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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기독교의 역사
오늘 하루도 재미있게 보내셨나요? 다들 잘 살아 있죠? 이런 인사가 의례적인 것 같지만,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게 특별한 일이니까 이런 인사도 괜찮은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아직까지’입니다. 그렇게 길게 남은 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제가 ‘기독교가 뭐꼬?’라는 주제로 일주일에 두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제 머릿속에도 남아 있어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으로 전하기도 하고요. 그 모든 것이 저의 영적 순례의 한 순간들입니다. 제가 그런 것들을 할 만한 나름대로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충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준비가 된 것 같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제가 강의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 제가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 자신에게서 완전히 소화된 이야기를 한다는 거죠. 소화되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말도 되지만, 더 중요한 건 내가 말하는 그 사실, 말하려는 내용들, 말하는 행위, 글 쓰는 행위 전체를 통해서 내가 거기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는 거예요. 제 강의가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겠지만, 저 개인에게는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설교를 하면서, 신자들을 어떻게 잘 변화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킬까에 집중하지 않고, 일단 제가 설교하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목요일과 주일 밤에 강의한 내용이나 주일 예배 때 설교한 것들이 늘 제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유 운동이라고 하죠. 제가 성숙한 정도에 따라서 그 운동의 정도가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사유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월요일마다 포항에 가서 강의하고 있는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강의가 제게 시간적으로 압박감을 주기는 하지만, 저 개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것이 모두 그 나름대로 제 생각과 영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수요일이어서 시편강해를 했는데요.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저의 삶을 끌어가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갈라디아서 강의와 연관해서 정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강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뒤에 말하도록 할게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어쩌면 강의 내용보다도 제가 과외로 말하는 것들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실제로 대학 강의도 그렇거든요. 강의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 아주 작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죠. 인문학이나 철학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나 자연과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학생이 얼마나 인문학적으로, 혹은 자연과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느냐가 핵심이지 않겠어요? 나중에 그 학생이 자기 나름대로 고유한 자연과학의 길 혹은 인문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게 중요한 거죠. 그래서 우리의 강의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을 설명하려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예수와 바울
지난번 강의와 연관이 되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서와 서신서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고요. 바울은 복음서의 내용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이건 신약 성서학자들이 더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서, 제가 그 문제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상식적인 차원에서 제가 나름으로 생각한 부분들을 말하려고 해요.
복음서와 서신서는 사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좀 빠르고 늦고의 차이만 있어요. 그리고 신약성서의 각 권들은 권위가 있는 어떤 단체에서 획일적으로 기록된 게 아니라 서로 다 다른 곳에서 기록된 겁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총회나 노회, 혹은 WCC와 같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단체에서 체계 있게 만든 게 아니라, 전혀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 여러 곳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수집되고 문서화되고 편집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관성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공동체와 마태복음 공동체가 달랐어요. 서로 다른 공동체가 있었던 거죠. 마가복음과 그보다 더 원천이 되는 예수님의 어록집 같은 게 공유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도 그런데 서신서는 오죽하겠어요? 다 제각각입니다.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진술한 문서들이 바로 신약성서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복음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요? 참 많은 생각을 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바울이 복음서를 몰랐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서 그래요.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니까요.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자기 나름의 경험이나 해석에 따라 그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을 뿐,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잖아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 말할 때 언뜻 비추었지만, 바울은 동정녀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여자에게서 났다는 것만 언급할 뿐이죠. 바울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서를 몰랐다고도 볼 수 있고, 또 그가 생전에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당연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바울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직접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또 굳이 복음서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에 대한 전승들이 곳곳에 알려져 있었을 텐데, 왜 그 많은 편지들을 쓰면서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참 재미있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와 아울러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유대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의 원형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못자리와도 같아요.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라고 하는 그 교회가 유대 기독교입니다. 여기에서 초점은 기독교에 있는 게 아니라 유대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은 유대교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거기 머물러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방 기독교와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이방 기독교의 태두는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와 바울이 세운 이방 기독교가, 즉 바울의 신앙과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앙이 크게 다릅니다.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교단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종파가 다를 정도로 달라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을 사악하고 간사하다고 하면서 지금 우리가 이단을 대하듯이 말합니다. 