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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내 17대 조가 된다는 해평 백수원이 당시 여수에 있던 통제사를 찾아간 날은 조선 수군이 부산포 공격 준비로 부산하던 날이었다. 통제사 집안과 우리 아산 백씨 집안은 그럭저럭 교류가 있던 편으로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통제사는 공무가 끝난 후 사저에서 녹도만호 정운과 대솔군관 송희립 등과 함께 공세를 위한 세부사항을 점검하다가 해평이 찾아왔고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흔쾌히 그를 들이라고 명령했다. 통제사는 몇 살 아래의 해평을 ‘제법 공부를 했고 옛 사람들과 노인들을 받들 줄 아나,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해 가끔 오만한 모습을 보여 예를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로 평하고 있던 터였다.
통제사에 의하면 평소보다 자신만만함이 넘쳐 오만하고 허세가 다분한 것 같아 보이던 해평 백수원은 인사를 올리고는 실은 자신이 마술사이며 아산 백씨 가문이 전통 있는 마술사 가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자신에게 미래를 보는 눈이 있어 바로 몇 시진 후는 물론이고 수천 년 앞에서 벌어질 일 또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백 년 후 성배를 두고 벌어질 다툼에 이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통제사가 당연히 불려나갈 것이며 그를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밤새도록 계속된 해평의 길고 긴 설명의 요지였다.
통제사는 끝까지 다 들어 주고 밖에다 간단히 명령했다.
“반가의 자제로서 혹세무민한 소리를 지껄이는 저 놈을 당장 내쳐라!”
병졸 몇이 와서 해평을 끌어내자 해평은 끌려가면서 자신이 실제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며 외쳐댔고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질 전투에서 얼굴에 대구경 조총을 맞고 얼굴이 으스러져 전사할 녹도만호 정운을 포함해 6명이 전사할 것임을 예언했다. 정운은 당연히 길길이 뛰며 당장 효수해 본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통제사는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부정한 피를 볼 수 없다며 정운을 만류했다. 대신 통제사는 해평을 옥에 가두고 전투가 끝난 후 돌아온 후에 해평을 참해서 해괴하고 혹세무민한 말을 지껄여 군영을 어수선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회항 직후, 통제사는 명령을 철회하고 옥중의 해평을 불러왔다. 그의 말대로 정운은 그렇게 얼굴이 으스러져 죽었고 그를 포함해 6명의 전사자가 났던 것이다. 통제사의 서슬 퍼런 눈앞에서 해평은 바로 다음날 일어날 일들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말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다시 통제사 앞에 불려간 해평은 내년(계사년, 1593년)에 일어날 웅포 출전은 별 소득 없이 끝날 것이고 남해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광양현감 어영담을 비롯한 수천 명의 군졸들과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을 것임을 말했다. 그리고 그것 또한 들이 맞았다. 무당, 점쟁이 등 혹세무민한다 생각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 통제사였지만, 이건 믿지 않고서는 못 배길 일이었다.
몇 백 년 후에 있을 성배전쟁을 위해 해평이 통제사에게 내놓은 방안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성배전쟁 상황을 가정할 때, 통제사가 군사 지휘관이자 해전 지휘관으로서 가진 장점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아예 통제사뿐만 아니라 통제사의 조선 수군 병력들 전체를 이후 벌어진 성배전쟁에 나서게 해 통제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그 친구는 내 면전에서 ‘그렇지 않는다면 수사또 영감께서 관운장이나 장익덕과 마주쳐서 칼로 이긴다는 보장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지.”
“우와, 효수당하지 않은 게 신기하네요.”
“다행이도 관운장이나 장익덕을 만나진 않았단다. 대신 기쁘게도 조운 자룡과 마주치게 되었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넘어가자꾸나.”
무척 황당해 보이는 이 제안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해 통제사가 물으니, 해평은 가문에서 다른 가문과 명나라 마술사들과 공동으로 연구해 온 방법을 말했다. 혼백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나지 않으며 영원히 머물 수 있고 그 주인의 의지에 따라 확장과 축소가 가능한, 물체를 매개체로 한 심상공간의 창조를 통해 조선 수군들의 혼백들을 그 공간 속에 머물게 하고 또 필요에 따라 그들을 현세에 현계하게 하는 통로를 열게 만들어 조선 수군을 통제사의 명령에 따라 전쟁에 나서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해평은 그 중 많은 것이 자신의 독자적인 실험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자신에 차 말했다.
