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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아침
황 금 찬
바다는
달이 뜬 설악을 찾아
은하의 별들과
구름을 이야기하고
찬란히 열리는 하늘
수평선
태양이 꽃바구니를 들어
대청봉 머리에 걸어놓고
우리 바다 해원들의
출발의 깃발은 불새처럼 가벼웠다.
빛나는 이름, 젊은 새들의 날개엔
동반구 다시 서반구의 거리가 없고
사랑의 대화로 피우는
솜다리꽃
공원의 향기
울산바위 비선대 여기는 설경
평화와 사랑의 아침이
날개를 편다.
하나의 표정으로
세계는 행복하고
옷깃 스치는 그들을 위하여
허공의 무지개로
현교를 가설하노라.
밟고 오라, 이 우주안에
영원한 공원으로-.
아무도 모른다
황 금 찬
초침이 없는
시계는
도는 것 같지 않다.
가을은 소리도 없이
여름을 밀어낸다.
이 하루가
저무는
발소리가
불꽃으로
타고 있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소리 없이 흐르는
이름 없는 강물인가-.
홀로 떠나야지
최 은 하
손 씻고 떠나야지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게
산마루에 걸친 구름장 바라보며
매듭지던 매듭일랑 놓아버리고
챙겨 일어나 홀로 떠나야지.
되돌이킬 수 없는 자리
나도 거기 머물렀다가
훌훌 털어내고 떠나야지
한자락 바람으로 고이 서성이다가
무슨 말이란 말씨도 흘려버리고
저마다 지닌 못으로 박히고
대못으로 아픔 박으며 빈 들녘 떠돌다가
불러주는 이 없어도 휘휘 휘돌다가
떠나올 때 되돌아보던 자리
내 꿈으로도 정녕 자리 잡고
누군가의 이야기 중의 이야기로
훌쩍 박차고 가벼이 떠나야지.
새벽닭
최 은 하
분명히 그토록 오랜
어둠 살우고
여명 펼쳐오는 너
어디로부터의 계시인가.
층계 이뤄 쌓아온 밤을
버릇처럼 견디며
살아온 까닭은
너를 두고
─목숨은 고대하는
시종(始終)일 뿐
남아 있는 어둠 속에서
절망할 수 없는 너와
나의 최후에
끝날이어도 어느 역사의 유역에
목청 갈갈이 찢으며 펼치는
울음은 청아하게
우리를 일깨운다.
이제 아침을 불러
온갖 꽃을 피우는
날개의 휘날림
땅끝, 끝까지 휩쓰는 전위(前衛)의
저 목소리,
목소리.
윤중로 벚꽃
황 송 문
게처럼 횡보(橫步)만 궁리하는
국회의사당에 눈 흘기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구름 떼로 몰려와서
꿀벌처럼 닝닝닝 넋을 놓고 바라본다.
청운 꿈, 뭉게구름 바라보듯이
3.1만세 함성을 바라보듯이
화사한 꽃구름을 정신없이 바라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죽을 때는 저렇게
아름답게 진다면 월매나 좋으까
저렇게 양광(陽光) 다 독차지하고
인산인해(人山人海) 가랑이 밑으로 지나게 하고
떠날 때는 조용하게 지니 월매나 좋으까.”
하고, 아찔한 현기증 가열시킨다.
떠날 때는 화사한 꽃잎 흩뿌리면서
짧고 굵게 살다 가면 월매나 좋으까.
옆으로 실실 기는 게 꼴 볼 것 없이
꿀벌들 넘나드는 순결한 정사,
씨방 남기고 지는 꽃잎들의 세상은
이승 저승 윙윙윙 월매나 좋으까.
눈물의 씨앗
황 송 문
요염한 입술의 사랑을 받던
담배꽁초가 하나
혼신을 다 태우다가 버려진다.
승용차 유리문 밖으로
유성처럼 튕겨져 나온 목숨이
쇠창살 틈서리로 해서
하수구 시궁창에 버려진다.
금붕어가 물을 마시듯이
뻐끔뻐끔 빨아들일 때는
샛별같이 잠 깬 눈을 반짝이며
빛을 내던 여자와
빛을 내던 남자가
발길에 채이고 버려진다.
낮은 일흔 살
―사람
김 년 균
일흔 살이 넘으면 별일이 생긴다.