유대 기독교의 대표자는 야고보이고요. 베드로도 유대 기독교 지도자의 대표에 속합니다. 베드로 성당에 가면 베드로와 바울의 상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기독교에서 쌍두마차와 같은 사람들인데요.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두 사람은 결코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이처럼 보이거든요. 제가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풀지 못한 문제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다가온 하나의 숙제거든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바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해서인지,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 채 순전히 케리그마로서의 예수님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죽이고 헬라화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 예수는 빠지고 그리스도만 살아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예수 이해를 다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들이죠. 오늘 이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요. 일단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제시하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 걸까요? 아니면 흔히 말하듯이 일종의 음모론 비슷하게 바울이 예수님을 왜곡한 걸가요? 지금 여기에서 다 풀어내기에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방향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울이 예수님을 오해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다만 제가 여기서 조금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전통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통이 각축을 벌였는데, 거기에서 역사적으로 살아남은 파가 바로 바울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역사 안에서 살아남은 기독교는 내용적으로 바울의 신앙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나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었고 그 전통이 가톨릭을 통해서 내려오고 있으니까,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베드로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게 지금 잘 어울려 있는 상태인지, 어울려도 될 만한 것들인지, 아니면 임시조치로 그렇게 된 건지는 불분명합니다. 3-4세기에 성서가 경전이 되었는데, 그 때 바울이 유대 기독교와 겪었던 갈등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덮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어요. 이런 내용은 제가 학문적인 검토를 거쳐서 말한 게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문제를 짚어 본 건데요. 이것이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진수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에서, 베드로나 그 쪽 사람들보다 바울이 더 예수님을 정확히 이해했는지에 대한 문제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서로 같은지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갈라디아서만 놓고 본다면 복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라고 할 수 있어요. 참고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복음의 문제는 로마서도 다루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초기의 작품이고 로마서는 다소 후기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요. 여기에는 바울의 신앙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어떤 사상가라도 초기, 중기, 후기의 사상이 조금씩 변천해 간다는 일반론에 따른다면, 갈라디아서의 칭의론과 로마서의 칭의론은 조금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흐름은 같더라도 말이죠. 신약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주제로 논문을 써도 괜찮을 것 같아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타난 칭의론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도 바울의 사상이 전기에서 후기로 변천되는 과정을 짚는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있는 작은 뉘앙스의 차이들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짚어낼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의 관계에서 우리가 전제로 해야 할 것은, 일단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동생과 대다수의 사도들이 포함된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 이해와 바울의 예수님 이해는 결국 달랐어요. 유대 기독교는 토라와 할례를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전적으로 그의 은총으로만 우리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고 화해하여 의로워진다고 하는 바울의 신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거죠. 그 당시 예수님의 사도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율법과 토라를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기본적으로 기독론에서 차이가 있는 건지는 사실 알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를 찾기 위해서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될까요? 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베드로의 신학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역시 찾기 힘듭니다. 베드로전후서가 베드로의 편지라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반면에 바울의 편지는 70-80%가 바울이 저자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유대 기독교의 운명
다른 이야기가 길었네요. 제가 초기 기독교 역사에 대한 문제들을 좀 짚은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정통 역사가 회의적이고 불확실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기에 많은 역사적인 힘들이 개입되었고, 그러한 힘들을 뚫고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르침, 내용, 도그마 등 그 하나하나가 치열한 투쟁 속에서 나왔다는 거죠. 예수님이 와서 이 땅에 자연스럽게 풍요로운 기독교 신앙의 꽃이 피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황무지 같은 환경 속에서 역사를 통해 여러 사람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참여하고, 논쟁하고, 싸우는 과정을 거쳐 기독교가 지금까지 버텨왔던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버틸 수 있을까요? 아니면 시들시들해져서 예루살렘 기독교가 유대교에 합병되고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처럼 그냥 사라져 버릴까요? 이게 참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세웠던 쟁쟁한 예루살렘교회, 즉 유대 기독교는 지금 흔적조차 없거든요. 역사에서 사라졌어요. 거기에서 살아남은 건 바울이 세운 이방 기독교였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루살렘교회가 기독교의 모체라고 생각하는데, 따지고 들자면 그렇지가 않아요. 그냥 연대기적으로 따라 간다면 바울이 있기 전에 예루살렘교회가 있었으니까, 그것을 원천으로 볼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시작한 이방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와는 완전히 달랐어요. 화합의 끄나풀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기독교가 살아나왔습니다. 우리도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르게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대 기독교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충돌을 두려워해서 타협하다 보니까 토라와 할례를 겸했던 것 같아요. 그들이 믿음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이방 기독교와 비슷했지만, 유대교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 때문에,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던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겠지만 말이에요.
