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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의 꿈
이 우 동 지 음
1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꼭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화려하고 거창한 꿈이 아니라 아주 소박하고 작은 꿈이었다.
혈기 왕성한 시절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국토 방위를 위해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병정놀이를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그곳을 한번 찾고 싶음이었다. 차비 몇 푼 쓰고 다녀오면 될 것을…….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한번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보낸 세월이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도 해보았으나 적극적인 반응이 없었다. 혼자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창궐하여 3년이란 세월이 또 지났구려. 이젠 운전도 힘들어서 그곳까지 왕복할 자신이 없다.
그럼 이제 아주 작고 소박한 나의 꿈을 접어야 하나? 하는 암담함에 빠져 있을 때…….
작년 연말에 안동 본가에 계시는 형수께서 전화가 와서 온혜 도개정사에서 관리인이 연락이 왔는데 부산에서 군생활을 11병참대대에서 같이 한 박소남 씨가 이우동 씨를 찾는다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주었다고 하시면서 박소남 씨의 전화를 나에게 알려 주셨다.
전화를 끊고 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군복무 시절 서로 간에 정을 나누며 끈끈하게 지내던 몇몇 병사들이 가끔 보고팠으나 연락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힘든 일을 소남이가 해 냈구려. 곧장 소남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소남 씨! 나 우동이야.”
두사람은 너무 감격하여 한동안 말문을 열수가 없었다. 군복무를 끝낸 후 56년 만이었다. 잠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후 내가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게 되었는지를.
내가 교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안동시 교육청에 여러 번 문의했지만 실패하고, 군복무시 내가 집으로 편지를 보낼 때 주소를 기억하고 도개정사를 찾기 위해 도산면사무소에 연락을 하였더니 면사무소 여직원이 도개정사에 연락하여 접선이 되었다고. 나를 찾기 위해 평생을 동분서주했단다.
군복무시 가장 친밀하게 지내던 함국진, 박소남, 백영욱, 이우동이었다. 국진이와 영욱이는 벌써 소남이가 찾아서 만남을 가졌단다. 국진이와 영욱이의 전화를 알려 주어서 통화를 했다. 영상통화를 하고 그룹통화도 했다. 빠른 시일 내에 우리 만나서 11병참대대를 찾기로 하였다.
올해는 유난히도 추위가 계속되고 있어 날씨가 풀리면 만날 날을 정하기로하고 기다리던 중 단톡방에 *11병참 벗들* 이라는 문패를 걸고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느림보 시간을 재촉하고 있단다.
드디어 소남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5월 17일 서울역에서 11시에 만나 서울에 있는 영욱이 차로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로 향하기로……. 1박2일 일정이란다. 부대를 방문하고 화천댐을 한 바퀴 돌아서 귀경길에 가평에서 일박 하기로 팬션 예약까지 마쳤단다.
주도면밀한 소남이의 활약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소남이는 부산에서 나는 대구에서 국진이는 홍천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발길들이 얼마나 신날까? 단번에 폰을 열고 KTX 동대구ㅡ서울 승차권을 발권받고 17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하루가 여삼추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렇게도 느린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시간도 때가 되니 어쩔 수 없는지…….
오늘이 기다리고 고대하든 17일이라니. 새벽같이 일어나서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하며 부산을 떨다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갑시다, 동대구역으로!”
기사에게 한마디 던지고 초조히 앉았다. 20분이 채 못 되어 역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려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드디어 나를 싣고 달릴 KTX산천4026호가 우렁찬 굉음을 토하면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재빨리 승차하여 8호차 8A석에 안착했다.
잠시 후 열차가 출발하여 김천구미역, 대전역, 오송역, 천안아산역, 광명역을 거쳐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을 때 소남이의 전화가 왔다. 중앙 인포메이션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열차가 도착 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대합실로 나오니 머리가 희끝한 소남이의 모습이 보인다.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놓고 서로 얼싸안고 한참을 부비면서 56년만의 회포를 풀었다. 잠시 후 ‘국진이는?’ 하고 내가 물으니 국진이는 홍천에서 자기차로 춘천휴게소로 직행한다고, 거기서 합류 한단다.
그럼 이제 영욱이의 차만 오면 춘천으로 출발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강남 집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여 오던 중 건설노조 데모로 인해 차가 막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고 잠시 더 기다리라고 연락이 왔다.
