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학인이다 - 한국 여성 공학인 협희 , 효형 출판 , 한국 오라클 박경희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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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라클 박경희 부사장 - 한국 여성 공학 기술인협회 효형 출판 (2015,8,15)
서울대학교 계산통계학과와 카이스트 MBA를 졸업하였고 현재 한국오라클 고객지원 서비스 를 총괄하는 부사장으로서 우리나라 IT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며,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새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으로 항상 깨어서 오늘을 준비하고 내일을 계획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오라클에서 OWL(Oracle Women Leadership)의 리더를 맡아 여직원들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성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두근두근 내 인생
아줌마의재취업 도전기
남편의 박사 후 과정(post-doctor)을 위해 미국에서 2년 정도 지낸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의 일과 중 하나는 신문의 구인란을 뒤적이
는 것이었다. 삼십 대 초반이었던 당시, 2년의공백에 두 아이까지 있는 아줌마를 뽑아줄 회사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불안했다.
아이들이 만 한 살과 세 살로 너무 어렸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맞은 예방주사 부작용으로 큰아이가 이따금씩 경기를 하는 상태라 아이를 돌보아주시는 아주머니에게만 아이를 맡기고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큰아이는 열감기를 앓을 때마다 경기를 했다.
이 증상은 아직 신경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일단 발생하면 습관성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신경의 발달이 완성되는 다섯 살 이후에는 이런 증상이 없어지지만 그 이전에는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다 보니 차마 일을 하겠다는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하고 싶은 욕구와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그저 끊임없이 신문을 뒤적이며 각종 회사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 또 채용 시험에 응시해보면서 아직 입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만으로 혼자 만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
나도 당시엔 흔한 여성 경력 단절자였고,아이를 돌보기 위해 나의 사회적인 경력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삼십 대 초반의 아줌마였다.
한때는 대학에서 푸른 꿈을 꾸는 눈이 총명한 명문대생이었다. 하지만 보통 여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많은 꿈을 스스로 포기해갔다. 남자 친구는 우리 부모님이 사윗감으로 꿈꾸시는 속칭 ‘사’자 직업 종사자가 아닌 생물학도였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더 이상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학교 안에 남학생 수가 월등히 많았으니 더 나은 조건의 남자를 따져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항상 밤새워 실험하는 남자 친구가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내 공부는 포기했지만, 남편은 공부를 계속했으면 했다.
그런 내 의지를 강조한 덕에 남편은 카이스트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고,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면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갖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새로운 문화도 접할 겸 남편의 NIH 박사 후 과정 생활을 함께하며 2년간 미국에서 지내다 돌아왔다. 미국에 들어가기 전에 근무하였던 KDI(한국개발연구원)에 제품 소개를 하러 온 영업 사원을 통해 오라클이라는 회사에 대해 알게 되었었다.
오라클 데이터베이스가 모든 오픈 시스템에서 실행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서 당시 여의도에 위치한 오라클 회사를 찾아가보기도 했다. 첫눈에도 얼마나 멋진 회사던지. 그때 나는 다음에 꼭 이 회사에 입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국오라클이 한국에서 고속 성장을 막 시작하던 해인 1995년 공채 1호 신입, 경력 사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더 이상 내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사 원서를 내고 서울로 집을 옮겼다.
당시 난 미국에서 돌아와 생명공학 연구소에 자리 잡은 남편을 따라 대전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 다른 회사에 지원해서 1, 2차에 통과했을 때도 아이들을 두고 회사에 간다는 용기를 못내 무수히 고민하다 최종 면접을 포기했었는데, 오라클은 전부터 눈여겨본 회사여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하늘의 도움이었는지 당시 큰아이의 경기 증세도 잠잠해지고 있었다. 남편도 나의 뜻을 이루어주기 위해 대전의 연구소 생활을 접고 서울에서 통근이 가능한 천안에 위치한 선문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결혼 전 나를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해주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이런 남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남편은 내 꿈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지원자였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 일, 일
오라클에 경력 사원(대리)으로 입사하여 데이터베이스 기술 지원을 맡게 되었는데, 그동안 일하고 싶어서 몸에 병이 날 정도였던터라 나는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을 새벽 3시에 일어나 공부를 시작하였다. 내가 한 가지를 더 깨우치면 더 나은 지식을 고객사에 전달할 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가득한 시기였고 국가의 IT 산업에 이바지하겠다는 애국심 또한 충만하던 때였다.