기독교의 운명도 유대 기독교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죠? 그러나 가능합니다. 몇 백 년 후를 내다보지 말고 몇 억 년 후를 내다보세요. 몇 억 년 후에도 여전히 지금의 기독교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샤머니즘의 무당들이 고대에서는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주류였잖아요. 지금은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처럼 기독교도 우리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어요. 그 전에 예수님이 온다면 다행이고요. 또 그러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역사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감이 클 수밖에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 기독교가 했던 선택이 아니라 바울이 했던 선택, 즉 진리를 향한 치열한 노력과 투쟁이 필요한 거죠. 그렇게 역사가 내려 왔습니다.
제가 놓친 게 있네요.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를 놓고 볼 때,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보다 바울이 더 월등하게 예수님에 대한 케리그마를 정확히 서술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인데요. 그런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지난 월요일에 포항에서 그 문제가 나오니까 어떤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 그런 대답을 하더군요. 그 학생이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돌베개)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도 그 책을 대충 훑어보기는 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태일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 변호사가 전태일과 같이 살았던 사람들보다 전태일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썼다고 하더군요. 그것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예수를 만나본 제자들보다 바울이 더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죠. 좋은 통찰력을 얻었는데요. 바울은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있었던 굉장히 복잡한 문제들이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예, 정말 중요합니다. 뿌리로 돌아가는 거니까요. 만약 우리가 지금의 기독교만 본다면 방향을 잃고 말 겁니다. 눈길을 걸을 때 미끄러질까봐 발밑만 보고 걸어가면 결국 뺑뺑 돈다고 합니다. 멀리가지를 못해요. 조금 힘들어도 지나온 출발점을 보고 가야할 길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방향을 놓치지 않아요. 이런 문제들이 오늘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안에서 벌어졌던 복잡하고 진지했던 논쟁 혹은 사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방향을 놓치지 않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은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쭉 훑어보려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2천년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그 긴 역사를 한 시간에 다룬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꼼꼼하게 살피지는 않고, 중요한 대목만 짚겠습니다. 나중에 보충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첫 번째 단락은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이것은 주로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사도행전 외에 다른 곳에 기록된 게 있나요?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기독교의 역사이긴 하지만 실증적인 역사는 아니에요. 역사를 다룰 때도 어떤 시각이 존재하거든요. 사도행전의 시각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 공동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변호하려고 했던 겁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될 시점인 기원후 80-90년은 이미 예루살렘 공동체가 망한 후, 또는 급격히 쇄락한 후였을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 쪽에 세운 교회들이나 로마의 교회들이 명실상부하게 기독교의 중심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뿌린 씨앗들이죠. 물론 바울은 죽은 후였고요. 그때 누가라는 이름을 빌려서 어떤 저작자가, 그 당시 역사 안에 살아 있던 이방인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사도들의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관점에서 글을 썼습니다. 이 말은 이방 기독교가 유대 기독교와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그 간격을 극복하려고 하는, 그 뿌리를 더 확보하려고 하는, 역사적 근거를 예루살렘에 두려고 하는 해석학적 방향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것의 첫 출발이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임했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문에 오순절이 생긴 게 아니에요. 오순절은 원래 유대인들의 절기였어요. 유월절이 지나고 오십일 후를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부활절은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관이 있어요. 유월절이 시작될 때 예수님의 부활 사건 있었으니까요. 하여튼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성령이 강림한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은 이미 창조사건 때부터 존재했었고, 성령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분명히 성령 강림으로 나오고 있거든요. 그런 초기 기독교의 특별한 신앙 경험, 혹은 은사 경험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의 혀같이, 강한 바람같이 임했다고 하죠. 그러면서 방언을 하게 되었고요. 그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현상들이 신을 경험하는 매개가 되었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에 그런 방언 현상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고린도서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잘 나와 있는데요. 이것은 일종의 광적인 신비주의 은사 운동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의 뿌리를 예루살렘교회에 두고 있는 거죠. 그러나 실제로 오순절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확실성은 없습니다.