알았다고 하고 기다리던 중에 또 연락이 와서 도저히 안 되니 지하철을 타고 충무로역으로 오란다. 할 수 없이 지하철을 타려고 나가다가 내가 말했다. 지하철은 무슨 택시로 가자고 했더니 그래 충무로역이 가까우니 그러자고 하더니, 아니야, 그쪽에서 이리로 오지 못하는데 택시는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고? 할 수 없이 4호선을 타고 충무로역에 내려 도로변에 주차를 해놓고 비상깜박이를 켜 놓은 채 기다리던 영욱이를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머리는 백발이 되었어도 숱은 풍성하였으며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빨리 출발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춘천 휴게소에 도착하여 국진이를 만났다. 힘찬 포옹을 하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두를 다만나고보니 배가 고팠다. 시계바늘이 2시를 넘기고 있었다.
춘천시내로 진입하여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와 춘천 막국수집을 찾았다.
늦은 점심이라 배불리 먹고 빨리 11병참대대를 찾기로 하고 출발하여 달리던 중 춘천댐에 도착하여 잠시 차를 세우고, 복무 중에 보급수령 차 자주 드나들던 그때의 향수를 맛보기 위해 사진도 찍고 비포장으로 먼지를 덮어쓰던 그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잠시후 이제 지척인 11병참대대를 향해 출발했다. 구비구비 모퉁이를 돌아 부대가 가까워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56년 전의 부대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까?
위병소 앞에 있던 ‘경북상회’는 그대로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드디어 차는 사북면 지촌리 어리고개에 도착했다. 옛날 그시절에 헌병부대의 초소가 있던 그자리였다.
오면서 부대안을 입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견들을 나누면서 왔기에 모두들 하차하여 위병소를 찾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군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문에 11병참대대라는 표식도 없었다. 위병소 문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도 없고 폐가 그 자체였다. 저 멀리 부대막사와 1종창고 취사장 등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공사하는 모습이 보이고 건설 회사 현장사무실이 보였다.
직원 한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우리는 1965년에서 1967년까지 이곳11병참대대에서 복무하던 동기들인데 부산에서, 대구에서, 홍천에서, 서울에서 56년 만에 오늘 찾게 되었는데 부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니 자기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공사는 탱크부대가 주둔하기 위한 공사라고만 알려 주었다.
순간 온몸에 맥이 빠져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까하는 희망을 안고 K상사가 취사반장 시 내 쪼인트를 까던 취사장, 호랑이같이 무서우면서도 인자하시던 C대대장님이 근무하시던 대대장실, 내가 근무하던 군수과 사무실 등이 위치하던 곳 등을 두루 살펴보면서 지난 추억들을 떠 올려보았다. 부대에 전입 후 일등병 시절 군수과 2,4종계 조수로 근무 시 부식 수령을 위해 위병소 앞에 닷지차를 인솔해 보급차량으로부터 소고기를 인수 후 귀대하려는데 헌병검문소 헌병들이 몰려와 칼로 고기를 잘라 가려고하여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새끼, 꺼져!’하며 고기를 갖고 가버렸다. 할 수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귀대하여 취사장에 인계하였는데 취사반장이 저울질하고 나서 이 새끼 어디다 고기를 팔아먹고 왔느냐며 사정없이 내 쪼인트를 까기 시작했다.
군대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상기된 얼굴로 군수과로 복귀를 하였는데 나의 직속 상관인 보급관 L소위님이 나를 보더니 ‘무슨 일이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내 바지를 올려보라고 하여 할 수 없이 올리니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어떤 놈이야 하시면서 이실직고를 강요했다. 할 수 없어서 사실대로 얘기를 했더니 전화를 걸어서 당장 취사반장을 호출했다.
잠시 후 취사반장이 보급관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보급관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라고 보고한다. L소위는 다짜고짜로 취사반장의 쪼인트를 까면서 넌 임마 군생활을 할 만큼 한 놈이 군수과 요원을 이렇게 만들어 하면서 역정을 부리자 취사반장이 ‘보급관님! 부모뻘 되는 저에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고 한마디 하니, L소위가 ‘야임마! 군대는 계급이야!’ 하면서 앞으로 주의 하라고 하고 돌려보냈다. 그 후로는 내 군생활이 L소위의 그늘에서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호랑이 같은 대대장님은 엄격하면서도 일면 자상하시고 정이 있는 분이셨다.
군 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화장실에서 휴지로 갖고 갔던 신문을 읽고 있던 중 서라벌예대 여학생이 쓴 글 한 편을 읽고 공감이 갔다. 바로 그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젊고 건장한 청년으로 대한민국의 국토 방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나의 소개와 학보지에 소개된 귀하의 글을 읽고 공감을 받았다는 내용과 함께 앞으로 그 공감대를 서로 넓혀 나가자고 제안을 했다.
