 사라지는 해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찍이 증산 상제님의 성골이 도굴당한 이후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터에 고수부님의 성골 또한 도굴당한 것이었다. 물론 고수부님의 성골을 모시고 있으면 도통을 할 것이라고 믿는자들의 소행일 터였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인류의 어머니 고수부님은 살아생전에도 믿었던 신도들로부터 그토록 철저한 배반을 당하곤 했었는데 선화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선화하는 순간까지 후천 가을개벽의 폭풍우 속에서 단 한 명의 인명이라고 건지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
가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는가. 고수부님 도장의 수석성도 고민환도 이제는 많이 늙었다. 고수부님 성묘를 남모르게 관리하다가 뜻밖에 도굴을 당한 75세의 백발노인 고민환 성도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고수부님의 성골을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분노와 번민을 거듭하던 끝에 생존성도들과 상의하여 분묘도난신고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9월 20일 이경 초에 고민환 노인이 홀로 앉아 번민에 빠져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고수부님이 생시와 같이 나타났다.
“정읍에 있을 때의 상제님 일을 생각하라.”
고수부님이 말했다. 고민환은 반갑고 죄송한 마음과 함께 감개가 무량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고수부님은“너무 고심치 말라”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고민환은 다시 도굴한 자를 은밀히 찾아 나섰다. 서백일(徐白一) 교단의 최정현(崔正玄)이라는 자가 의심스러웠다. 고민환은 최정현의 연락처를 추적했다. 군산에 사는 서명옥(徐明玉)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고민환은 곧장 군산으로 달려갔다. 최정현은 이미 행방을 감추었다. 고민환은 오성산 도장의 신도 전세윤에게 연락하여 은밀히 탐색하라고 하였다.
며칠 뒤 전세윤이‘최정현이 군산에 와 있다’고 알려왔다. 고민환은 서명옥의 집으로 쫓아가 최정현과 맞닥뜨렸다. 고민환 일행이 죄상을 추궁했다. 최정현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일행은 최정현을 앞세우고 고수부님 성골이 암장된 곳으로 갔다.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에 있는 서백일 교단 근처였다. 내막은 서백일이 도통할 욕심으로 최정현을 보내 성흥사 주지에게 돈을 주고 고수부님 묘소의 위치를 알아내 도굴하여 그곳에 암장한 것이었다.
아아. 어머니!
고수부님 성골 앞에 엎드린 늙은 고민환 노인은 회한이 사무쳤다. 이 때 성묘에 참배한 사람은 고민환을 비롯하여 전선필, 전세윤 성도들이었다.
그날 고수부님이 선화하였던 오성산 도장터를 답사한 뒤 우리 일행은 성흥사를 내려와 오성산 정상으로 향했다. 성흥사 초입 큰골마을에서 왼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를 가니 정상으로 오르는 도로가 나타났다. 정상까지 자동차 두 대가 겨우 피할 수 있는 포장도로가 나사못처럼 뚫려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제법 넓은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정면으로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이고 바로 옆에‘오성정(五聖亭)’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3층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었다. 휴게소와 관리실을 겸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3분의 2정도 오르니 오른편에는‘오성대제봉행기념비’(1992. 10. 4)가 서 있고 왼편에는‘오성(五聖)의 묘비명’(1995. 12. 8)이 서 있었다. 나는 후자 앞에 섰다.
때는 삼국시대였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을 맺고 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 오성산 인근의 금강하구에 도착하였다. 안개가 자욱이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가운데 소정방은 겨우 10킬로를 전진하였으나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당시 소정방이 헤매고 있었던 곳이 바로 우리 일행이 서 있는 오성산이었다. 산속에서 한참 동안 헤매던 소정방은 이곳에서 한가로이 장기(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도 전한다)를 두고 있는 다섯 노인을 발견하였다.
“사비성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느냐?”
“내 나라를 침공하려는 적장에게 어찌 길을 일러 주겠는가?”노인들이 준열하게 꾸짖었다.