성서의 진술에는 역사적 확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그 말을 잘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역사적 확실성을 무조건 다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보다는 더 근원적인 어떤 게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누가라는 이름을 빌려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오순절 강림 사건을 묘사하게 된 데는, 반드시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초기 기독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영적인 사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찾아내는 게 중요해요. 그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가 기록을 했겠어요, 아니면 사진을 찍었겠어요? 다 지나간 일인데요. 누가복음이 80년대에 쓰였다고 하면, 성령 강림 사건은 그로부터 50년 전의 일이거든요. 지금처럼 정보가 잘 교환되는 시절도 아니었고요. 한구석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났던 현상들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사실처럼 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어쨌든 그들이 특이한 영적 경험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영적 에너지죠. 그게 없었다면 그들이 어려운 상황들을 잘 뚫고 나가기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 부분은 이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은 어떻게 된 걸까요?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이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베드로가 예루살렘 사거리에서 아람어로 말씀을 전했어요. 오순절에는 세계 곳곳에서 성지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모르거든요. 제 각각 자기가 태어나서 살던 곳의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아람어를 다 알아들었다고 해요. 그게 어떤 현상이었을까요? 그걸 음성학적 차원의 사실로 받아들이면 좀 무리한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마가의 다락방을 초기 기독교의 출발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예루살렘, 사마리아, 안디옥을 거쳐서 점점 더 퍼지게 돼요. 그러다 결국 로마의 중심부까지 기독교가 들어가게 됩니다. 책에는 제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에 대해 조금 다루기는 했는데요. 그 책을 쓸 때는 미처 갈라디아서를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 기독교와의 갈등이 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지 못했습니다. 책을 개정 증보하게 되면 그 부분들을 좀 더 보충할까 합니다. 하여튼 구도가 이렇습니다. 유대교가 있고요. 유대 기독교가 있고, 그 다음에 이방 기독교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유대교와 유대 기독교가 있었어요. 둘이 하나라고 봐도 좋습니다. 둘 사이가 나뉘지 않았으니까요.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있는 하나의 파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했다가 돌아섰다고 한 것은, 유대교로 있으면서 유대 기독교를 반대했던 겁니다. 그러던 바울이 나중에는 이방 기독교가 되면서 유대 기독교와 싸웠던 거죠.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때나 완전히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나, 사실 바울이 계속해서 싸웠던 대상은 유대 기독교였습니다. 이방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는 완전히 달랐거든요. 유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유대적인 것을 그대로 안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회색분자였죠. 이방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유대 기독교가 더 위험해 보였을 수도 있어요. 유대교가 기독교를 직접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더라도, 유대 기독교에 많은 압력을 넣었을 겁니다. 유대교의 압력으로 인해서 유대 기독교는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하고 유대교 쪽으로 많이 기울어집니다. 이때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말하다 보니 또 다른 모순이 생기네요.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순교한 게 맞나요? 그렇다고들 역사에 나오는데, 베드로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초대 교황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만 머물러 있었으니까요.
