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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苑 有感
慶州 崔氏
中央 宗親會
司成公派
白沙公 11代 冑孫 石堂 長植 書
桂苑 有感
지난 2006年 이 때 인 듯 싶습니다.
始祖 할아버지의 享禮에 參與한다는 벅찬 感激으로 果然 우리後孫들이 偉大하신 始祖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고 또한 알아야 하는 가를 反芻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여러 文獻들을 考察한 끝에 有名한 黃巢檄文을 發見하고 이를 原文과 解釋한 글을 小冊子로 만들어 함께 參與하는 우리 族親들에게 配布한 적이 있습니다.
올해 2008년에도 다시 參禮해야 한다는 自矜心으로 享禮날자를 屈指하고 있던 中 中央宗親會에서 通報가 와서 이번에도 參與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中國旅行은 여러 차례 해 보았습니다마는 단순한 觀光 次元이었고 특별한 意義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偉大하신 始祖 할아버지를 崇仰하고 稱誦하며 그 偉業을 繼承 發展시켜 後世와 中原 天地에 자랑하고 기리 빛내기 위한 享禮는 우리 後孫이 반드시 참여해야한다는 義務感과 責任感이 同時에 賦與되는 行事가 아닐 수 없고 그 목적이 一般的인 旅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昨年 參與時에 들은 이야기로 中國과 國交이후 처음으로 中國 國家元首로 강택민 主席이 韓國에 와서 國會演說을 하면서 序頭에 大學者이신 崔致遠 先生이 태어나신 大韓民國에 오게 된 것을 큰 榮光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니 始祖할아버지의 位相을 새삼 再論할 餘地가 있겠습니까?
나는 公職에서 물러나 大學構內에서 敎授와 學生들속에서 硏究와 學業을 支援하고 奉仕하는 일을 하며 消日하면서 國文學과 漢文學을 硏究하는 書籍들 가운데 우리始祖의 學問을 硏究하는 論文과 書冊이 國內는 물론 中國과 심지어 日本에서 까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發見하고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가 심히 自愧感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始祖할아버지의 史蹟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紹介된 史實은 알고 있겠지만 구체적인 文獻에 대하여는 專門家를 除外하고는 잘 알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有名한 詩文이나 黃巢檄文과 같은 文章은 당연히 알고 紹介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猥濫되게 昨年에 小生이 黃巢檄文을 配布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昨年 始祖의 享祀 奉行 後에 遺物館 앞의 東山을 거닐면서 조그만 연못가에 앉아 있노라니 누군가가 여기가 바로 시조할아버지가 남기신 桂苑筆耕을 執筆하신 장소인 桂苑이라는 것에 놀란 사실이 있었다.
桂苑이란 글자되로 풀이하면 桂樹나무가 있는 뒤뜰이고 月桂樹가 있는 神仙들이 노니는 東山이라고도 하겠다.
始祖할아버지가 18세에 당나라에서 及第하시고 官階에 계시다가 28세에 歸國하시기 까지 10餘年間 在職하시면서 閑暇한 時間을 이 桂苑에서 桂苑筆耕集에 나타난 바와 같이 中國에서 지으신 無數한 詩文들을 集大成하시었으니 이 桂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感懷는 무엇으로 形言할 수 있겠으랴!
이번에 보게 될 고운 시조님을 영원히 기릴 雄壯하고 盛大한 記念館을 中國의 楊洲시에서 이 桂園의 近處에 建立하였다니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는 과거로부터 여기에 유물관이 있다가 다시 記念館이 新築된 것이 아닌 가.
그렇다면 우리 始祖할아버지가 양주시와 淮南, 그리고 이 桂苑에서 무엇을 하였고 또 무엇을 남기시었기에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後世에 까지 물려주고자 巨大한 事業을 하였을까?
양주시측에서 韓國의 小數民인 孤雲先生의 後孫들을 위함일까, 아니면 韓國民을 대상으로 단순한 觀光 收入 次元이었으랴. 결코 그것은 아닐 것이다.
孤雲始祖께서는 중국 땅에서 科擧 及第 後 10年동안 계시면서 桂苑筆耕 序文에서와 같이 名文의 글만 數百 編을 남기셨는데 우선 序文에서의 說明과 같이 이 桂苑에서 4년간 계셨다고 하니 이 곳 뿐 이었으랴.
