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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교의 역사
1. 화교란


중국인들이 외국에 이주한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른다. 그러나 정식으로 「華僑」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약 100여년 이전인 청나라 말기부터이다. 1898년 중국인들은 일본 요코하마에 학교를 세워 정식으로 화교 학교란 이름을 지어 이 때 세워진 화교 학교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옛날 청조와 조선이 서로 교환한 문서에 따르면 화교에 대한 명칭이 淸朝人, 華人, 淸商 등으로 명칭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후에 청조 農工商部 대신이 작성한 문서에 "화교"라는 단어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華僑를 한자의 의미대로 풀어보면 華란 중국인을 가르키고, 僑란 잠시 거주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모두 통칭하여 "華僑"라 일컫는다. 1909년의 청나라 헌법과 1929년의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고 부른다." 라고 나와 있다.
2. 한국 화교의 태동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면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모든 단체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 19년(1882년) 6월 9일 일본이 조선에서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청조는 조선을 돕기 위해 광동성 수사제도(水師提都)인 오장경(吳長慶)과 3,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청조 군대는 세 척의 군함과 양 척의 상선으로 나누어 산동성 연대에서 출발하여 한 달 후인 7월 12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약 40여 명이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이 40명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본래 한국에 머물러 있는 청군을 도와주려고 온 것이었는데 청군이 한국에 오래 머물게 됨에 따라 점차 한국인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초기 2-3년 동안에 이들의 상업 활동은 청조의 보호정책과 오장경 제독의 보살핌을 받아 매우 순조롭게 발전하였으며 후대 화상들이 상업 활동을 벌이는데 공고한 기반을 다져 주었다. 화교 경제의 발전은 청조의 "병상통일주의(兵商統一主義)"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1882년 청군이 주둔한 지 한달후 청조는 즉시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청과 조선간의 무역관계를 맺었다. 12년 후인 1894년 11월 양국은 청상보호규칙(淸商保護規則)을 제정하였는데 이때가 화교들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전에는 조선의 상업권이 완전히 일본인의 손에 있었다. 조선과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 오랫동안 폐쇄정책을 펼친 조선 사회를 개방시켰으며, 1882년 6월까지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의 수는 3,622명에 달했다고 한다.
1882년 이후 일본 항구도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화교들도 일본인들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부산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1884년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화교의 숫자는 크게 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서울의 화교 숫자는 약 350명 정도로 약 4배 가까이 늘었다. 인천도 235명으로 늘었는데 그 이유는 산동반도와 인천항 사이에 정기적으로 배가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선과 여객선의 운행으로 화교들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져서 서울과 인천의 화교 수는 더욱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3. 한국 화교의 성장

당시조선사회는 상업이 세분화 되어있지 않아 화교들은 여러가지 상업 활동에 모두 종사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 사회와 조선 상인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초기 화교들은 중국 정부의 정책적 도움을 받아 일본인을 제외하고 조선에 가장 많이 거주한 외국인이었다.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으며,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이다. 그리고 이후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는 부산, 1889년에는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되었다. 또한 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만 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화교들의 활동 범위가 날로 확대되어 가면서 공관과 중화회관을 중심으로 한국인들과 접촉하는 횟수도 날로 많아졌으며 이로 인해 화교들과 한국인들간의 충돌도 점점 많아졌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1883년 7월부터 1884년 9월까지 한국과 화교간에 발생한 채무 분쟁이 15건이며 액수는 30687량에 달했다. 정착 초기에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지리적 환경이 달라 한국인들과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에서 침략자 일본의 이간책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20년대의 10년 동안 화교의 경제력은 막강하였다. 특히 20년대의 후반기인 1927년 전후에는 화교의 경제활동이 가장 막강했던 시기였다. 서울과 인천에 분포해 있던 화교 무역 상인들은 주로 비단, 옷감, 면화, 양식, 고추, 마늘 등 각종 토산품을 중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한 후 다시 한국의 전역으로 판매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과 인천 양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의 수는 약 6천명 정도였다.
이들이 40년간 중국으로 보낸 액수는 1천만 엔에 달했다. 당시 경성 시민 중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은 화상 동순태(同順泰) 사장인 담걸생(譚傑生)씨였다. 1920년대 화상이 경영하는 상점들은 대체로 잡화점, 비단가게, 양장점, 이발소 등이었으며 후반기에는 요식업이 늘기 시작했다
4. 한국 화교의 위축과 이동