313년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와 이방 기독교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자리하고 있었어요.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70년 이후의 시점이 중요해요. 유대 기독교가 유대교로 기울어집니다. 결국 유대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죠. 만약 유대 기독교가 좀 힘들다고 하더라도 계속 이방 기독교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했다면 기독교 역사가 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예요. 어쨌든 그것은 지나간 역사입니다. 유대교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서 기독교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 시점에 로마로부터의 박해가 심해집니다. 콜로세움에서 격투사와 싸운 이야기, 카타콤으로 들어간 이야기 등,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종종 봤을 거예요. 저는 1996년에 카타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일부러 땅굴을 판 곳이 아니라 원래 로마에서 만든 지하공동묘지예요. 로마는 깨끗한 도시였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무덤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회암을 파고 들어가 묘지를 만들었는데요. 그것은 또 하나의 지하세계였습니다. 그런 곳에 숨어 들어갈 정도로 기독교가 박해를 받다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공인을 받는데, 그 해가 313년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313년이라고 했어요. 오늘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한꺼번에 훑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몇 가지지 숫자에 담긴 사연을 알게 되면 전체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내린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겠다고 공표한 게 아닙니다. 단지 인정을 받지 못했던 종교에서 공인, 즉 공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거죠. 국교로 인정된 것은 한참 뒤인 391년입니다. 그때의 황제는 테오도시우스였습니다.
콘스탄틴이라는 사람, 기독교를 말할 때 빼놓지 않는 사람인데요. 국교화한 테오도시우스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대단한 사람이에요. 역사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대개 독재자로,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전쟁을 앞두고 환상을 보았다고 하죠? 하지만 그는 기독교를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은 직업 군인인 아버지와 여관 주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황제가 됩니다. 그때는 로마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참 전쟁을 했어요. 그런데 콘스탄틴은 자기 누이의 남편, 즉 매제가 되겠죠? 그 사람도 또 하나의 황제였는데 그를 죽였고, 자기 장남도 죽였어요. 자기의 왕위를 넘본다는 생각이었을까요? 더구나 자기 아내도 욕조에서 질식사를 시켰거든요. 권력에 방해가 되는 대상은 다 처형해 버렸던 것 같아요. 콘스탄틴 이후로 종교와 정치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과정을 걸었습니다. 긴 과정에 대해서는 강의안을 참고하세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써, 기독교는 손대지 않고 코풀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그 반면에 갈릴리 예수의 복음은 역동성을 상실한 양면성이 있습니다. 1054년, 1517년 항목은 제 강의안을 천천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역사에 대한 문제가 좀 까다롭기도 하고 정확하게 짚어야 할 숫자들도 제법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054년
콘스탄틴은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로부터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후에 이 도시는 콘스탄틴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은 이스탐불이라 함)이라고 불리었다. 두 바다(지중해와 흑해)와 두 대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정학적 거점도시로서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틴에 의해서 기독교적 색채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로마의 수도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시나브로 이곳의 주교는 로마의 감독이며 주교인 교황과 맞서는 경쟁적 위치에 서게 된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양 축으로 한 기독교는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마지막 에큐메니칼 종교회의를 기점으로 그 사이가 벌어지다가, 결국 1054년에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서로 상대측을 파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분리된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역시 상당한 기간 동안 신학적, 정치적 반목과 대립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분상이나마 하나의 교회였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 것이다. 그 분리가 지금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그 본질로 하는 교회로서 너무나 큰 상처다. 그 어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11세기 중엽에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었다. 로마의 교황 레오 9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1043-1058 재위)는 오히려 차제에 로마의 간섭을 막아내고 자신이 동방교회의 명실상부한 교황이 되려는 야망을 키워나갔다. 그는 동방교회를 서방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했다. 케룰라리오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서로마교회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모두 폐쇄했다. 이런 사태 앞에서 로마의 교황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측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단 양측은 대화의 장에 나섰다. 로마교황의 대사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양측 교회의 신학적 문제점들을 논의해나가기 시작했지만 실제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앙금만 쌓이게되었다. 급기야 케룰라리오스가 로마 교황청의 대사인 훔베르트 추기경의 글들을 소각시켜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교황 대사들은 1054년 7월16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 교회의 제단에 파문장을 던져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대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케룰라리오스에게 힘을 몰아주어 로마교회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한치의 양보나 관용도 없이 서로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함으로써 기독교 교회가 두 쪽으로 나뉘었다. 그 비극적 역사가 일어난 해가 바로 1054년이다.