또한 序文序頭에 淮南에서 本國으로 歸國하셨다고 하니 이 淮南이 양주 땅이었고 活動의 舞臺가 이 桂苑만이 아닌 양주시 一圓을 中心으로 한 中原天地가 아니었겠나 想像되며
특히 이번에 觀光한다는 雙女墳이며 致遠橋等은 이를 立證하는 것이 아닐까?
何如間에 양주시에서는 우리가 始祖어른을 崇仰하고 高揚하는 그 무엇 보다 孤雲先生을 敬慕하고 推仰하여 業績과 精神을 이어 받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들의 想像을 超越하는 發想으로 事業을 施行하였을 것이며
또한 韓國에서 받들고 崇仰하며 알려진 大聖賢, 大學者 以上으로 中原 天地에 알려져 있는 史實과 業績이 있지는 않는지 심히 의아해 하면서 한편 높이 推仰해 마지 아니 할 수 없도다.
高麗末 大學者인 李奎報는 그의 著書에 中國의 當時 文獻에 孤雲先生의 四六集 몇 編, 桂苑筆耕만이 紹介되고 있는 것은 中國人들보다 글이나 行績이 越等함으로 이를 猜忌하여 漏落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記述하고 있다.
孤雲 始祖가 中國에 들어가기 12歲前에 이미 羅政丞의 따님과 對作한 有名한 詩가 생각나 다음과 같이 읊어 보자.
孤雲 始祖 : 화소함전 성미청(花笑檻前 聲未聽)
羅 小姐 : 조제림하 루난간(鳥啼林下 淚亂看)
고운 꽃이 헌함 앞에서 웃고 있으나 웃는 소리 들리지 아니 하네
이쁜 새 한 마리 수풀 속에서 울고 있으나 눈물은 볼 수가 없도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文學에 才質이 남달라 18세에 중국의 科擧에 及第하시어 30세 未滿인 不過 20대에 中國天地를 놀라게 한 黃巢檄文이란 名文章을 비롯한 數百 首의 詩, 賦, 狀, 啓 等의 有名한 글을 지어 세상에 남기시고 本國에 돌아오시어
憲康王으로부터 侍讀 兼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벼슬을 除授받고
그 이듬해에 桂苑筆耕集을 獻上하신후 中央官階에 進出하려 하나 官階가 不正腐敗하여 큰 뜻을 펼쳐 보일 수 없는 處境이라 外職을 自處하여 邊方인 옛 百濟땅 太山, 天嶺, 富城의 太守를 역임하게 되었고
드디어 진성왕 3년 朝廷에서 租稅를 督促한 것이 農民들의 蜂起로 이어져 國政이 塗炭에 허덕이고 梁吉과 궁계 그리고 甄萱이 나라를 세우면서 首都인 慶州로 공격해 들어옴에 이를 보다 못해
진성왕 8년에 政局收拾策의 一環으로 時務十餘條를 上疏함에 이를 받아들어 施行에 들어가고 벼슬을 阿湌에 除授 받으시다.
그러나 이 時務十餘條를 施行하기에는 朝廷의 官吏가 頑强하게 拒否함에 그 빛을 發揮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孤雲始祖께서는 모든 벼슬을 버리시고 全國의 名勝地를 踏査하시며 자연을 벗 삼아 詩興을 돋우시고 歲月을 보내시며 산이나 강가 혹은 바닷가 가는 곳마다 정자나 樓閣을 지어 後世사람이 그 곳에 찾는 이 마다 자기의 뜻을 펼 수 있게 하시었다.
고국에 돌아와 남기신 詩賦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碑石으로 남아 있는 四山碑, 山寺에 있는 法藏和尙傳 等이 있으나 그 밖에도 年代와 作者未詳의 글들이 由來되고 있는 것은 無數히 많다고 한다.
2008년 10월 14일 중국의 孤雲始祖 祭享에 參與하면서 위에 적은 대강의 사실을 알고 族親 여러분께 알리고자 하는 것은
우선 우리가 桂苑을 찾아가 孤雲始祖의 文學思想을 鑑賞하게 될 것이고 1100여년전 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桂苑筆耕集을 다시 한 번 살필 수 있는 契機가 되었다는 것이다.