그러나 화교 사회의 이 같은 경제호황은 1948년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 후 화교 사회는 우리 정부의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아래 위축되어 가면서 화교의 이동이 본격화되었다. 1948년 수립된 우리 정부는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화교의 한국 유입은 종식되었다. 더불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성립되면서 이주억제책으로 외국 이동을 금지하여 일년에 한번 있던 한국 화교의 고향 방문도 끊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화교 무역의 배경이었던 중국과의 교역도 불가능해지면서 화교들은 한국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제시대 한국 내 화교 여자의 수는 적어서 그 비율이 전체 화교의 26% 정도였다. 해방 이후 고향에 돌아갈 길이 막히자, 사회경제적 안정을 위해 재혼하고 결혼적령기의 화교 남녀들도 한국 내에서 결혼하였다. 이에 따라 화교 남자와 한국 여자와의 결혼이 증가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부터 한국 화교는 사회경제적 난관을 겪는다. 자유당 정부가 6·25 직전 전국에 내린 창고 봉쇄령으로 화교 무역상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어 내려진 외국인에 대한 외화 사용 규제책은 화교의 무역업에 족쇄를 채운 격이었다. 이로 인해 화상들은 국내 기업과의 경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차 도태되어 한국 화교의 경제 활동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또한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 아래 두 번의 통화 개혁이 있었다. 화교들이 현금 소지를 선호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두 번의 통화 개혁을 통하여 화교들의 현금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만다.
그 외에도 이승만정권(1948∼60)때 화교들의 대표적인 직업인 중국음식점에 대하여 불리한 세율을 적용하고 음식값을 통제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박정희정권(1961∼80)때인 1961년에는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의 시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한 외국인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970년에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한국 화교는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고, 주택 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된다. 또한 취득한 토지의 건물은 자신만 사용하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도 불가능하였다.
화교가 한국에 온 이래 채소 경작은 그들 주요 생업의 하나였다. 그러나 밭의 소유가 불가능하게 되자 화교 농민들은 더러 그 소유권을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 아내나 한국인 친구의 명의로 해두고 경작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경작지의 소유권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빈번하였다. 상점과 주택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화교는 게다가 또 외국인 거류 제도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한국에는 영주권 제도가 없기에 화교들은 외국인으로서 「외국인 출입관리법」을 따라야 한다. 외국인은 거주자와 비거주자로 분류되고, 거주자는 2년에 한번 비자를 받아야 했다. 1997년부터 그것이 5년에 한번으로 바뀌어 다소 사정이 나아졌다.
재입국제도는 현재는 복수로 되어있어 1년에 여러번 출입국이 가능하나, 기한 내에 반드시 돌아와야 거주자 자격을 유지하게끔 되어 있었다. 화교들이 이른바 보따리장사로 해외에 다니다가 기한 내에 재입국을 하지 못해 거주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대만으로 유학간 화교학생으로서 재입국 기간을 넘겨 거주권을 상실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 기간 음식점은 화교의 전형적인 생업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화교는 음식업에서도 여러 제한과 차별대우를 겪어야 했다. 그리하여 한때 4천여 개가 되던 중국음식점이 현재 대략 천여 개 업소로 감소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음식업에 많이 참여하면서 화교음식점의 경쟁력이 약화된 점도 물론 여기서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여하튼 이러한 차별과 제한을 견디지 못한 화교 음식업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음식점을 차렸으니, 그 수가 2천여 개나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으로 한국 화교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간다. 이들은 7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호주나 대만 등지로 이주하였다. 한국 화교 출신의 연합체인 韓華聯議會에 의하면 60년대 말까지 4만 명을 헤아렸던 화교들 가운데 2만명 이상이 70년대이래 외국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남가주지역에만 현재 8천여명의 한국 화교 출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5. 한국 화교의 재도약