통제사가 묻기를
“그게 말이 되는 설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에 해평이 답하기를
“그걸 만드는 게 저니까 말이 됩니다.”
(여기서 난 내 조상님의 콧대가 얼마나 높으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해평은 심상공간 창조를 위한 매개채로 그 주인이 항상 지니고 다니거나 주인의 의지나 사념이 깊이 담겨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하니 통제사가 해평에게 준 것은 그 일기의 첫째 권이 될 임진년에 쓴 일기였다. 통제사는 공간 구축 과정에서 일기에 손상이 가지 말 것을 단단히 약속받으며 일기를 맡겼고, 해평은 그 길로 공간 구축을 위한 마술행사에 들어간다며 다음 일기가 완성될 때 돌아온다며 여수 전라좌수영을 떠났다.
해평이 위대한 통제사를 존경하고 또 존경해서 그에게 반드시 성배를 가져다주기 위해 그런 것만은 당연히 아니었다. 해평은 그의 괴상한 비방을 말하는 대가로 성배전쟁에서 후일 통제사를 다루게 될 ‘주인’은 오로지 아산 백씨 가 일문으로 자신의 직계 후손이어야 하며 다른 마술사가 통제사를 소환했을 경우 성심성의껏 싸워 주지 않을 것을 문서로 철저히 약조 받았다.
그 후 해평은 매년 정초마다 나타나서 그 전년에 완성된 일기를 받아갔고 그 사이의 공간 구축의 진척도 같은 것은 일절 말하지 않으며 사적인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아 뭐 하며 지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통제사 앞에 나타난 날은 절묘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다. 노량으로의 출전 전전 날, 통제사가 며칠 동안 기록을 미룬 공백기에 그가 나타났다. 해평은 마침내 자신이 수십년 간 증명하려 노력한 결과가 실현될 때라며(통제사 왈:이제서야?) 마지막 일기를 받아갔다. 이 때 일기를 달라던 해평의 모습은 평소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지고 뭔가에 쫓기는 듯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며 통제사에게 뭘 말하려는 눈치를 계속 보이다가 그만둬 보이는 등 이래저래 석연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일기를 받은 해평은 조선 수군 장졸들의 혼백을 묶어두는 데 필수적인 물건이라며 아무 것도 없는 백지 한 장을 주더니만 그 백지에 이름을 적거나 지장을 찍으면 죽은 뒤에 그 혼백이 갈 곳으로 가지 않고 일기 속으로 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더니만 가리포 첨사 이영남과 사도 가장 이언량을 비롯, 난데없이 장졸 합해 총 32명의 이름을 읊더니만 이들을 지금 당장 여기에 서명 시켜야 한다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통제사는 이 뜬금없는 요구에 난색을 표했지만 평소답지 않게 여유를 잃은 해평은 한시가 급한 일이라며 앞뒤 설명 없이 계속 부탁했다. 할 수 없이 영문 몰라 하는 수졸들과 통제사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 무슨 상황이 올지 익히 알고 있는 이영남과 이언량이 백지에 서명했다. 백지 위의 먹물은 몇 시진 후에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이후 해평은 통제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늘 그랬듯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통제사가 어째서 해평이 그렇게 조급해 했는지 알았을 때는, 흉탄이 그의 왼쪽 겨드랑이에 정확히 파고들었을 때였다.
통제사의 식은 육신이 관에 들어가고 남해안 전체가 통곡에 덮였을 때, 모여서 통곡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던 수군 장수들 앞에 나타났다.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는 통제사의 관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이제까지 받아온 통제사의 일기 7권과 그 백지를 장수들에게 바치고는 일기 7권 모두 흩어지지 않게 철저히 보관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고는 그 길로 사라져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1598년까지의 일이었다.
“이후 우리 수군의 장수들은 그 백지에 일일이 서명했고 글 모르는 수졸들은 다 지장을 찍었지. 이 과정이 석 달 넘게 반복되어서 결국 1만 6천 5백 4십 7명에 이르는 무술년 겨울에 그 마지막 전투를 끝낸 모든 수군의 인원들이 내 일기에 들어오게 되었단다.”