일주일 쯤 지나서 회답이 왔다. 어린아이의 눈망울처럼 맑고 순수한 마음이 라면 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펜팔이 이루어젔다. 조심스럽게 편지가 오고가기를 몇 달이 지났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편지 내용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어지고 그리워지는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저쪽에서도 오는 답장이 내 뜻을 거스르는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 사이는 연인의 사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용기를 내어서 한번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 어느 일요일 11시에 창경원 식물원 앞에서 기다린다고. 드디어 그 일요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토요일에 대대장께서 이번 주는 일체의 외출 외박을 금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장님의 지시를 어기고 외출을 했을 시 처벌 수위는? 아니면 내가 약속을 해놓고 펑크를 냈을 시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판단이 서지 않으면서도 내 결심은 가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춘천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부대앞 도로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 저쪽에서 대대장님의 지프차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앞이 캄캄해젔다. 그 지프차는 잠시 후 내 앞에 멈추고 대대장님께서 ‘이 일병 어디가는 거야?’ 하신다. 순간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음미하면서 사실대로 말씀을드렸다. ‘펜팔로 맺어진 여대생과 오늘 창경원에서 11시에 첫만남을 갖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서…….’ 하고 말끝을 흐리니 대대장님께서 지프차에서 내리시더니 뒷자리에 타라고 하신다.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차에 올랐다. 속으로 이제 영창으로 직행을 하는구나 하고 불안에 떨며 가고 있었다. 춘천댐을 지나 지프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속으로 ‘과연 앞으로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하며 한숨을 쉬고 나니 지프차가 춘천역 앞에 멈추어 선다. 대대장님께서 내리시며 서울을 잘 다녀오라고 하신다.
“단결!”
하고 경례를 한 후 열차를 탔다. 그 이후 일정은 말할 것도 없이 술술 잘 풀렸다.
대대장님! 취사반장님! 이제는 두 분 모두 이승을 떠나셨겠지요? 늦었지만 오늘 이 자리를 찾아서 인사를 드리려고 왔는데 두 분들이 아끼시던 그 부대가 온데간데없습니다. 마음속으로만 그리움과 고마움을 전하면서 발길을 돌립니다.
과연 내 소박하고 작은 꿈은 이루어질 건지?
2
눈물겹도록 고맙고 멋진 대대장님의 격려를 뒤로하고, 열차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잠시 전의 불안했던 심정에서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변한 가슴을 안고 열차가 빨리 도착하기를 재촉하고, 또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열차는 드디어 성동역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뛰어 역무원에게 차표를 던지고 나와서 택시를 탔다. 기사에게 주문을 넣었다. 빠른시간 안에 창경원에 도착하라고.
택시가 창경원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박차고 나와서 식물원 앞으로 뛰었다. 헐떡거리는 숨을 가누면서 시계를 보니 11시10분이었다. 식물원 앞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 돌아간 건가? 아님, 나오지 않은 건가? 혹시 저 안에 있는 건가 하고 유리 넘어 식물원 안쪽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낙담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까만 우산이 눈앞에 보인다. 잠시 후 우산을 들어 얼굴을 내보이는 순간 나도 모르게 ‘YJ 씨!’ 하고 거수경례를 한 후 그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기에. 내 명찰을 자세히 보더니, 안심을 한듯,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저를 알아보았느냐고 묻는다. 학보에서 YJ 씨의 글을 읽을 때 게재된 사진이 저의 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잠시 후 우린 창경원을 빠져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비가 한 우산을 쓰며 걷는 우리에겐 고맙게 생각 되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12시가 넘었다. 식사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동안 꼬개꼬개 모아두었던 돈으로 점심을 쏠려고, 남자로서의 기를 뽐내고 싶었고, 씩씩한 군인 정신을 발휘하고 싶었다. 무엇을 좋아 하느냐고 묻는다.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했다.
가까운 곳에 음식점이 있었다. 내가 먼저 불쑥 들어갔다. 비오는 일요일이라 손님들이 보이지 않는다. 안쪽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면서 주문을 넣었다. 나는 오무라이스를 주문하고, 무엇을 드시겠느냐고 하니, 아침을 늦게 먹고 나와서 전혀 생각이 없다고 혼자 드시란다. 할 수 없이 혼자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계산은 그녀가 한다. 군대의 용어로 서울은 자기의 위수지역 이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 중인데 그녀가 묻는다, 몇시에 서울을 출발해야 하느냐고.
오후 4시에는 떠나야 한다고 하니, 첫 만남을 폐쇄 된 공간에서 영화 관람을하거나, 다방에서 차를 마시기에는 아쉬우니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산책을 하자고 한다. 좋다고 쾌히 승낙을 하고 보니 마침 날씨도 개이고 있었다.