분개한 소정방이 장검을 뽑아 그 자리에서 다섯 노인의 목을 베었다. 아무리 무도한 자라고 해도 순식간에 죄 없는 노인들의 목숨을 다섯씩이나 앗아간 소정방은 썩 개운치가 않았는가 보았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물러갈 때, 소정방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섯 노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
죽인 자가 지내준 장사가 제대로 이루어졌겠는가. 훗날 백제의 후예들은 다섯 노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산 정상에 묘를 나란히 썼다. 이름 하여‘오성인묘(五聖人墓)’라 칭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오성산(五聖山)’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묘비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는 다시 정상으로 올라갔다. 정상에는‘오성인지묘(五聖人之墓)’라는 커다란 비가 서 있고 뒤로 다섯 기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맨 뒤에는‘오성산왕대신(五聖山王大臣)’이라는 비석이 서 있었다. 고수부님이 천지공사를 볼 때 신위(神位)를 설치했던 바로 그 오성위요, 산신이다. 이미 지적했다시피 이곳 오성산은 고수부님과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증산 상제님이 행한 중요한 천지공사가 몇 차례에 걸쳐 행하여진 곳이다. 고수부님 일대기‘거룩한 생애’를 집필하는 나로서는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마지막 코스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었다. 고수부님의 출생지인 전남 담양 성도리에서 출발하여 당신이 선화한 이곳 오성산 도장까지 나는 돌고 또 돌아왔다.
오성산을 답사한 우리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오성산 정상에서 떠날 줄 몰랐다. 정상에서 서해가 보이는 쪽은 약간 비탈진 잔디밭이었다. 일행은 잔디밭에 앉아 망연히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주위에서 패러글라이더를 즐기는 젊은 남녀들이 한가롭게만 보였으나 우리 일행의 관심은 그들을 벗어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금강을 막아 놓은 금강하굿둑이 보이고 강 왼편으로는 군산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자세하게 얘기할 여유는 없지만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가 현실화된 것이 바로 금강 하굿둑이다.
병오년 여름 군창에 머무르실 때 하루는 금강 하구에 가시어 서천 쪽을 향해 물 위로 걸어가시니 갑칠이 상제님 옷자락을 잡고 따르니라. 이 때 갑칠이 보따리 때문에 좀 방심하여 옷자락을 느슨히 잡으면 목까지 물속으로 빠지고, 꼭 잡으면 다시 물 밖으로 나오더라. (5:144)
이른바‘금강하굿둑 공사’이다. 문제는 금강하굿둑이 생긴 이후의 일이다. 우리 일행의 시선이 금강하굿둑과 금강, 그리고 군산시에 정지한 채 오성산 정상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었다. 앞에서 고수부님은‘장차 괴질이 군산 해안가로부터 들어온다’고 하였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후천 가을 대개벽 중에 병겁‘개벽’이 바로 이곳 군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괴질의 기세가 워낙 빨라 약 지어 먹을 틈도 없고 풀잎 끝에 이슬이 오히려 더디 떨어진다.’고 했다. 증산 상제님은 바로 그‘지구촌 대병겁의 전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이 있다.
또 말씀하시기를“이 뒤에 병겁이 군창(群倉: 군산-인용자)에서 시발하면 전라북도가 어육지경(魚肉之境)이요 광라주(光羅州: 광주·나주-인용자)에서 발생하면 전라남도가 어육지경이요 인천(仁川)에서 발생하면 온 세계가 어육지경이 되리라. 이 후에 병겁이 나돌 때 군창에서 발생하여 시발처로부터 이레 동안을 빙빙 돌다가 서북으로 펄쩍 뛰면 급하기 이를 데 없으리라. 조선을 49일 동안 쓸고 외국으로 건너가서 전 세계를 3년 동안 쓸어버릴 것이니라. 군창에서 병이 나면 세상이 다 된 줄 알아라. 나주에서 병이 돌면 밥 먹을 틈이 있겠느냐.”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그러면 천시(天時)인 줄 아소.”하시니라. (7:41)
병겁이 군산에서 발생하여 이레 동안을 빙빙 돌다가 서북쪽 인천으로 뛰게 되고, 그로부터 49일 동안 조선에서 창궐한 뒤에 외국으로 건너가 전 세계를 3년 동안 휩쓸게 된다는 것이다. 아아.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를 끝낸 나는 지금 후천 가을개벽 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가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제 오성산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웠다. 내 의식에는 다시 고수부님으로 가득 차 올랐다.