“하지만 6만 남짓하다고 하신 수군 병력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에 통제사의 답변은 이랬다. 아무래도 조선 수군 1만 6천여명의 전력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수군 장수들은 직접 나서거나 옛 부하들을 시켜서 조선 8도에서 기골이 장대하거나 힘깨나 쓰던 장정들을 찾으면 앞뒤 설명 안 해주고 일단 지장을 찍게 하고 보았다. 전쟁 직후라 괜찮은 장정들을 보기 힘들었고 장수들의 수졸 선별 기준이 높은 편이라 이 작업은 대 단위로 이어져 내려오다 어느 세인가 끊어졌다. 그 결과 일기 속 수군은 적지 않은 규모의 보충병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 조상님이 6만명이 넘는 사내들을 군대 두 번 가게 만든 셈이군.’
이게 그 설명을 듣고 처음 나온 생각이었다.
“하오시면,”
내가 물었다.
“방금 전에 한바탕 거하게 보여주신 그 무기체계의 대행진은 어떻게 나와서 통상의 수군 병력들이 그렇게 무장을 할 수 있었던 겁니까?”
“좋은 질문이구나.”
통제사는 시원하게 대답했는데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우리 수군을 죽은 후에도 이끌고 가려 했을 때 가장 우려했던 게 죽은 후까지 무장을 갖출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해평 그 친구에게 물어보니 역시 어떻게 할 줄 모른다 해서 별다른 뾰족한 수 없이 그대로 갈 수밖에 없었지.”
“그럼 소환되신 이후에는 어떡하실 생각이셨습니까?”
“내가 적진(그 적이 누구일지는 몰라도)을 습격해서 적 무기고를 털어 부하들을 무장시킬 생각이었지. 하지만,”
통제사는 그러며 만족스레 껄껄 웃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진 덕분에 나는 예수꾼들이 말하는 ‘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축복이 우리 수군에게 내려진 게야.”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영문 몰라 했다. 통제사는 사람 궁금하게 늘 수사학적 문장을 앞에 붙이고 설명은 뒤에 했다. 그때 우리가 앉아 있던 통제사의 방이 사라지며 으레 그 백색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다시 그 압도적인 일이 일어났다.
나와 통제사의 자리를 제외하고, 백색 공간에 K-2 전차들이 엔진을 으르렁거리며 튀어나오더니만 그 끝없는 공간에서 내 시야의 한계까지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통제영의 보급창.”
통제사가 3세대 반응 장갑으로 도배된 전차 전면장갑을 기분 좋게 두드렸다.
“내가 영령으로서 가진 여러 능력 중 가장 축복받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 이걸로 내 유일한 고민은 단번에 해결됐단다.”
통제사는 이윽고 눈으로 보고도 정말 믿기 힘든 설명을 시작했다.
“내 보급창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지. 내 마력에서 허용되지 않는 마술적 도구는 꺼내올 수 없지만, 비교적 ‘사소한’ 것들, 총, 전차, 화포, 장갑차, 수상함, 잠수함, 항공기 등과 연료, 총포탄을 막론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마력이 허용하는 한 내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내가 이 황당한 설명에 멍한 얼굴이 되어 버리자 통제사는 한 마디로 그 보급창에 대한 설명을 축약했다.
“그러니까 전쟁 물자를 내키는 대로 뽑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내 입이 딱 벌어졌다. 비록 내 얼굴은 멍한 표정이었지만 머리는 재빨리 돌아갔다. 통제사의 승리들이 값진 원인은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이 왜 수군의 서해를 통한 육군의 보급루트를 만들지 못함으로서 전쟁판도 자체를 뒤바꿔 버렸다는 것에 있다. 육상 루트의 보급 효율은 해상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지경이라 북상하는 보급병들이 보급해야 할 식량을 길 가다 다 먹어 버리고 합류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결국 작전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독소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버린 것에도 이 보급 문제가 강력히 작용했었다. 1943년 하르코프에서 만슈타인이 보여준 기적 또한 붉은 군대의 공세가 보급 능력을 초과해 버린 걸 노렸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그렇게 전장을 지배하는 보급의 문제가 통제사에게는 아예 없다는 말이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조선 수군이 군의 전력증강을 가장 크게 가로막는 예산의 문제에 아예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통제사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비싸지만 성능 좋은 무기라도 그냥 보급창에서 꺼내 온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복잡한 작금의 무기체계들을 보급창에서 구현시키려면 내가 그것의 세부 설계도와 운용원리를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는 단점이야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설계도들 또한 보급창에서 구현시켜 뽑아 올 수 있으니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단다. 그 결과로 여기 이 2형 전차(K-2)들이건 21형 보병전투차(K-21)이건 니미자(尼米兹:니미츠)급 항공모함이건 해랑(시울프)급 잠수함이건, 14형 전투기(F-14) ‘웅묘’(雄猫:톰캣)이건 간에 마력이 허용하는 한 마음껏 뽑아 쓸 수가 있고 그에 수반해야 하는 포탄 및 도탄(미사일), 탄약들도 마찬가지지.“
“저 설마, 여기가 아닌 현실로 불러 올 수 있는 건 아니죠?”
