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초강력 기대작 프로젝트 엿보기 (출처; 씨네21)
★초특급 강자들, 초강력 귀환★
2003년, 한국영화는 다시 춘추전국시대다.
최근 몇년간 급변한 영화시장이 알려준 “불변의 흥행공식은 없다”는 교훈 탓이다.
제작비 50억원을 훌쩍 넘는 블록버스터들이 연달아 실패하고
<집으로…> <폰> <몽정기> <색즉시공> 등 적은 예산의 영화들이 예기치 못한
성공을 거둔 지난해는 2003년을 더더욱 예측불허로 만들고 있다.
바야흐로 하나의 유행이나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할 수 없는, 다양한 영화들이
관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춘추전국의 혼란 속에도 중량감이 느껴지는 발걸음은 분명 존재한다.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강우석, 강제규 두 감독의 신작.
충무로 상업영화의 쌍두마차인 그들은 각각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로
흥행감독의 자존심 대결을 벌인다. 설경구의 캐스팅이 확정된 <실미도>는
3월에 첫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며 장동건, 원빈 주연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1월10일경 크랭크인한다.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김성수, 곽경택, 이재용, 임상수, 정지우, 봉준호,
류승완, 김태균, 민병천, 곽재용, 장윤현, 윤종찬, 양윤호 등 주목할 만한 감독들도
올해 신작을 공개한다.
이중 박찬욱의 <올드 보이>, 김성수의 <영어완전정복>, 곽경택의 <똥개>,
류승완의 <마루치 아라치>, 김태균의 <조선의 주먹> 등은 2003년 봄까지 크랭크인에 들어갈 영화들.
데뷔작 가운데는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김성호의 <거울 속으로>, 오종록의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등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영화는 대체로 2003년 상반기에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외화는 올해도 블록버스터 속편들이 많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5월 말,
<매트릭스3 레볼루션>이 12월, <터미네이터3: 기계들의 반란>이 8월,
<엑스맨2>가 5월에 관객과 만날 예정.
이 밖에 <미녀 삼총사> <툼레이더> <나쁜 녀석들> 등이 2편을 선보인다.
새로운 프랜차이즈 가능성이 높은 영화로는 국내에 7월에 개봉할 예정인
리안의 <헐크>를 들 수 있고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림웍스의 <신밧드>가 대기 중이다.
이런 할리우드 블럭버스터 외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폴 슈레이더의 <엑소시스트4>, 에릭 로메르의 <삼중간첩>, 시노다 마사히로의 <스파이 조르게> 등도 각 나라에서 올해 선보일 기대작들이다.
관객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 이들 영화 가운데 막 공개된 한국영화 5편과 외화 12편의 청사진을 펼쳐보며 2003년 영화계의 미래를 점쳐보자.
☆한국 영화 5편
1.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2. 김성수 감독의 <영어 완전정복>
3. 곽경택 감독의 <똥개>
4.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
5. 김태균 감독의 <조선의 주먹>
오래 전 박찬욱 감독이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봉 감독은 일본만화 <올드 보이>가
재밌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올드 보이>를 재밌게 읽었다.
얼마 지나 박 감독이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만들려고 알아봤더니,
며칠 전에 봉 감독이 판권을 사갔간다(<날 보러와요>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다).
“이럴 수가!” 조금 더 지나 박 감독에게 <올드 보이>를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복수는 나의 것>을 마친 뒤였다.
“복수할 기회다!”
멀쩡한 20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어딘지 모를 건물 한구석의 4평 남짓한 밀실에 갇힌다.
조직폭력배가 의뢰인이 원하는 기간만큼 사람을 잡아다 가둬놓고 징역살이를
시키는 것이다. 남자는 의뢰인이 누군지, 왜 그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게 10년을 갇혀 있다가 마취된 상태에서 공원에 버려진다.
‘출소’한 남자는 복수를 다짐하며 의뢰인을 찾아 나선다. 의뢰인쪽에서도
남자를 놔두지 않고 생사를 건 게임을 걸어온다. 영화는 여기까지의 틀거리를
만화에서 빌려온다. 그러나 의뢰인이 남자에게 갖는 원한의 정체, 의뢰인과 남자의 관계,
캐릭터의 특징, 세부 디테일과 대사가 모두 바뀐다.
박 감독이 이 만화에 매료된 건, 미스터리스릴러에 더할 나위없이 적합하면서도
사람에 대해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설정이었다. “주인공이 영문을 모른 채 갇히니까
누가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는지 미치도록 궁금해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낸다.
그런 상황이면 인생을 돌이켜볼 거다. 인생을 복습하면서 내가 남에게 상처준 일이 있는지,
시시한 것부터 큰 것까지 다 꼽아볼 거다. 그 설정이 좋았다. 그처럼 처절하고
절박한 상태에서 회고하고 반성할 기회가 인생에 잘 주어지지 않는데, 타의에 의해 생긴 거니까.”
언뜻 보면 <올드 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차갑다. 이런 식의 대립에 타협이나 절충의 여지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박 감독은 <복수…>와는 다를 것임을 강조했다.
“나는 <복수…>가 유머러스한 영화라고 말해놓고도 완성한 뒤 처음 봤을 때
너무 냉정해서 부담스웠다. 이번에는 관객이 인물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함께 사건에 부닥치고 해결해나가는 영화를 해보려 한다.”