이름 없는 한 여성에서 수부 우두머리 여성에 이르기까지 파란 많은 일생을 살았던 고수부님. 한 여인이로되 어머니요, 한 어머니로되 온 인류의 어머니요 천하 창생의 어머니가 되는 당신을 나는 생각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온 인류의 어머니로서 세상에 온갖 질곡의 삶을 홀로 감내하면서 피와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살아오면서 천하를 호령하였던 여인이여.
태모 고판례 수부님.
한 여자의 일생을 살면서 당신은 온갖 역경과 파란많은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알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인간 고판례의 삶은 당신이 회고한 바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한의 세월이었다. 원도 많고 한도 많았던 파란곡절을 겪으면서도 항상 천하창생만을 염려하였던 고수부님. 인류 진멸의 위기인 후천 가을개벽을 맞이하여 인류의 어머니, 온 생명의 어머니로서 후천 가을개벽의 현장에서 단 하나의 목숨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고수부님은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천지의 어머니로서 정녕 혁명적인 삶을 살다가 갔다. 우주 주재자 증산 상제님이 도수를 붙여 놓은 그‘크나큰 세 살림’도장을 주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당당하게 한 시대를 살면서 후천대도를 열었던 고수부님은 그렇게 인적 드문 오성산 골짜기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고수부님이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수부’로서 고난과 역경의 시절을 살다가 갔는데, 우리는 여기서 왜 그래야만 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녕 왜 그러한가. 결론부터 얘기한다면, 우리는 먼저‘고수부님이 암울한 시대를 산 여성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일차적인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5백년 조선왕조는 봉건주의적 철의 예교질서 아래 숱한 조선의 딸들을 한 많은 일생으로 묶어 놓았다. 고수부님은 이른바 구한말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끝머리에 인간으로, 여성으로 왔다. 우주사적으로 선천/후천의 과도기에 인간으로 왔던 고수부님은 문명사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전근대/근대의 과도기를 살았다. 그래서 그가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가려고 할 때 늘 전자가 발을 묶고 앞길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 다음은, 고수부님이 온 인류를 품어 안은 자애로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만약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후자로 나아가려고 할 때 전자가 발을 묶으려 든다면 당장 벼락신장을 불러 번갯불로 혼구멍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고수부님의 생애를 정리하는 여정에 동참했지만, 고수부님이 벼락신장을 불러 벼락을 쓴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고수부님은 엄한 아버지와 달리 자애로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온 인류의 어머니’,‘ 온 생명의 어머니’,‘ 천지의 어머니’인 당신은 벼락신장을 불러 불벼락을 내리기 전에 모성애가 먼저 앞을 가려 사랑으로 감싸 안았던 것이다. 결국 고수부님이 모진 풍파를 헤치며 살아온 그 숱한 역경과 고난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크고 거룩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후천 정음정양의 한 전범으로서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요, 종통대권자가 되어 여성해방의 선봉장으로서 천하를 호령했던 우두머리 여자.
우주의 가을을 맞아 그 풍성한 추수를 하기 위해 온몸을 희생했던 가을의 여인.
한 여인으로서 만고풍상을 다 겪는 역경의 운명을 살았으나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던 고수부님은 정녕 우두머리 여인이었고, 가을의 여인으로서 당신에게 맡겨진 종통대권 수부사명을 완벽하게 성사했다. 고수부님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으나 후천 가을 대개벽 앞에 몸 바쳐 천지공사를 집행하고,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온 몸을 불태웠던 숭고한 삶이었다. 또한 상제님의 반려자요, 천하창생의 어머니로서 후천대도를 열고, 광구천하를 위해 영혼까지도 다 바쳐 버린 거룩한 삶이었다. 만년에는 오성산 기슭 한편 도장에서 천지자연과 벗하며 끝없는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 속에서도 마지막 그날까지 고수부님은 창생을 구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그날 황혼 무렵이다. 서편 멀리 지평선 위로 붉은 낙조가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땅은 불기둥처럼 타오르는 낙조로 이어져 있었다. 저녁놀이지고 어둠이 서서히 밀려올 무렵 우리 일행은 오성산 정상에서 내려왔다. 걸음은 여전히 천 근 만 근 납덩어리를 매어 놓은 듯 무거웠다. 일행이 탄 차는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출발했던 대전을 향해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