대번에 통제사의 호통이 날아왔다.
“예끼 이 녀석! 그럼 이건 뒀다 뭐에 쓰겠느냐? 내가 ‘제승당의 솟을대문’이라 부르는 통제영의 보급창과 현실을 연결하는 경로를 적절히 구축하면 얼마든지 현실에 불러올 수 있지. 그저 손 좀 휘두르면 아무도 모르는 새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단다. 아 참고로 이 ‘솟을대문’은 내 의지에 따라 심상공간과 연결되는 문이 되어 심상공간에 미리 준비해 둔 완전무장한 우리 수군 병력들을 현실에 불러온다.”
“저, 통상.”
“음, 뭐냐?”
“그런 걸 세간에서는 ‘사기’라고 합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독자들은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군대란 말인가? 터무니없이 위대한 무적의 지휘관에 터무니없이 강력하고 실전경험 풍부한 군대에, 무엇보다 터무니없이 끊이지 않는 무장과 보급이라니!
“요새 젊은 놈들이란. 아니 수식어가 왜 하필 ‘사기’냐?”
통제사가 표현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마력이 허용하는 한도’라 했는데 그렇게 무기들을 보급창에서 막 뽑아 쓰시는 데도 무리가 가지 않습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걸 걱정했는데 계속 사용하다 보니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수치적으로 비유를 하자면 , 나를 현세에 유지하도록 하는 일기 속의 마력 총량을 무량대수(10의 68승)라 치면 이 총알 하나(12.7밀리 구경)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마력은 무량대수분지 1이 된다. 전차 같은 경우 제법 복잡하고 크기도 크니 불가사의(10의 64승)분지 1이고 불러내는데 제일 마력이 많이 드는 항공모함은 항하사(10의 60승)분지 1이 들지. 불가에서 이런 숫자들은 잘 만든단 말이야.”
“숫자가 아닌 걸로 비유하면 태평양의 바닷물에서 물 분자 하나를 사용한 격이 되겠군요.”
“좋은 비유다. 그런 셈이지.”
“그럼 진짜 사기지 않습니까?”
“또 그 표현이냐?”
통제사가 면박을 주었다. 내 말 그래도 이건 진짜 사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엄청난 능력이었다. 사실상 소비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극소량의 마력만으로 뽑아 낼 수 있는 건 내키는 대로 뽑아 낼 수 있다니.
“통상께서 그 능력을 성배에서 받은 이유는 아마 그 시절의 통상이 보여주신 능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내 생각이었다.
“통상께서는 중앙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많은 수군 전력들을 유지하는데 힘을 쓰시고, 군량과 무기를 비롯한 보급품들을 수영에서 자체 생산하시고 조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선례 때문에 통상이 보급창을 쓸 수 있으신 게 된 것 같습니다.”
“흠, 그럴 듯한 설명이구나.”
통제사는 내 예상에 어느 정도 수긍한 듯 했다.
“어찌 하였건 덕분에 심상공간에서 365일간 실탄을 아낌없이 써 가며 훈련과 모의전을 벌였지. 내 의지에 따라 평지, 구릉지, 산, 해안, 연안, 대양을 구현하여 우리 수군을 어떤 지형과 어떤 상황의 전투건 간에 최고의 전투력과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지. 그리고 이를 통한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는 길에 이르도록 맹훈련 시켰느니라. 우리 수군은 어떤 상황에 부딪치건 최고의 대처가 가능하단다. 한 마디로 우리 수군은.”
통제사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최고 중에 최고다!”
“최고군요.”
나는 정말 진심으로 동의했다. 세상에 이런 군대가 있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미군이 통제사의 이 조선 수군에 제일 근접하지만, 그들도 무한히 보급과 무기를 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매일같이 모든 상황에서의 맹훈련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이 미쳤다.
“하온데 수군 장졸들은 아무리 죽은 후라지만 그렇게 훈련을 하면서 힘들어하지도 않습니까?”