學界에 일려진 바에 의하면 桂苑이란 글자대로 해석하여 文集의 아름다운 이름정도로 익혀지고 있다.
이번에 확실하게 桂苑에서 중국의 16년 생활의 정리를 하시고 글을 모아 상자에 모아 歸國準備를 하신 장소란 것도 짐작하게 된다.
이번 기회에 別紙 桂苑筆耕序文을 拔萃하여 桂苑에서 整理編纂하신 經緯를 紹介하고 아울러 雙女墳을 觀光하게 되는데 그 설화에 대한 일부를 別添하여 알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그 상세한 내용은 中央宗親會에서 紹介한다니 다행이고
또한 다시 한 번 孤雲始祖를 살펴보기 위해 油印物로 소개하면서 始祖의 生涯를 年譜를 엮어 보기 쉽게 羅列하였다.
아무쪼록 중국의 4박 5일 期間 中에 始祖의 祭享行事는 물론 觀光이 有益하고 보람된 日程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8년 10월 14일
司成公파 白沙 11代 冑孫 長植 올림.
첨부
1.桂苑筆耕序
2.雙女墳의 說話
3.崔致遠
4.年譜
5.中央宗親會 提供 雙女墳 이야기
桂苑筆耕序
淮南에서 入本國에 兼送詔書等使인 前都統巡官 承務郞 侍御史 內供奉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은 進所著雜詩賦及表奏集二十八卷호대 具錄如後하노이다.
회남(淮南)1)에서 本國으로 들어올 적에 조서등사(詔書等使)를 겸하여 보내 주신 전 도통순관(都統巡官)과 승무랑(承務郞)과 시어사(侍御史)와 내공봉(內供奉)을 지냈고, 자금어대(紫金魚袋)2)를 하사 받은
신(臣)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3) 28권을 올리는데 갖추어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합니다.
私試今體賦五首一卷
五言七言今體詩共一百首一券
雜詩賦共三十首一卷
中山覆簣集一部五券
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사시금체부 5수 1권4)
오언 칠언 금체시 모두 100수 1권5)
잡시부 모두 30수 1권6)
중산복궤집 1부 5권7)
계원필경8)집 1부 20권
右는 臣自年十二로 離家西泛이라 當乘桴之際하야 亡父誡之曰 十年에 不第進士면 則勿謂吾兒하라 吾亦不謂有兒라호라라 往矣勤哉하야 無隳乃力이어다하야늘 臣이佩服嚴訓 하야 不敢弭忘懸刺하야無遑冀諧養志하야 實得人百之己千之라 觀光六年에 金名牓尾호니 此時諷詠情性하야 寓物名篇을 曰賦曰詩라호니 幾溢箱篋이나 但以童子篆刻으로 壯夫所慙이러하다.
위에 열거한 문장들은 제가 나이 열두 살 때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서쪽으로 올 때부터의 것입니다. 배를 탈 즈음을 당하여 죽은 저의 아비가 경계하기를 “10년 동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말하지 말라. 나 또한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라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너의 힘을 무너뜨리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아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어 감히 현자(懸刺)9)하는 노력을 쉬거나 잊지 않았습니다. 겸하기를 희망하고 뜻을 기를 겨를이 없어서, 실로 남들이 백 번하면 저는 천 번 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공부를 한 지 6년 만에 합격했다는 이름이 방의 맨 끝에 붙었으니, 이때에 정성(情性)을 시로 읊고, 사물에 생각을 표현한 시편의 이름을 지어서 부라는 명칭을 붙이고, 시라는 명칭도 붙인 것이 보관한 상자에 넘칠 정도로 많게 되었습니다. 다만 동자(童子)의 전각(篆刻)10) 같아서 장부라면 짓기를 부끄러워하는 것들입니다.