만화에선 의뢰인의 정체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박 감독은 관객이 엉뚱하다고 느낄 정도로 의뢰인의 정체를 빨리 폭로할 생각이다.
“‘후더닛’이라는 말처럼 대개의 스릴러는 범인이 누구냐를 마지막에 밝히지만,
이 영화에선 ‘왜’를 의문의 핵심으로 가져가면서 마지막에 충격적인 반전을 줄 거다.”
시점을 의뢰인쪽으로 바꿔놓고 보면 ‘왜’의 문제, 즉 원한의 정체는 매우 중요해진다.
다른 사람을 10년간 가둬놓게 하고, 그뒤에도 게임을 걸어오는 집요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만화는 그 의뢰인이 어릴 때 겪은 상처에서
해답을 찾지만, 박 감독은 좀더 넓게 보고 있는 듯했다.
“그 의뢰인이 만화처럼 남자의 동창일 수도 있지만, 전우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일 수도 있다.”
스타일은 고전적인 필름누아르에 가깝게 가되, 자주와 보랏빛 위주의 강렬한 색상을
선보일 계획이다. 2003년 4∼5월 크랭크인, 가을 개봉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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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뜨거운 배우
“<복수…>는 온도가 낮지만 <올드 보이>는 높을 거다. 그래서 배우도 냉혈동물 송강호에서 뜨거운 최민식으로 간다.”
<올드 보이>는 <복수…>처럼 “배우를 멀리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밀착해서 감정의 격렬함을 세세하게 중계”할 예정이다.
영화에서 최민식은 오래 갇혀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박 감독은 그에게 “강재로 등장해서 박무영으로 퇴장”할 거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최민식의 애인이 돼 그를 돕는 20대 초반 여자 역은
오디션을 통해 뽑을 방침.
“심사위원들을 배우로 구성하고, 감독 중에는 ‘소녀에 일가견이 있는 ’(<장화 홍련>의 소녀배우들을 뽑았다는 점에서) 김지운을 참가시키려고 한다.”
악역, 즉 의뢰인 역은 스타로 할지 덜 알려졌어도 연기력이 있는 배우로 갈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다.
★김성수의 <영어 완전정복>
ㅡ영어로 사랑할까요?
작금의 세계화 시대를 맞아, 영어는 단지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가리키진 않는다.
영어는 동아시아 변방에 사는 보통 사람에게도 생존을 위한 구명대요,
교양을 증명할 수 있는 자격이며, 지위를 업그레이드하는 연료로 받아들여진다.
스물 몇해를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영어가 자신의 삶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 없던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영주 또한 이 영어의 ‘광풍’을 피해갈 수 없다. 동장님의 ‘세계화 시대의 공무원론’에 이끌려 억지로 영어학원에 등록한
영주는 영어에 관심도, 실력도 없는 탓에 학원생활이 괴롭다.
그러던 그녀에게 서광이 비치니, 난생처음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남성
문수를 만난 것. 천성이 바람둥이인 문수의 의례적 행동을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착각한 영주는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영어에 매진한다.
영어를 매개로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을 로맨틱코미디로 담는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영어 콤플렉스를 통렬하게 부수려는” 김성수 감독의 바람을 담고 있다.
“언어나 사랑이나 결국 마음을 활짝 열 때 진정으로 소통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연출을 결정한 뒤로 김성수 감독은 주위의 삐딱한 시선을 느끼고 있다.
‘김성수가 무슨 로맨틱코미디냐’는 의아함과 불만, 그리고 어이없음이 뭉뚱그려진 반응 때문이다.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를 통해 남성들의 거친 세계를 담아온 그의 영화여정을 생각해보면, 여성적 시선이 두드러질 이 영화는 주인을 잘못
만난 건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처음 고민이 됐다. 하지만 뭔가 새롭고 다른 것을 할 때 신이 날 것 같았다.”
또 느린 템포의 멜로영화는 몰라도, 빠른 호흡의 로맨틱코미디라면 스스로의
취향에도 맞을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이미 로맨틱코미디를 찍은 적이 있다.
93년 출시된 70분짜리 비디오영화 <결혼 만들기>가 그것. 이미연과 김승우가
처음 만난 것으로 더 유명한 이 작품은 애초엔 결혼 가이드 비디오로 기획됐지만
“극영화로 만들어보자”는 김 감독의 제안에 따라 로맨틱코미디로 변신했으니
그로선 이 장르가 낯설지만은 않은 셈이다.
김 감독으로 하여금 이 영화에 손을 대게 한 첫째 요소는 시나리오였다. 우선 인물들이 모두 “뭔가 모자란 인간들”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영어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자신감도 모자란, 이 주눅든 사람들의 유쾌한 이야기는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여기에 ‘<무사> 후유증’도 한몫 했다.
“<무사>의 후반부처럼 비장하고 무거운 장면을 찍을 땐, 배우나 감독이나 스탭
모두 비장하고 무거워져 힘들었다. 이 영화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찍을 것 같다.”
“김성수 스타일은 없다. <영어 완전정복> 스타일만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엔 스텝프린팅, 고속·저속 촬영, 엄청난 컷 수 등 현란한 테크닉으로 대별되는
그의 스타일이 두드러지지 않을 것 같다. 코미디는 인물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밋밋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주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면 등에선 ‘울림있는 테크닉’을 사용할 계획.
