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윗 세대의 기억으로는 호치민은 빨갱이의 수괴요, 베트콩의 대부라고 그를 기억 할 것이
다.
제국주의의 억센 칼날에 맞선 민족의 지도자요, 어진 어버이로써 호선생님으로 지칭되는
위대한 국부인 베트남의 스승이신 그 분은, 한편으론 학자이셨으며 불굴의 신념가 이셨다.
그런 호선생이 평생 곁에 두고 사랑 하셨던 저서가 있었으니 바로 목민심서다.
한자라는 동아시아의 공통코드를 통해서 다산의 필생의 역작이 먼 나라 베트남의 지도자가
한반도와 정신적 교감을 나눈 것이다.
현실에서는 미국의 용병인 한국군이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유당이 온전히 천주교인 이었는지는 다른 의견이 오히려 많다.
학문적인 관심을 지녔던 것은 확실하나, 믿음을 지닌 신자로서 보기에는 그의 저술에서나
생활이나 시에서 보이는 다산의 모습은, 당 시대의 모든 것에 치열한 관심을 보이는 뛰어난
학자이며, 경세가이며, 생활인 이었을 뿐, 일부 종교인의 억지스런 끼워맞춤에는 적당치 않아
보인다.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전은 천주교인이라는 설이 정설이지만, 그도 천주교인들과 깊은 교류
를 가졌으나 목숨을 걸 정도로 막무가내의 신앙을 지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산이 신앙을 지닌 진짜 신자도 아니면서 유배를 가고 결국은 목숨까지 잃어버리는
형의 상황에 비통함을 호소한 글이 보인다.
강진 다산 기슭에는 여유당의 체취가 많다.
바로 밑 동네가 처가였고, 읍내의 학동들이 다산에게 글을 배울려고 찾아 왔으며, 인근의 젊
은 선비들이 드나들었고, 스님들도 깊은 교류를 하였다.
감옥에 갖혀 꼼짝 못하는 지금의 정치범들과는 다른 환경이었으며, 조선의 유배 생활이 경우
에 따라서는 대 학자를 키우는 요람의 역학을 했다는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관리로 있었으면 조선 초의 황희에 버금 갈 인재 였으나, 그 역량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주머니의 송곳처럼 결국은 학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이 나라 이 민족의 자랑인 그 분을
흠모하며, 어줍잖은 단상을 올려본다.
첫댓글 아마도 다산을 한꺼번에 얘기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정치 경제 사회 문화별로 나누어 보면 더 쉽게 이해되겠지요...다산의 사상이 이 후 상공업을 중시하는 북학파들과 연계된다는 것이 중요한데 아쉽게도 이들도 사농공상의 계급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나봅니다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일본도 서양의 흑선을 통해 강제적으로라도 기술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한반도및 동남아 중국도 점령하는 2차대전 당시에 세계5대강국이었지요.....지금은 더한 첨단 기술전쟁 시대입니다...실사구시가 어느때 보다 필요한 시기라 생각합니다...
다산은 큰 산 이지요. 세목별로 나누어 얘기해도 쉽지가 않는데 전체를 논함이 가당치 않지요. 하지만 개인이 가진 느낌은 올려도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