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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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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스크랩 정역사상의 현대적 이해
참으로 추천 0 조회 140 13.02.14 10: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역사상의 현대적 이해 첨부파일



양 재 학(증산도사상연구소)

1. 들어가는 말

동양에서 주역을 풀이한 책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역은 주역에 대한 수많은 해석서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정역은 주역에 담긴 핵심을 추출하여 다양한 주역관을 종결짓는다. 전통 주역관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주역의 본질을 새로운 성격으로 규정짓는데, 일차적으로 정역은 ‘올바른 주역(正易) = 바로잡힌 주역’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것은 정역을 통해 전통철학의 주제는 물론, 그것과 직결된 사회적 모럴과 문화의 양상도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정역의 출현은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정역은 김일부의 평생의 역작으로서 인류의 앞날을 제시하는 최종의 역을 완수했다는 점에 사상적 의의가 있다. 그는 복희역과 문왕역에 숨겨진 대립과 갈등과 모순을 극복한 형태인 정역괘도를 완성함으로써 인류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를 단순히 우주질서의 대변혁만을 외친 사상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정역』은 윤리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종교를 회통하는 혼융의 이념을 집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성적 사유 속에서 맴돌이하는 관념론의 체계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이념이 역사현실에 구현됨으로써 실재와 현상이 하나로 만나는 접점을 해명하는 논리적 정합성은 정역사상의 압권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정역사상의 정수를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입장을 따르느냐에 의해 그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첫째로 가깝게는 당시 사상계의 동향에 발맞추어 종교적 관점이나 개벽사상으로 조명하는 방법과, 멀게는 조선조 중기 이후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담은『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비결서 등에 깊이 숨겨진 우주의 비밀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한 학문으로 인식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로 순수 철학적 입장에서 정역사상의 핵심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① 정역사상은 선진유교의 근본정신을 계승하여 새로운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우주의 생성과 기원, 선후천 의 변화원리를 논증하였다.

② 정역사상은 인간인식의 최고경계를 드러낸 합리적 사유의 모델이며, 특히 우주론의 독창성은 역학의 새 로운 지평을 열어 동양철학의 면모를 획기적으로 장식한 작품이다.

③ 정역사상은 철학의 근본문제들을 혁신적 발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사유체계를 창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세계화의 물꼬를 튼 학문이라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 둘을 종합지양하여만 정역의 실체를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즉 정역이 형성된 배경과 함께 정역사상의 본질을 동시적으로 밝혀야만 그 현대적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하나의 사상이 비판을 통해 새로운 논리가 개발되고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한다. 만약 후자(정역은 선진유학의 근본정신을 밑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주장)만을 고집하는 경우에는 근본주의에 폐단에 휩싸일 위험이 있다. 유교의 경전만을 최고 권위의 완성품으로 간주하여 과거로의 회귀가 현대사회의 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또하나의 획일주의를 초래함으로써 정역의 현대화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자의 시각(정역사상이 출현할 수 있는 조선조 전반의 사상적 흐름에 유독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서 후자를 바라볼 경우는 정역은 전통사상의 아류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정역의 성립 자체가 시대정신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결코 이들의 단순 절충으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역사상의 본지에 어긋나는 이분화의 논리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시대상황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당대의 사회적 관심을 배제해서도 안 된다. 시대사조만을 강조하면 객관성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김일부가 살던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지식인과 재야학자들 사이에 폭넓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김일부는 당시의 시대상을 충분히 반영하면서도 철학의 보편적인 문제를 구축하였다. 그 의도를 제대로 읽지 않고는 정역사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정역사상에 대한 한국철학의 독창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는 열쇠임에 틀림없다.



김일부는 혁명적 사상가인 동시에 사상적 혁명가이다. 그는 대부분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뿌리를 주역에 둔다. 하지만 주역을 완성한 공자를 계승하는 한편, 공자가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우주의 근본적 변화를 정역팔괘도로 압축하여 논증한 점은 사상적 혁명가로 일컫기에 충분하다. 또한 공자 이후 어느 누구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선후천변화의 문제에 착안하여 우주론의 근본명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유하고 풀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혁명적 사상가라 불러도 마땅하다.



정역에서 주역을 보면 선후천론이 아닌 것이 없다. 조선조 후반기는 넓은 의미에서의 개벽이론이 창출되어 한국사상의 다양성을 꽃피웠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3)는 중국철학의 아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념에서 새로운 기철학을 수립했으며, 이제마(李濟馬: 1837-1900)는 전통적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한의학을 사상논리(四象論理)로 흡수통합하여 사상의학을,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시천주(侍天主)라는 자신의 종교체험을 밑바탕으로 동학사상을 정립했으며, 강증산(姜甑山: 1871-1909)은 천지개벽(후천개벽)에 따른 인류구원의 법방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조선조 말기는 극심한 혼돈의 과정에서 새로움의 창조적 전진을 지향하는 이념과 실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 정역의 선후천사상




1) 선후천 개념의 변천 과정




철학적 의미에서 사용된 선후천이란 말은 주역에 있다. “하늘보다 앞서가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며, 하늘을 뒤따라가도 하늘의 때(시간)를 받드니, 하늘이 또한 어기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며(어기지 아니한다), 하물며 귀신이랴!” 이에 대해 정이천은 유가의 이상적 인간상인 성인은 도와 합치되기 때문에 하늘의 경지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주희는 인식 범위의 확충에 의해 인간은 진리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진리 체득이 되면 하늘의 의지를 깨달음은 물론 그 실천도 가능하다고 풀이한다. 공영달 역시 천인합일의 입장에서 하늘의 이법을 터득한 대인과 천지의 궁극성 자체인 하늘은 본래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선천은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대상이므로, 후천은 진리 파악과 실천을 바탕으로 이상적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주역을 선후천론으로 집약한 대표적 인물은 소강절이다. 그는「설괘전」에 함축된 내용에 근거하여 제3장은 선천학인 복희괘도, 제5장은 후천학인 문왕괘도를 표상한 것이라고 단정하여 선천학에 그 가치를 높게 부여하였다. 그가 복희괘도를 선천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복희괘의 방위배치는 인간의 인위적인 사유에 의한 안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데 연유한다. 괘도가 그어지기 이전의 자연법칙 자체를 형상화한 것을 복희괘로 여겼기 때문이다.



소강절은 주역의 이치를 해명하면서 처음의 주역을 복희역이라 하고, 이를 확장하고 수정한 것을 문왕역이라 하여 복희역을 선천역이라 부르고, 문왕역을 후천역이라 불렀다. 복희역과 문왕역은 공간적 방위와 시간적 흐름을 상징하는 수의 배열과 - 복희역은 1부터 8까지, 문왕역은 5를 제외한 1부터 9까지의 수로 나타난다 - 8괘를 배당하는 원칙이 다르다. 이 둘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까닭에 대해 소강절은 본체의 영역이 현상세계로 진입하여 성장하는 과정을 복희역의 선천에서 문왕역의 후천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하였다.



소강절 이후의 선후천론은 한결같이 천지창조 이전을 선천, 그 이후를 후천으로 규정한다.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후천의 세상이므로 선천은 인간이 직접 포착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영역이다. 그것은 현실에 의존하여 획득한 경험적 지식으로는 시공을 초월한 진리를 인식 불가능하다는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선천에 큰 비중을 두는 까닭은 ‘경험 이전의 사태’, ‘어떤 인간도 보거나 체험하지 못하는’ 태초 이전의 선천이라는 궁극적 세계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전통적 주역관에 익숙한 과거의 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앞선 세계가 선천이며, 현재의 세계가 바로 후천이라고 평면적으로 풀이하였다. 김일부는「설괘전」을 재해석함으로써 전통의 선후천관을 완전히 뒤바꾼다. 그는 선천역을 현상적 변화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칙성 안에서 반복하고 교류하는 ‘交易의 易’으로 규정하고, 후천역은 근원적 변화를 통한 새로운 차원의 질서인 ‘變易의 易’으로 규정하여 선천역과 후천역을 구분하였다. ‘변화’를 어떻게 개념규정하고 설명하는가에 따라 선천역과 후천역의 성격이 판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김일부는 역의 본래적 의의를 선후천변화의 문제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보통 역의 의의는 易簡, 不易, 變易이라는 3가지 특징으로 설명되어 왔다. 정이천과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우주의 보편적 원리를 변역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실재론적 관점에서 불역을 중심으로 주역의 세계를 해석한다. 그들은 현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생성법칙을 ‘변역’으로, 현상계의 배후에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절대불변의 실재(reality) 또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진리, 혹은 모든 것이 변화하는 사실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역’으로 풀이하였다. 따라서 현상계의 최종 근거를 묻고 대답하는 성리학은 주역을 해석할 때에 늘 ‘불역’의 입장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시간의 문제를 배제함으로써 역동적인 세계를 설명하는데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정역괘도 성립의 의의




