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천 물줄기가 커질수록 갑천과 접하는 마을도 커지고 많아진다.그리고 갑천과 부데끼는 이야기도 많아지다 보니 발걸음론 감당키 어려움에 자전거로 도전해보기로 한다.
아침 9시에 넉넉한 마음으로 출발한다.유성을 거쳐 가수원,흑석동,우명동을 지나 논산의 벌곡면 양산리,양산교에 도착하니 12시이다.전번 종주시 양산리를 지나 신양리에서 마쳤으나 외개연을 정확히 보지 못해 다시 찾아왔다.외개연을 남개연이라고도 부른단다.
양산리 ,호남고속도로 벌곡 휴게소 뒤편 갑천에 피어있는 외개연(남개연이라고도 부른답니다)
갑천의 생태계중 양산리의 외개연 서식지는 중요한 곳이라는 것과 11월까지 연꽃이 핀다는 안여종님(대전 문화유산 해설사)설명에 다시 찾게 되었다.
외개연(남개연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외개연(남개연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양산들판은 그야 말로 황금들판이다.가까이서 접하는 외개연이 정말로 아름답다.자연적인 하천에 자연으로 피는 연꽃이기에 더욱더 아름답게 보인다.외개연 서식지를 보고 신양리로 향하는중 공시미 마을 입구에서 농부님들이 점심을 먹고 있어 신선 바위를 물으니 마을 앞으로 보이는 바위가 신선 바위란다.
천마산,신선 바위(산모양이 마치 하늘을 나는 말과같다하여 천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한다.천마산에 있는 신선 바위는 공시미 마을에서 보면 바로 보인다.10여분 올라가면 도착한다)
공시미 마을 앞의 천마산 ,높이가 307m 이며 산모양이 마치 하늘을 나는 말과 같다 하여 천마산이라 이름이 붙혀지게된 산 중턱에 신선 바위가 있는데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에 바둑판 모양이 있나 찾아볼겸 올라간다.
신선 바위에서 바라본 갑천,벌곡 휴게소 와 공시미 마을
10여분 올라가니 신선 바위에 도착한다.공시미 마을에서 볼 때는 근사했던 바위가 막상 올라오니 바위들이 각이 지어 볼품이 없다.그러나 허름한 깃대가 있는데 조망은 일품이다.벌곡 휴게소와 공시미 마을이 갑천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이다.바둑판은 찾을 길이 없고,,,
신양리 로 접어든 물줄기, 신양교 못미쳐 물가로 또다시 외개연 군락이 펼쳐진다.갑천 물길중 양산리와 신양리 2곳이 외개연 서식지이다.
신양교 위쪽에 자생하는 외개연(양산리와 신양리 두곳에서 자생한다)
신양교 마을 표지석에 도착하니 물줄기를 가운데 두고 오른편은 신대,왼편은 양곡 마을이 펼쳐진다.신양교에서 마을 노인을 만나 응봉산을 물으니 신대마을 뒤편의 송신탑이 지나가는 봉우리를 가르키며 매봉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공원교와 갑천
옛날 백제와 신라군이 싸울 때 빼앗기고 뺏는 싸움이 치열해 마치 씨름하듯 하였다 해서 씨름재성이라고 부른다는 씨름재을 물으니 매봉산 의 왼편 골짜기에 있다고 가르켜 주는데 지금은 잡풀로 인해 가기가 어렵다고 일러준다.따가운 늦가을 햇빛이 씨름재로의 발길을 접게 만든다.(14:15)
창평마을 표지석
신양리 마을 앞을 가로 지르는 물줄기는 진달래 공원앞의 공원교를 지나 창평교를 만나 대전과 논산으로 나우어 오동리로 내려간다.창평마을 표지석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 회관과 경로효친 마을 표지석이 자리잡고 있고 회관 뒤편으로 돌아가면 벌곡초등학교 조동분교장이 있는데 지금은 폐교되고 종합체험학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운동장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은 무슨까닭 일까....