及忝得魚나 皆爲棄物이라 尋以浪跡東都하야 筆作飯囊에 遂有賦五首와 詩一百首와 雜詩賦三十首하야 共成三篇이라 爾後 調授宣州溧水縣尉하니 祿厚官閒하야 飽食終日이라 仕優則學이니免擲寸陰 하야 公私所爲 有集五卷이라 益勵爲山之志 하야 爰標覆簣之名 호대 地號中山일새 遂冠其首이다.
외람되게도 어대를 하사받게 되었으나 모두가 버리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동도(東都)에 유랑생활을 하여 붓으로 글을 지어 주고서 식생활을 해결하게 되자 드디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 30수를 지어 합쳐서 세편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로 선주 율수현위(宣州溧水縣尉)를 제수 받게 되니 봉급이 많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불리 먹고서 온종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벼슬이 넉넉하면 배워야 하는 것이니 촌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되어서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로 일을 한 바, 문집 5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욱 산을 만들려는 뜻을 힘써서, 이에 삼태기 흙을 붓는다는 ‘복궤(覆簣)’라는 명칭을 표방하여, 그 지방이 중산이라 부르기에 그 복궤라는 명칭 위에 중산이란 말을 놓게 되었습니다.
及罷微秩하고 從職淮南에 蒙高侍中專委筆硯이라 軍書輻至나 竭力抵當하야 思十用心이 萬有餘首 라然이나 淘之汰之하야 十無一二나 敢比披沙見寶리오마는 粗勝毁瓦畵墁일새 遂勒成桂苑集二十卷호이다.
그 조그마한 관질(官秩)을 그만 두고 회남(淮南) 지역에서 관직에 종사할 때에 고시중(高侍中)11)이 문장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위임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 때에 군사에 관한 서류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었으나 힘을 다해서 감당해냈으며, 4년 동안 마음을 두고 노력한 것이 만여 수나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어 버렸기 때문에 보존한 것이 10분의 1,2도 되지 못했으나 감히 제가 가지고 있는 시를 모래를 헤치고 보배를 찾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대로 망가진 기와와 그어진 벽장식처럼 못쓰게 된 것보다는 낫기에 드디어 『계원집(桂苑集)』20권을 만들었습니다.
臣이 適當亂離하야 寓食戎幕호니 所謂饘於是粥於是이라 輒以筆耕爲目하고 仍以王韶之語로 前事可憑하야 雖則傴僂言歸이나 有慙鳧雀라 旣墾旣耨하야 用破情田호니 自惜微勞하야 冀達聖鑑하노이다. 其詩賦表狀等集 二十八卷을 隨狀奉進하고 謹進하노이다.
신이 마침 난리를 만나 야영의 융막(戎幕)에서 의탁생활을 했으니, 이른바 여기에서 된 죽도 먹고 여기에서 묽은 죽도 먹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에 필경으로 제목을 삼고, 또 왕소(王韶)12)의 말처럼 지난날 이력의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비록 꾸부정하게 등에 지고 돌아오기는 했으나, 오리나 새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하기에는 부끄러운 면이 있습니다. 이미 이것을 개간을 하고 김매듯이 하여 마음을 파헤쳐 문장에 공을 들였으니 스스로 조그마한 수고나마 버리기가 아까워서 상감께서 열람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 중에서 시 ․ 부 ․ 표 ․ 서장 등의 문집 28권을 이 서장에 딸려서 받들어 올리고 삼가 아뢰옵니다.
中和六年 正月日에 前都統巡官 承務郞 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은 狀奏하노이다.
桂苑筆耕集 一部二十卷
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崔致遠撰
중화 6년中和六年13) 정월 일에 전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은 서장으로 아뢰옵니다.
『계원필경집』1부 20권.
도통순관 시어사 내공봉 최치원 지음.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인 최치원에 관한 설화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일화에 관련된 문헌설화이다. 한 편의 설화이기는 하나 내용 구성면에서 다분히 소설적 면모를 띠고 있어 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설화는 원래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었던 것이 뒤에 성임(成任)의 ≪태평통재 太平通載≫ 권68에 ‘최치원(崔致遠)’이라는 이름 아래 전재되어 있고, 그 뒤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 권15에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이름으로 수록
되어 전한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선녀홍대〉가 〈최치원〉보다 약 5분의 1 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태평통재≫에 수록된 설화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한 뒤 율수현(碌水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는데, 항상 고을 남쪽의 초현관(招賢館)에 가서 놀았다.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노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취금(翠襟)이라는 시녀가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가 최치원의 시에 대해 화답한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히 기다리노라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율수현의 부자 장씨(張氏)의 딸들로 언니가 18세, 동생이 16세 되던 해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장수에게,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은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여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렇게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날 지난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부른다.
