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곡산(谷山)은 황해북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 748년(신라 경덕왕 7) 십곡성현(十谷城縣)으로 편성되었다가 757년에 진서현(鎭瑞縣)이라 개칭하여 영풍군(永豊郡)이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곡주(谷州)로 개편되고 995년(성종 14)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1393년(태조 2)에는 곡산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태종 때는 곡주(谷州)에서 다시 곡산군으로 격하하였다. 1669년(현종 10) 부로 승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황해도로 편입 되었다. 별칭으로는 덕돈홀(德頓忽)·고곡(古谷)·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 등으로 불리고 있다.
성씨의 역사
곡산한씨(谷山韓氏) 시조 한예(韓銳)는 원래 송(宋)나라 사람으로 1206년(희종 2) 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왔다가 귀화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했으며 후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곡산(谷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한예의 아들 한희(韓禧)는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으며 손자 한익(韓翊)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으며 한익의 아들 한진(韓瑨)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는 등 가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최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곡산한씨는 1,562가구 총 4,91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