“예끼 이 놈. 그럴 걱정은 없다. 일기의 마력을 이용해 부하들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키고 있으니 몸 좀 힘들다고 불평하는 녀석은 이제까지 한명도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통제사의 표정은 약간 씁슬하게 바뀌었다.
"사단칠정 자체를 제거했으니 아예 그런 걸 느끼고 생각하지도 못하니 말이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단칠정의 제거라니?
"내 심상공간에서는 부하들의 심성에 대한 임의적인 조작도 가능해서 그렇게 했다만,
그거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해 주마. 확실한 것은 율곡 선생께서 사단칠정과
이와 기의 원리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말씀하셨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말 해 주는것을 잊은 게 하나 있구나.”
“무엇입니까?”
“사실 보급창 이용에 드는 마력이 극소량이긴 하지만 부하들을 내 공간에 유지할 마력이 생각보다 많이 드는 편인데다가 이렇다 할 마력 공급 수단이 없이 이백년 가까이 보내다 보니 조금씩 쪼들리기 시작했단다. 그래도 집적 물자로 훈련은 계속 했지만 혹시 일이 잘못되면 큰일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제 시각에 네가 나타나 줬단다. 덕분에 우리 수군은 안정적인 마력 공급 수단을 얻었고 내 걱정은 사라졌다. 네가 나와 계약한 것은 우리 수군의 홍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척 기뻤다. 죽기 직전의 고통을 참아내며 마술각인을 강제로 이식받고 암울한 중학교 3년을 보내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강의 군인이자 이 나라의 대영웅이 내가 도움이 그에게 된다고 보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결론은 하나입니다. 총통과 나치놈들은 이제 끝났다는 겁니다.”
내가 자신만만히 말하자 호통이 날아왔다.
“예끼 이 놈! 속단하지 말거라!”
통제사의 얼굴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손자 말하길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했거늘 너는 자신만(정확히는 우리 수군만)알고 승패를 함부로 판단하려 하는구나. 우리 수군은 최고 중의 최고지만 저 덕국 녀석들을 보거라. 녀석들은 크게 클라우제비츠와 샤른호르스트, 대 몰트게와 슐리펜의 후예들이자 조금 작게는 만슈타인, 구데리안, 클라이스트, 호트, 모델, 하우저, 라인하르트의 후예들이며 작게는 만토이펠, 롬멜, 발크의 후예들이다. 많은 면, 특히 보급 측면에서 우리 수군이 우세에 있다고는 하지만 저 덕국군을 얕잡아 보았다가는 크게 당하고 우리 수군의 명성을 깎을 수 있음이야!”
“하오나 저들이 어땠건 간에 객관적으로 수군은 현재 천하제일이 아닙...”
“떽!”
이 한 마디에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통제사는 성적 나쁜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말투였다.
“자신을 자만하고 적을 얕잡아 봄에 따라 폐한 전례는 사서에 많이 나와 있을 터인데 어찌 잊었느냐? 게다가 우리 수군이 비록 물자는 넘치지만 병력 숫자가 저들에 미치지 못하거늘 어떻게 승리를 단순하게 장담하느냐?”
그간의 어른들에게 혼나던 여러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상황에서 통할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어리석은 말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좋다. 저 덕국 놈들을 어떤 수로 이길 것인지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마.”
통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신데,”
나는 다른 질문을 시작했다.
“그런 강력한 군세와 통상의 막강함이 있는데도, 어째서 옛날에 벌어진 성배전쟁에서 성배를 차지하지 않으시고 일기 속에 눌러 앉으신 겁니까?”
순간 통제사의 표정이 험악해져서 나는 괜히 질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통제사의 눈에서 번쩍 불이 나고 콧김이 거칠어지며 분을 참으며 이를 가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 나를 소환한 주인이 극악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통제사가 이를 한층 더 뿌드득 갈더니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분노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추악하고, 무도하고, 비열하고, 간악하고, 음탕하고, 극악하고, 혐오스럽고, 음흉하고, 소름끼치고, 추잡하고, 간사하고, 잔악한 그놈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흉악한 놈이었다! 내가 생전에 범한 과오는 많지만, 그래도 그런 놈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다는 것은 나와 우리 수군이 당한 최악의 치욕일 것이다!”