그 뒤 최치원은 신라에 돌아와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고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린다.
최 치 원(崔 致 遠)
857(문성왕 19)~?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 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涼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 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신라의 불교).
특히〈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年 譜
857년(신라 문성왕19년): 出生
868년12세(경문왕8년) : 中國의 唐나라에 들어 감
874년18세(경문왕14년.唐 僖宗乾符元年)賓貢科 及 第
874-875年19世 今體詩五首 1권, 五言七言今體詩100首1권, 雜詩賦 30首1권 著述
876년20세(헌강왕2년) : 江南道 宣州 溧水縣尉除授
中山覆簣集 5권 著述
877년21세(헌강왕3년) : 율수현위 辭職後 博學宏詞 科 應試準備 入山
878년22세(헌강왕4년) : 淮南節度使 高변의 경제적 도움
879년23세(헌강왕5년) : 고변이 諸道行營兵馬都統(자금의 참모총장)으로 黃巢討伐에 나설 때 從事官(書記任務)으로 任命
880년24세(헌강왕6년) : 都統巡官 承務郞 殿中侍御史 內供奉에 任命, 緋銀魚袋 下賜
軍務 中 지은 글들이 桂苑筆耕을 編纂한 契機가 됨
881년25세(헌강왕7년) : 檄 黃巢書를 지어 黃巢의 亂 平靜
紫金魚袋 下賜
882년26세(헌강왕8년) : 고변의 종사관 辭任
882-884년28세 : 桂苑에서 讀書와 著述의 정리
885년29세(헌강왕11년) : 唐 僖宗의 使臣자격으로 詔書를 받들고 歸國
新羅의 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外交業務)에 除授
886년30세(헌강왕12년) : 唐나라에서 著述한 글을 集大成 한 桂苑筆耕集을 獻上,
大崇福寺碑銘, 眞鑑國師碑銘 著述
887년31세(50대 정강왕,51대 진성왕 즉위) :
太山 太守(지금 전북태인군수)
889년33세(진성왕3년) : 天嶺 太守(지금의 경남
함양 군수)
나라 財政의 窮乏으로 조새를 독촉한 것이 농민蜂起로 이어져 891년 梁吉, 弓裔가 동해안의 郡縣을 공략해 나라를 僭稱하고 892년 甄萱이 後百濟를 세워 나라 崩壞地境임
891년35세(진성왕6년) : 富城 太守(지금의 충남 서 산군수)
893년37세(진성왕7년) : 唐의 賀正使 任命( 國難으 로 下車)
894년38세(진성왕8년) : 時務十餘條 上訴
阿飡에 任用
896년40세(진성왕10년) :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시다.
897년41세(효공왕 즉위) : 진성왕 讓位表, 효공왕 謝嗣位表 撰述
898년42세(효공왕2년) : 모든 관직에서 물러남
900년44세(효공왕4년) : 해인사 善安住院壁記 지음
904년48세(효공왕8년) : 해인사 華嚴院에서 法藏和 尙傳 著述
908년52세(효공왕12년):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登樓 記 著述
이후 문서상 어디에도 나타나신 흔적이 없으나
시부를 많이 남기신 樂天的이고 每事 多方面에 疎脫하며 情緖的인 면에서 볼 때 長壽하실 것을 想像하면 70壽를 넘어 어쩌면 永生하는 神仙이 되었다고 觀望함.