택시를 잡더니 정능으로 가자고 한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도심을 떠나 한적하고 상쾌한 숲속 이었다. 차에서 내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으니 벤치가 보인다.
그때는 만보기가 없어서 얼마를 걸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약간 다리가 아픔을 느껴 좀 쉬자고 하면서 벤치에 앉았다. 그녀도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채로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않는다. 서로의 편지가 오고갈 때 그녀의 나이를 알고자 무슨 띠냐고 물었더니 답장에 고양이띠라고 했다. 동료들에게 고양이띠가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야! 이친구야! 고양이띠가 어디있냐?’들 했던 이야기를 해놓고 둘이서 한바탕 웃었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남이지만 그동안 우린 수많은 서신을 통해 서로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초면이라서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나의 왼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위에 올려지고 힘주어 내쪽으로 당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자신도 조금 놀랐다. 이 행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녀도 나의 돌출 행동에 거부반응 없이 응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어지는 순간 짜릿하고, 감미롭고, 황홀함에 젖어 있을 때 어디에서 *연애를 하지 맙시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서로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개구쟁이 아이들이 저쪽에서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소중한 설레임이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이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우린 아이들의 요구대로 떨어져서 앉았다.
서로의 눈을 주시하면서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나는 일어서면서 이곳은 금연(禁戀) 구역이니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그녀도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일어난다.
오던 길로 다시 내려가면서 발견한 것은 내 왼손과 그녀의 오른손이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느낌이 정말 따뜻하고 좋았다.
한참을 걷다가 시간을 묻는다. 시계는 오후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은 교통상황을 예측할수 없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행동해야한다면서 춘천행 시외버스정류소로 출발하자고 한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좀 더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김없이 택시는 정류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내려서 매표소로 가더니 춘천행 티켓을 구매하여 내손에 쥐어준다. 시간을 보니 5분후에 출발예정이란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버스에 올라 지정석에 앉으니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그녀는 안녕을 기원하는 손짓으로 배웅을한다. 버스는 출발하고 나는 그녀의 손짓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쪽을 응시하면서…….
그녀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3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서 경춘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겪어본 소중한 순간들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YJ 씨! 또 만나요.’ 독백을 되내이며 허전한 내 마음을 달래면서 그렇게, 그렇게 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버스는 춘천터미널에 도착한다.
다시 화천행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중 별로 무리를 한 일도 없는데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잠시 후 버스에 올라 귀대하려는데 불현듯 아침에 대대장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후의에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주머니가 빈약한 육군졸병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예의를 갖추어 깍듯이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한다. 눈을 감고 있어도 버스의 운행코스는 훤히 알 수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이제 눈을 떠야겠다고 판단되어 눈을 뜨니 어리고개 부대 위병소 앞에 버스는 멈추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위병소를 지나 막사로 향하는 나의 걸음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고 힘든 일정들이 무난히 해결되어 가슴 뿌듯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YJ 씨와 헤어짐으로 인한 그리움과 가슴아림으로 얼룩진 자신을 발견하면서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단결! 대대장님께 용무있어 욌습니다.”
이튿날 아침 대대장님께 인사차 들러서 경례를 한다. 순간 대대장님께서는 “짜식! 잘 다녀 온거야?”
하신다. 네! 하며 큰 소리로 답변하니 ‘소문 내지마.’ 하시며 물러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단결! 하고 거수경례를 한 후 밖으로 나오니 당번병이 ‘넌 운 좋은 놈이야.’ 한다. 그렇게 대대장님의 격려를 받으며 우리들의 사랑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몇 달 후 내가 YJ 씨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YJ 씨! 우리 부대에서 병사들 애인의 사진 콘테스트가 개최되니 이력서, 전신 사진, 명함판 사진, 수영복차림 사진(반나체), 키, 몸무게, 바스트, 웨이스트, 히프의 싸이즈 등을 적어서 보내 주세요.’
밋밋하게 사랑타령만의 편지가 오고가기를 몇 달이 지나니 뭔가의 변화를 위해 약간의 픽션이 가미된 이벤트를 꾸미고 싶었다.