김일부는 시간질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기 철학의 전부를 시간 해명에 두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정역』을 시간론으로 일관시킨다. 그가 말하는 선후천은 어떤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앞과 뒤를 구분하는 형용사적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출생 → 성장 → 완성의 직선적 발전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천의 세계질서를 허물어뜨리는 새로운 후천의 세계질서를 뜻한다. 그것은 구질서의 파국을 넘어서 신질서를 개벽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선후천의 전도에 따른 새로운 우주관, 인생관, 가치관 등의 정립이 필수적이므로 선후천변화는 일종의 혁명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정역』은『주역』에 대한 단순 해설서가 아니다. 정역사상은 선후천변화의 문제가 함축적된 주역의 핵심을 추출하여 완결하는 이른바 ‘주역을 바로잡는 역’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정역은 때로는 ‘주역에 대한 본질적 완성’을 의미하는 일종의 최종 결론서라는 성격이 부여되기도 한다. 김일부에 따르면, 주역에서 정역으로 전환되는데는 3단계의 절차를 거친다. 그것은 바로 복희괘 → 문왕괘 → 정역괘의 순서이다.



첫째로, 복희8괘도를 살펴보자.

① 건1, 태2, 이3, 진4, 손5, 감6, 간7, 곤8의 수적 배열은 분열의 단계에서 아직 성장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므로 보통 복희괘는 ‘生長成’에서 ‘生'에 해당되는 生卦圖로 불린다.

② 모든 괘는 안에서 밖을 향하는 양상을 띠는데, 이는 만물이 태어나서 분열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③ 천지(인간적으로는 부모)를 뜻하는 乾坤을 비롯하여, 6남매인 震(장남)-巽(장녀), 坎(중남)-離(중녀), 艮 (소남)-兌(소녀)가 각각 음양이 대대(待對)적으로 상응하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복희괘는 坤北乾南 의 방위를 이룬다. 이는 天地否卦를 형상화한 것으로 만물의 생장이 원천적으로 갈등 구조를 바탕으로 전개됨을 시사한다.

⑤ 복희8괘도를 시간적 생성의 측면에서 보면, 미래적인 하도10수 원리의 완성을 전제 로 하여 과거적 인 낙서 ‘1태극’이 창조되는 이치를 반영한다. 태극의 창조는 만물이 태어나는 생(生)의 과정을 표 상한다.

⑥ 8괘는 전체 우주의 향방을 단순하게 논리화한 것인데, 복희8괘도는 천지질서에 근거한 2진법의 조직적 전개 양상을 보인다.



둘째로 문왕8괘도에 대해 살펴보자.

① 복희괘가 문왕괘로 전환됨은 천지만물이 왕성한 활동에 접어들었음을 표상한다.

② 중앙의 5황극을 포함하여 - 실제로 문왕8괘도에는 직접 5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 1부터 9까지의 수가 나타난다. 수리적으로 9수는 만물의 성장이 극한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

③ 문왕괘는 生?長?成 중에서 ‘長’의 원리에 해당된다. ④ 남북의 坎離만 음양이 서로 상응하고, 나머지 坤과 艮, 震과 兌, 乾과 巽은 모두 음양의 부조화를 이룬다. 오직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水의 坎(中男) 과 火의 離(中女)만이 조화를 이룬 반면에, 어머니인 坤과 막내아들인 艮, 아버지인 乾과 장녀인 巽, 장 남인 震과 막내딸인 兌가 서로 대응함은 윤리적인 패륜 현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왕괘는 만물이 상극 적 구조로 진화함을 표상한다.

⑤ 복희괘와 마찬가지로 문왕괘는 괘의 구조가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즉 만물이 무한성장하는 드러낸 다.

⑥ 문왕괘도는 본질적으로 낙서와 일치한다. 이 둘의 운동의 본체는 5황극이다. 5황극을 중심으로 서로 대 응하는 음양을 합할 경우, 모두 만물의 완성을 상징하는 하도의 10수가 된다. 하지만 생수인 1?2?3?4 와 성수인 6?7?8?9가 5황극을 중심으로 각각 1?9, 2?8, 3?7, 4?6의 형상으로 배열됨으로써 음양 의 조화가 수반되지 않는 성장과 팽창을 표상한다.

⑦ 문왕괘도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성의 근원인 건곤이 서북과 서남쪽으로 기울어져(Declined) 있는 점이 다.

이러한 구조가 생태계에 거대한 무질서를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던 것 이다.



셋째로 정역8괘도에 대해 살펴보자. 김일부에 의해 정역8괘도라고 최초로 천명된「설괘전」6장의 내용을 과거에는 복희괘나 문왕괘와 독립된 별도의 괘도로 인식되지 못하였다. 주희도 복희괘와 문왕괘의 연장선에서 방위만 약간 달라진 것으로 간주하여 원리적 해명을 회피하였던 것이다. 김일부는 복희괘의 발전적 측면이 문왕괘도요, 문왕괘도의 발전적 측면을 정역괘도로 단정하여 복희괘와 정역괘를 매개하는 중간 과정을 문왕괘로 판단했다. 그러므로 괘도의 마지막 단계인 정역8괘도의 질서는 우주변화의 완성을 전제한 배열이므로 그 3단계를 生(탄생=birth)→長(성장=growth)→成(완성=complete)으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정역8괘도에는 괘도의 변천사에서 처음으로 수리철학적 완전수인 10이 등장한다. 이 10수에는 만물을 성숙시키는 원리와 선천의 ‘抑陰尊陽’에 대비되는 후천의 ‘調陽律陰’이라는 이치가 응축되어 있다. 즉 문왕괘8도는 9까지의 수로써 생성의 극한을 상징한다면, 정역8괘도에는 분열로 치닫는 생장이 수렴작 용에 의하여 역전되는 새로움의 창조원리가 함축되어 있다.

② 정역괘의 근간은 음양의 조화에 있다. 10과 5의 乾坤이 남북축을 형성하며, 만물 완성을 상징하는 소남 소녀의 艮兌는 동서에서 화응하며, 중남중녀의 坎離는 동북과 서남에서 음양이 대응하며, 장남장녀의 震巽은 서북과 동남에서 조화를 이루는 형상을 보인다.

③ 정역괘가 복희괘나 문왕괘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괘의 형상이 밖에서 안을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팽 창만을 일삼던 음양작용이 구체적으로 분열에서 수렴으로 바뀌어 통일운동하는 모습을 시사한다. 특히 남북의 건곤괘 내부에 ‘二天七地’가 자리매김한 점이다. 이는 生數의 2火가 10乾北의 내부에, 成數의 7 火는 5坤地의 내부에 위치함으로써 ‘물이 극한에 이르면 불을 생한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운 우주(좁게 말하면 지구의 운동)를 태동하는 원동력을 의미한다.

④ 정역괘가 복희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괘 구성의 핵심축인 건곤이 180°역전되어 地天泰卦의 형상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선후천변화를 통한 시공의 기하학적 근본틀이 전환됨을 시사한다.

⑤ 8괘배열의 원칙은 문왕8괘도를 형식적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다. 괘도는 원래 시각적 이미지(논리적 사 고보다는 직관적 사고)로 자연을 이해하고 심미적 기준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동양 고대인의 세계를 바라보는 ‘창(窓; window)’이었다. 김일부는 괘도의 배열방식으로 우주변화의 두 얼굴인 선천과 후천을 구분하고 논리화하여 선후천변화의 필연성을 묘사하였고, 거기에 이념과 가치를 부여한 존재론과 인식 론의 새로운 ‘창’을 창조적으로 상승(Up grade)시켰던 것이다.