옛 벌곡초등학교 조동분교,지금은 폐교되고 놀뫼 종합체험 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벌곡초등학교 버스가 일일리 마을을 순회하며 어린이들을 태워다 준다.
창평교를 넘어 서면 조동리 새골마을에 도착한다.마을 입구에는 슈퍼와 마을 표지석이 있는데 마을 입구 오른편의 조그마한 개울을 사이에 두고 논산과 대전을 가르는 시경계이다.마을은 한마을인데 행정구역상 으로는 마을앞의 조그마한 개울을 사이에 두고 논산의 조동리와 대전의 우명동으로 갈리워 진다.
조동,새골 부락 마을 표지석,우측으로 조그마한 개울을 사이에 두고 논산과 대전으로 갈리워 지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편 능선이 시루봉이다.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는 우명동 마을 회관뒤로 시루봉에 올라서면 정상부에 거대한 참나무가 있고 산제단이 두 개나 있다.7구루의 소나무로 둘러쌓여 있는 참나무는 보호수로 지정관리되고 있는데 참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옛날 매년 정월달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하나 지금은 산신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한다.시루봉에서 바라보는 어곡리 마을이 아련하다.(15:25)
시루봉 정상의 산제단,정상에는 7구루의 소나무 가운데 참나무가 우뚝서있다.참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는데 참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된 것은 처음 보는 관경이다.두 개의 산제단이 조성되어 있다.조망또한 일품이다.
도로상의 시경계를 넘어 물줄기를 따라 어곡교에 도착한다.어곡교를 지나 마을 입구의 느락골교에 도착하니 지방2급하천 어곡천이란 표지판이 당당히 서있다.느락골 한없이 느러졌다 해서 붙혀진 이름이라는데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가히 어곡(於谷)이란 말을 실감한다.
시루봉에서 바라본 조동리 마을 들판 물줄기는 태극 모양을 하며 대전으로 향하고 있다.
시루봉에서 바라본 어곡리 느락골 마을
왼편은 논산 조동리 오른쪽 마을은 대전시 우명동
대전시계,다리를 건너면 대전시이다.
느락골교 옆으로 마을 회관이 있고 공덕비 내용을 읽어보며 "이분은 돌아가신 모양이죠" 하며 도로에 넗어 놓은 나락을 걷고 있는 부부에게 물으니 ㅎㅎ 우스며 제가 그사람입니다. 하며 내용을 설명 해주신다.마을 회관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밥을 지어 베낭에 챙겨 넣고 어곡천을 따라 올라간다.
어곡리의 느락골교 2급하천으로 당당히 서있다,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며 2급하천을 실감한다.얼마가 길은지를.....
의실마을 과 솔골 마을앞을 지나 바랑골 마을 앞에서 물줄기는 좌우로 갈라진다.우측의 만목리을 향해 올라간다.만목리 산촌개발 마을 이란 표지석을 지나 올라가니 하늘아래 첫동네 같은 윗만목리 마을에 도착한다.마루금위에 마을이 형성되어진 것이 신기할뿐이다.
바랑골 마을 표지석,이곳에서 물줄기는 좌우로 갈라진다.우측으로는 대덕리와 만목리 방향
만목리 산촌개발마을 표지석,논산시에서 운영하는 휴양시설이다.
마을 끝에서 위에도 집이 있습니까? 물으니 골짜기 위에 기도처가 있다한다. 50여m올라가니 집이 나오고 뒷편으로 돌아 가니 샘이 있다 어곡천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곳이다.산그늘이 길 게 드리워진 윗만목리 마을을 내려간다.(18:15)
윗(상)만목리 마을,하늘아래 첫동네이다.