플래시애니메이션, 3D애니메이션, 말풍선 등 다양한 시각적인 장치를 활용할 생각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장애물 중 하나는 “김성수는 여성 캐릭터를 이해 못하고, 피한다”는
주위의 평가다. 때문에 그는 아내로부터 여성의 내면에 관해 열심히 ‘사사’받고 있다.
“‘김성수가 변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떡할 거냐고 외려 ‘변하는 김성수’가 되길 갈망한다.”
예정대로 3월에 크랭크인하려면 캐스팅이라는 최종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아직 구체적인 캐스팅 작업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관건은 영주 역할을 맡을 여배우다.
겉보기엔 뚱하며 답답하지만, 내면엔 자유로운 상상력과 꿈을 품고 있는 20대 중반의 여성을 연기해야 한다. 첫눈엔 매력없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서서히 매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르네 젤위거를,
내면에 귀여운 상상의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선 <아멜리에>의 오드리 토투를
떠올려야 하는 탓에 신인급 보다는 영화경력이 있는 연기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곽경택의 <똥개>
ㅡ뜨거운 가슴,정의는 살아있다?
‘똥개’는 족보가 없는 개다. 예전엔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개였고
특별히 영리하거나 멋있거나 예쁜 개가 아니다. 하지만 어딘지 정(情)이 가는 개,
똥개는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똥개>의 주인공은 똥개처럼 살아가는 젊은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모든 판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친구다. 아무 데나 침뱉고 괜히
눈을 부라리는 양아치지만 남들이 허리를 굽히는 권력이나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남자다.
곽경택 감독은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서 이 영화를 구상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그 사람은 곽 감독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써서 보여줬고 <친구>를 끝내고
영화제 참석차 몬트리올에 갔다가 그 글을 읽은 곽 감독은 귀국하자마자 영화판권을 샀다.
<챔피언>을 끝내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똥개>는 곽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휴먼코믹드라마”다. 누가 “똥개야”라고 부르면 주인공과 주인공이 기르는
똥개가 함께 뒤돌아보는 식의 코미디와 더불어 늘 손해보고 희생양이 되는
똥개의 삶에서 인간적 매력을 발견하는 드라마가 진행될 예정.
“돌아가신 분 이야기를 가급적 밝게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은 죽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로 고민했고 짓눌려 있었다. <챔피언>은 그런 면에서 시험을 치른 것 같은
느낌이고 이번엔 재미있게 웃으면서 찍고 싶다.”
곽 감독이 경쾌한 코미디에 마음이 쏠린 이유다. 실제로 그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하고 싶은 대로 한 게
하나도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렇다. 자기가 정의라고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며 살았는데 나중에 보면 희생양이 돼 있다.
똑똑한 사람, 영리한 사람은 안 하는 짓을 하는데 그게 어쩌다 한번 대단한 용기로 보이기도 한다.”
곽 감독은 여기에 검찰수사를 받은 최근 경험까지 덧붙인다.
“무엇이 정의냐, 불의냐의 기준은 각자 다르다. 그걸 객관화한다는 게 법인데
법을 쓸 줄 아느냐와 못 쓰느냐는 정의냐 불의냐와는 다른 문제다.
똑똑한 사람들만 법을 쓸 줄 안다.”
검찰 소환을 받고 지명수배까지 당하면서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컸던 만큼
개인의 가치관과 법의 잣대가 어떻게 어긋날 수 있는지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오직 가슴으로 행동하는 똥개의 삶에 자꾸 끌리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곽 감독은 데뷔작 <억수탕>부터 꾸준히 선보인 코미디 감각을 이번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펼쳐 보일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코미디는 주인공은 울고 있는데
관객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역설적인 표현법이다.
“극중 인물은 심각한데 관객은 웃는 영화, 그게 진짜 코미디다.
극중 인물은 웃는데 관객은 우는 영화, 그게 슬픈 영화인 것처럼.”
똥개의 행동이 정말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난 것이지만 상황의 희극성으로 말미암아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테크닉면에서 또 하나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는
동물연기다. 똥개가 출연해 표정연기를 선보이는 작품이기 때문.
액션장면도 전작들과 다른 스타일을 고민 중이다. 관객이 <똥개>를 보고나서
“와, 골때린다. 그쟈”라는 반응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003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
90년대 방황하는 청춘의 대명사가 된 정우성을 별볼일 없는 양아치,
똥개로 변신시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곽 감독은 정우성의 연기에
이번 영화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눈빛의 정우성이 아니라 선하고 따뜻한 눈빛의 정우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감독과 배우는 <챔피언> 개봉 직후부터 꾸준한 만남을 가졌다.
“처음엔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똥개> 이야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여러 번 만나면서 가능하겠다는 판단을 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정우성이 살이 찐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곽 감독은 이제 정우성이 살을 불리지 않더라도 똥개로 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감독이 되고 싶어하는 정우성은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가했다. 곽 감독은 시나리오에
정우성의 몇몇 아이디어를 반영하기도 했다.
류승완의 <마루치 아라치>
ㅡ폼생폼사,고수들의 25시
“현대사회에 도인들이 살고 있다.” <마루치 아라치>는 이 하나의 전제에서 시작한다.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청소부가 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경공을 쓰고 있고
길에 앉아 운세상담을 하는 할아버지가 실은 내공의 고수라는 ‘황당한’ 상상이
<마루치 아라치>라는 현대판 무협영화를 가능케 한다.
