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영글던 월계뜨락
조동걸(24회,안동 경덕중학교 국어교사)
다정한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화가 걸려 왔다. 상쾌하게 맑은 오월의 싱그러움과 함께 반가운 목소리에 무척이나 기뻤다. 학창시절에 관한 글을 한 편 써 달라고 하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흔쾌히 대답을 하고 몇 마디의 안부와 간단한 이야기를 마치고 통화를 끝냈다. 즐거운 일거리를 마련한 난, 학창시절을 머릿속으로 영화 필름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영상들 속에는 슬픔과 기쁨 즐거움과 괴로움, 만남과 헤어짐, 계절의 변화, 친구들의 변화, 학년의 변화, 그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서 정지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눈보라 흩날리던 어느 날, 초라한 모습으로 중학교 배정 번호 추점기인 물레를 돌리고 몇 번인가를 주워 확인을 하고 즐겁다거나 기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우리 마을 수많은 친구들 가운데 같은 번호는 단 네 명, 남학생 두 명 여학생 두 명 뿐이었다. 그때 중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학교가 너무 멀어서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중학교에 입학 하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중학교 입학을 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단 한 명의 친구는 그나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마을로 이사 가고 결국 나 홀로 다녀야만 했다.
여학생도 있었지만 부끄러움이 많아 함께 다닐 수도 없어 늘 외로운 등하교 길이었다. 그 때에 산길과 들길 둑방길을 걸으며 수많은 생각과 새로운 상상력을 기를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중학교 -풍기중-에 다녔으면 이렇게 풍부한 상상력은 기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학교 길은 장골목이라 사람 사는 냄새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많이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겠지만, 그래도 풀냄새 흙냄새 산새소리 개울물소리가 더 좋았고, 그 속에서의 3년간은 난 무척 아름다운 상상만으로 더욱 더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까만 교복에 빡빡 머리 그 위에 눌러 쓴 모자. 어깨를 의시되며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어 보았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운동화라는 것은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운동화를 신은 발은 깃털처럼 매우 가벼워 새벽같이 학교에 갔다.
또 새 교복이니 세련되게 하고 다녀야 하지만, 시골에서는 요즈음 흔한 다리미 하나 없어 바지에 줄을 만드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빨래하면 그저 툭툭 털어 말려서 입었다. 그래도 멋을 좀 내기위해 다리지는 못하지만, 저녁에 잘 때 잠자리 이불 밑에 깔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래도 바지에 줄모양의 형체가 어느 정도는 잡혀 있었다. 그것도 아침 등교시에는 줄 윤곽이 잡혀 있다가 오후가 지나면서 줄의 흔적들은 사라지고 통바지 모양으로 바뀌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학교생활에 서서히 적응 되면서 다른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즐겁고 아름다운 중학시절이 시작되었다. 특히 3년간의 가장 큰 행운은 3학년 때의 남녀 합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다. 물론 국민 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에 남녀 합반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학교 때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어떤 친구는 3년간 운 좋게도 합반을 한 친구가 있었으니, 그 친구는 무척 복 받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겠지만, 이미 국민 학교 시절부터 이성에 관심은 많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라 여학생들에게 가까이 가거나 말도 잘 걸지 못해 여자 친구들 앞에 서면 왠지 작아졌다.