일주일쯤 후에 사진과 서류가 등기우편으로 도착했다. 봉투를 뜯어서 사진을 보면서 동료들과 한바탕 웃었다. 옆에 있던 3종계 조수 김 일병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하고 나를 쳐다본다. ‘어떡하기는 심사를 해서 입선을 시켜야지.’ 하니까, 또 모두들 껄껄 웃는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약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김 일병이 콘테스트 심사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당연히 해야지 하면서 나는 주위를 살펴본다. 군수과내에 김 일병과 나, 그리고 행정과에서 마실온 윤 일병 셋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심사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고 내가 두 사람을 쳐다보니 윤일병이 ‘심사는 무슨, 단독 출마했으면 무투표 당선이지.’ 한다. 옆에있던 김 일병이 그러네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내가 받아서 그럼 심사는 끝났고, 시상은 어떻게 하지? 하니 윤 일병이 말하기를 진, 선, 미 중 진과 선 을 선택하면 약간의 픽션의 냄새가 날 것 같으니, 미로 결정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고. 김 일병과 나는 역시 행정과가 그냥 1과가 아니네 하고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며칠 후 내가 상장을 만들어서 윤 일병과 김 일병을 불러 어떠냐고 하니 ‘좋았어!’를 연발한다.
상 장
성 명 K Y J
귀하는 당부대에서 개최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11병참 Miss美에 입상
하여 본 상장을 드립니다.
1966년 ㅇ월 ㅇㅇ일
육군 제11병참대대장 CTM
그런데 상장은 해결되었는데 상금이 문제였다. 또 윤 일병을 처다보며 어떻하지? 하니 윤 일병이 잠시 생각하더니 상금은 진:7,000 원, 선:5,000 원, 미:3,000 원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 또한 그의 뜻을 따르기로했다. 그리고 나서 상장을 윤 일병에게 주면서 대대장 직인을 눌러 오라고 하니, 결재를 득해 오라고 한다. 옆에 있던 김 일병이 ‘과연 대대장님께서 결재를 하실까?’ 한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윤 일병이 말하기를 내손으로 날인할 수는 없으니 이 일병이 위험을 떠안으란다. 순간 내가 ‘알았어! 내가 쪼인트를 까이지.’ 하며 행정과의 윤 일병 책상위 인장함에서 직인을 꺼내어 상장에 힘주어 눌렀다. 그리고 곧장 YJ 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영광스럽게도 Miss미에 등극하였으며 상금은 3.000원을 수령하였으나 주위의 악동들에게 축하 파티금조로 차압당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내고 생각을 해 본다. 상장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소를 지을까? 아님 진이 아니어서 아쉬워할까?
며칠 후 춘천에 보급 수령을 위해 다녀오니 내 책상위에 소포가 와 있었다. 무엇인가 하고 발신인을 보니 YJ 씨였다. 반가운 마음에 급하게 풀어보니 통닭 2마리와 바나나, 귤, 빵, 과자, 콜라, 담배 등 다양한 음식과 메모지가 있었다. 메모 내용은 악동들과 함께 맛있게 나누어 먹으란다. 김 일병보고 윤 일병을 부르라고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왜 또?’ 하고 윤 일병이 들어온다.
음식들을 보면서 웬일이야 하더니 발신인을 보고 ‘음, 상장값이로구나.’ 한다.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먹기나 해, 하고 내가 핀잔을 준다. 모두들 허겁지겁 집어먹고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통닭 한 마리는 직인 날인값이니 갖고 가서 행정과에서 나누어 먹으라고 윤 일병에게 주니 직인 위력이 대단하다며 갖고 나간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괴롭고 힘들던 졸병 시절이 지나가고 내 모자에는 병장 계급장이 꽂혔다. 지금까지 힘든 시간들을 견뎌낸 것은 YJ 씨의 사랑 덕분이라는 생각에 또 한번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남은 군생활을 내방식대로 변화를 모색하기로 다짐을 한다.
훈련소에서부터 병참학교를 거처 11병참에서의 군생활은 기합과 매맞기로 점철된 과거였음을 돌아보며 내가 고참이 되면 이는 반드시 시정하기로 결심을 굳힌 지 오래되었다.
병장 진급을 한 지 몇 주일 후 드디어 내가 내무반에서 제일 선임병이 되었다. 그날 저녁 점호가 끝난 후 잠깐! 하고 내가 일어서서 주목! 하고 소리쳤다. 모두들 놀라서 또 이 병장 기합이로구나 하고 체념한 얼굴들이었다.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실천해주기 바란다. 내가 군복무를 하면서 받아온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극심했음을 토로하며, 이는 국토방위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처사로서 건전한 병영 문화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본인의 실수나 과오 없이 무더기로 단체 기합을 받는 경우, 상급자의 기분에 따라 줄빳다를 치는 등 병사들의 육체적 고통과 사기 저하는 분명 전투 태세에 악영향으로 작용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지향하는 군복무 자세를 밝혔다.