참고적으로, 서로마 정치권에 있었던 교회를 서방교회라 하고 동로마 정치권에 있었던 교회를 동방교회라 한다. 서방교회의 중심은 로마이며, 동방교회의 중심은 콘스탄티노플이다. 요즘에는 각기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정교회라 통칭된다. 그때 분리된 이래로 지금 까지 일천년 가까이 이들 두 교회는 서로 비슷한 교리와 종교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적대적으로 지내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몇몇 대화시도가 있긴 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다.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칼, 그리고 그들이 식민지화 했던 중남미 등 세계 전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정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그리고 지난날 소비예트연방에 속했던 몇몇 나라들을 중심으로 그런대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이렇게 분리될 수밖에 없는 그만한 절박한 사정이 실제로 있는 것일까? 그것도 거의 원수지간처럼 말이다. 우선 그들 사이에 어떤 신앙형식이나 신학의 차이가 있는지 중요한 요소들만 몇 대목 추려보자. 우선 이들 양측의 공통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325년부터 787년 사이에 개최된 세계종교회의(공의회, Konzil)의 교리들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며, 동정녀 마리아를 믿고 성화와 성유물을 경배한다. 성례련에서도 일곱 가지를 함께 받아들이며, 화체설을 믿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며, 사제의 교권을 절대시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미사형식 같은 것들이 거의 유사하다.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된다고 하지만, 정교회는 성부에게서만 유출된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은 로마의 교황이 세계적인 권위와 무오성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정교회는 이를 반대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성을 로마 가톨릭은 인정하고 그녀의 승천설 까지 주장하지만 정교회는 부정한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지만 정교회는 하급 교직자들의 경우에 한해서일지라도 결혼을 허락한다. 성만찬 문제에서 로마 가톨릭은 평신도들에게 떡만 배분하지만 정교회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준다. 이런 차이점 중에서 특별히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화상(畵像)문제와 성령론이다. 교회당 안에 화상을 설치하느냐 마느냐의 논란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교황, 감독, 수도사들 사이에 8-9세기 동안 가열차게 전개되어 동서방교회의 간극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결국 로마 가톨릭은 화상숭배를 거절하게 되었고 정교회는 상당부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유출되는가, 아니면 성자에게서도 역시 유출되는가 하는 문제는, 즉 단출설과 복출설문제는 너무나 복잡한 신학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심층적으로 다룰 필요는 없고 그것이 동서방교회 분리에 어떤 계기를 마련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짚어보도록 하자. 기독교의 신론이 삼위일체론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대두된 현안은 삼위격인 성령을 어떤 위치에 놓는가 하는 점이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처음 결정된 신조에는 “우리가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다가 후에 “우리는 성부에게서 나신 성령을 믿습니다.”로 변경되어 모든 교회들이 받아들이는 명제가 되었다. 589년 톨레도에서 열린 3차 세계종교회의에서는 니케아신조 라틴어판에 처음으로 ‘필리오케’(그리고 성자에게서)라는 구절을 삽입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양측 교회는 이 신학적 문구를 두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반목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지금도 역시 여전하다. 참고적으로 개신교는 이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 서 있다.
