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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빌2:5)
너희 마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은 찬송가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에 나타난 내용을 통하여 은혜받고자 합니다.
이 찬송은 찰스 가브리엘(Chales Hutchinson Gabriel, 1856-1932)이 작사,작곡한 노래입니다. 그는 1856년 8월 18일 미국 아이오와 주 윌튼(Wilt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족의 농사를 도우면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들은 가브리엘이 음악적 소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게 리드 오르간을 구입해 주었는데, 그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음악적 기초소양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17세 때 음악과 가사를 창작하는 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1890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감리교회에서 지휘자로 활동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시카고에 정착하여 17년간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거나 작곡하였습니다. 생전에 8,000여곡의 성가를 발표하였으며, 1932년 9월 15일 로스엘젤리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찬송가집에 수록된 그의 찬송가는 89장 “샤론의 꽃 예수”(곡), 108장 “그 어린 주 예수”(곡), 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곡),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시,곡), 458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곡), 490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곡),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곡),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610장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시,곡)가 있습니다.
이 찬송은 주님이 본을 보이신 것 가운데서 특히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님의 거룩하심을 자신의 삶으로 이루어 나아가겠다고 하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또한 이 찬송은 주님을 따라 사는 생활이 많은 고난과 시련이 따른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시며 고난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그 주님을 본받음으로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주님께서 가지셨던 거룩한 성품에 이르러야 한다는 강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는 성도의 고난의 의무만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의 영광을 우리가 입게 될 그 날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는
첫째, 평강이 찾아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숨어서 지낼 때에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하느냐”하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하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건에 대하여 의심하고,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벌어질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으로 숨죽이고 살면서, 제자들이 모여서 이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광풍이 몰아칠듯한 징조로 예루살렘 성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인지라 예수님을 따랐던 자신들도 신체적인 위해를 당할것이라고 짐작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실패한 모의에 대한 사후 대책으로 제자들까지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문과 증인들이 있음으로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덮으려고 혈안이 되어 제자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아신 예수님께서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와 불의와 불법이 빛을 가장하여 선한 이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고, 때로는 일생을 망쳐놓기도 합니다. 빛을 가장한 어둠의 세력들이 사회를 혼란케 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도록 하는 흉악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위법과 불법도 서슴치 않는 위선자들로 인하여 국가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며, 선량한 시민과 기업이 위태로운 처지입니다. 길거리로 뛰쳐나간 이기주의자들의 피해자인양 호소하는 시늉에 깜박 속고 있습니다.
그들중 많은 이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진실된 믿음의 소유자는 가슴 아파 합니다.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말씀이 기억납니다.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내 영혼 날마다 신령한 말씀을 배웁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으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7-48)
우리는 새벽 조용한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손을 모아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험한 세상 살아갈 때에 승리할 수 있은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악한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아니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영혼이 건강한 생각과 경건한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럴지라도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 넘어질뻔한 때가 많지만 그때마다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이라 하였고, 잠언 기자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3)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둡고 험악한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실족하지 않도록 비춰주시고, 간사하고 악의를 가지고 유혹하려고 접근하는 무리를 막아주시며, 내 영혼이 곤핍하지 않도록 시원한 생수가 되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며”,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되라”는 말씀과 같이 선한 양심과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된 생활을 하도록 교훈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왕 때에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아삽이란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하였습니다. 환난날에 파난처되시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면 평안하고 안전합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은 신령한 은혜를 입어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셋째, 가는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집니다.
인생길은 고해와 같다고 합니다. 거친 풍랑은 거대한 함정도 순식간에 삼켜버리고, 태산 같은 군함도 부셔버릴 정도입니다. 우리 인생은 날마다 새로운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시간은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인 듯 하지만 실은 매 순간이 새로운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과거에 살아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 하며, 어떤 길을 가게될지 전혀 모른체 살아가기에 신비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이숙 선생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라고 노래했습니다.
지나온 인생길을 더듬어 보면, 힘들고, 눈물 나며,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해온 것은 주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이란 구절에서 시인의 고단한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상대를 중퇴하고, 동백림사건으로 모진 고문과 후유증으로 몸과 정신이 많이 상했고, 불임이 되고 이가 빠져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신체적 고통을 겪었으며, 정신착란 등으로 괴로워하여 음주 없이는 잠도 못 이루는 지경이었을 때 쓴 시가 ‘귀천’입니다.
안이숙 선생이나 천상병 시인처럼 우리 인생도 거칠고 험한 길을 가지만,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은 그 순간에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요즈음 많이 불리는 송경민의 ‘은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불평은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이 채워지기 않을 때 나오는 원망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지도 못 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 손에 쥔 것으로 만족하며 살면, 원망이나 불평이 사라지고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나옵니다.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며 찬양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시려고 가신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엄마가 자녀에게 ‘시장가서 맛있는 것 사 올테니 집에서 숙제하고 있어’라고 약속한 엄마를 기다리는 자녀와 똑 같습니다. 엄마의 당부는 ‘숙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숙제를 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입니다. 이 숙제는 차근차근히 쉬지 않고, 성실히 해야 합니다. 먼 곳까지 가지 못할 지라도 교회주변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매 순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며 대인관계에서 온유한 모습을 보이면 천 마디 말보다 더 효과가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말의 실수가 있고, 말의 실수가 있으면 인격이 손상을 당하고, 인격이 손상을 당하면 신앙이 치명상을 당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구부러진 잣대를 가지고, 상대를 측정할 때는 부족하게 느끼고, 자신을 측정할 때는 넘쳐나게 보입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며, 비난하고 책망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의인인체 하지만 실상은 해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서 겸손과 온유를 연습하여 몸에 익숙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세워주고 빛나게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상대방을 실족케 하여 예수님을 떠나게 하는 자가 되면 안됩니다. 상대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 흘리는 날이 있습니다. 순간의 감정조절을 못하여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습성은 치유 받아야 할 환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의 질병도 고쳐주십니다. 다만 본인에게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다시 오실 주님은 우리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참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됩시다.
예수사랑선교회 임 웅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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