“내무반의 밝은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존경심으로 대하고, 상급자는 하급자를 사랑으로 대하며, 군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어떠한 처벌도 해서는 안 되고, 단체 기합이나 줄빳다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직업이 교사다. 학생들을 지도할 때 이성과 지성을 총동원하여 교육에 임한다. 우리 내무반의 병영문화 확립을 위해 나는 빳다 대신 이성과 지성을 택할 것이다. 여러분들도 내 뜻을 따라 적극 협조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 이상!”
하고 내 말을 끝내니 우렁찬 박수와 함께 여기저기서 ‘이 병장님 화이팅!’ 을 외친다.
그후 나는 일과가 끝나면 늘 내무반의 분위기를 예의 주시한다. 누가 억울한 구타를 당하지 않는지? 상, 하급자 간의 대화는 서로 예의를 갖추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고참병들의 식사를 졸병들이 늘 취사장에서 배식받아 내무반으로 갖다 나르던 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순간 나는 가슴 뿌듯함을 느끼면서 내 뜻을 따라준 병사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군복무가 끝나기 전에 내가 지향하는 건전한 병영문화를 꼭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4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에게도 제대 특명이 내려젔다.
순간적으로 훈련소에서 부터 본 부대까지의 군생활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친다. 어떤 이는 군복무를 감당하지 못해 탈영을 하고, 어떤 이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정도를 걷지 못하는 병사들도 많은데,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광의 제대 특명을 낚아챈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병영문화 개선을 위해 노력한 덕으로 후배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나에게는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 달 남짓 지나 나는 푸른 제복을 벗은 민간인으로 탄생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부풀고, 한편으로는 이제 철이 들어가는 후배들과의 헤어짐이 안타깝다. 후배들은 ‘이 병장님의 제대를 축하한다.’고는 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듯하다.
뽀진뽀진 시간이 흘러 제대복을 수령하여 하루 한 번씩 입어보면서 으쓱해 한다. YJ 씨에게 보낸 편지에는 몇월 며칠 춘천역전 ㅇㅇ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술 타령으로 이어진다.
오늘은 군수과에서, 내일은 행정과에서, 모레는 어디에서 등등. 제대 축하파티로 알콜에 찌든 몸을 가누기가 무척 힘든다. 그러나 어쩌랴, 끈끈한 정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을!
그럭저럭 찌든 술이 깨이기도 전에 제대일자가 다가왔다. 취사장에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내무반으로 돌아와서 내 모든 관물을 반납하고 제대복으로 갈아입은 후 제대 신고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창밖으로 대대장님의 1호차가 진입하는 모습이 보인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내무반을 나와서 대대장실로 향한다. 이윽고 당번병이 열어준문을 통과하여 대대장실로 들어서서 대대장님께 단결! 하며 거수경례를 한후 ‘병장 이우동은 1967년 ㅇ월ㅇ일부로 제대명을 받았기에 신고합니다.’ 하고 신고를 하니 대대장님께서 내 앞으로 다가오셔서 ‘이 병장의 제대를 축하하고 앞날에 큰 영광이 있기를 기원하네.’ 하시면서 악수를 청하신다. 굳게 악수를 나누면서 ‘대대장님의 건투를 빌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오니, 나를 춘천역까지 태워줄 닷지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는 국진이, 영욱이, 소남이 등이 타고 있었다. 춘천까지 전송을 하기 위함이란다. 차가 출발하여 위병소를 지날 무렵 도로변에 내무반원들이 도열하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순간 나는 기사에게 차를 멈추라고 한 후 내려서 일일이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찡했다. 병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보였기 때문에.
얼마 후 춘천역전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아! 이제 나는 영영 11병참과 멀어지는구나!’ 하는생각에 잠겨있던 중 차를 돌려보내고 다방을 향해 걸어가는데 제대를 하면 날아갈 것 같던 기분이 오늘은 뭔가 아쉬움이 남아있는듯.....
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저 안쪽에서 일어서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내가 사랑하는 YJ 씨였다. 그 앞으로 다가가서 가벼운 인사를 하고 뒷쪽을 가리키며 내 군대 동료들이라고 소개를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게했다. 차를 마시고 잠시 환담을 나눈 후 식사를 하기위해 우리가 자주 들르던 막국수집을찾았다. 국수를 모두들 맛있게 먹고 그릇을 비울때 쯤 짖궂은 소남이가 ‘YJ 씨! 국수 맛있죠?’하고 묻는다. ‘네, 정말 맛있네요.’하고 YJ 씨가 대답하니, ‘이 국수가 춘천의 명물이랍니다.’하면서 ‘YJ 씨가 맛있다고하니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하며 급히 카운터로 나가 계산을 끝낸다. 식당을 나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이제 헤어져야할 시간이라며 군복무 마무리 깔끔하게 끝내고 다음에 꼭 만나자고 약속을 한 후 나는 춘천역으로 그들은 버스 터미널 로 향했다.
