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각운동(大覺運動)의 전개
선사의 대각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저술과 역경, 선의 대중화, 항일운동, 교단의 정화운동, 사원경제의 자립화, 포교의 현대화 등 여섯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저술과 역경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3.1운동으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후부터였다. 이 때 감옥에서 성경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얽히고 있음에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이 일반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역과해금강경(詳譯科解金剛經)』의 서문에서 “한자장경(漢字藏經)이 적재여산(積在如山)이라도 귀어일개후물이재(歸於一個朽物而哉)인저”라고 술하고 있다. 즉, 보지않고 쌓아만 두는 경전은 산더미같이 아무리 많더라도 한갓 종이이며 썩은 물건에 불과하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역경사업은 항일운동의 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글 화엄경』서문에서 “조선인에게는 조선글 조선말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의 시대상황이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을 때임을 감안할 때 선사의 역경사업은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경사업에 대해 교단 내에서는 많은 비판도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번역본이 『화염경』을 비롯하여 30여 종이며, 저술도 『각해일륜(覺海日輪)』등 30여 종이나 된다.
둘째는 선의 대중화를 위하여 각 곳에 선학원을 위시한 선종포교당을 건립하게 된다. 또 선을 대중화하여 일반민중에게 스스로 자각케 함으로 대각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선사는 본인이 ‘선종인(禪宗人)’임을 확실히 했으며, 도시포교와 독립운동 등을 하면서도 참선에 대해서는 한시도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각사에 ‘부인선원’을 개설하기도 했고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회(活句參禪萬日結社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에 처음으로 서울시내에 ‘참선(參禪)’이란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사가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각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참선정진의 힘이었다.
셋째는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선사는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산중에서 도회로 뛰어든 뒤 1940년 입적 때까지의 30년간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되지 않음이 없었다. 특히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 대표로 서명하고 참여함으로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사는 대각사를 설립하여 여기에 머물면서 한용운 등을 위시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때로는 대각사가 독립운동의 온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경에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의 뜻을 듣고는 두말 하지 않고 도장을 한용운에게 맡기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하는 길이라면 어디에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승낙하였다. 한용운은 전국의 그 많은 승려들 중 백용성 이외는 이 일을 상의할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 일에 가담한다는 것은 최후에 사형집행까지도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사에게 있어 3.1운동은 많은 새로운 경험을 쌓게 했으며 대각교운동의 방향을 확실히 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이때에도 일본 연호를 사용치 않고 불기를 사용했다 해서 출판검열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책 속에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님도 또한 1918년 실시된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수탈된 우리의 땅과 경제적인 침략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만주에 가서 용정에 농장을 만들고 대각교당을 건립하였으며, 하동에 華果院(화과원)을 만들 선농(禪農)불교를 실천하였다.
한편으로는 교단이 왜색화 되어가자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찾기 위해 교단의 정화운동에 불을 붙였다. 2차에 걸친 ‘建白書(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일제의 불교정책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선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요시찰인물이 되었으며, 항상 일본경찰의 감시하에서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넷째는 교단의 정화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선사의 계맥은 선곡율사(禪谷律師)에게 수계하였다. 이는 조선조의 대은(大隱)스님의 계맥(戒脈)에 속하므로 한국전통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호리(毫釐)의 어김도 없이 계를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제자들에게 계율에 관해서는 철저했다. 이때의 시대적 상황은 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하여 31본사는 대처한 자들이 늘어갔으며 한용운을 비롯한 대부분의 승려들은 취처해 줄 것을 총독부에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사찰에는 승려들의 처자권속들이 양육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라고들까지 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선사는 1926년 총독부에 2차에 걸친 ‘建白書(건백서)’를 127명의 비구승들의 연명으로 제출하게 된다.
이것이 해방 이후 일어난 대처·비구 정화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선사가 주장한 조건은 세가지였다. 첫째는 당국에서 대처식육을 금하지 못할 바에는 대처승에게 비구계를 취소 환속시켜 재가이중(在家二衆)의 위치에 있게 하든지, 둘째는 대처승들이 전국 사찰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지계병자(持戒炳子)들에게 일부의 몇 개 본사(本寺)만이라도 할양하든지 셋째는 유대승(有帶僧)과 무대승(無帶僧)을 확실히 구분하든지 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만약 해방 이후 정화운동이 선사의 뜻대로 서로의 신분에 대한 구분만 확실히 짓고 같이 공존했다면 오늘날 한국불교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화운동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그 때의 잘못된 점에 대하여 오늘날 종도들은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대각사상의 전개과정에서 다섯째 사원경제의 자립화와 여섯째 포교의 현대화 등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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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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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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