골짜기는 일찍 해가 떨어진다.윗만목리 조금내려오다 길가의 콘테이너 박스에 들어가 하루밤 신세를 진다.윗만목리에 살던분이 이곳에 혼자 사신단다.술에 취해 밤새 지나온 인생사를 들려 주는 이야기가 끝이 없고 이불 옆으로는 생쥐가 생라면을 갏아 먹고 있다.숨이 막힐 것 같은 냄새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고 새벽5시에 문을 나선다.그래도 찬 바람을 피할 수 있어 고맙기 그지 없다.
어곡천의 발원지,건물 뒤로 샘이 있다.
어곡천은 갑천에 흡수되어 갑천이란 이름으로 대전의 오동으로 유유히 흐른다.어곡리 마을을 빠져 나와 우명교를 향하면서 시경계는 과연 어디일까 궁금해 하면서 왼편의 기적소리 식당을 지나 우명교를 넘어간다.시계 종주팀의 산행기를 보니 오동에서 우명교 직진 왼편의 능선으로 붙었다 <아마 우명교 위에있는 우명보가 시경계가 아닐까???>멀리서 볼려니 표시기는 보이지가 않는다.이제부터 물줄기는 대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07:45)
우명보
기적소리
오동의 영골에는 선양주조회사가 있다.영골앞 증촌보를 건너 무송유씨 세적비를 보고 장밭탱이로 들어선다.승강장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돌장승이 풀숲에 가려 말없이 서있고 마을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니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있는 오리울 마을 입구가 온다.
무송유씨세적비
감나무가 지천인 오리울 마을을 뒤로 장밭탱이 의 굴베루라고 부르는 바위산에 도착하니 물탕약수가 있고 물탕약수 뒤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니 바위굴이 나오고 바위굴 사이로 석간수가 흐르고 있다.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에 옛날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 지금은 황량하니 그지없고 암자가 있었던 자리옆으로 낡은 빗자루가 놓여 있다.
장밭탱이 승강장과 장승
굴베루 의 물탕약수
굴베루의 석간수(피부병에 좋다는 곳이다.)
꽃바위산
약수터에서 약수 한잔을 마시고 평촌동으로 향한다.와촌,질마루,사기점골,증촌으로 이루어진 곳이 평촌동이다. 평촌 사거리에 있는 마을 회관앞에 도착하니 도선 바위,혹은 평촌고인돌 이라고 하는 바위가 회관 옆으로 있고 길평(吉坪)이라 새겨져 있다 하나 글씨가 흐려 분간하기가 어렵다.신라말기 풍수에 능해 왕건의 개국을 예언했다는 도선스님이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고 무만문천(武萬文千)이 날곳이라고 예언한뒤 이 바위 위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있는 바위이기도 하다.(10:45)
평촌 마을 회관에 있는 도선바위
증촌으로 향하면서 2개의 증촌교를 건너기전 왼편 야트막한 산이 꽃바위산이다.인근 부녀자들이 용황제를 지내는 곳이다.구다리와 신다리의 2개의 증촌교를 건너면 무송유씨 세거지인 증촌이다. 마을 입구에는 증도문이란 표지석이 있고 오른편 느티나무가 있는곳이 선배미이다.선배미를 따라 부엉이 굴이 있다는 절벽의 부엉이 굴을 보고 되돌아 와 마을 가운데에 도착하니 왕바위와 마을 공동우물이 있다.마을 사람들은 이 샘물을 신성이 여겨 정월보름과 명절 때에 정제(井祭)를 지낸다 한다.
증촌마을 입구의 증도문
10월7일 서대전 공원에서 평촌지경다지기 놀이 민속경연을 했다 하는데 이민속놀이가 이우물과 관련이 있다 한다.여덟마당 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지경다지기 놀이는 첫째 길놀이를 시작으로 샘굿,터잡기,개토재,가래질 작업,지경다지기,집짓기와 놀이마당,마지막 으로 퇴장 순서로 되어 있는데 남녀노소 구별없이 하나된 마음으로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원하는 것으로 민속학적으로 매우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한다.지경다지기에 물으니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불러 지경다지기 책자를 건네주라 하신다.정성이 되단하다.