평소에 가깝던 사람들 물러서 가고,
손 내밀어도 손잡아 주는 이 없고,
자식들에게 이래라 하면 듣는 시늉도 않고,
역정이라도 내보이면 콧방귀로 돌아오고,
손주놈에게 되려 따귀만 얻어맞는다.
어찌할 거나. 어찌할 거나.
높으신 몸과 마음은 허공에 둥둥 뜨고,
넓으신 자리는 한숨이 들끓고,
깊으신 가슴엔 눈물만 고인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이 내린 분이다.
뇌(腦)
―사람
김 년 균
코에서 콧물이 난다. 또 감기가 왔나.
풀면 풀수록 콧물이 더욱 흐른다.
이렇게 많은 물이 어디에 모여 있을까.
머릿속에 호수라도 들어있는 것일까.
약을 써도, 주사를 맞아도 안 되고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해도 희망이 없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자, 왠일인가
거짓말같이 콧물이 뚝 끊긴다.
뇌의 지시라고 한다.
뇌가 쉬면 몸도 쉬고. 뇌가 잠들면
몸도 잠드는 것이라고 한다.
신기하게, 콧물이 한 방울도 안 나오고
근심걱정도 떨쳐버리게 된다.
그러나 아침 해가 뜨니, 왠일인가
뇌도 다시 잠깨어 일어났는가.
뇌는 다시 어제의 생각들을 불러놓고 자리를 편다.
남을 속이고, 또는 남의 뒤통수를 때리고,
또는 남의 담을 뛰어넘을 음모들을 꾸미고,
저들이 춤추고 놀아날 판을 벌인다.
어젯밤 멎었던 콧물도 다시 솟는다.
모두가 뇌의 연극이다. 뇌의 계략이다.
머리 속에 울퉁불퉁 들어앉은 해괴한 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의 뇌.
산수유꽃
가 영 심
숲 속의 길은 고요처럼 은밀히 눕고
낯선 길 보다 더 멀리
그리움은 뻗어있네
그대
가슴 다 뚫린 채
푸른 슬픔으로 뼈가 녹다가
한 순간 미칠 듯한 절망에 빠져 죽는
그러나 피 흘리지 않는 꿈이어서
노오란 산수유 꽃처럼
그리움이
헝클어진 마음속으로 한없이 퍼져들 때
그대 찾아 길 떠나리.
부레옥잠
가 영 심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가락 끝으로 물을 건드려서
살짝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순간 부레옥잠의 모세혈관이
활짝 열리더니
보랏빛 뜨거운 꽃입술이 벙글었다.
둥근 잠의 울림으로 퍼져 나가는
연못 물결
부드러운 물방울이 명상의 물음표를 털어냈다.
부레옥잠은 나의 삶을 지켜주었다.
물 위에 떠 있어도
든든히 뿌리 내리는 목숨
제 홀로 향기롭고
전혀 가볍지 않는 그녀의 세상살이는 씩씩하다.
세상 삶을 놓지 않으려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레옥잠은
내 삶의 아득한 중심으로 밀어 올린다.
안개강
이 동 백
정수리 가는 길은
늘 푸르고 깊은 안개강이 흐른다.
마디진 손을 내밀며 서있는
가로수 곁을 지나
마을 어귀 에돌아 흐르다 보면
짙은 안개에
손등까지 파르르 젖어들곤 한다.
나무들도 떼지어 다닐 줄 아나보다.
등어리가 잘린 들판의 전신주 너머로
하늘거리는 수초 사이를 헤집고
저 멀리 손을 잡고 둥둥 떠다니는
수목들의 희끄므레한 군상들이 보인다.
시름에 겨워
길게 누워 있는 강을 건너
다시 언덕을 넘으면
황달 든 얼굴로
아침 태양은 이제사 떠오르고
사람들은 부스스 안개를 털고
새로이 길을 나선다.
아버지의 강 - (1)
-移葬(이장)
이 동 백
아버지가 그리던 우리들의 고향이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움에 사시던 하늘이옵니다.
이제는 남루한 옷 훌훌 벗어버리시고
저희가 마련한 푸르름으로 갈아입으소서.
아버지의 그리움 차곡차곡 물려주시고
이제는 오롯이 가을로 깊어가소서.