⑥ 우주사의 긴 여정은 반드시 3번의 시간적 굴곡을 거친다는 것이 정역의 기본 입장이다.



정역8괘도에 투영된 수리 구조는 우주의 완성형을 압축한 청사진(Blue print)이다. 우주가 완성을 향해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을 형상화시킨 것이 문왕8괘도라면, 그것의 완성 모델이 바로 정역괘도인 것이다. 복희괘는 1태극을 중심으로 만물이 창조되는 모습을, 문왕괘는 5황극을 중심으로 만물이 길러지는 모습을, 정역괘는 10무극을 중심으로 만물이 통일되는 이치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 우주론적 이해 - 3극론을 중심으로




현대물리학의 업적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처음에 시간과 공간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초극미의 있는 듯 없는 듯한 무경계의 상태였다. 현재의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의 ‘아기우주(Baby universe)’는 적막무짐하여 질서 이전의 그 무엇이었다. 이 막막하고 무질서한 상태를 ‘카오스(chaos)’라고 한다. ‘혼돈’이라는 뜻이다. 카오스는 형상도 질서도 없는 하나의 조그만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덩어리는 생명이 구체화되지 못한 상황, 하나의 사물로 형상화되지 못하여 모든 요소가 경계도 없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로 나아가려고 꿈틀거리는 상태일 뿐이다. 이와 반대되는 상태를 우리는 ‘코스모스(Cosmos)’라 한다. 코스모스란 아름답게 배열된 질서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질서가 부여됨에 따라 ‘천지’라는 틀이 출현한다. 천지는 카오스를 정리한다. 혼돈상태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의미이다. 정역은 우주창조의 시원을 ‘반고(盤古)’에 둔다. 반고에서 분화되어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천황, 지황, 인황이다. 천황과 지황은 한 마디로 천지이며, 인황은 천지에서 비롯된 인간의 탄생을 상징한다. 소강절은 우주창조와 인류의 출현에 대해 “하늘은 자에서 열리고, 땅은 축에서 열리고, 인간은 인에서 일어난다(天開於子, 地闢於丑, 人起於寅)”라고 하여 일정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천지인이 형성되고 인류역사는 문명화 과정에 이르는 이치를 논의하였다. 그의『황극경세서』는 ‘元會運世’의 시간단위를 기준으로 역사는 순환반복한다고 주장하였다. 소강절의 입론근거는 현재의 세계는 후천이며, 그 이전의 세계가 선천이라는 점에 있다. 정역에 의하면 현재는 선천이며, 다시 시작될 세계가 바로 후천이다. 소강절과 김일부가 바라보는 선후천관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일부가 비록 소강절의 용어를 그대로 빌리지만, 논리전개의 패턴은 언제나 선후천론에 둔다.「十一一言」의 첫머리에서 김일부는 “하늘은 정사를 자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땅의 정사는 축에서 열린다(天政開子, 地政闢丑)”고 하여 선후천의 중심축이 판연하게 달라짐을 언급한다.



정역사상의 존재론은 무극, 태극, 황극의 3극원리이다. 3극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선후천이 순환할 수 있다. 우주가 존재하기 위한 근원적 바탕으로서의 3극이 형성되었다면, 어떻게 ‘천지(하늘과 땅)가 분화되어 열릴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무극을 바탕으로 천지만물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오는가를 묻는 문제, 즉 천지만물의 창조의 모체로서의 태극의 존재론적 근거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역은 무극이 선행하여 존재하고 이로부터 태극이 출현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에 비해 성리학은 무극과 태극을 동일한 존재의 두 측면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김일부는 3극원리를 두 가지 측면으로 해명한다. 하나는 논리적 해명이요, 다른 하나는 시간성의 차원에서 풀이함이 그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무극은 엄연히 무극이며, 태극은 태극일 따름이다. 무극은 수리적으로 10이며, 태극은 1이다. 하지만 무극은 태극의 작용이 없으면 본체로서 성립할 수 없으며, 또한 태극은 무극이라는 근거가 없으면 지반이 성립될 수 없다. 시간성의 차원에서 보면, 무극의 열림이 태극이요, 태극은 바로 천지(하늘과 땅)의 열림이고 음양의 열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지만물의 본원과 온갖 변화의 궁극적 근원은 ‘무극’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극이라고만 하고, 태극을 언급하지 않으면 무극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말 그대로 절대적 ‘무(無)’에 빠지게 된다. 이럴 경우 우주의 다양한 사물들은 생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물은 생장수장의 순환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간 흐름의 차원에서 본다면 무극과 태극은 동일한 존재이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실로 다른 것으로 규정된다. 우주만물의 창조의 모체는 ‘근원적 바탕’에서 말한다면 무극이며, 실제적인 전개과정이라 일컬어지는 ‘발생론적 입장’에서는 태극이다. 왜냐하면 태극은 ‘무극의 열림’이 질서화된 자신을 드러내는 조화의 경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주의 생성이란 무극에서 태극으로의 전환운동을 뜻한다. 태극의 창조운동으로 빚어진 우주만물은 분열과 통일을 거듭하여 지속적인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태극이 음양으로 분화되어 분열운동을 시작하면 만물은 왕성한 생장의 단계에 접어든다. 이것이 분열의 극점에 이르면 다시 통일운동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통일의 극점에 이르게 되면 다시 분열운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분열과 통일운동의 순환적 리듬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는 운동의 본체로서, 조화능력을 가진 존재가 바로 ‘황극(皇極)’이다. 황극의 주도에 의해 선천이 후천으로 바뀐다. 황극의 중재에 의해 낙서의 9수세계가 하도의 10수세계로 전환됨은 우주의 필연적 이법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역은 한마디로 ‘황극대도(皇極大道)’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는다.



무극과 황극과 태극은 하도와 낙서의 도상에서 각각 그 위격이 다르게 표상되어 있다. 하도와 낙서의 도상에 나타난 차이점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 도
낙 서

10수의 도형
9수의 도형

음양의 조화와 균형
음양의 부조화와 불균형

양수(25) + 음수(30) = 55
양수(25) + 음수(20) = 45

전체수 10의 짝수로 구성
전체수 9의 홀수로 구성

調陽律陰의 구조
抑陰尊陽의 구조(調陽律陰이 목표)

二?七, 四?九(서남방향)
二?七, 四?九(남서방향)

상생질서의 논리
상극질서의 논리

후천 10수(10土)의 통일의 원리
선천 9수(5土)의 분열의 원리







기존의 역학에서는, 하도낙서란 자연의 변화현상을 축약하여 설명하는 방식인 괘의 성립근거라는 차원에서 언급했다. 정역은 기본적으로 하도낙서를 하늘이 내려준 신령스러운 존재론적 문서로 간주한다. 김일부은 하도낙서에 반영된 신비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선후천변화의 화두를 풀어나간다. 선천이 분열과 발전을 지향하는 9수의 낙서체계라면, 후천은 천지만물을 성숙시키고 종합 통일하는 10수의 하도체계이다. 이것이 바로 정역사상이 말하는 하도낙서의 본질적 의미인 것이다.

우주는 끊임 없이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유기적 생명체로서 영원한 창조의 연속과정에 있다. 하도는 우주의 원초적 생명력이 음양과 오행의 짝을 이루어 천지를 변화시키고 어떻게 그 목적에 도달하는가 하는 우주창조의 설계도이자 계획서이며, 생명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자존하는 신비로운 모습을 상수논리로 해명하는 우주변화의 암호해독판이다. 하지만 하도는 일종의 계획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중간 단계로서 후천을 향해 진화해 나가는 원리인 낙서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도의 설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분화전개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낙서의 선천이다. 또한 하도의 후천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낙서가 다시 하도로 바뀌는 ‘금화교역’이라는 근본적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이다.