열차에 올라 YJ 씨는 차창쪽으로 나는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열차는 춘천을 뒤로하고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속살을 드러낸 6월의 싱그러운 숲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 속으로 우리둘은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면서 한동안 몽롱한 정신으로 가고 있었다. 얼마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2월 졸업식 때 나에게 인사시켜준 올케는 나에 대한 느낌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고. 그녀의 가족 중에서 내가 만난 첫 번째 인물이었으니까.
결혼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내면은 모르니까 외면상으로는 멋있었다고 하더란다.
우리가 인연을 맺은 지 어언 2년이 지났다. 두 사람이 가꾸어온 사랑이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된것 같다. YJ 씨는 졸업을 했고, 나는 병역 의무를 끝냈으니, 지금이야말로 적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 프로포즈를 하기에는 성급하다는 생각에 침묵을 지킨다.
열차가 서울시내로 진입을 하니 어디로 갈거냐고 묻는다. 혜화동 나의 고모가로 가야한다고 하니 같이 가잔다. 그 동안 군복무를 하면서 외박시 가끔 들리던 곳이다. 고모부가 성균관에 근무를 하고 계셨고 생활은 관사에서 하고 있었다.
열차를 내려 택시를 탔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내려 가끔 들리던 다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저쪽에 고모부의 모습이 보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검지손가락을 곧추세워 입에 대고 모른 척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영문도 모르고 나는 반대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차를 주문하고 고모부쪽으로 슬쩍 눈을돌려보니 아! 이게 웬일인가? 마주 앉은 분이 아버지셨다.
내가 아버지를 알아보는 순간 고모부께서는 또 모른 척하라는 눈치를 준다. 그런 사이 차가 나와서 급하게 차를 마시고 그녀를 향해 YJ 씨! 오늘은 조금피곤하여 쉬고 싶으니, 내일 여기서 만나 점심을 하자고 하니 그러자면서 일어선다. 밖으로 나와서 전송을 한 후 다시 다방으로 들어가서 아버지께 제대신고를 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고모부께서 반갑다고 악수를 청한 후 고생했다면서 내손을 쓰다듬어주신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보시고 처남! 내말이 맞지 하시니, 아버지께서 자리를 까시지요 하신다. 어릴적부터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여서 별로 대화가 없이 지냈다. 그러나 고모부께서는 다정다감하시면서도 젊은이들을 이해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멋쟁이 어른이셨다. 그동안 군복무시 가끔 고모부댁에 들려 고모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YJ 씨와 펜팔로 맺어진 사연을 들으시고는 적극 지지를 하시면서 큰 관심을갖고 우리들의 관계를 물어보시곤 했다.
지난번 마지막 외박시 고모부댁에서 유하면서 오늘 부로 제대 특명을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그날은 YJ 씨도 마중오기로 했다는 얘기를 했었더니, 어제 마침 아버지께서 오셔서 주무시고 가시려는데 내 얘기를 하시면서 틀림없이 오늘 내가 YJ 씨와 같이 나타날 것이니 예비며느리 선을 보자고 대기중이셨단다. 다방을 나와서 고모부댁으로 갔다.
고모님께 인사를하고, 고종형님 내외분께도 인사를 했다. 저녁식사 후 고모부께서 아버지께 물으신다. 처남, 아까 그 신부 어떻던가하고. 아버지께서 보기에는 수더분하더라고 하신다. 이윽고 고모부께서 그럼 됐네! 하시면서 성균관 담양지부에 오더를 내려서 그 집안을 알아보았는데 자네집과 혼사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형님은 우동이의 혼사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으시냐고 하시니, 고모부께서 펜팔로 맺어진 젊은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숭고하고, 고귀한 것인가? 그 결실이 아름답게 맺어지기를 나는 바라네 하신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다. 나는 아버지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펜팔로 맺어진 여대생과 사귀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는데, 반대 의사를 밝힌 일이 없으셨다. 그런데 어느 날 모 가문에서 중신이 들어오면서 태도가 바뀌셨다. 보름전 쯤 부대로 온 편지에 지금 사귀는 아가씨와 깨끗이 헤어지고 제대 후 선을 보라신다. 이런 일을 두고 청천병력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다. 어떻게 이루어진 관계인데, 외출금지 지시를 어기고, 영창갈 각오를 하고 만난 사이인데…….