통제사가 씩씩대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나는 겉으로나마 충심으로 놈을 섬기며 성배를 얻을 때까지 참자고 생각하며 놈의 추악하고 황망하기 짝이 없는 불로불사라는 목적을 위해 싸우고 놈의 추악하고 음탕한 행각들을 다 참아 주었건만, 그 흉악무도한 놈은 내가 나머지 영령들을 다 처리하면 마지막까지 쓰지 않은 령주로 나를 강제로 소멸시켜 성배를 독차지할 속셈이었지! 그 시절 생각만 하면 심화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구나!”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통제사의 얼굴을 보며 나는 역시 괜히 여쭈어 봤다고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 전차로, 나는 소인배 같지만 시원한 수법을 써서 놈에게 제대로 복수했지. 나는 그의 추악한 악행들을 충심으로 성심성의껏 시행하는 척 하면서 놈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을 참으며 놈에게 안하던 사탕발림을 하느라 내 오장육부가 다 뒤틀릴 뻔했지! 내가 성배를 얻기 위한 최후의 결전에서 검사의 좌에 있는 영령을 상대로 내 최강의 보구를 사용해서...”
“그럼 보급창과 솟을대문은 보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말을 끊으며 대뜸 질문을 했다.
“예끼 이 녀석! 보급창에서 나오는 병기들은 마술적 물건이 아니라 영체에 타격을 줄 수 없는데 어떻게 보구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니 그럼 수군은 사실상 성배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격이 아닙니까?”
“이 녀석. 다 쓰기 나름이니라. 어떻게 우리 수군을 영령과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부릴 것인지는 나중에 설명해 줄 터이니 지금은 말 끊지 말고 그냥 잠자코 듣거라. 어쨌건 나는 그 검사의 좌에 있는 영령을 상대로 내 최강의 보구를 사용해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였지. 놈이 성배가 거의 손에 들어오자 기뻐 날뛰고 있었을 때, 나는 행동을 개시했지.”
통제사는 그러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원했지만 소인배같은 일이었단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나를 일기 속에 재봉인하는 술식을 가동시켰다. 그리하여 상황은 우습게 되어 버렸지. 놈이 마지막 남은 령주를 어떻게 써야 할지 쩔쩔매며 내게 고래고래 오만가지 추잡한 욕설을 퍼붓는 꼴이라니"
그것은 정말 절묘한 수였다. 통제사가 스스로를 봉인할 때 그 세이버 서번트는 치명상을 입어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 통제사의 전 주인이 자살하라고 령주로 명령하면 세이버 서번트가 성배를 차지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통제사에게 죽지 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이었을 것이다. 그가이 성배를 독차지해야 할려면 통제를 죽여야 하는데 령주가 없으면 영령을 자살시킬 방법은 없으니 말이다. 통제사에게 스스로 봉인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해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래고래 악만 쓰다가 내가 놈을 최대한 비웃으며 봉인당하는 걸 봐야 했느니라. 그 광경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통제사는 그러며 유쾌하게 껄껄 웃더니 다시 분노에 찬 얼굴이 되는 것이었다.
“벌레 같은 놈! 아니 벌레 그 자체인 놈! 그놈이 만약 살아서 나와 마주한다면 놈을 그 자리에서 능지하고 쓸개를 빼어 잘근잘근 씹어 버릴 작정이다. 그런데 놈은 극악하지만 실력 하나는 뛰어난 놈이라 육체를 능지하기가 좀 어려운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 벌레 같은 놈은 대체 누구였습니까?”
“묻지 말거라. 떠올리기도 싫구나.”
통제사가 심화를 가라앉히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체 그 벌레라고 칭하는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저한 선비인 통제사를 그렇게 분노하고 다소 술수까지 쓰게 만들 정도면 정말 지독한 인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던 간에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데로, 그리하여 제2차 성배전쟁은 그 누구도 성배를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최후까지 있던 세이버 서번트는 소멸했고 통제사는 스스로 봉인해 버렸으니 아무도 성배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물론 추악한 작자이긴 했지만, 눈앞에서 성배를 놓쳐버린 통제사의 전 마스터를 생각하니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한편에서 들었다. 물론 우습다는 생각이 먼저였지만.
그러다가 통제사가 내게 말했다.
“이제 내 심상공간은 충분히 견학했고 여기서 들을 만할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이만 밖으로 나가자꾸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차로 가득 차 있던 백색공간이 삽시간에 사라지더니 어느 새 우리 집 거실로 바뀌어 있던 것이었다.
첫댓글 ㄷㄷㄷ 역시 치트공 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