낙서에는 10수의 무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낙서는 10수의 세계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일부는 하도낙서의 시간적 운동방식을 각각 ‘倒生逆成’과 ‘逆生倒成’으로 설명한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⑩→9→8→7→6→⑤→4→3→2→①
도생역성 운동의 특징 : 통일 → 분열

①→2→3→4→⑤→6→7→8→9→⑩
역생도성 운동의 특징 : 분열 → 통일





정역에 의하면 하도에 무극,황극,태극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형상은 아직 시간적으로 현상화되지 않은 원리를 객관적으로 표상한 체계이며, 낙서는 시간적으로 이미 지나간 과거의 현상화된 질서를 헤아려 표상한 것이다. 따라서 하도는 앞으로 전개될 미래적 시간성을 의미하며, 낙서는 과거에 그 뿌리를 둔 과거적 시간성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역의 3극원리는 시간의 형성과 선후천변화의 궁극원리를 가리키는 체계라 할 수 있다.



3극의 관계에 대해 김일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열 손가락 중 拇指) 들어 보면 곧 무극이니 10이다. (10을 굽히면) 10은 (拇指인 1을 굽히면) 곧 태극이니 1이다. 1은 10이 없으면 그 體가 없음이요, 10은 1이 없으면 그 用이 없으니, 체와 용을 합하면 (중앙에 위치하는) 土로서, 그 中(하도의 중앙)에 위치하므로 5이니 황극이다.” 10무극과 1태극은 체용관계이며, 이 체용을 통합시키는 존재가 바로 5황극이다. 무극은 태극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며, 태극은 무극을 지향한다. 무극과 태극은 황극에서 집약통합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에 황극은 선후천변화의 핵심처인 ‘中’인 것이다.



플라톤의 우주창조설에 따르면, 창조주가 우주를 만들 때 모델로 삼은 것이 이데아이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는 설계도와 재료가 필요하듯이 하도는 우주창조의 설계도이며 계획서이다. 하도의 중앙에 있는 10무극과 5황극은 설계도의 중심적 원인체이며, 계획서의 핵심적 생명체이다. 그 안에 존재하는 1태극은 모든 설계와 계획의 기본적 인자인 동시에 최종 혹은 최초의 단위이다. 이를 여성의 생리구조에 비유하면 자궁에 고정된 태반이 10무극이라면, 태아에게 영양분을 나르는 탯줄은 5황극에 해당되며, 영양분을 공급받는 태아의 배꼽은 1태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태아는 10무극, 5황극, 1태극의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바탕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10무극의 태반은 5황극과 1태극의 탯줄과 배꼽이 각각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지를 제공하면서, 스스로 또한 5황극과 1태극 사이에서 생명창조의 과정에 참여하는 영원한 지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로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단순정위(simple location)라고 불렀다. 그는 서양의 전통철학과 신학에서 꾸준히 논의되었던 플라톤의 이데아(idea),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substance), 기독교의 신(god), 칸트의 물자체(Ding-an-sich) 등의 개념을 단순정위라고 규정했는데, 김일부도 이러한 고정된 실체의 성격을 갖는 사고를 철저히 부정한다. “정역은 중국역학의 맹점을 극복하여 하도와 낙서 속에 담겨져 있는 실체론적 성격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시도했다”라는 지적은 정당하다.



3극론의 요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을 객관화한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무극은 우주조화의 바탕이며, 태극은 무극의 조화성이 질서화되는 경계이다. 이런 점에서 우주는 무극의 자기전개이며, 천지는 태극의 자기현상화라 할 수 있다. 태극은 무극이 자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작용하는) 경계이다. 예를 들어 하루 자체가 무극이라면, 무극이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낮과 밤의 음양질서가 바로 태극이다. 즉 10무극은 우주조화의 근원정신이며, 1태극은 무극이 열려 질서화되는 현실 우주의 본체로서 무극을 대행하는 경계자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태극의 바탕은 무극이지만, 무극이 현실적으로 우주질서를 열어 작용할 때는 태극의 음양운동을 통해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은 그 근원에서부터 무극이 태극으로 열려 천지의 분열운동과 통일운동을 반복하고 변화와 순환을 지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 순환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생장변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이 5황극이다. 따라서 무극은 황극과 태극이라는 두 힘의 본원으로서 창조의 생성과정에 개입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포괄적 궁극자인 것이다



정역은 우주생성의 기원과 과정, 그리고 선후천의 순환을 ‘無極而太極’, ‘皇極而無極’의 질서로 요약한다. 선천 황극이 낙서의 5황극이라면, 선후천변화의 핵심처는 하도의 5황극이다. 逆生倒成의 낙서에서는 1과 9의 ‘중(中)’이 5황극인데 비하여, 倒生逆成의 하도에서 10과 1의 中인 황극의 명칭은 5황극이지만 실제로는 6황극이다. 왜냐하면 도생법칙의 10,9,8,7,6,5의 순서대로 10무극에서 5황극까지 헤아리면 도생의 5는 10에서 여섯 번째이므로 내용적으로는 분명히 6황극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형식적으로는 5황극이지만, 그 실제 내용이 6황극인 것을 정역은 ‘包五含六’이라 하여 황극을 선후천변화의 관건으로 여겼던 것이다.



황극은 선천의 5와 후천의 6을 동시적으로 내포하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정역은 직접 6황극이라 하지 않고, ‘包五含六’ 또는 ‘5와 6은 皇中月體成數’라고 규정하여 선천의 5황극과 차별화한다. 즉 5황극과 6황극은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5황극은 선천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며, 6황극은 후천의 중심축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것은 운동방식이 달라짐에 따라 선후천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도생역성’과 ‘역생도성’의 순환질서에서 이러한 전환을 일으키는 운동의 본체가 황극인 까닭에 음양의 구조 역시 선천의 ‘三天兩地’에서 후천의 ‘三地兩天’의 바뀌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5황극 → 6황극으로의 전환됨에 의해 선천이 후천으로 전환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또한 무극과 태극이 합일되는 ‘十退一進’의 원리로 직결되는 것이다.



하도의 ‘十退一進’이란 도생의 질서에서 무지(拇指)를 굽히면 10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10이 물러나는(退) 운동과 나아가는(進) 운동을 동시적으로 표상하는 ‘無極而太極’의 논리이다. 그리고 ‘포오함육’은 도생의 순서로 소지(小指)를 펴면(伸) 6을 상징하는데, 거기에는 이미 과거의 모든 것을 함축한 의미에서의 5를 포괄한 후천 황극의 형상이기 때문에 ‘皇極而無極’의 논리로 압축할 수 있다.



선천의 5황극은 1과 9의 中으로서 태극을 형성하여 생명의지의 촉진과 만물을 생장시키는 것이 목표이지만, 후천의 6황극은 11의 中으로서 이미 완전히 자란 태극을 무극으로 환원시켜 10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역의 근본정신은 황극론에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선천의 5황극에서 후천의 6황극으로 변하는 구체적인 시공의 변화양상을「化无上帝言」편은 “복상에서 달을 일으키면 천심에 당하고, 황중에 달을 일으키면 황심에 당하는구나(復上起月當天心, 皇中起月當皇心)”라고 하여 ‘복’에서 일으킨 천심월은 선천의 중심이요, ‘황중’에서 일으킨 황심월은 후천의 중심이라고 하여 선천과 후천의 중심축이 변동함을 말한다. ‘복상=천심’에서 ‘황중=황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새로운 질서가 정립됨을 의미한다. 이는 정역8괘도에서 10건북(乾北)과 5곤지(坤地)의 모습과 동일하다.