1054년 어간의 분열역사는 여러 정치, 사회, 신학적 배경을 고려해야만 설명될 수 있지만 다층다기한 여러 정황 가운데서도 결정적으로 작동한 요인 한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기독교의 교권화라는 것이다. 교회가 로마제국의 존재기반이라 할 힘의 논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신앙의 본질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온갖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려다 보니까 결국 극단적 행동까지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기독교가 이러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지 않고, 온전히 봉사하는 공동체로서, 즉 소외된 자를 위해 봉사하며 수난받는 공동체로 남아있었다면 종파분열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회가 세속권력의 맛을 포기하기까지는 그 후로 5백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으며, 그걸 감당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그가 바로 마틴 루터다.
1517년
1517년 10월31일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기록된 일종의 대자보가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 상단에 나붙었다. 이 대자보 내용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덕분으로 삽시간에 독일 전역에 인쇄 배포되었으며, 그 반향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이 대자보의 작성자는 비텐베르크 성당의 사제이며 교수인 마틴 루터 박사였다. 교황청은 이 사건을 접하고 직간접으로 루터에게 압력을 가하여 이 소책자와 그가 출판한 그 이외의 반교황적 문서들을 자진 폐기처분토록 명령을 내렸지만 루터는 교황의 뜻을 따르지 않고 훨씬 더 강력하게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루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교황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제국의회가 열리는 보름스에서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루터는 그 재판에 당당히 참석해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로 유죄가 선고되었지만 다행히 프레드릭 선제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많은 신학 문건들을 완성시켰다. 교황청의 유죄선고와 출교령 이후로 루터는 교황청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를 지지하던 많은 독일 사제들과 귀족들, 그리고 중산층 상공인들의 도움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지배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가 출현하였으니, 그 교회가 바로 프로테스탄트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신학적, 혹은 교회 실천적 요소만이 아니라 독일인들의 반이탈리아 정서가 상당히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 교구의 재산이 시간이 갈수록 이탈리아 로마로 옮겨가는 것을, 그리고 교황이 거의 이탈리아계로 선택된다는 사실을 게르만 민족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 형성된 민족주의와 상공인 중산층의 확대로 인해서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독일 지역 안에서 탄력을 얻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제 교황청의 중앙집권적 교권에 반기를 들고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적 교권이 훨씬 강한 설득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라 교황청이 루터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과민했다는 내부적 요인이 일개 무명의 사제요 신학교수에 의해 제기된 작은 신학적 불씨를 교회만이 아니라 유럽의 全사회, 문화, 정치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큰 불길로 확대시킨 게 아닌가 생각된다.
종교개혁의 씨앗이 된 95개 항목의 대자보는 원래 교황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그래서 그것에 반하는 교회를 새롭게 건설해야겠다는 뜻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신학자로서 자신의 교회에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해보자는 제안이었을 뿐이다. 이 작은 논제들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독일의 민족주의와 교황청의 알레르기 식 반응으로 인해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루터가 제기한 논제들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 문제에 집중된다. 하나는 면죄부이며,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이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비가 예상 외로 많이 들어가게 되자 교황청은 재원 마련을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연옥에 있는 조상이나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서 면죄부를 구매하면 그 돈이 헌금함에 들어가는 순간에 그 영혼이 구원받아 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선전했다. 루터는 이를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주장이라고 공격했다. 교황무오설은 원래 로마 가톨릭의 본질적인 교리는 아니지만 교황권을 강화시키려는 교황들로 인해서 점차 교리화 된 내용이다. 루터는 교황이 무오하다는 주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교황보다도 주교회의가 더 권위있는 의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루터,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참조).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신학적, 실천적 차이는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그것 보다 훨씬 분명하다. 우선 주변적인 몇 가지 사실부터 점검해보자.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승천한 분으로, 무죄한 분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께 세상 사람들의 기도를 전달해주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마리아의 종교적 의미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예외 없이 남성독신**이지만 개신교 성직자들은 거의가 남성기혼이다. 가톨릭은 일곱 가지의 예전을 (영세, 고해, 영성체, 견진, 혼배, 서품, 종부) 실행하는데 반하여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만 예전으로 취급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신부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데 반하여,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다. 1962-1965년에 열린 2차 바티칸 공회의 이후로 로마 가톨릭은 많은 점에서 전향적으로 개혁되어서 개신교와의 관계복원에 힘쓰고 있다. 예컨대 적대적으로 대하던 개신교를 ‘나누인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라틴어로 드리던 미사를 자국어로 드릴 수 있게 된 것들이다.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아직도 로마 가톨릭을 이단이라거나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몰아붙이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깊이 알지 못함의 소치로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같은 기독교 형제로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직 요원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언젠가는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한 가운데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대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는 루터가 제기한 종교개혁의 신학적 슬로건 세 가지를 가톨릭의 신학적 바탕과 견주어 설명함으로써 양 교회의 특징을 그려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양측 교회를 구별하는 유일한 잣대일 수 없지만, 또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도 볼 수 없지만 그런대로 기본적인 변별축이 될 수는 있다.