증촌마을의 왕바위
증촌마을 공동우물( 지경다지기 민속놀이 우물 정재를 지내는 곳이다)
증촌마을을 떠나 류현역 장군 신도비를 지나 류현역장군 묘가 있는 와촌마을에 도착한다.문화재 자료제28호로 조선후기 무신인 야당 류현역은 삼군수군통제사,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죽은후 나라에서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다.묘소는 1781년 (숙종17) 지금 이 자리에 이장되었다 한다.
류현역 장군묘역(무송유씨와 다르다)
와촌 마을을 지나 당고개로 해서 용천동으로 넘어간다.이 당고개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혈도를 끊었다는 고개이다.용천교를 지나 미리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으로 용의 머리와 같이 생긴 바위와 용촌정이라는 정자가 보호수 느티나무와 어우려져 있다.이 마을 미리미 라고 부르는 것은 마을 입구에 용의 머리와 같이 생긴 바위에서 유래 되었다 한다.
미리미 마을 입구의 용천정
갑천과 호남선을 사이에 두고 왼편은 미리미 마을 오른편을 시누리(세누리) 마을이다.호남선 굴다리를 지나 승강장이 있는 시누리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마을 입구에서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 나무로 지정되어 있고 시누리 느티나무라고 부른다.나무 왼편으로 아담한 정자가 있었다 하고 옛날 시누리 앞쪽으로 개울이 흘렀으며 그 때 세노인이 마을 어귀 바위위에 앉아 낚시를 했다 하는데 이 정자를 삼로정이 부른단다.이 삼로정은 진잠팔경중 제1경으로 알려져 있다는 곳인데 지금은 논으로 변해 그 때의 아름다움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마을길 이름이 뒷고살길로 되어 있어 시누리 마을 이름과 맞지 않는다고 마을 주민들이 이름변경을 구청에 냈다고 한다.
시누리 느티나무(삼로정이 있는곳으로 진잠8경중 제1경이란다.)
온길을 되돌아가 미리미 마을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는 정뱅이 마을에 도착한다.정방길,정방들,정방보등 이름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 과 얽힌 이야기들에 의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한다. 이 마을 왼편으로 2구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를"정뱅이 느티나무"라 한다.
정뱅이 느티나무
그 동안 대둔산에서 발원한 갑천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흘러 내려왔다.지역에 따라 덕천내,검천천,한삼천,등의 이름으로 불려 졌다.이제 그 물이 용촌동(龍村洞)정뱅이 마을에 이르러 계룡산에서 발원한 두계천(豆鷄川)과 만나 지방2급하천을 넘어 당당히 국가하천 으로서 진정한 갑천(甲川)으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좌측은 갑천,우측은 두계천이다.
지방2급하천에서 당당히 국가하천으로 다시 태어난다.
두계천과 만나 국가하천 갑천이 가장 먼저 만나는 마을이 서구 봉곡동의 야실마을이다.우리 말로는 불무실이라고 하는데,고려시대 불뭇간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국가하천 갑천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야실마을 이다.
좌측은 두계천이 감싸고 뒤편은 산이요 앞쪽으로는 갑천이 빙돌아 내려가는 물위에 떠있는 외로운 섬 같은 마을이다.야실 마을 입구에는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고 다리는 봉곡2교이다.야실 마을앞을 지나는 갑천을 따라 오른편으로 솟은 산이 고무래봉으로 흑성산성이 있는 산이다.산성길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산성에 도착한다.
흑석산성 거의 허물어 졌으나 윤곽만은 뚜렸하다.
기념물 제15호인 흑석산성은 고무래봉 정상에 테을 두르듯 돌로쌓은 백제시대 성으로 밀암산성 이라고도 한다.지금은 거의 허물어 지고 윤곽선만 남아 있다.대전에서 연산에 이르는 길목을 감시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삼국사기 및 중국의 사서에 나당군과의 전투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된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진현성 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안내판과 산성을 둘러 보고 내려와 갑천길을 따라 내려간다.