선천의 낡은 틀을 벗어버리고 후천의 새로운 틀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자연의 변화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역에서 말하는 자연변화는 日月變化가 대표하고, 해와 달의 변화는 달의 변화가 대표한다.「金火五頌」의 “달은 자(子는 壬子를 뜻함)에서 복하니 30일이 그믐이니 후천이다”라는 구절에 비추어 보면 복상은 선천 보름달의 제1일을 가리키고, 황중은 후천 보름달의 제1일, 즉 선천 제16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달을 선천 초하루에서부터 계산해서 15일은 천심에 해당되므로 이를 천심월이라 부르고, 달을 제16일부터 계산해서 15일 뒤는 황심에 해당되므로 이를 황심월이라 부른다. 계산하는 달을 기준으로 말할 경우는 선천월이 복상월이요 후천월이 황심월이지만, 15일 훗달을 기준으로 말할 경우는 전자가 천심월이요, 후자가 황심월이 된다. 그래서 김일부는 “달이 복상에 일으키면 천심월이요, 달을 황중에 일으키면 황심월이옵니다”(「化无上帝言」)라고 하여 결국 황중월은 선천 16일의 달인 동시에 후천 초하루 달이 됨을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달의 메카니즘에 있어서 삭망 15일의 전환됨이 바로 선후천의 전도이며, 내용적으로는 자연변화가 구체적인 시간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역에 따르면 천간배열에서 ‘戊’자리는 후천태음의 어머니이며, ‘己’자리는 선천태양의 아버지에 해당된다. 선천 6갑의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질서가 후천에서는 기,경,신,임,계,갑,을,병,정,무의 질서로 바뀌기 때문에 ‘무’는 선천에서는 5황극이지만 후천에서는 10무극이 되며, ‘己’는 10무극이면서 1태극이 되는 것이다(「十一一言」). 즉 ‘戊’자리의 황극은 선천의 중심축이요, ‘己’자리의 무극은 후천의 중심축이 된다. ‘무’와 ‘기’는 선후천변화에 있어서 5土와 10土를 이루는데, 이때 5황극은 10무극과 1태극을 창조의 본체로 삼아 만물의 성장과 분열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운동의 본체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극과 황극과 태극의 합일을 강조하는 정역사상은 인간과 우주, 문명과 역사가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 세계를 꿈꾼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제도적 정비나 도덕적 구현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질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연의 탈바꿈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주역』의 11번째의 괘인 地天泰卦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괘사에서는 “태괘의 원리는 작은 것은 물러나고, 큰 것이 도래한다(泰, 小往大來)”라고 했으며, 3효의「상전」에서는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기이다(无往不復, 天地際也)”라고 하여 선후천의 필연적 순환성을 설명한 바 있다.

김일부도 후천에 쓰일 역(易=曆)을 ‘金火正易’이라 규정하고, “아아! 금화가 올바르게 바뀌니 선천의 비색한 시대는 물러가고 태평한 후천의 시대가 도래한다(否往泰來)”라고 단정하여 하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땅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과 땅이 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형상을 가지고 후천의 세계를 묘사하였던 것이다.






4) 상수론적 이해 - 금화교역론을 중심으로



동양인들은 변화의 관점에서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한 주역을 변화의 텍스트로 불렀다. 주역의 기본논리는 易簡(easy and simple), 不易(non change), 變易(changing)이라는 3가지로 규정되어 왔다. ‘역’이라는 하나의 글자 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자연은 음양이라는 간단한 법칙에 의거해서 변화하므로 인간은 아주 쉽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이간’의 뜻이 있다. 만물은 시공간의 범위 안에서 운동하는데, 운동의 최종근거로서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만물로 하여금 변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궁극원리라는 ‘불역’의 뜻이 있다. 모든 사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거듭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음양현상은 시간적 또는 공간적 두 양태로 나타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변화라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듯이 ‘변화 자체’야말로 역의 본질적 의미이다. 따라서‘불변’과 ‘변역’ 중에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그 세계관은 판연하게 달라진다.

과거의 역학이 ‘불변’을 고집했다면, 정역은 ‘변역’을 새롭게 해석하여 변화 자체에 주목했던 것이다. 정역이 말하는 ‘변역’은 우주질서의 근원적 변화로서 선천과 후천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김일부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정역은 선후천의 전환에 근거한 후천역이다. 김일부는 선천이 후천으로 전환되는 이치를 하도낙서의 오행적 구조에서 찾는다. 그는 하도와 낙서의 차별상을 포착하여 금화교역을 개념화하고 체계화에 성공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금화교역은 선후천변화가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현실화?구체화의 원리이다. 그러면 우주는 왜 선천에서 후천으로 전환해야만 하는가.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태어나면 생장하고 결실을 맺어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다한다. 만약 성장만 하고 멈춤이 없다면 무한팽창하여 파멸을 초래한다. 우주에는 이러한 무한분열을 막고 만물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조절하고 성숙시키는 이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金火交易의 理致’이다.



우주변화를 주도하여 조화시키는 권능(function)은 금화에 있다. 김일부는 4?9와 2?7이 낙서에서 그 위치가 바뀌었다가 다시 하도의 원래 위치로 환원시키는 권능을 ‘經天地之化權’(「金火二頌」)이라고 표현한다. 화의 권능은 만물의 성장을 촉진하는데 있으며, 금의 권능은 극한 성장을 멈추도록 조절하여 알찬 결실을 맺도록 한다. 오행의 구조가 생명의 순환성을 대변하듯이 겨울과 봄에 해당하는 동북방의 ‘水木’은 生長을, 여름과 가을에 해당하는 서남방의 ‘金火’는 收藏을 특징으로 한다. 금화교역에서 비롯되는 조화권능은 생장한 만물을 성숙하도록 수렴하고 다음의 생명탄생을 위하여 본체로 환원시키는데 있다.



정역사상에서 ‘금화교역’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정역의 원래 명칭이 ‘금화정역’였듯이 금화교역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은 정역사상의 합리성을 보장하는 관건이다. 금화교역의 필연성을 논증한 김일부는 자신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이는 동서양 철학자들이 사고의 발상조차 못했던 내용이라고 단언하였다.「金火四頌」에는 정역사상의 화두가 담겨 있다. “4?9와 2?7의 金火門은 옛사람의 사고와 뜻이 전혀 미치지 못한 곳이며, … 옛날과 현재의 천지에 오로지 가장 으뜸가는 장관이요, 현재와 옛날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구경거리일세(四九二七金火門,古今天地一大壯觀,今古日月第一奇觀).” 금화문은 굳게 닫힌 문이 아니라, 금화교역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출입구이다. 선천에서 후천으로 시공의 기하학적 근본구조가 바뀌는 전환점을 알리는 이정표가 바로 금화문인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영원한 목적지이며 새롭게 펼쳐지는 인간 희망의 궁극처이다.



남방의 火가 서방 金의 고향으로 들어가고, 金이 다시 火로 들어감은 선천교역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에 반해 서방의 金이 남방 火의 고향으로 들어가고, 火가 다시 金의 자리로 환원하는 것은 금화정역의 모습을 상징한다. 즉 선천의 火金이 후천의 金火로 변화하는 것은 선후천변화의 근본원리인 ‘원천도(原天道: 천도 자체의 고유한 천지도수인 바뀔 수 없는 프로그램)’이다. 낙서에서 생장의 극한이었던 남방의 4?9金이 서방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서방의 2?7火가 다시 남방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천도 본연의 길(Way)인 것이다. 이는 낙서의 질서인 火金이 다시금 하도의 질서인 金火로 복귀하듯이, 선천과 후천은 순환반복함을 뜻한다. 따라서 선천의 火金이 金火로 교역함으로써 후천이 열리고, 후천의 金火가 다시 火金으로 바뀜으로써 또다른 새로운 선천을 맞이하는 것처럼, 火金과 金火가 교류하는 법칙은 곧 원천의 도로써 항구불변하는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금화교역은 선후천의 전환을 밝히는 원리이다. 그것은 금과 화 사이의 변화현상이기 때문에 火 → 金은 낙서선천의 질서요, 金 → 火는 하도후천의 질서로 요약할 수 있다. 금화교역은 과연 어떤 절차를 거치면서 이루어지며, 정역팔괘도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金火二頌」은 낙서에서 하도로의 전환이 문왕팔괘도가 정역팔괘도로 전환되는 이치가 일치함을 노래한 노래이다. “氣는 동방과 북방의 제자리를 굳게 지키고, 서방과 남방이 바뀌는 理는 서로 교통한다(氣東北而固守, 理西南而交通).” 동방의 3?8과 북방 1?6의 氣는 굳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방 2?7과 남방 4?9가 바뀌는 금화교역의 이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즉 ‘기동북’은 만물이 자라서 커나가는 生長의 단계를, ‘이서남’은 생장한 만물이 성숙하여 결실을 맺는 收藏하는 원리를 가리킨다. 이를 4계절에 비유해서 말하면, 봄과 여름의 ‘春生夏長’은 선천의 생장과정이며, 가을과 겨울의 ‘秋收冬藏’은 만물을 성숙시키고 매듭짓는 후천의 수장과정이다. 금화가 교역함으로써 선천이 후천으로, 문왕괘의 9수도가 정역괘의 10수도로 전환되는 이치를 밝힌 말이다.



