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곤지산 동산에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다.
겹벚꽃을 비롯하여 영산홍, 자산홍이 풋풋한 연초록 신록과 짝하여 자태를 뽐내고 있다.
꽃사태가 일어나서 상춘객이 몰려온다.
시진핑의 눈치도 안 보는지, 중국인 단체 여행객들도 보인다.
전주 한옥마을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곳.
곤지산은 완산의 끝자락이다. 백두대간이 금남호남정맥으로 갈라져 굽이치다가 진안 모래재에서 호남정맥이 나뉘고, 호남정맥은 전주 근교의 경각산으로 내달리는데, 여기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고덕산으로 솟은 후 평촌 보광재를 거처 완산까지 이어진다. 완산은 전라감영과 경기전을 감싸는 남주작으로서 7봉우리를 이루고 서쪽 태극산과 이어져 서신동으로 흐른다.
삼천천과 전주천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인 것이다.
완산과 남고산 쪽으로 향하다 멈춘 곳을 곤지산이라 부른다.
곤지산의 끝에는 초록바위가 있고, 이곳은 개화기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중 한 분이었던 김개남님이 처형된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꽃동산을 가꾸신 고 김영섭님께 응당 감사드려야 하지만, 문학도인 나는 박봉우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박봉우 선생이 말년에 완산시립도서관에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완산시립도서관 뒷동산이 바로 꽃동산이다. 이곳 완산 주변에는 동학혁명기념탑, 해학이기선생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지만, 박봉우 시비는 없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해마다 그가 화사하게 왕벚꽃으로 피어난다고 믿는다.
박봉우 시인(1934~1990)은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정치과를 다녔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분단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하는 시작을 활발히 했다. 그는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신서정시를 썼는데, 개인적인 열정 고독 방황 저항에서 멈추지 않고, 민중의 노래 민중의 가슴에 닿는 노래로 현실에 저항하고 도전했던 것이다.
1962년 현대문학상을 받을 만큼 주목받았던 그는 휴전선,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4월의 화요일, 황지의 풀잎, 서울하야식, 딸의 손을 잡고, 시인의 사랑 등의 시집을 남겼다.
박봉우 시인이 시립도서관에 근무할 때엔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시인과 함께 근무했던 도서관 계장님으로부터 시인의 삶을 취재한 적이 있다. 계장님은 당신이 박봉우 시인을 많이 돌보아 주었는데, 시인이 말년에 알콜중독자로서 술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박정희 전두환 치하에서 저항적 삶을 살았던 정치인, 사회운동가, 문인들은 대부분의 구금과 고문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고 그 트라우마를 이길 수 없어 술에 의존하게 된다.박봉우 시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광주 출신의 시인이었지만 그의 형편을 잘 아는 친구가 전주 시장을 하고 있어서 도서관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후문이다.
그의 고향, 연고를 떠나 시립도서관과 전주한옥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곤지산 그 어디쯤 박봉우 시인의 작은 시비 하나 서길 소망한다.
한 인간의 삶과 예술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 역사가 어떻게 스며 있는가로 할 수 있으리라.
분단 시대에 민족의 화해와 하나됨을 꿈꾸고,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노래한 죄로 박해받았던 한 시인에 대한 위무의 돌비석을 우리 마음에는 물론 그가 아프게 살았던 생의 현장에 세우는 것 또한 예의가 되리라.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ㆍㆍㆍ 우리는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ㅡ'휴전선' 일부
꽃길을 따라 내려간다.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외치다 동백꽃 꽃송이로 누운 김개남 장군,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훍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 . (전주사범학교 졸업)
"무지개 꿈이나 꾸어야지. 그려, 미친 채로 무지개꿈이나 바보처럼 꾸어야지. 그것은 분명 신화인데ㆍㆍㆍ" 박봉우 (신화)
그들의 꿈과 아픔이 어우러져 꽃사태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직 긴 겨울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잠시 꽃에 취하는 것은, 봄날을 꿈꾸며 꽃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냈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춘래불사춘.
봄이지만 한반도는 한겨울이다.
진정한 봄은 역사의 봄, 우리 민족이 화해하고 하나되는 그날이리라. 김개남, 신동엽 그리고 박봉우가 꿈꾸었던 시공간이 새봄이리라.
ㅡ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추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