처음 해보는 합반이라 여러 고민들이 생겼다. 혹시 실수는 하지 않을까,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밥과 반찬이 부실해서 흉을 보지 않을까 하는, 온갖 두려움과 고민으로 한 달이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걱정이 되어 교복도 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해서 단정하게 입고, 반찬 국물도 가방이나 책에 흘리지 않으려고 마른 반찬이나 냄새가 덜 나는 반찬으로 될 수 있는 한 골라서 싸고, 책과 공책도 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쓰고 공부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밤이 늦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난 읍에서 떨어져 살고, 가정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못해, 참고서니 학원이니 하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학교 마치면 꼴 베고 소먹이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늘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는 주로 밤에 할 수밖에 없었고, 학교에서 필기한 것, 공책,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 것 이외는 어느 것도 참고 할만 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학교 수업에 악착스럽게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공부를 꽤 많이 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
또 시험을 치고 난 후 항상 긴장되기 마련이다, 여학생들 앞에서 공부 못해 성적으로 좋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항상 선생님들의 매가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그리고 합반을 하면 여학생들 가사 실습시간이 가장 좋았다. 왜냐하면 그 때 남학생들은 내리 4시간 자습이고 남학생만으로 이루어진 반들은 수업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하였다. 그래도 가사실습이 끝나면 당시에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어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새로운 음식이라는 호기심에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해보면 같은 반 친구라고 배려하는 그 마음이 무척 아름답고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미안한 기억이 하나 남아 있다. 친구들을 만나면 꼭 사과를 해야겠다. 그 때는 남녀 탈의실이 없고 교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어야 했다. 합반 아닌 반은 관계가 없지만, 합반인 경우 남학생이나 여학생 어느 한 쪽이 먼저 갈아입으려면 한 쪽은 밖에서 어느 정도 기다려야 했다. 다 갈아입고 난 후, 갈아입은 쪽의 허락이 떨어지면 들어가 갈아입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도 체육시간이 들었지만 합반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규칙을 깜빡 잊고 교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교실에 들어서는데 여학생들이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여기저기 아우성에다 곳곳을 가리느라 정신없는 모습에 나도 놀라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어 잠시 혼이 나간 상태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에 여학생 부실장이 와서 무엇이라고 열심히 쫑알거렸지만 지금 그 말들은 기억에 남은 것은 없다. 다만 그때 내가 한 말은 “나는 아무것도 못 봤데이.”하는 이 말밖에는 더 이상 할말도 없어서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해보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돈다. 지금 다시 그 친구들을 만나더라도 “난 아무것도 못 봤데이.”그 말 밖에는 없다.
그리고 3학년 때 야간 자습을 하면 꽤 오래 동안 했다. 시계는 없었지만 깜깜한 밤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도시락을 항상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녀야 했다. 하나는 점심 때 하나는 저녁 때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은 그래도 괜찮지만 저녁밥은 조금 이상했다. 특히 여름이면 밥에서 조금씩 냄새가 나기 시작 했다. 그래서 밥을 물에 살짝 씻어서 먹거나 아니면 물에 말아 먹으면 밥도 잘 넘어가고 먹기도 쉬웠다. 반찬은 별 것 없이 된장은 냄새가 많이 나서 좋지 않았지만 고추장이 냄새도 덜나고 쉴 염려도 없기 때문에 최고였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남아 공부하다 혼자 집까지 오는 것이 늘 고민이었다. 읍내로 돌아오면 길이 넓고 밝아서 오기는 쉽지만 거리가 멀고, 산을 넘으면 시간은 단축되지만 오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하나라도 더 배워 보려고 학교 다니기가 힘들어도 야간 자습과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장 공부를 하지 않으면 무척 힘든 농사일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두컴컴한 자수고개를 혼자 넘을 때면 무척 힘들었다. 그 길은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에 늦게 마치면 넘을 수밖에 없었다. 서걱 이는 갈대 소리도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소리도 펄럭이는 비닐 소리도 내 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무척 겁이 났다. 그뿐 아니라 주변이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더욱 겁이 났던 것이다. 특히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오래된 고목 뿌리나 뼈 조각에서 인광이 번쩍거려 한참씩 머뭇거리다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비닐에 무척 많이 놀랐다. 처음에 비닐이라 생각하다가도 자꾸만 보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귀신 이야기에 나오는 진짜 귀신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겁 없이 다닌 것을 보면 체구는 조그만 했지만 간은 무척 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나지막한 단층의 학교 교실이 눈앞에 아른거리면 내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고 그 때의 선생님들과 친구들 덕분에 내 삶은 더욱 풍부하게 살찌게 되었다. 그렇게 아기자기한 중학교 생활이 무척 재미가 있었고 월계문 뜨락에서 어린 시절의 푸른 꿈들이 조금씩 영글어 갔던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그 때의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조 선생님 그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 다음달의(2월) 24회 만남을 기약하며.
한편의 영화를 보듯... 지나간 추억을 상기시켜줘서 고마워..조선생 4 반이었 었구나..몰랐네..ㅎㅎ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아름다운것.. 돌이켜 생각해 보니 행복했었네.. 그 행복으로 지금 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고.....긴글 감사히 잘 읽었어. ( 김 용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