금화교역은 우주질서에 근원적으로 내재한 영원히 바뀔 수 없는 도수(度數)에 근거한다. 그래서 김일부는 금화교역론을 포함한 하도낙서에 반영된 이론을 완벽한 체계로 확신한다. 서양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홀로그램 우주론’은 하도낙서적 세계관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감각적 현실이 사실은 홀로그램(Hologram)과도 같은 일종의 환영이라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존재의 더 깊은 차원, 즉 광대하고 더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한다. 흑백이든 컬러이든 간에 사진은 평면의 그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홀로그램필름은 홀로그램 입체상을 만들어 평면 너머에 있는 모습까지도 드러낸다. 데이비드 봄은 이러한 사실에 착안하여 두 세계를 설정한다. 한 장의 홀로그램필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입체상의 관계에서 필름은 감추어진 질서이다. 필름의 간섭무늬로 암호화된 이미지는 전체에 걸쳐 접혀들어 있는 감추어진 총체이기 때문이다. 필름에서 인화된 홀로그램은 드러난 질서이다. 데이비드 봄은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감추어진 질서(implicate order, 접혀진; enfolded)’라 하고, 우리의 현실차원을 ‘드러난 질서(explicate order, 펼쳐진; unfolded)’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현상들의 나타남은 이 두 질서간의 무수한 접힘과 펼쳐짐의 결과이다. 이 세계의 특성들이 복잡하고 심지어는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숨겨진(감추어진) 질서가 ‘접힌’ 상태로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역에서 말하는 낙서선천의 세계는 이미 펼쳐진 세계요, 하도후천의 세계는 앞으로 펼쳐질 감추어진 질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의 두 측면을 이룬다. 낙서선천은 하도를 본체로 삼아 우주사의 전면(前面)에서 작용하고 지배하는 원리를 표상한다면, 하도후천은 낙서를 본체로 삼아 우주사의 전면에서 작용하고 지배하는 원리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체관계를 형성하면서 이원적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하도와 낙서는 선후천을 막론하고 우주의 항구적인 창조원리인 셈이다. 다만 낙서가 전면에서 작동하는 생장과정에서 불가피한 부조화와 불균형한 시스템을 이룰뿐, 그 목표는 언제나 하도의 조화와 균형과 완전을 지향한다. 그래서 김일부는 낙서가 하도로 펼쳐질 수 있는 근거로서의 총체를 원래의 천도라는 뜻에서 ‘原天道’라 규정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낙서의 9수는 부분적으로 펼쳐진 세계요, 하도의 10수는 미래에 전체적으로 펼쳐지고 열릴 필연의 세계인 것이다.



김일부가 구상한 우주론의 특징은 우주창조의 시작점과 완성점이 극명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정역은 전자보다는 후자를 강조한다. 그 까닭은 낙서의 역생도성의 순서에 따라 우주는 왕성한 팽창과 자기 목적을 향해 진행하며, 그것이 극한의 경계점에 이르면 곧이어 하도의 도생역성의 순서가 뒤따르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역사상은 일종의 목적론적 우주관이라 할 수 있다. 그 목적은 다름아니라 선천은 후천을 지향하고, 후천이 다하면 다시 선천으로 바뀌는 순환의 영원회귀에 있다.



선후천변화의 이치인 생명의 율동상을 형상화하여 표현한 금화교역은 ‘우주의 자기조직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도수’라는 말 자체에 이미 하늘의 이치가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듯이, 실제로 활발히 살아서 우주질서에 아로박혀 있는 자기창조, 자기조직, 자기변화하는 하늘의 이치인 것이다. 따라서 하도낙서의 역생도성과 도생역성의 논리는 ‘새생명’을 낳는 창조의 방식으로서 자연의 질서를 관통하는 보편원리인 것이다. 역생도성과 도생역생는 각각 분리된 시간 흐름의 독립적 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전체 우주에 편재하여 작용하는 질서의 총화, 조화체의 궁극인 우주의 거울인 셈이다. 그것은 모든 시공간에 스며들어 만물로 하여금 공간적으로는 상호연결시키고, 시간적으로는 만물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는 역동적 원리인 것이다.



김일부는 시간 흐름의 방향성과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우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기 변신을 거듭하여 성숙을 지향한다. 우주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원인은 무한성장을 조정하는 금화교역의 구체적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금화가 교역한다는 것은 낙서9수의 질서가 하도10수의 질서로 전환됨으로써 모든 질서가 완전 조화상태로 정립됨을 의미한다. 우주론적으로 보면 금화교역은 우주의 자기 정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낙서의 상극질서를 부정하는 우주의 자기부정 현상인 동시에 자기정체성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금화교역에 의한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뒤바뀜은 단순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존재방식까지도 변한다는 점에서 선천과 후천은 그 외연과 내포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시간론적 이해 - 역수론을 중심으로




기존의 태극음양론은 우주의 기원과 생성을 법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목적였다. 그래서 역은 변화에 주목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의식일 뿐이다. 서양인들이 줄곧 불변의 영원을 추구했다면, 동양인들은 변화의 영원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영원불변한 것은 변화의 지속일 따름이다. 변화에는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구체적 변화와 우주질서의 근본적 전환을 뜻하는 우주변화가 있다. 현상적 변화는 과학의 탐구대상이며, 우주변화는 역이 전하고자 했던 본질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역의 핵심명제는 우주변화, 즉 선후천변화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정역은 어떤 특수한 개별생명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정역의 대상은 보편생명이다. 주역은 “낳고 낳아 생명을 잇는 것이 易이다”라고 하여 생명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강조한다. 정역도 일차적으로는 주역을 충실히 계승한다. 하지만 김일부는 우주생명의 순환에는 절차와 마디가 있으며, 그것도 일정한 시간대(Time zone)에 맞추어 진행된다고 하여 무한 순환만을 말하는 주역과 결별을 선언한다. 기본적으로 김일부는 소강절의 원회운세설에 기초한다. 소강절 우주론의 백미는 ‘우주개벽의 과정(Cosmogonic process)’을 논리화한 점에 있다. 만물의 생성이 번갈아 일어난다는 관찰은 그의 사유의 출발점이다.



주지하다시피『황극경세서』는 처음부터 우주역사의 시간표 작성으로 시작된다. 소강절은 우주 전체의 생장수장의 순환을 시간으로 계산하는 작업을 추진한다. 그는 우주를 생장수장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으로 간주하고, 또한 이를 수리화함으로써 변화의 시간대를 객관화하려고 시도하여 우주 전체의 시간적 시스템은 1元 = 12會, 1會 = 30運, 1運 = 12世, 1世 = 30년이라는 ‘원회운세설’을 창안하였다. 우주는 129,600년을 하나의 주기로 삼아 생장수장의 단계를 거치면서 온갖 굴곡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서 성숙시키고 다음 생명을 위해 저장함으로써 선후천을 반복한다. 김일부는 원회운세설을 낱낱이 파헤치고 한층 심화시켜 우주생성의 목적을 명확하게 천명한였다.



역의 본래적 의의는 ‘변역(변화)’으로 집약된다는 것이 정역의 근본입장이다. 그래서 역의 근본명제를 획기적으로 바꾼다. “역이란 책력(冊曆)이니 책력이 없으면 성인(聖人)이 없고 성인이 없으면 역도 없다.” 이것이 바로 정역의 3대 명제이다. 그는 전통역학의 주제였던 변화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시간성(책력)의 문제로 환원시켰다. 우리는 보통 책력이라 하면 자연계의 주기적 변화를 단순화하고 체계화하여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천문학적 의미에서의 캘린더(Calender)로 인식하여 년,월,일,시,분,초 등의 개념을 바탕으로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계산함으로써 인류문명을 발달시켜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김일부는 달력 구성의 메카니즘에 대해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고 궁극적 해답을 내려 ‘책력’이란 단지 삶의 유용한 수단이 아니라, 캘리더 구성의 근거로서의 ‘역수원리’라고 규정한다.