흑석산성 안내표지판
고무래봉 북쪽 줄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유천동 마을에 도착한다.감나무가 마을 전체을 감싸고 마을 앞은 갑천이 원을 그리며 돌아 가고 유천동 마을앞 갑천에는 다슬기 잡는 사람들이 많다.마을 길은 양천길로 되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유천동이라 대전시 중심가에 있는 유천동과 헷갈린다.갑천은 봉곡교 밑을 지나 금곡천과 만난다.
온통 감나무로 둘어 쌓여있는 유천동(앞 갑천은 다슬기 잡는 사람이 많다)
봉곡교를 지나 세점마을로 향한다.세점골 이라는 이름이 고유지명이고 한자어로 금곡이라 표기되어 봉곡이라는 지명보다 더 애용한다.느티나무와 보리바우가 있는 안세점마을 에 도착한다.도로에서는 마을이 보이지가 않는다.가을 배추를 손질하고 있는 2분의 아주머니를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듣는다.
안세점 마을 위로 서북쪽의 산이 장군산이며 명당 자리라 하여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묘를 쓴다 한다.평풍바위,말바위 이야기며 구수봉 에는 산신제당이 있고 지금도 산신제를 지낸다 한다.산신제 드는 비용은 산제답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여기에서 나오는 도지를 받아 경비를 충당한다 하는데 이 산제답을 희사한 사람이 천씨라 한다.이름을 알려 줬으나 그냥 천씨라 적는다.
안세점 마을(도로에서는 마을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분은 세점마을의 천석군으로 세명의 부인을 거느렸다 한다.한동네에 3명의 부인중 첫 번째 부인에게서 3명의 딸이 있었고 두번째 부인은 마을 아주머니 말을 그대고 빌리면 헌부인 이었다 한다.천씨가 무서워서 도망을 못갔다는 말도 하고,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남매를 두었다 한다.
천씨가 죽을 때 전재산을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돌아 가셨는데 천씨가 죽자 2번째 부인과 3번째 부인은 남매을 남겨두고 떠났다 한다.그뒤 남매는 큰어머님 밑에서 배우지도 못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으며 잘랐다 한다.지금은 거지(그대로표현 했음)가 되어 어디에 사는지 알길이 없고 딸들은 지금도 대전에 살고 있다 한다.그런데 아주머니가 열을 내는 것은 왜 산제답이 우리 마을 것인데 대전시 논이 되었냐고 항변을 하신다.
마을 입구에는 천씨의 공덕비가 있다 하는데 찾지를 못하고 승강장이 있는 바깥세점에 도착한다.구봉산 서부능선 자락밑에 자리잡고 있는 바깥세점 마을 입구에는 장승이 서있다.승강장 평상에 앉아 있는 2분의 할머니에게 마을 이야기를 듣는다.
바깥세점 마을 입구의 장승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에 대해 물으니 지금도 거리제를 지내고 있다 한다.구봉산을 가리키며 산신제도 지낸다 한다.거리제와는 달리 산신제는 매년 정월 초 열흘 안쪽 으로 길한 날을 정해 산신제를 지낸단다.
바깥세점 마을 (뒤는 구봉산 서부능성 자락)
산신제당은 덕수 이씨가 지었다는 기록에 덕수이씨를 물으니 한분의 할머니가 우리 할아버지(남편)가 덕수 이씨란다.1남3녀를 두었다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4년전에 작별 하였고 첫째와 둘째 사위는 축협에 근무를 하고 막내인 아들은 공주에서 교사로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다 조상님의 보살핌 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끝없는 할머니들의 마을 자랑을 뒤로 하고 세점골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따라 봉곡교가 있는 대추벌에 도착 일정을 마감하고 대전 유성으로 자전거 폐달을 밟는다.(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