이야기는 어리버리한 경찰 상환이 우연히 도인들의 세계에 눈뜨면서 시작된다.
늘 남에게 당하며 사는 데 익숙한 청년 상환,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하는 여자 의진,
내공의 고수인 7명의 신선 등이 등장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펼친다.
그러니까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는 애니메이션 <마루치 아라치>와
내용상 별 관계가 없는 영화다. 그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마루치 아라치의
어원에서 이 영화를 떠올렸다.
“산마루, 할 때 쓰는 것처럼 ‘마루’는 가장 높은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고
‘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루치는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자, 득도한 자인 셈이다.
반면 ‘아라’는 아름답다, 신성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마루치, 아라치는
득도한 남자와 여자를 뜻한다. "
“별볼일 없어 보인다고 무시하지 말자.” 류 감독은 이것이 <마루치 아라치>의
전언이라고 말한다. 매일 복덕방에서 장기두는 할아버지, 청소부, 식당 아줌마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세상사의 변방에 밀려난 사람들이 알고 보면
도인이며 내공의 고수라는 설정은 세상을 보는 획일적인 시각을 교정하자는
류 감독다운 제안이다. 그는 <마루치 아라치>가 서양의 슈퍼히어로영화와는
다른 맥락이라고 덧붙인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은 혈통으로 구분되는 것이지만 동양사상에서 신선은
인간이 수련을 거쳐 이르는 어떤 경지다.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도인이 된다. 이런 사고는 선악이분법에도 반영된다.
<마루치 아라치> 역시 선악구도가 있고 그에 따른 싸움이 벌어지지만
여기서 악은 씨를 말려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다스려야 하는 것으로 그려질 것이다.”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출중한 무공도 그냥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저 멀리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천리득음술을 쓰면 온갖 휴대폰 소음에
귀청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게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내공 고수들의 피치 못할 괴로움이다.
그들이 비천한 삶을 견디며 사회의 주변부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열혈 액션영화광 류 감독은 <마루치 아라치>의 액션을 현란하거나 요란하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액션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액션연출이 심리상태 안으로 들어간 전작들과 달리 카메라가 여유를 갖고
빠져나와서 신나고 경쾌한 움직임을, 리듬을 쫓아가도록 하겠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특히 강조하는 세 가지는 ‘리듬’, ‘열린 사고’, ‘폼’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경우 매 장면 힘을 줘서 전체 영화의 리듬 조절에 실패했다고 판단,
전체의 완급 조절에 신경을 쓰겠다는 것이고, 배우나 스탭에게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다그치기보다 풀어놓고 나란히 횡대로 함께 걸어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입버릇처럼 ‘자세’를 말하는 류 감독이 새삼스레 강조하는
‘폼’은 무엇일까.
“스티븐 소더버그나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처럼 미끈하게 잘 빠진 영화였으면 좋겠다.
장르의 완성도를 갖추면서 장르의 한계를 돌파하는, 그러면서 대중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 영화 말이다.”
<마루치 아라치>는 2003년 3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찍으면서 감독이 된 것보다
류승범을 배우로 쓴 거라고 생각한다.”
류 감독이 주인공 상환 역에 류승범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품행제로>를 보고 확신이 들었다. 류승범의 다른 매력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상환 역의 류승범 외에 캐스팅이 확정된 인물은 아직 없다.
상환의 짝을 이룰 의진에 대해서는 감독 자신도 “누가 될지 너무 궁금하다”고 말하는 형편.
여기서 의진은 보통의 젊은 여자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도인의 길을
걸어야 하는 여자이다. 7명의 도인인 칠선 가운데는 5명이 필요하다.
2명은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
류 감독은 “소화자 없는 <취권>은 없다”는 말로 칠선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보여준 대로 의외의 캐스팅에서 영화적 매력을 만드는
류 감독의 재능을 다시 기대할 만한 대목이다.
★김태균 감독의 <조선의 주먹>
ㅡ멋진 사나이, 시라소니
역대 최고의 주먹은 아마도 전문가들이라면 ‘잇뽄’ 김두한 등과 함께
그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시라소니’ 이성순.
<조선의 주먹>은 한반도의 북쪽을 주먹으로 호령했고, 중국 만주, 상하이 등지에서
수많은 전설을 남겼던 시라소니를 그리는 영화다. 그렇다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일대기 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니다.
1936년 겨울 만주의 봉천(현재 심양)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허구적 재미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싸움을 막무가내로 좋아했고
환상적인 솜씨를 가졌다는 시라소니의 캐릭터만 사실에 가깝고, 나머지 이야기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나가게 된다.
영화는 5년 전 맞붙었다가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이상대를 시라소니가 찾아나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본군과 중국인들로부터 조선인 거리를 지키고 있는
듬직한 주먹 이상대는 신임 일본 치안책임자 도조의 위협에 맞서고 있던 형편으로
시라소니의 갑작스런 도전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와중에 도조 또한 천하의
싸움꾼이란 사실을 알게 된 시라소니는 그와 맞붙으려다 큰 사고를 치고,
봉천의 조선인들은 위험에 처한다.