그 이후 1998년 200평 이하로 소유를 제한했던 외국인 부동산 관련 법규가 풀리고,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도에는 22,917명(법무부 집계 F-2 비자 대만인 거주현황)으로 점차 안정적이 되었다.
그리고 21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의 부상과 21세기 지구촌 시대 도래, 특히 1997년 IMF사태 이후 외국 자본 유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한국 화교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즉 이들은 막대한 세계 화교 자본을 국내로 유치하는 교량 역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면서 이들이 중심이 되어 2005년 서울에서 제8차 세계화상(華商)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서서히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역시 한국 화교의 재도약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 화교망을 이용하여 화교 자본 유치는 물론 우리 경제의 교역활성화를 위한 최첨병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 나간다면 한국 화교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충분히 그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6. 한국 화교의 현황
2010년 현재 한국 화교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2001년 5월말 기준으로는 약 22,917명이다.
이 통계는 최근의 현황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지만,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 화교 인구의 큰 흐름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80년대와 90년에는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주요 원인은 해외유학이나 취업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거주여건이 비교적 나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선진국으로의 이민 등이다. 둘째, 그러나 1999년부터 2001까지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는데, 이는 이른바 IMF 금융위기에서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대폭적으로 완화되면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한도 역시 철폐되는 등 외국인에 대한 여건이 호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급속한 성장 및 한중 교류의 폭발적인 증가가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셋째, 2001년부터 최근까지의 현황은 관련 자료를 구하지 못해 정확히 서술하기 어렵지만, 상기 추세에 따라 예측할 경우, 향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교 후손으로 이루어진 기존 화교에 최근에 한국으로 건너오는 신이민 화교층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본다면 당분간 이들의 수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 지역 | 계 | 거주자(F-2) | 기타 |
|---|---|---|---|
| 계 | 22,917 | 21,978 | 939 |
| 서울 | 8,987 | 8,479 | 508 |
| 인천 | 2,974 | 2,862 | 112 |
| 경기 | 2,145 | 2,057 | 88 |
| 부산 | 2,030 | 1,985 | 45 |
| 대구 | 1,032 | 1,011 | 21 |
| 충남 | 811 | 793 | 18 |
| 전북 | 749 | 725 | 24 |
| 충북 | 728 | 720 | 8 |
| 강원 | 632 | 617 | 15 |
| 대전 | 568 | 550 | 18 |
| 경북 | 562 | 537 | 25 |
| 경남 | 420 | 403 | 17 |
| 광주 | 366 | 358 | 8 |
| 울산 | 331 | 313 | 18 |
| 전남 | 296 | 286 | 10 |
| 제주 | 286 | 282 | 4 |
19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화교 인구 추세

한편, 인천시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2010년 6월 30일 기준으로 인천의 총인구수는 2,772,967명이며, 이중 외국인은 48,652(인천시 전체 인구의 1.75%)이다. 이들의 국적별 분포를 보면 중국계가 조선족 16,522명을 포함하여 23,214명(47,7%)으로 가장 많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들의 거주지역별 분포를 보면 남동구 11, 903명(24.5%),
서구 10, 287명(21.1%)순으로 정작 차이나타운이 속한 중구에는 그 수가 많지 않다. 몇 년 전의 통계에 따르면
인천에 상주하고 있는 화교는 약 3천 7백여명으로, 차이나타운 주위에 120여 가구의 5백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2008년 연말에 출간된 자료에 따르면 차이나타운(11만4천여㎡)에 살고 있는 화교는 832명으로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 음식점과 기념품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 상호 | 주소 | 연락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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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화교소학 |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1가 29 | TEL : 02-678-5939 |
| 중산중학 |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8 | TEL : 032-772-3615 |
| 중산소학 | 인천광역시 중구선린동 8 | TEL : 032-772-3536 FAX : 032-765-6199 |
| 부산화교중학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548 | TEL : 051-467-0275 FAX : 051-465-4556 |
| 부산화교소학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548 | TEL : 051-467-0274 |
| 부산화교유아원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580 | TEL : 051-468-2845 |
| 대구화교중학 |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1292 | TEL : 053-471-1422 |
| 대구화교소학 |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 31 | TEL : 053-255-4273 |
| 광주화교소학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2동 22 | TEL : 062-223-4163 FAX : 062-223-4163 |
| 대전화교소학 |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179 | TEL : 042-253-5374 |
| 울산화교소학 |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 116-8 | TEL : 052-211-0300 |
| 중정소학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교동 172 | TEL : 031-232-2649 |
| 의정부화교소학 | 경기도 의정부시 가릉1동 369-4 | TEL : 031-874-3482 FAX : 031-874-3411 |
| 평택시화교소학 | 경기도 평택시 평택동 59 | TEL : 031-653-7709 |
| 춘천화교소학 | 강원도 춘천시 옥천동 18 | TEL : 033-254-5196 |
| 원주화교소학 | 강원도 원주시 원동 268 | TEL : 033-764-4846 |
| 강릉화교소학 | 강원도 강릉시 홍제동 57 | TEL : 033-648-3834, 648-5150 |
| 청주화교소학 |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653 | TEL : 043-274-2204 |
| 충주화교소학 | 충북 충주시 교현1동 212 | TEL : 043-847-2656 |
| 제천화교소학 | 충북 중앙로2가 24-4 | TEL : 043-644-1579 |
| 천안화교소학 | 충남 천안시 봉명동 215-9 | TEL : 041-572-8061, 573-3885 FAX : 041-574-9291 |
| 아산화교소학 | 충남 아산시 모종동 585-13 | TEL : 041-545-2872 |
| 논산화교소학 |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동 34 | TEL : 041-745-4464 |
| 전주화교소학 |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1가3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