1948년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의 대분열인 1054년과 1517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분열의 역사가 개신교 안에서 더 심각해졌어요. 1948년은 개신교 안에서나마 이런 분열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일이 일어난 때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창립총회가 개최된 해입니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을 시작으로 9차까지 열렸어요. 1차는 암스테르담(네덜란드, 1948년), 2차는 에반스톤(미국, 1954년), 3차는 뉴델리(인도, 1961년), 4차는 웁살라(스웨덴, 1968년), 5차는 나이로비(케냐, 1975년), 6차는 밴쿠버(캐나다, 1983년), 7차는 캔버라(호주, 1991년)에서 열렸는데요. 7차 총회에서 우리 한국의 한 여자 신학자가 오픈 예배에 설교를 해서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한쪽으로는 굉장히 호의적인 반응을, 다른 한쪽으로는 비판적인 반응을 받았어요. 정현경 교수지요. 이화여대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국내 메스컴에도 가끔 글을 쓰는데요. 아주 독특한 종교 간의 대화들을 시도하고 있는데, 저와는 취향이 별로 맞지 않아요. 어쨌든 대단한 분인데 이때 떴습니다. 8차는 하라레(짐바브웨, 1998년)고, 9차가 2006년에 브라질의 포르타알레그레에서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WCC 총회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세계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한데도, 우리나라에서 WCC총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게요. 짐바브웨에서도 열렸는데 말이죠. 앞으로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열리지 않을까 싶네요. WCC 1차부터 9차까지 열렸던 문서들을 검토해 보면 세계교회의 신학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강의가 있고 얼마 후에 2014년의 10차 총회가 부산에서 열리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필자 주)
WCC과 연관된 우리나라의 단체가 한국교회협의회(Korea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KNCC), 일명 ‘교회협’입니다. 그냥 NCC라고도 하죠. 여기에는 기장, 예장(통합), 기감, 성공회, 복음교회, 구세군, 하나님의 성회, 정교회가 회원 교단으로 있습니다. 이게 한국을 대표하는 에큐메니컬 단체인데 요즘에는 힘이 없습니다. 대신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막강하죠. 소위 돈 있는 부자교회의 목회자들이 한기총에서 활동하고, 가난한 교회 목회자들은 NCC에서 활동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뭔가 비정상적입니다. 교회협 신학을 용공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여튼 1948년에 WCC 창립총회가 있었고, 그로 인해 개신교의 에큐메니컬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이제 끝났군요.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한 번 쭉 살펴보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원시 기독교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예루살렘 전체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안디옥까지 쭉 퍼져서 세계의 중심 종교로 확장되었습니다. 중요한 시기들을 좀 짚었으니까 잊지 말고요. 로마의 인정을 받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었다가 다시 일치의 길을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질문 있으면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