그리하여 87세까지 年譜로 함
912년56세 : 53대 신덕왕 즉위
917년61세 : 54대 경명왕 즉위
918년62세 : 王建이 高麗 建國
924년68세 : 신라 55대 경애왕 즉위
927년71세 : 신라 56대 경순왕 즉위
935년79세 : 新羅 滅亡
943년87세 : 고려 王建 讓位 2대 혜종 卽位
쌍녀분(雙女墳) 이야기
쌍녀분전기(雙女墳傳記)
최치원 작
최치원은 자(字)가 고운(孤雲)으로 열두 살 때 서쪽 당나라에 유학했다. 874년(唐 僖宗 甲年)에 학사(學士) 배찬(裵瓚) (예부시랑 지공거 : 禮部侍郞 知貢擧)이 과거를 관장할 때 단번에 괴과(魁科)14)에 합격했다. 그 후 20세 되던 876년에는 율수현위(溧水縣尉)를 제수 받았다. 일찍이 현의 남쪽에 있는 초현관(招賢館)에 간 적이 있는데 관의 앞 언덕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어 쌍녀분(雙女墳)이라 했다. 여기는 고금(古今)의 명현(名賢)들이 유람하던 곳이다.
최치원이 무덤 앞 석문(石門)에 다음과 같이 시(詩)를 지어 썼다.
誰家二女此遺墳 뉘 집 두 딸이 묻혀 있는 무덤인가
수가 이 녀 차 유 분
寂寂泉扃幾怨春 적막한 황천에서 봄을 원망하기 몇
적적 천 경 기 원 춘 해던고.
形影空留溪畔月 아름다운 그 모습, 시냇물에 비치는
형영 공 유 계 반 월 달 속에 머무르고
姓名難問塚頭塵 이름이 무어냐고 무덤 가 먼지에게
성명 난 문 총 두 진 묻기조차 어렵구나.
芳情儻許通幽夢 꽃다운 정이(情誼). 그윽한 꿈속에서
방정 당 허 통 유 몽 만날 수 있다면
永夜何妨慰旅人 기나긴 밤 나그네를 위로한들 어떠하리.
영야 하 방 위 여 인
孤館若逢雲雨會 외로운 관사(館舍)에서 운우의 밀회를
고관 약 봉 운 우 회 즐길 수 있다면
與君繼賦洛川神15)그대에게 낙천부를 이어 불러 주리라.
여군 계 부 낙 천 신
시(詩)를 써 놓고 초현관으로 들어오니 때마침 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여 명아주 지팡이를 끌며 천천히 거니는데 홀연이 한 여인이 나타났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그 여인은 손에 붉은 주머니를 들고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께서 선생님께 말씀을 전하랍니다. 아침에 특별히 어려운 걸음하시고 겸하여 좋은 글까지 주셨으므로 두 낭자께서 화답하신 글이 여기에 들어 있으므로 명령을 받드려 올리나이다.”하였다.
최치원은 그녀를 돌아다 보고 깜짝 놀라며 아가씨가 사는 곳이 어디냐고 거듭 물으니 그녀는 “아침나절 수풀을 헤치고 돌을 닦아 시를 써 놓으신 그곳이 두 낭자께서 사시는 곳입니다”라고 한다.
최치원은 그제서야 깨닫고 첫 번째 주머니를 열어보니 팔낭자가 최치원에게 회답한 시였다. 그 시에는
幽魂離恨寄孤墳 저승의 혼령이 이별의 원한을 외로운
유혼 이 한 기 고 분 무덤에 의탁하고 있으나
桃臉柳眉猶帶春 복사꽃 같은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엔
도검 유 미 유 대 춘 아직도 봄빛을 띄었나이다.
鶴駕難尋三島16)路 학의 수래는 삼신산(三神山)가는 길
학가 난 심 삼 도 로 찾기가 어렵고
鳳釵空墮九泉塵 봉황무늬 새긴 비녀 부질없이 구천의 먼
봉채 공 타 구 천 진 지 속에 떨어져 있나이다.
堂時在世長羞客 살아있을 당시에는 나그네 대하기를
당시 재 세 장 수 객 몹시 부끄러워 하였는데
今日含嬌未識人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금일 함 교 미 식 인 품나이다.
深愧詩詞知妾意 시로써 저의 뜻을 알림을 깊이 부끄
심괴 시 사 지 첩 의 럽게 여기며
一回延首一傷神 한번 고개 떨구어 기다리고 한편 마
일회 연 수 일 상 신 음 아파하나이다.