<조선의 주먹>은 시라소니, 이상대, 도조라는 세명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내세워
호쾌한 액션과 남성들의 의리, 일제시대 조선인의 삶 등을 담을 예정이다.
“남자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다”고 김태균 감독은 설명한다.
<화산고>를 마친 뒤 옛날 ‘깡패’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있던 그는 애초
60년대를 배경으로 조직 2인자들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으나, 자료를 조사하던 중
시라소니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면서 방향을 선회하게 됐다.
“시라소니는 조직이란 틀에 얽매이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장안의 강자들과 1대1로 대결하던 사람이었다. 얼마나 멋있냐.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주먹은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진짜 사나이들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조직폭력배란 개념도 없던 시대였다.”
배경을 30년대 만주로 삼은 것은 유년기 그의 꿈속에 있던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
투사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개털 모자를 쓰고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의 마음속에 줄곧 남아 있었고,
여기에 시라소니라는 캐릭터가 결합되면서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주먹>은 시대극이지만, 역사적 고증이나 사실 재현보다 그 시대 상황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하는 데 더 신경을 쓰는 영화다. 시라소니 캐릭터부터
중후한 이미지가 아니라 다소 철부지이며 생기발랄한 ‘신세대 주먹’이니 말이다.
중국 베이징 인근에 6억원을 들여 지을 오픈세트 또한 30년대의 화려한 풍경과
현대적인 공간감을 조화시킬 예정이다.
음악의 주된 분위기를 강렬한 기타 리프의 록으로 설정한 것도 ‘현대풍 시대극’을
위한 시도.
또 하나 신경쓰는 점은 액션이다. 김태균 감독은 <화산고>에서 ‘토종 와이어 액션’을
선보였던 이응준 무술감독과 함께 기존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액션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 중이다. 2월 하순 크랭크인할 이 영화는 45억원가량의
예산을 들여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에서 100% 촬영될 예정이다.
김 감독이 꼭 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 “<화산고>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조선의 주먹>의 시라소니는 ‘단지 거기 싸움이 있기 때문에’ 싸움을 하는
본능적인 주먹이다. “그에게 싸움은 섹스 같은 거죠.”
이렇듯 결전을 벌이면서도 즐거움을 찾는 시라소니의 기질을 표현하기 위해선
20대 초반의 배우가 필요하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또 벽을 딛고 튀어올라
3~4m 정도 날아간 뒤 상대방의 얼굴을 명중시키는 ‘공중걸이 박치기’ 등
기술이나 좌중을 사로잡았다는 춤솜씨를 보여줄 수 있으려면 몸도 날렵해야 한다.
사실 시라소니 역은 최근 급부상 중인 신세대 연기자로 거의 정해졌지만,
상대역인 이상대를 맡을 배우가 결정되지 않아 아직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며 듬직한 맏형 기질이 있는 이상대는 이 영화 드라마의 대부분을
이끌어갈 정도로 비중이 높지만 “다들 시라소니를 하겠다는 통에” 아직 미정.
‘채찍 액션’의 달인인 도조 역은 일본 배우가 맡게 된다.
난데없이 튀어나와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입 5억2천만달러를 올리고 DVD 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 왕관까지 내처 차지한 <매트릭스>는 1999년 최고의 깜짝 히트였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었다. <매트릭스>는 1970년대 이래 심미안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던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다층적 스토리텔링이라는 신무기까지 보탰다.
워쇼스키 형제는 2001년 3월부터 2002년 7월까지 캘리포니아와 시드니 폭스 스튜디오에서,
본래 그들이 3부작으로 구상한 인간 대 기계의 사이버펑크 전쟁 서사시 2편과
3편을 찍었고 워너는 도합 3억달러를 쏟아넣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제작자 조엘 슈마허는 2편 <매트릭스2 리로디드>와 3편 <매트릭스3 레볼루션>을 6개월 시차를 두고 연달아 개봉하는 이유가
관객에 대한 ‘배려’라고 말한다.
“2편을 보고 나면 3편을 오래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라는 큰소리다.
물론 진짜 목표는 시너지 효과. <매트릭스 리로디드>의 미국 개봉일(5월15일)에 맞춰
게임 <엔터 더 매트릭스>가 시장에 나오고 6월에는 <매트릭스>의 ‘외전’격
단편 애니메이션을 모은 DVD <애니마트릭스>가 출시 스케줄을 잡았다.
<매트릭스> 속편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뉴스위크> 기자의
<매트릭스 리로디드>의 20분 분량 시사기에 따르면 조엘 슈마허의 호언장담이
허풍만은 아닌 모양이다. 전편의 총알 피하기 묘기신이 그랬듯 <매트릭스> 속편은
기존의 영화적 액션의 한계를 무너뜨릴 ‘턱 빠지는’ 상상 초월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캘리포니아 알라메다에 1.5마일 고속도로를 아예 건설해서 찍은 2편의 프리웨이 추격신은
달리는 캐딜락 뒷좌석과 바퀴 18개짜리 트럭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두개의
쿵푸 격투와 모터사이클 추격전, 움직이는 자동차 지붕에서 다른 차로 뛰어내려
자동차를 맥주 캔처럼 밟아버리는 ‘차력’으로 구성된다.
액션의 안무가는 역시 원화평.
“(이 장면은) <분노의 질주>를 <졸음의 산보>처럼 보이게 만들 거다.” 촬영감독 빌 포프의 자랑이다.