아버지의 아들이 마냥 그리워할 고향이옵니다.
아버지의 아들의 아들과 딸들이
그리워할 아버지의 하늘이옵니다.
이제는 겨운 짐 풀어 던지시고
저희가 마련한 그리움으로 갈아입으소서.
그래도 못다 한 그리움 남으시거든
강물처럼 바다처럼 깊어가소서.
양수리에서
유 소 향
먼 데 산은 사위어 가고
가까운 곳에 드리운 그림자는
무슨 말을 하려 하네.
물안개는 나를 휩싸돌고
가까이 점으로 일어나는 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고.
갔던 길 되짚어 돌아오는 일이란
스스로 다급한 쫓김일레.
물비늘은 달려와서 달려와서
온갖 형상을 일러주고
앞산은 넌지시 나를 안아 어르네.
지는 해 뜨는 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데
나는 바람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볼 뿐
한 점의 실명으로 남았네.
조간신문과 모닝커피가 있는 풍경
정 민 욱
왈츠가 흐르고
라디오가 춤을 춘다.
활자들이 리듬에 따라
장단을 맞춘다.
바람ㆍ구름ㆍ비
오브제로 스케치를 하다
꽃비로 그리다
흙비로 덧칠해 지우고
그릴 수 없는 그림 (꿈)
보이지 않는 그림 (희망)에
아리고 저미는 진한 여운이
씁쓸한 커피 향에 젖은 체
아침신문 사회면에 찍힌 그림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바람까지
봄의 의미로 그리는
수수밭의 “밀레의 만종”
연두 빛의 이랑이 깃발로 일렁이며
아지랑이 속에 빛의 포자로 흩어진다.
눈 꽃 그리고 봄 꽃
정 민 욱
뚝, 잘라낸 흑백의 논리에
동서로 갈라진 파란(破卵)의 경계(境界)
바람으로 그리는 수묵화
되돌린 계절의 환희
한 방울의 이슬을 태워 그리고
한 자락의 바람으로 붓질하는
순간, 피어난 만화경 속의 풍경
계절의 모반
그 알 수 없는 비밀코드의 번호가
일치하는 순간
바람은 꽃으로 피어 꽃으로 지는
순환의 기억으로
계절의 간이역에서 펼치는
바람의 퍼포먼스
풀밭에서 글밭에서
유 회 숙
풀잎을 보면 같으면서 같은 게 없다.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풀밭과 글밭 참 많이 닮았다.
글도 엉키면 숨이 차다.
풀밭 사이로 태엽이 풀리듯 길이 난다.
그 길로 유모차를 밀고 가는 풍경과
풀잎이 풀잎에게 어깨를 기대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목소리 들린다.
슬픔은 푸릇푸릇 그 나름대로 소중함을
시를 쓰는 일이 상처가 아님을
수백 번 수천 번 풀잎을 일으켜 세우는 바람처럼
시를 쓴다는 건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지독한 고독이다.
살아가는 동안
시간의 성긴 그물 속에서
시인이면서 어머니임에 더없이 감사하며
아무도 밟지 않은 길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본다.
멀리 강물이 흐르고 가지마다 봄빛이다.
지상에 오기까지 나뭇잎 하나의 모습
풀밭에 글밭에 여문 씨앗처럼 풍경은 이어진다.
덩굴 공인중개사
유 회 숙
그녀 등 뒤로
지번벽면도가 붙어 있다.
크고 작은 길이
마치 사방으로 뻗은 담쟁이 같다.
수줍음 많은 내 친구 춘희가
사무실을 차리고
용인 어디쯤에
공인중개사 간판을 올린다.
벽이 다가설 때마다
덩굴을 키웠을 그녀
열매를 밀어 올리며
벽을 넘는다.
벽 뒤엔
또 다른 벽이 있음을
물러서는 대신 번지수를 그려 넣는다.
스크럼을 짠
봄,
덩굴은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는다.
휴대 전화가 불타고 있다
정 희
민들레 꽃씨들. 메시지를 쳐댄다.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
하늘에 흩어진다.
거리에 흐드러진 민들레 신호음
보관된 편지 삭제 중
민들레가 몸을 턴다.
다시 너에게
메시지,
메시지가 날아간다.