라고 쓰여 있다. 이어서 두 번째 주머니를 열어보니 바로 구낭자의 것이었다. 그 시에는
往來誰顧路傍墳 왕래하는 그 누가 길가의 무덤 돌아
왕래 수 고 노 방 분 보겠나이까
鸞鏡鴛衾盡惹塵 난새를 새긴 경대와 원앙새 수놓은 이불
난경 원 가 진 야 진 엔 먼지만 일고 있나이다.
一死一生天上命 한 번 죽고 한 번 태어남은 하늘이
일사 일 생 천 상 명 정한 운명이요
花開花落世間春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은 세간의 봄이
화개 화 락 세 간 춘 로소이다.
每希秦女17)能抛 매양 진여(秦女)가 속세를 벗어날 수
매희 진 여 능 포 속 있음만 바랐고
不學任姬18)愛媚人 임희(任姬)처럼 아양떪을 배우지 못
불 학 임 희 애 미 인 했나이다.
欲薦襄王19)雲雨夢양왕(襄王)을 모시고 운우의 꿈을 꾸
욕 천 양 왕 운 우 몽 고자 하나
千思萬憶損精神 천만가지 생각이 정신을 어지럽히나
천사 만 억 손 정 신 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뒤 폭(幅)에도 글이 쓰여 있었다.
莫怪藏姓名 이름 숨김을 괴상히 여기지 마옵소서
막괴 장 성 명
孤魂畏俗人 외로운 영혼이 속세의 인간을 두려워
고혼 외 속 인 하기 때문입니다.
欲將心事說 장차 심사를 모두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욕장 심 사 설
能許暫相親 잠시 서로 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
능허 잠 상 친 소서.
라고 쓰여 있었다.
최치원은 이미 아름다운 시(詩)를 보고 자못 희색이 만면하여 심부름 온 그녀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翠襟)이라고 했다.
그는 기쁜 나머지 약간 희롱하는 말을 던지니 취금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선생께서는 답장을 써 주셔야 합당한데 공연히 사람을 괴롭히려 드십니다.”했다.
최치원은 곧 시를 적어 취금에게 주었다.
偶把狂詞題孤墳 우연히 경솔한 글을 오래된 무덤에
우파 광 사 제 고 분 쓴 것이
豈期仙女問風塵 어찌 선녀가 속세 일을 묻는 기회가
개기 선 녀 문 풍 진 될 줄이야.
翠襟猶帶瓊花艶 취금도 오히려 구슬꽃 같은 아름다움
취금 유 대 경 화 염 을 띠었으니
紅袖應含玉樹春 붉은 소매는 응당 옥같은 나무에 깃
홍수 응 함 옥 수 춘 든 봄을 품었으리라.
偏隱姓名斯俗客 문득 이름을 숨겨 속세의 나그네를
편은 성 명 사 속 객 속이더니
巧裁文字惱詩人 교묘히 문자를 지어 시인을 괴롭히는
교재 문 자 뇌 시 인 구려.
斷腸唯願陪歡笑 애타게 모시고 환소하기를 바라오며
단장 유 원 배 환 소
祝禱千靈與萬神 천만 신령에게 빌고 또 비나이다.
축도 천 령 여 만 신
하고 끝 폭에다 이어 쓰기를
靑鳥20)無端報事由 청조가 뜻밖에 까닭을 알려주니
청조 무 단 보 사 유
暫時相億淚雙流 잠시 생각에 잠겨 두 줄기 눈물 흘립
잠시 상 억 루 쌍 류 니다.
今宵若不逢仙質 오늘밤 만약에 그대 선녀 만나지 못
금소 약 불 봉 선 질 한다면
判卻殘生入地求 남은 생을 버려 지하에 구하리다.
판각 잔 생 입 지 구
라고 썼다.
취금이 시를 가지고 돌아가는데 빠르기가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았다.
최지원은 홀로 서서 애달피 시를 읊조리는데 한참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단가(短歌)를 읊어 그것을 마치려는데 갑자기 은은한 향기가 풍기더니 조금 후에 두 여인이 가지런히 다가오는데 분명히 한 쌍의 밝은 구슬이요, 두송이 상서로운 연꽃이었다.
최치원은 마치 꿈인 듯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했다.
