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육 이제는 중학교 이전에 모두 끝낸다.
한국일보 2006/03/06
교실에 '토익800'과 '교과서 더듬더듬' 공존 요즘은 중학교때 영어 끝내고 고등학교에선 언어·수리 전념 '조기교육' 돈과 부모 열정이아이들의 영어실력을 결정
서울 강남에 사는 최선영(41)씨는 올해 큰 딸이 외국어고에 들어가자 장기투자의 결과라며 흡족해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꾸준히 영어학원에 다니도록 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캐나다에 1년간 단기 유학도 보냈다. 그의 영어관은 확고하다. “돈으로 해결되는 유일한 과목이 영어다.”
영어가 권력이 된 사회에서 영어 투자의 대차대조표는 명확하다. 빨리, 많이 투자하면 그만큼 돌아오게 돼 있다. 영어권력을 재생산해내는 영어 조기교육 컨베이어벨트는 강남 등 교육특구를 중심으로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 곳에 올라서지 못하면 영어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일찌감치 낙오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영어권력의 재생산 과정
현재 영어권력을 만들어내는 조기 영어교육 시스템은 크게 국내와 해외로 나뉜다. 해외파는 외교관, 교수, 상사주재원 등 부모를 따라 외국에 체류하는 경우와 아예 조기유학에 나서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2004년 한해에만 출국 초등학생이 1만7,000여명에 달했고, 이 중 조기유학 목적은 6,276명이었다.
G유학원 박모(51) 원장은 “미국 명문고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조기유학을 가는 경우는 드물다”며 “조기 유학생 대부분이 영어에 익숙해지면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생 유학생이 급증하고, 이들을 사후 관리할 귀국학생 전문 어학원도 성업중이다.
국내파의 출발선은 영어유치원이다. 강남에는 수업료만 월 100만원이 넘는 영어유치원도 있다. 초등학생 대상의 듣기, 읽기, 작문(에세이) 전문 등으로 세분화한 어학원이 즐비하다. 대치동, 목동 등 교육특구에 빼곡히 들어찬 각종 영어학원은 블랙홀처럼 학생들을 빨아들인다.
국내파도 방학 중에는 해외연수를 다녀오는 경우가 많다. 유학원의 프로그램에는 3~6주의 영어연수부터 1년 정도의 단기유학까지 입맛대로 구비돼 있다. 경기 분당 A중학교 김모 교사는 “한 반 40% 정도가 어떤 식으로든 해외연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코스가 고교 입시를 앞둘 무렵 수렴되는 곳이 특목고 대비 전문학원이다. 경기 고양시 G학원 관계자는 “이 시기쯤 되면 학생들의 평생 영어실력은 결판나 있다”고 말했다.
결국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결정짓는 관건은 돈과 부모들의 열정인 셈이다. 서울 D고 김모 교사는 “외국에 살다 왔더라도 사후 관리가 부족하면 영어실력은 곤두박질 친다”고 말했다. 물론 꾸준히 돈과 성의가 투자된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수준급이다. 특목고 입시 전문인 J학원 관계자는 “서울지역 외고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경우 중학교 2학년이면 대입수학능력 영어시험은 만점을 받는다”고 말했다. 물론 토익, 토플 성적도 상위권이다. 실제 대일외국어고 2005년 신입생들의 토익 평균점은 802점이었다.
조기 영어교육에 목을 매는 이유
의대 진학이 목표인 서울 K고 2학년 최모군이 요즘 영어공부에 쏟는 시간은 일주일에 단 2시간. 머리도 식힐 겸 영어소설을 읽는 게 전부다. 일찌감치 영어교육을 받아온 덕분이다. 대신 수학 과학에 주력한다. 최군 부모도 조기 영어교육이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만족한다. 현 입시제도에서 영어의 영향력은 크다. 영어 특기자 전형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반전형에서 영어실력은 상위권 대학 진학에 필수적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첫번째 관문격인 특목고 입시에서 영어의 실질적 반영비율은 70%라는 게 학원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영어는 다른 어떤 과목보다 효율적인 선행학습이 가능하다. 수학의 경우 초등학교에서 중ㆍ고교 과정을 익히긴 힘들지만, 초등학교에서도 대학 수준까지 끝낼 수 있는 게 영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게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가 있다’는 언어학 이론이다. 동덕여대 우남희 교수는 “영어교육은 기본적 인지능력이 발달한 만 6~13세 사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 시기를 넘기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서울 E외고 출신 최모씨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영어 만큼은 어려서 외국에서 익힌 얘들을 당할 수 없었다”며 “국내파들이 모이면 ‘자식은 무슨 일이 있더라고 미국에 보내자’고 늘 얘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고교생 학부모 정영복(51)씨는 “중학교까지 영어를 끝내고 고등학교에선 수리와 언어에 매달리는 게 요즘 상위권의 공부패턴”이라고 말했다.
영어는 이후 경쟁사회에서도 성공을 보장하는 강력한 무기다. 영어를 일찍 마스터 해두면 입시뿐 아니라 평생 써먹을 수 있다고 해서 “수학은 입시용이지만 영어는 평생용”이라는 말도 있다. 학부모 윤기훈(38)씨는 “어렸을 때 영어에 투자하면 뒤늦게 영어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평생이 보장되는데, 기를 쓰고 시키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엄마, 영어 선생님이 이 문장을 이상하게 해석해요.” 학부모 김모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1년간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중학생 아들이 학교만 갔다 오면 영어교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고 말했다.
지금 교실 영어는 3중고를 겪고 있다. ‘영어 못하는’ 교사가 ‘영어 잘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진땀을 뺀다. “영어교사의 세대교체가 시급하다”는 학부모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교사 가운데 정년이 가장 짧은 과목이 영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나마 영어를 제대로 가르칠 교사도 태부족이다. 1997년부터 영어교육을 실시해온 초등학교의 경우 전담교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건이 괜찮다는 서울도 전담교사가 517개 학교에 894명으로, 교사 한명이 800명의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실정이다.
이러는 새 학생들간 영어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교과서를 더듬거리며 읽기도 힘든 학생과 토익 800점을 넘는 학생들이 공존하는 곳이 요즘 중학교 교실이다. 서울 B중 영어교사는 “우열반 수업을 한다지만 수준차가 너무 커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이 기댈 곳은 공교육 뿐이지만, 영어에 관한 한 공교육의 현실은 참담하다. 서울 C중 영어교사 이모씨는 “공교육만 받을 경우 중학교 3학년의 영어수준은 1980년대 학력고사 세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결국 영어가 빈부격차, 도농격차의 확대재생산이 이뤄지는 시발점이 된다. 교육 양극화의 핵심이 영어인 셈이다. 최근 영어학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영어과외를 시키느냐’는 질문에 도시지역 학부모의 91.9%가 그렇다고 응답했지만, 농촌지역은 51.9%만 그렇다고 답했다. 교육부가 최근 실시한 전국단위 고교생 학력평가 결과에서도 서울과 읍ㆍ면 지역간 영어점수 격차는 18점(80점 만점)이나 됐다. 해서 “공교육이 절대로 사교육을 이길 수 없는 과목이 영어”라는 말도 나온다. 너도 나도 영어 조기교육에 나서면서 영어 선행학습은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 되고 있지만, 조기 교육을 받을 수 없는 낙오층의 상실감은 더욱 넓고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ㆍ조철환ㆍ이동훈ㆍ박원기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