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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대 |
1500년대 |
16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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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安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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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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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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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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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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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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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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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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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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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좌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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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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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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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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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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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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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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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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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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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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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척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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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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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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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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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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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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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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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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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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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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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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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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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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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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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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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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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葳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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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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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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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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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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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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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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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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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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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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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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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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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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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慶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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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
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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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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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澍盆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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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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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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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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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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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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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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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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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 |
갑 |
중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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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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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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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昌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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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
자 |
종 |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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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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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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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德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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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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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
사 |
반 |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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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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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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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慶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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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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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 |
정 |
사 |
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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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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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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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獻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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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 |
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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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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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
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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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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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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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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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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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
觀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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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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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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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
斗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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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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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과 분홍은 사화(士禍)시대, 붉은 색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의미하고 의미한다.
당시 별제공 금성공,이천공,판관공제위의 연대는 계보불록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후 삼척공파간의 공동으로 피란에 대응한 시기를 조감해 보는바 (덕창)공과 경원공 재세시 삼척공파 (창정)공이 문경금성산에 피란하였다는 기록과 일치하다. 관찰사(관징)공이 경상관찰사재임시 예천송곡에 별사를 기증했을 당시는 별좌공파의 (경원)공과 (헌징)공 재세시다.
十二世 諱 葳壽 계보> 延安君(仁文)>_별좌공 (垙)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배위는 인동장씨(仁同張氏 父宣略將軍 仲羽 祖 延福君 安襄公 末孫,曾祖 縣監 安良, 外祖 申琥 本貫殷豊)시다.
자는 梅村公(愈) 栗里公(熹) 訥軒公(應)이며,
여는 玄璞(昌原人 吏曹判書 錫圭의 玄孫)邊克寧(原州人 父 參奉 璫) 金訒(光山人) 孫溥(平海人 文 參校)이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 (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명 송곡동 사고막골)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갖이시고 세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공의 맏 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
十三世 諱 愈 계보> 延安君(仁文)>)별좌공 (垙)>-교위공(葳壽)
자는 자흠이요 호는 매촌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율리, 눌헌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생원진사에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문인으로 나아갔다.
도산문현록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연안인인으로 예천출생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현감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히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군정재령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설제위서충모시석)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에 움직일 수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토적을 잡아 일군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김수)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자는 자수인데 첨추(첨정벼슬과 중추부사를 지내신)인문공의 증손으로 수를 72세라“ 이록한바 있고 또한 ”태천현감 재임시에 렴사 한음(문익공 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표리의대)을 하사하였다”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안집사 백암 김인(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전현감 이유로하여금 예천을 지키고 토적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국조실기에도 “용궁현감 이유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예천읍지(나은 이동표찬)에는 ” 이유는 의병장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없어 그의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조선 명신록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였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재야인재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襨)를 받았다.
무릉정 현판을 걸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분 아우님,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訒 鄭元黙 李景嶔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 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 (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아우분을 합하여 수물한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저 있어 오늘 날 까지 보존되어 왔다.
十三世 諱 熹 계보> 延安君(仁文)>별좌공 (垙)>-교위공(葳壽)
十三世 諱 應 계보> 延安君(仁文)>별좌공 (垙)>-교위공(葳壽)
김성근 [金聲根, 1835~1918] 자 중원해사안동
본관 안동(安東). 자 중원(仲遠). 호 해사(海士). 1862년(철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때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901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홍문관학사를 지냈으며, 1902년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자작(子爵)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미남궁체
미불(미불 [米芾, 1051~1107]
자 원장(元章). 호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기행(奇行)이 심했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등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그림은 동원(董源)·거연(巨然) 등의 화풍을 배웠으며, 강남의 운연(雲煙) 어린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기 위하여 미점법(米點法)이라는 독자적인 점묘법(點描法)을 창시하여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왕몽(王蒙) 등 원말 4대가와 명(明)나라의 오파(吳派)에게 그 수법을 전했다.
아들 미우인(米友仁)에 이르러 성립된 이 일파의 화풍을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한다. 북송 말의 회화사상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화사(畵史)》 외에도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서사(書史)》 《보진영광집(寶晋英光集)》 《해악명언(海岳名言)》 등의 저서가 있고, 《초서9첩(草書九帖)》 《행서3첩(行書三帖)》 등의 작품이 있다.
2006년 2월
延安李氏
(地部)
丙戌 迎春
李 觀 熙 編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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