사서함, 보관된 편지 5개
후두둑 피는 한 무더기 민들레꽃
문자가 떴다.
너에게 나를 전송한다.
방금 너가 도착했다.
유채꽃 사랑
정 희
기억 끝에서
한바탕 바람이 불면
까실한 이파리 속에 꽃무더기로 피어
해를 바라고
달을 바라고
그 모습
노란 기다림으로 피어
목이 섧게 차온다.
어느 늦봄
내 마음 돌아보면
아프게 자꾸만
이제 지쳤다고 소리조차 없다.
더 많은 시간을
나에게 물어야 하는가 보다
지난 계절
긴 기다림으로 유채꽃 핀다.
산이 나에게
송 선 애
산이 나에게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 하네
저 산 저 산 잔설도
잠시 동안 쉬어갈 뿐
영원한 인연은 없으니
안개서린 한 때도 사랑하라 하네.
산을 내려올 때에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절망의 골짜기 벗어나라네
슬픔은 새를 날려 보내 듯
더러는 속을 비우고
쉬엄쉬엄 내려오라 하네.
잡초를 뽑으면서
송 선 애
잡초를 뽑으면서
나의 뿌리를 생각한다.
내가 뽑히면 무엇이 남을까
그릇된 생각이 남을 거야.
뽑아도 뽑아도
다시 올라오는 욕망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자리를 잡곤 했다.
하나 둘 뽑아 낸 잡초에서
보이는 나의 허물
내일이면 또 다시 돋아날
죄의 뿌리를 바라본다.
참나무의 귀천(歸天)
박 기 동
지상의 높이만큼 하늘 높이 저린 가슴 흙속에 꼭꼭 다져 놓았다가 빛의 환희와 어둠을 빚어 참나무는 숲을 이룬다. 우주의 생성이 그러했듯 가파른 비탈에 서서 굴곡의 길을 돌아보며 저렇게 제 가슴에 구멍 몇 개 가져본 생은 안다 또 다른 생을 키우는 그 시간의 기쁨과 절망 그늘을 견뎌본 이는 안다 숲에서 제 할일 마치고 가슴가슴 구멍 숭숭 그 모진 참수를 겪어내고 비로소 꿈을 잉태한다. “참나무는 버릴게 없어요.”농부의 진정한 말씀으로 표고버섯으로 가슴 꽃을 피우다 피우다 빈 가슴으로 돌아가는 참나무의 충만을 아는 이는 안다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아궁이 속으로 자신을 활활 태워 하늘로 귀천하느니 오늘은 내가 비탈에 서서 참나무 숲을 바라본다 하늘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누군가 눈시울 적신다.
서설(瑞雪)에게
박 기 동
3月에 오는
그대를 만나니
문득 정겹고 눈물 난다.
지난밤 별들의 속삭임
瑞雪되어 나리시는가.
언어 이전의
님의 말씀을 듣는가.
나직이 불러보는
그리운 이여 ―
되감기는 기억 속으로
바다 물결이 출렁이고
주체할 수 없는 시간들이
걸음 멈추게 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마른 대지에 젖을 물린 듯
따스한 숨결로 이어지는 3월의 서설
긴 기다림의 그림자 하나 둘
그대, 하얗게 타다 스미는 봄빛
그림자만 남기고
정 명 숙
폭풍이 휘몰아치는 날
거리로 난선다.
저만치 날려보낸 시간의 언저리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가
하룻내 거리를 헤메어도
보이지 않는다.
푸르던 나날
마저 건네지 못했던 말
이제 긴 한숨으로 이어져
그대 목소리 귓전에 가득하고
바람은 살 속으로 파고든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한움큼의 기억 마저 털어내고
속으로 가두었던 그대를
떠나보낸다.
그대가 가버린 자리
내 그림자만 커다랗게 남았다.
이른 봄날
정 명 숙
거울 속에 한 사람을
내 안으로 맞아들일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여닫는다.
빛이 맑을수록 내 눈은 흐려지고
삐걱거리며 낡은 문살 사이로
바람이 흔들어놓은 시간
까치발로 서서 바라보는 허공
빛길 마중 나온 노랑나비
날개 한껏 펼치려
또 다시 길을 나서
푸른 하늘에
말간 창틀 하나 만들어 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