정역은 우주사의 생성은 역수변화에 의거한 것임을 전제한다. “역수원리는 우주역사를 섭리하는 가장 근원적이요, 포괄적인 전체 역수를 밝히고 있는데, 우주의 생성은 바로 역수원리 안에서 또는 그것에 근원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김일부는 구체적으로 原曆 → 閏曆 → 閏曆 → 正曆의 단계로 우주는 발생하고(生) 성장하여(長) 완수된다(成)고 요약한다. 우주운행의 시간의 메카니즘은 네 단계의 절차를 밟으면서 대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이다. 4력은 원역과 2단계의 윤역, 그리고 최후의 정역으로 구성된다. 윤역을 하나의 단계로 간주한다면 우주는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된다고도 할 수 있다. “4력 생성사에 있어 윤역이 생하는 太初的 根源曆이라는 입장에서 말할 때에는 原曆이요, 윤역이 변화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된 역이라는 입장에서 말할 때에는 正曆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역에 있어 그 본체도수까지를 포함해서 말할 때에는 원역이 되는 것이요, 반대로 원역에서 그 운행도수만을 말한다면 정역이 되는 것이다.”



김일부는 우주변화의 한 싸이클을 4개의 시간대로 구분하여 시간의 내부구조를 밝히고, 후천에는 1년 360일의 도수가 정립됨을 논증하였다. “堯임금이 밝힌 1년 책력수는 366일이며, 舜임금이 밝힌 1년 책력수는 365¼일이며, 一夫가 밝혀낸 1년 책력수는 375도이니 15를 尊空하면 孔子가 밝힌 1년 책력수인 360일이다.” 그렇다면 원역과 윤역, 정역은 어떤 관계성을 갖는가. 그리고 원역과 정역을 구분하는 15도의 존재론적 위상과 원역의 성립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해석 방법이 있으나, (하도의 중심수 10 + 낙서의 중심수 5) + 정역도수 360 = 375라는 풀이가 정석이다. “375도 원역은 과거적인 본래의 근원역이며, 360도인 정역은 미래에 성취될 완성역을 가리킨다. 전체 역수인 원역도수 안에는 4력생성사를 통한 역수변화에 의해 존공 귀체될 윤도수 15와 정역도수 360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윤도수가 귀공되면서 본체도수가 되는 것이 바로 ‘15 尊空’으로서 4력 변화원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원역과 윤역, 정역의 사실적 생성 관계는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4력의 생성변화는 원역 → 윤역 → 윤역 →정역의 절차를 밟아 진행되지만, 원역 375도에는 그 본체도수인 15도가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운행하는 도수는 정역 360도수이므로 원역이 정역이고 정역이 원역인 것이다. 따라서 원역이 바로 정역인 까닭에 정역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일관하는 영구불변의 항구적인 시간의 원리인 것이다. 정역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바로 현재에도 존재하며, 앞으로 먼 미래에도 영원히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초시간적인 선험적 시간원리인 것이다. 그 이유는 정역 360도는 원역과 음양의 윤역을 통틀어 우주에 편재하여 시간의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적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역도수 360도는 선천과 후천에 상관없이 시간질서의 표준이 되는 보편적 기준인 것이다.



그러면 원역에서 윤역으로의 전환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할까. 그것은 시간의 모체인 하도낙서의 중심체인 15도가 시간 흐름의 물결을 타고 현상적으로 윤역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여기에는 2가지 풀이가 가능하다. 하나는 전통 주역학의 괘상(卦象) 중심의 풀이와, 다른 하나는 하도낙서적 시간관에 근거한 풀이가 있다. 전자에 의하면, 시간 생성의 본원인 무극과 시간 흐름을 조절하는 추동력인 황극이 시간 형태로 자신을 드러낼 때, 10무극은 건괘로 대표되는 9로, 5황극은 곤괘로 대표되는 6의 운동으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한다. 이런 뜻에서 주역은 양효를 9로, 음효를 6으로 부르는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하도낙서의 원리는 시간의 실재성을 전제함과 동시에 그 실재성의 근본틀 변화가 선후천의 시간전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본질적 명제였다. 이때 시간의 모체인 10과 5를 핵심축으로 형성된 하도수 55와 낙서수 45는 대연지수 50을 중심으로 각각 마이너스(minus) 방향과 플러스(plus) 방향으로 진행함으로써 객관적인 시간의 변화라는 ‘자기 변신’의 사태를 맞는 것이다. 즉 10과 5는 즉자적으로 자기를 현시하는 것이 아니라, 10은 5의 방향으로, 5는 10의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정역(正曆)이 윤역(閏曆)으로 변화하면서, 정역의 본체도수였던 원역(原曆) 내의 15도(度)는 건괘의 ‘用九’법칙과 곤괘의 ‘用六’법칙에 의하여 음양으로 분리되어 윤도수 15로 나타난다. 그것은 우주생성의 극한 분열의 상태를 상징하는 9나, 분열을 성숙과 완성으로 수렴시키는 6의 구체적 운동이 360일 정역에 시간의 꼬리표가 붙는 ‘윤역’의 형태로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론적 의미에서 시간의 모체인 10과 5가 객관적인 시간으로 변환되는 ‘자기변신’의 사건인 것이다. 즉 10과 5는 즉자적으로 자기를 현시화하지 않는다. 우주의 심원한 영혼인 10과 5는 9와 6의 양태로 스스로의 역할을 대행하도록 한다. 그것은 강약(9와 6)의 박자로 춤을 추어 생명의 약동을 보여주는 우주의 몸짓인 셈이다. 생명의 춤은 처음, 중간, 끝이라는 시간의 리듬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치와 흡사하다. 처음의 원역, 중간의 윤역, 마침의 정역의 단계가 그것이다. 그 중간단계의 역동적 표현체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365¼일)과 태음력(약 354일)인 것이다(이것이 선천 캘린더 구성의 연원이다. 반대로 말하면 분열과 수렴의 극한을 상징하는 9와 6이 원래의 자리인 10과 5로 환원되는 역전에 의해 - 체용의 전환 - 360일의 正曆이 된다).



이와 같이 원역은 2단계의 윤역으로 분리되는데, 이때 정역 360도는 윤역으로 하여금 원역의 근본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자기 항상성’을 유지하게끔 하는 중심체이다. 다시 말해서 원역 375도에서 15도는 본체가 되고 정역 360도가 작용하던 구조가, 윤역에서는 정역 360도가 중심체가 되어 윤역의 도수가 작용함으로써 본체와 작용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逆轉; Reverse)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정역사상의 시간적 수리론은 다음의 내용을 갖는다. 12시간은 하루 30일은 한 달을 구성한다. 이 시간수의 귀공(歸空=歸體)에 의해 날수의 변화를 가져오고, 날수의 귀공에 의해 달수의 변화를 가져오므로 결국 日月의 변화는 1년 朞數의 변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정역이 말하는 시간의 변화란 1년을 구성하는 ‘朞數 自體의 變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변화는 일월의 올바른 궤도 수정에 따른 지축의 정립을 통해 드러난다. 선후천변화의 물리적 흐름을 주도하는 주체는 일월이므로 ‘日月開闢’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일월의 운행질서 자체에 근본적 변화가 온다는 말이다. 일월의 운행이 자기수정을 통해 올바르게 자리잡는다는 말은 과거의 캘린더가 전혀 쓸모 없어져 새로운 캘린더로 교체됨을 전제한다. 즉 ‘윤역’이라는 시간의 흐름은 미완성이므로 낡은 일월은 물러나고 후천의 새로운 일월이 솟는 물리적 변화로 가능하다. 일월의 변화는 후천의 책력을 가져온다. 즉 선천의 윤역은 물러나고 후천 정역의 세계가 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 달은 30일, 1년은 360일이 되며, 23.5도로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서고, 황도와 적도가 일치함으로써 지축은 북극성을 향하게 되어 극한과 극서가 소멸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역이 강조하는 선후천변화가 과연 물리적 변동에 따른 인간의 자세를 촉구하려는 사상인지, 인간의 존엄성의 확립을 위해 그 근거를 재구성하려는 이론인가를 판단할 시점에 이르렀다. 달리 말해서 시간질서의 변화가 공간질서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지구를 비롯한 태양계, 멀게는 우주의 중심축이 바뀌는 대변동을 말하는 것인지를 진솔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현대과학의 업적과 발맞추어 대응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정역사상의 합리성과 진면모를 드러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일부는 “아아! 축궁이 왕성하니 자궁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구나(嗚呼, 丑宮得旺, 子宮退位)”「化翁親視監化事」라고 감탄하면서, 암시적으로 ‘지축정립’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시간의 질적 변화와 동시에 공간의 량적 변화가 순간적인 지축이동의 현상으로 나타남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김일부는「十五歌」에서 “금화가 서로 바뀌어 들어 만세의 책력의 그림이 되네(金火而易兮, 萬曆而圖)” 라 하고, 또한「四正七宿用政數」에서는 “(복희 8수, 문왕 9수와는 달리) 하도 10수의 정역은 만고불변의 캘린더이다(十易萬曆)”라고 하여 시간의 질적 변화를 통하여 우주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선후천변화에 의해 28수의 배치가 완전히 180°전도되는 천문현상으로 나타남으로써 1달은 30일이 되고, 1년은 언제나 360일이 됨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역사상의 시간론은 일월의 정도(正度)운행과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는다. 선천의 일월운행이 빚어내는 세계는 하나의 완성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진화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일월운행에 의해서 새로운 시공간대가 열리는 사건은 물리적으로 객관적 사실의 변동을 뜻한다. 정역의 선후천론은 ‘모든 것은 변화하면서 순환한다’는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의 화살은 붕괴의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선후천의 순환에 기초한 정역사상은 시공간의 객관적 변동이 곧 세상의 종말로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역사상의 시간론은 새로움의 창조성을 해명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선후천 전환이 갖는 철학적 의미는 시간의식에 대한 쌍방향적 사고의 필요성과 시간원리의 주체화에 의거한 인간의 능동적 대응자세를 일깨우는데 있는 것이다.