그렇다면 1편에서, 메시아의 숙명을 받아들인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그의 동지들은 연대기의 2장과 3장에서 어떻게 싸우는가 한국에서 5월 말 개봉할
<매트릭스 리로디드>는 모르페우스(로렌스 피시번)가 이끄는 인간들의 피난처
시온을 기계들이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이제 인간의 남은 희망은 기계 세상의 관문에 접근할 수 있는 키메이커(랜달 덕 김)뿐.
유령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면서 칼을 휘두르는 쌍둥이(닐, 아드리안 레이멘트)로부터
키메이커를 구하는 과정에서 모르페우스의 옛 연인 니오베(제이다 핀켓 스미스),
네오를 유혹하는 페르세포네(모니카 벨루치)가 새롭게 등장한다.
속편을 통해 더 큰 그림도 그려진다. 관객은 기계들 사이의 분열과 모르페우스 무리가 아닌
다른 반군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2편이 끝난 자리에서 시작될 <…레볼루션>은
‘매트릭스’ 안에 대부분의 액션이 이뤄지는 2편과 달리 진짜 세상의 폐허 위에
벌어지는 인간과 기계의 전면전을 담은 스펙터클이다. 17분짜리 클라이맥스
전투신만으로도 지금까지의 모든 액션 스펙터클을 고개 숙이게 만들리라고
제작진들은 예언한다.
속편에서 네오의 숙적 스미스 요원은 스스로를 100명으로 자가복제해 네오를
곤경에 빠뜨린다. 복제물에 포위된 것은 네오뿐이 아니다.
동양철학, 사이버펑크, 성경, 쿵푸, 보드리야르, 재패니메이션의 패스티시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매트릭스>는 어느새 다른 영화가 베끼는 참고문헌이 됐다.
어설픈 흉내에 포위된 네오, 그는 어떻게 다시 그를 둘러싼 세계의 벽을 부술 것인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Kill Bill)
ㅡ남자들이여, 내 칼 받으라
<재키 브라운> 이후 어언 6년. 쿠엔틴 타란티노가 슬슬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가 이처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준비한 새 영화는 여성 킬러의 복수를 다룬
누아르 <킬 빌>이다.
직설적인 제목 그대로, 빌이라는 남자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가는 여성 킬러와
그녀의 활약상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펄프 픽션>에서 함께했던 우마 서먼이 동정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여성 킬러로 출연하는
<킬 빌>은 동서고금의 선정적 상업영화와 고매한 예술영화를 두루 섭렵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잡식성 취향이 오롯이 드러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쿵푸영화, 사무라이영화, 이탈리아 고어영화에 대한 경배와 인용이 가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킬 빌>은 “천재적인 큐레이터의 재능”으로 불리는 타란티노의
또 다른 도발을 기대하게 한다.
<킬 빌>의 주인공 브라이드는 비운의 여인이다. 일급 암살단의 일원이었다가
은퇴한 브라이드는 자신의 보스였던 빌과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결혼식에서
브라이드는 남편 빌과 동료들로부터 총알 세례를 받고 쓰러진다.
코마 상태에 빠졌던 브라이드는 5년 뒤 의식을 되찾고, 피의 복수를 결심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 <킬 빌>의 아이디어는 <펄프 픽션>의 촬영장에서 나왔다.
죽이 잘 맞는 친구 우마 서먼과 잡담을 하던 타란티노는 복수를 이야기하다,
킬러의 복수로 이야기를 좁혀가며 흥이 났고, 즉석에서 9페이지짜리 트리트먼트를 써내려갔다.
순서상 <펄프 픽션>의 차기작이 됐어야 할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작 시기가 밀리게 됐는데, 원안의 공동작성자이자 둘도 없는 주인공감이었던
우마 서먼의 임신과 출산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됐다.
타란티노가 십대 시절부터 홍콩과 일본의 액션물에 심취했다는 것은
이젠 모두가 아는 이야기. 타란티노는 <킬 빌>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자신의
아시아 액션물 편력을 드러낼 예정이다. 그는 <킬 빌>의 프로덕션디자이너에게
일본 사무라이영화와 장철의 외팔이 검객 시리즈 등 ‘꼭 봐야 할 영화’
목록을 보내는가 하면, 고지라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정 장면을
그대로 인용하며 촬영했다.
<매트릭스> <와호장룡>의 무술을 담당했던 원화평이 이 영화의 무술연기를 지도하면서
당황한 것도 지난 20년 동안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예스러운’ 액션을 요구하는
타란티노의 집요함 때문. 심지어 우마 서먼이 입는 ‘전투복’ 중에는
이소룡이 마지막 영화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은 노란색 트레이닝복도 포함돼 있다.
<펄프 픽션>의 존 트래볼타, <재키 브라운>의 팸 그리어 등 한물 간 배우들에게
멋들어진 재기전을 치르게 했던 타란티노는 이번에도 60∼70년대 일본 야쿠자영화 등
액션영화의 스타였던 소니 치바를 캐스팅해 눈길을 모은다.
<미녀 삼총사>를 연상시키는 미녀 암살 군단의 진용도 흥미롭다. 악당 빌의 편에 서서
그의 경호를 맡고 있는 다국적 미녀 3인방은 다릴 한나(일명 캘리포니아 산뱀),
루시 리우(늪 살모사), 비비카 폭스(코브라)다.