이튿날 YJ 씨와 만나서 점심을 하고, 나는 이제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안동으로 가겠다며 작별을 하자고 하니 청량리역 까지 같이 가잔다. 역에 도착하여 열차표를 티켓팅한 후 내려가서 직장이 결정되는 대로 연락하겠다며 열차에 올랐다.
안동에 도착한 후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본 할머니께서는 그래봐야 소용없단다. 벌써 아버지께서 교육감에게 전화를 넣었단다.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 중이었는데 제대 후에는 전직을 하기로 결심을 굳힌 지 오래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막역한 관계인 교육감에게 복직 발령을 부탁하신 모양이다.
며칠 후 월성군으로 발령 통보가 왔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직장 구하기가 어려워 근무를 하면서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부임을 했다.
YJ 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일단 복직을 했으니 여름방학때 만나자고.
따분하고 지루한 교직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선을 보라는 연락이 오는데 함구로 일관했더니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학교를 방문하셔서 이번주 일요일에 대구 모 다방에서 선을 보기로 약속했으니 그리 알라 하시면서 만약에 약속을 펑크내면 너와 나의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시고 돌아가셨다.
고민을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어떤 경우일지라도 부자지간의 연을 끊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선을 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토요일에 대구에 와서 누님댁에서 하룻밤 묵고 일요일에 시간 맞추어 아버지와, 누님, 나 셋이서 다방으로 갔다. 20분정도 시간이 남았다. 아버지께서 입을여신다.
내가 명색이 영남 유가의 종손으로서 자식 혼사를 너들의 뜻에 맡겨 놓고 볼수만은 없다시며, 그것도 주위에서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 있는 양가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중매업자 말에 의하면 네가 유학을 원하든, 사업을 추진하든,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지원을 하겠다니 표정 관리 잘하고 맞선에 임하라고 하신다. 덧붙여 하시는 말씀은 네가 사범학교 입학을 거부하고, 교직이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 중인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그 모두가 집안 형편 때문이였으니 이제라도 꿈을 이루기 위해 결단을 내려주기 바란다고 하신다.
순간 이 세상에서 어느 부모가 자식 잘못 되라고 축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 하고 승복할 수 없어서 침묵을 지킨다.
그러던 중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되었다.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선보는 자세를 어떻게 취해야할 지 모르겠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갈 것인지, 아님 내 고집대로 갈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아니지, 예, 아니오를 요구하는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눈 후 헤어지면 그만인데.’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편안해젔다. 이제는 올태면 와 봐라는 식으로 나의 태도가 당당해젔다.
그런데 선을보기로 약속한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을 보니 10분이 지나고 있다. 아버지 얼굴에 초조함이 역력했다. 잠시 후 어떤 남자가 아버지곁으로 오더니 귓속말로 한참 동안 얘기를 하더니 돌아간다.
아버지께서 언짢은 표정을 지으시며 하시는 말씀은 이러했다.
신부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업가로 활동 중이고 신부는 조모와 함께 국내에서 살고 있는데 조모가 편찮으셔서 오늘 나올 수가 없단다.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동이 만세를 외쳤다.
찻값을 치르고 다방을 나오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고.
시간이 흘러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상경하여 YJ 씨를 만났다. 만남 즉시 나는 결혼 얘기를 꺼내었다. YJ 씨댁의 분위기는 어떠한가고 하니 경상도 안동이 넘기 힘든 벽이란다. 그녀 아버지의 결혼관은 영호남의 벽에 갖혀 있음은 물론 아들 같으면 허락하겠으나 딸은 도저히 안 되겠단다. 잠시 후 내집 사정을 묻는다.
아버지께서 뿌리 깊은 유교사상에 안주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앞으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두 사람의 머리로는 해결방법을 찾기어려웠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내가 입을 열었다.
YJ 씨댁은 YJ 씨가, 나의 집은 내가 설득하기로 하고, 설득이 이루어진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도록 제안을하니 그녀도 내 뜻을 따르겠단다. 빠른 시일 안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약속을 한 후 아쉬움을 달래면서 우린 헤어젔다.
그후 나는 여러 차례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으나 요지부동이셨다.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연락할 수가 없다. 그녀에게서도 연락이 없다. 일 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아린 가슴을 안고 한 달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다.
결국 우리는 영호남의 두터운 벽을 넘지 못하고, 뿌리 깊은 유교문화의 높은 벽밑에 주저앉은 애틋한 연인으로 남으며 첫사랑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나에게는 정설로 다가옴을 느끼면서, 이만 붓을 놓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