2년간의 경력 공백기 그리고 이전 직장에서 IBM 시스템만 다루어봤다는 점 때문에 입사 초기에는 오라클 데이터베이스 제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으나, 나중에는 우수한 한국오라클의 수많은 엔지니어 중에서도 뛰어난 여섯 명으로 구성된 COE(Center of Expertise) 팀에서 일할 정도로 성장했다. 데이터베이스의 소스 코드(source code) 정보에 접근하여 깊이 있는 테스트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우수한 엔지니어들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Internal Architecture(DSI) 과정 총 여덟 과목을 전부 스스로 공부하여 당시 내부 엔지니어들과 주요 고객 대상으로 강의도 진행하였다. 고객들로부터 받는 기술 평가나 만족도 점수는 대부분 만점에 가까웠다.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성공하다
오라클에서 기술 엔지니어로 9년 정도 근무하고 퇴사 후, 당시 베리타스(현 시만텍)의 컨설팅 부서 이사로 일을 하다 2007년 한국오라클에 상무로 재입사하였다. 베리타스는 당시 글로벌 소프트웨어 회사 중 4~6위를 오르내리는 큰 규모의 회사였다.
베리타스에 근무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큰아이를 미국의 기숙 학교에 보내게 되었다. 준비해주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미국의 기숙 학교에 보내기 위한 복잡한 지원 과정을 소화하려면 우선 미국의 학교 시스템을 이해해야 했다. 이때 내 일을 하느라 아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할 것 같아 회사에 사표를 내고 유학 준비에 올인해서 3주 만에 지원 준비를 마쳤고, 결국 원하는 고등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지금은 두 아이 모두 미국 명문대에서 아빠의 뒤를 이어 생물학과와 의예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내 일을 계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을 보살피는 것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두 가지가 양립하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있어 든든하다.
한 부분을 위해 다른 부분은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시기에는 과감하게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한쪽에 신경을 쓸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이를 위해 직장을 완전히 포기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부단히 나 자신과 싸웠고, 결과적으로 지금은 두 아이로부터 인정받는 떳떳한 엄마가 되었다.
오라클에 상무로 재입사하고 나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회사에서다시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잠도 오지 않았다. 항상 부지런히 걸어다니고 밥도 빨리 먹고, 대부분의 여직원이 그러하듯 남들보다 서너 배로 일하면서 꿈을 키워나갔다. 이 시점엔 남편(현재 메디톡스 대표이사)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더 이상 경제적인 부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책을 보고 동료들과 일하는 시간이 마냥 즐거울 따름이다.
오라클에 재입사할 때는 기술지원 서비스 본부에서 Presales Drector(기술지원과 영업의 중간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목표 달성을 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항상 남을 배려하는 자세가 좋은 평가를 받아서 100명이 넘는 엔지니어들을 이끄는 오라클 기술지원 부서에 5년 동안 엔지니어들의 수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이제는 한국오라클 고객지원 서비스 전체를 관할하는 부사장으로서 우리나라 IT의 발전을 위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력 강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나의 인생 상반기에는 오라클에서 젊음을 모두 바쳐 일하였으니 하반기에는 또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방향을 찾고자 현재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최고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과 문화 그리고 역사 공부도 한다. 그리고 더 나이 들었을 때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 동물에 관한 공부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가족의 구성원에는 강아지 두 마리도 포함되어 있다. 강아지는 골든 리트리버와 코카 스파니엘인데 이들은 내 삶의 또 다른 기쁨의 원천이다. 새벽에 두 강아지와 서울숲을 산책하면서 하루를 계획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밤새 앉아 책을 읽고 아침에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태양을 바라본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회사에 가기 위해 영동대교 위를 지날 때 비치는 햇살에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지. 일터로 향하는 나의 가슴은 여전히 벅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