서양의 우주관과 시간관은 화살이 반대방향으로 날아가지 않는 것처럼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뉴턴의 절대적 시간관에 발맞추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주는 결국에 붕괴와 소멸로 이어진다는 일방적이고 진보적 역사관을 낳았다. 하지만 정역의 우주관과 시간론은 순환론에 기초하지만 창조적 순환론을 본질로 한다.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화와 진보를 거듭한다는 직선적 시간을 포함하는 순환론이다. 그것도 선후천 전환을 밝히는 시간관이라는 점에서 정역사상은 시간에 대한 획기적 패러다임이 되기에 충분하다.









3. 나오는 말




一夫 김항(金恒, 1826-1898)은 암울했던 조선조 후기에 태어나 평생 재야에 몸담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하고 의미 깊은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그는 정역을 완성하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先後天論을 비롯하여 河圖洛書論, 金火交易論, 時間論, 3極論, 易數聖統論, 日月開闢論, 度數論, 五運六氣論, 天文學, 力學論, 曆法論, 소강절의 元會運世論, ‘空’의 形而上學, 神觀, 天干地支를 바탕으로 하는 6甲의 變形理論 등을 통합하고, 더 나아가 우주의 발전사를 괘도의 변천에 대응하고 그 결과를 정역팔괘도로 귀결시킨다. 또한 心法學, 수행의 문제인 詠歌舞蹈, 인간의 주체성과 우주원리의 상함성 등이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각 이론들은 한결같이 선후천론을 정점으로 특수와 일반의 관계처럼 조직되어 정역사상의 정교함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정역사상 전체를 이해하는데는 많은 분야의 기초지식이 요구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김일부는 우주론과 시간론, 그리고 종교를 아우르는 통합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따라서 정역사상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조명되어야 마땅하다. 정역사상이라는 빛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역은 성리학을 비롯하여 전통사상에 대한 발전적 계승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복형태를 갖춘다. 비록 용어와 문화적 기반은 승계했지만, 그 발상과 내용은 전혀 새롭고 신선하고 독창적인 사유를 보여주었다. 특히『서경』과『논어』에 나타난 ‘天之曆數在汝窮’라는 명제를 ‘시간의 인간주체화의 문제’로 압축하여 시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실존’이 융회하는 화두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시간의 객관적 변화를 가리키는 ‘4曆變化’를 통하여 시간 흐름의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우주관과 시간론)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대화’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극단적 분열주의로 치닫는 현대문명의 파괴성마저도 포용하는 대통합의 체계로 인정되는 정역사상을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은 그리 달갑지 않다. 금장태는 “19세기 말에 등장한 대중종교요 민족종교로서 정역사상이 가지는 한계는 상수론의 논리에 사로잡혀 주술의 세계로 빠지는 함정일 수도 있는 한계를 갖는다. 상수적 언어와 상징성으로 이루어진 정역사상을 재해석하지 못하면 보편종교로 나올 수 없고, 술수가의 폐쇄적 상상력 속에 갇힐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극복되어야할 평가임이 분명하다. 철학은 한낱 찻잔 속의 태풍을 일으키지만, 종교를 아우르는 철학은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폭풍이기 때문이다.



정역이 비록 그 시대의 언어로 기술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마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 정역사상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첨단과학의 업적의 하나인 과학적 시간관과 접목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문명사적 측면에서도 거시적으로 조명됨이 마땅하다. 지금은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이란 명제가 시사하듯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그에 의해 제기된 양자역학을 결합하는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을 수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으로 ‘카오스(혼돈) 이론’과 ‘생명의 자기조직화 이론’, 그리고 ‘시간의 非線型理論’이 떠오르고 있다. 시간의 화살은 열역학 제1법칙을 근간으로 한다. 이는 증기기관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熱은 에너지(열 = 에너지라는 등식이 성립됨)로 변환되는 데, 그 열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달되는 것이 특징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전달된 열은 일정한 방향성만을 갖는다. 이를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특정한 방향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과학이 밝히고 있는 시간의 궁극 명제이다. 정역사상은 노벨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이 제시한 ‘생명의 자기 조직화이론(이는 정역의 3극론을 현대화하는 결정적 학설)’과 이를 기초로 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제기한 시간관을 포괄(어느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 이들의 종합형태로서)하는 동시에,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를 뿐만 아니라(서양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철학, 역사, 심지어 다윈의 진화론 등도 시간의 線型적 발전을 강조한다) 그 내부에는 시간의 순환성(Circulation)이 오히려 근원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시간의 비가역성을 절감한다. 모든 생물이 죽는다는 사실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증거해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생 비애의 궁극적 원인이다. 특히 ‘노화현상’이 갖는 시간의 비가역성의 비정함을 과거의 사상가들이 얼마나 고뇌했던가. 여기서 벗어나고자 불교는 해탈을 주장했으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를 외쳤던 것이다. 인간의 삶은 시간의 무상함 때문에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다. 제한된 시간 범위 안에서 참다운 인생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은 차라리 숭고함 그 자체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참다운 삶인가를 풀기 위해 인간은 줄기차게 시간의 문제에 착안하여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어 왔다.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것은 문화적 시간관, 객관적 시간관, 주관적 시간관, 심리적 시간관, 과학적 시간관, 주체적 시간관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각종 시간관은 나름대로의 성격과 특징을 지니면서 인간의 삶의 양태에 영향을 끼쳤다. 문화적 시간관은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객관적 시간관은 자연질서의 냉혹함에 대항하는 정신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주관적 시간관은 진리의 객관성마저도 부정하기에 이르며, 심리적 시간관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무의식과 연계된 영성운동으로 확대되며, 과학적 시간관은 인간의 내면성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으며, 주체적 시간관은 신의 은총 또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시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신비주의와 부합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과연 김일부의 최대의 관심사였던 시간관은 과연 김일부의 시간관은 어디에 있는지 낱낱히 해부하고, 이를 종합해야만 비로소 그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동학사상이 새로운 세상을 그리워하는 희망의 구원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정역사상은 엄밀한 이론체계가 정비되어 있다는 측면에서도 한국철학의 독창성과 함께 21세기 담론을 담기에 손색이 없다. 정역은 비록 얇은 책자에 불과하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갖추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개발할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정역사상에 대한 과학철학적, 종교철학적, 수리철학적, 시간론적, 신과학적, 최신의 우주론적 성과에 기초하여 조명하는 방법 등은 거의 미개척 분야이다. 우리는 최우선적으로 김일부가 정역을 집필한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이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형태의 연구가 필요하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다면 그것은 각론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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