<펄프 픽션> <재키 브라운>에 출연했던 새뮤얼 잭슨, 그리고 타란티노 본인도
작은 역으로 출연한다. 베이징영화스튜디오 등지에서 촬영한 <킬 빌>은 2003년 10월에 개봉하며,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다.
★터미네이터, 세 번째 귀환
ㅡ조너선 모스토의 <터미네이터3: 기계들의 반란> (Terminator3: Rise of Machines)
용광로 속에서 그의 뼈대가 녹아 사라지는 순간에도 감히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은 관객은 없었을 것이다. “돌아온다”는 것은 그의 입버릇이었으니까.
터미네이터의 세 번째 귀환은 무려 12년이나 걸렸다. 2002년 4월 제작에 돌입해
9월 촬영을 마친 <터미네이터3>는 50대 중반의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다시
T800의 이름으로 소환해 2003년 여름 시즌 제패의 출사표를 던졌다.
“오사마 빈 라덴의 집 전화번호만큼 알아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나돌 만큼의 보안은
철통 같지만 이야기의 구조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3편의 시계는 <터미네이터2>로부터 10년 뒤.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성장한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2029년을 지배하는 기계들은 다시 암살자를 보내고
인간 레지스탕스는 사이보그 T800을 보호자로 파견한다. 세 번째 킬러 T-엑스,
일명 터미나트릭스(크리스타나 로켄)는 여성형 사이보그로 T800이나 T1000을
능가하는 전투력과 변신을 넘어 에너지 형태가 되거나 사라지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디지털 특수효과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특수효과가
상향 평준화된 시대에 얼마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지는 1억7천만달러의
사상 최고 제작비(슈워제네거 개런티 3천만달러)의 지출 내역과 맞물려 가장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청년 존 코너 역에는 마약문제를 겪고 있는 에드워드 펄롱 대신 닉 스탈이 선택됐고
존의 연인으로는 애초 캐스팅됐던 소피아 부시가 너무 어려보인다는 이유로
도중하차하고 클레어 데인즈가 자리를 메웠다.
<터미네이터2>가 속편으로 훌륭했던 열쇠는, 무적의 악당이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T1000에 비해 열등한 약자이자 존 코너의 보호자로 변모한다는 영리한 트위스트에 있었다.
그에 비해 <터미네이터3>에 굵직한 반전의 기회는 얼핏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T1000의 선조격인 모델 T800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신선한 놀라움을 은근히 예고한다.
<브레이크다운>에서 액션 하나하나에 플롯을 추진하는 동력을 실어주었던
조너선 모스토 감독의 구성력 역시 영화 테크놀로지의 귀재 제임스 카메론과는
다른 승부수를 기대하게 만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ㅡ검은 상처의 블루스
인간 심리의 어두컴컴한 강기슭에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겸 감독 3인이 모인다.
2003년 9월 공개되는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물네 번째 영화 <미스틱 리버>는
데니스 르헤인의 2001년작 동명 베스트셀러에 기초한 사이코스릴러다.
이스트우드의 근작 중에는 <미드나잇 가든> 이후 처음으로 이스트우드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는데 이는 숀 펜, 팀 로빈스, 케빈 베이컨의 주연 명단만 봐도
납득이 가는 선택이다.
지미(숀 펜)와 숀(케빈 베이컨), 데이브(팀 로빈스)는 어린 시절 친구. 돌아보기도 끔찍한 소금기둥과도 같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25년간 단절됐던
셋의 관계는 지미의 맏딸 케이티가 살해되는 새로운 비극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운명의 실을 얽는다. 형사가 된 숀은 케이티의 사건 수사를 담당하면서
겨우 봉인했다고 믿었던 악의와 폭력의 구렁텅이로 끌려 들어가고 거칠게 살아온
전과자 지미는 법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고 딸의 핏값을 손수 받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수십년 전 유괴돼 성적으로 학대당했던 세 번째 친구 데이브는
용의자로 트라이앵글을 완성한다.
이 밖에 로렌스 피시번이 케빈 베이컨의 파트너 형사로, 로라 리니가 숀 펜의 아내로 분한다.
보스턴에서 2002년 9월 촬영에 들어간 <미스틱 리버>는, 제작진의 오스카 수상 및
노미네이션 경력만으로도 포스터가 빽빽해질 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비롯해 작가 브라이언 헬겔런드(국내 미개봉된 이스트우드 전작
<블러드워크>의 시나리오를 썼다), 아트디렉터 헨리 범스테드, 조연 마르시아 게이 허든이
역대 오스카 수상자다.
스릴러 장르를 골라잡을 때마다, 번잡한 범죄현장에서 인간과 사회의 흥미로운 단면으로
끊임없이 한눈을 팔아온 도덕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깊이를 더한 통찰을
기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2>(X-Men2)
저주받은 초능력, 손을 잡다
2002년 박스오피스를 옴쭉달싹 못하게 포획한 스파이더맨은 슈퍼맨처럼 강하지도 않고 배트맨처럼 부티나는 무기도 없는 초라한 ‘슈퍼 히어로’라는
점에서 개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그나마 명성이라도 있다.
한발 앞서 할리우드로 진출한 마블코믹스의 캐릭터 엑스맨들은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아차리는 슈퍼스타도 못 된다. 극중에서도 엑스맨은 초능력자들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불길한 소수자로 핍박받는다.
그리고 <엑스맨> 시리즈만의 가장 걸출한 매력도 거기서 솟는다.
<엑스맨>은 매우 정치적인 판타지이며 어떤 슈퍼 히어로 스토리보다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를 보유한 블록버스터다.
집단수용소 캠프에서 벌어지는 첫 장면부터 <엑스맨>에 내재된 인종주의와
관용에 대한 메타포를 전면에 세웠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연이어 연출한 <엑스맨2>는,
1편에서 정치 견해 차이로 반목했던 자비에 박사의 엑스맨들과 매그니토의 수하들이
외부의 박해를 맞아 연합전선을 결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 시리즈 중 1982년작 <신은 사랑하고 인간은 죽인다>에 크게 기댄
<엑스맨2>에서 ‘공적’(公敵)은 안티 돌연변이 단체를 결성해 “당신의 아이,
지금 테스트해보세요!” 따위의 표어를 건 인종주의적 공세를 퍼붓는 전 육군장성 겸
방송선교가 윌리엄 스트라이커.
자비에 박사를 납치한 스트라이커가 박사의 텔레파시를 이용해 보통 사람과
돌연변이를 식별하는 작업에 나서자 매그니토 일파와 엑스맨은 대립을 잠시 접고 연대한다.
로그와 갬빗의 로맨스, 울버린과 사이클롭스, 진 그레이의 삼각관계도 잔가지를 친다.
<엑스맨> 시리즈의 불가결한 재미는 캐릭터 앙상블.
스톰, 사이클롭스, 진 그레이, 울버린, 로그, 파이로, 미스틱 등 낯익은 멤버가
외모와 능력을 업그레이드한 가운데, 앨런 커밍의 나이트 크롤러,
대니얼 커드모어의 콜로수스, 켈리 후의 레이디 데쓰스트라이크가 2편에서
신고식을 치른다.
속편의 원칙에 따라 스턴트와 세트, 메이크업이 고급화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3>가 인간의 반란을 선동하는 2003년,
인간에 대한 반란을 보여줄 <엑스맨2>는 더욱 매력적일 듯.
이십세기 폭스코리아는 5월 개봉을 계획 중이다.
★리안의 <헐크>(The Hulk)
ㅡ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완전한 사색
리안의 행보는 언제나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 등
대만 중산층 사람들의 삶을 다룬 소박한 드라마에서 급작스레 선회,
<센스, 센서빌리티> <아이스 스톰> 등으로 영국인과 미국인에 관한 섬세한
초상을 그려내더니, 다시 클래식 차이나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담은 무협영화
<와호장룡>을 선보였다.
매번 다른 문화권의 다른 이야기, 심지어 다른 장르의 영화에 도전하는 리안의
미스터리는 모든 작품들에서 퀄리티의 수준을 지켜낸다는 점.
따라서 리안이 마블사의 코믹북 <놀라운 헐크>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도
그의 팬들은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영화에 관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상황이지만,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리안이 모범적인 과학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망과 갈등의 소용돌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사색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제나처럼.
<헐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코믹북이 원작이며, 80년대에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TV시리즈로 소개된 친숙한 작품.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모티브로
브루스 배너라는 이름의 과학자가 실험 중에 사고를 당해 녹색의 거대하고
난폭한 괴물로 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를 추적하는 세력과의 맞대결이 이어지며,
배너(에릭 바나)의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나누는 여자친구(제니퍼 코넬리)와의
사랑도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이루게 된다.
리안은 이 단순하고도 복잡미묘한 <헐크>의 시나리오를 여러 작가와 함께 손봤다.
<딥 임팩트>의 마이클 톨킨의 각색본, 그리고 <엑스맨>의 데이비드 헤이터의
수정본이 성에 차지 않은 듯, 다시금 원조를 요청한 작가는 <와호장룡>에서
함께 일한 오랜 파트너 제임스 샤무스.
리안이 시나리오 단계부터 까탈을 피운 것은 <헐크>의 컨셉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고 특수효과가 풍성한 여느 블록버스터의 모양새를 갖추는 동시에,
클래식호러영화에서 나타나던 로맨스와 비극적 정조를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헐크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 달리 슈퍼히어로인 동시에 괴물인 까닭이다.
주인공 배너 박사를 연기한 에릭 바나도 ‘리안의 <헐크>는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를 부추긴다.
“이 영화에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이 있다. 리안은 완벽주의자고 매우 분명한 비전이 있는 사람이다. 심한 강행군이지만, 그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헐크’가 나오지 않는 예고편만 수개월에 걸쳐 보여지고, 지난 여름까지도
헐크의 캐릭터디자인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소문이 나면서, <헐크>의 제작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헐크 캐릭터는 ILM에서 100% CG로 창조하고 있는데, 공룡이나 외계인처럼
상상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변신 전의 에릭 바나와도 닮아야 하고 복잡한 감정을
표출해야 하기 때문에 디자인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스 스톰> <블루 벨벳>의 촬영감독 프레드 엘므스, <혹성탈출> <슬리피 할로우>의
프로덕션디자이너 릭 하인리히가 합세해 만드는 <헐크>의 비주얼은 이렇듯 기나긴
‘산고’를 거쳐 2003년 6월20일 세상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