“이 최치원은 섬나라의 보잘것 없는 선비요, 속세의 말단 관리라, 어찌 선녀에게 외람되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시기를 바랐겠나이까.
무심코 장난삼아 써 봤던 글이온데 이렇게 꽃다운 발걸음을 하시었습니다.”
하니 두 여인은 방긋이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이 없으니
최치원이 다시 시를 지었다.
芳宵幸得暫相親 꽃다운 밤 잠시나마 친해질 기회 다
방소 행 득 잠 상 친 행히 얻었는데
何事無言對暮春 무슨 일로 말이 없이 늦은 봄만 대하
하사 무 언 대 모 춘 고 있나이까.
將謂得知秦室婦21)장차 진실부(秦室婦)라 생각했을 뿐
장위 득 지 진 실 부
不知元是息夫人22)원래 식부인(息夫人)인 줄 몰랐나이다.
부지 원 시 식 부 인
이때 붉은 치마의 여인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웃으면서 말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경멸함을 당했습니다. 식부인은 일찍이 두 남편을 섬겼지만 천첩은 아직 한 남편도 섬기지 않았나이다.”라고 한다.
최치원은 이 말을 듣고 “부인은 말씀을 안 하시면 몰라도 하시면 틀림없는 말씀만 하시는군요.”하니 두 여인이 모두 웃었다.
최치원이 곧 다시 묻기를
“낭자들께서는 어디에 사셨고 친족은 어느 집안입니까?”하니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저와 제 동생은 율수현(溧水縣) 초성향(楚城鄕) 장씨(張氏)집안의 두 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고을의 관리노릇도 하지 않으시고 유독 고을의 부호(富豪)되기만을 힘썼으므로 넉넉하기가 동산(銅山)처럼 부를 누렸고 호화롭기가 금곡(今谷)처럼 사치를 부렸나이다.
저의 나이 18세였고 동생의 나이 16세 되던 해에 부모님께서는 혼처를 의논하시고 저는 소금장수와 정혼하고 아우는 차(茶)장수에게 혼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여러 번 남편감을 바꿔 달라고 조르다가 울적한 마음이 맺혀 급기야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어진 사람 만나기를 바랄 뿐이오니 그대께서는 의심하거나 혐의를 두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최치원이 말했다.
“옥 같은 목소리 뚜렷한데 어찌 혐의를 두겠습니까”
하고 두 여인에게 다시 묻기를
“무덤에 의지한지 오래 되었고(134년) 초현관에서 그리 멀지 아니하니 많은 영웅들과 만나신 일이 있을 터인데 어떤 아름다운 사연이라도 있었는지요?”
붉은 소매의 여인이 말한다.
“여태까지 왕래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비루한 남자들 뿐이였습니다. 이제 다행히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대의 기품이 오산(鰲山)처럼 넉넉하여 함께 현묘한 이치를 말할 수 있겠나이다.”
최치원은 술을 갖다놓고 두 여인에게 물었다.
“세속 음식을 물외지인(物外之人)에게 드려도 괜찮을는지요?”하니 붉은 소매의 여인이 말했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위대한 분을 모셨고, 아름다운 음식 받았사오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나이까?”한다.
이에 서로 술을 권해 마시며 각각 시를 지었는데 모두가 맑고 빼어나 세상에 없는 절세(絶世)의 시구였다.
이때 달의 밝기가 대낮 같고 맑은 바람은 가을날 같이 시원하였다.
언니가 다시 제안하기를 곡조(曲調)를 바꾸자고 하였다.
“달로 제목을 삼고 풍(風)의 운(韻)을 써서 시를 지읍시다.” 라고 한다.
이에 최치원이 먼저 연구(聯句)를 지었다.
金波滿目泛長空 금빛 물결에 눈에 가득 장공에 넘치니
금파 만 목 범 장 공
千里愁心處處同 천리나 되는 근심 곳곳마다 같도다.
천리 수 심 처 처 동
팔랑(八娘)이 읊었다.
輪影動無迷舊路 달 그림자는 움직이면서도 옛길을 잃
륜영 동 무 미 구 로 지 않고
桂花開不待春風 계수나무꽃은 피면서도 봄바람 기다
계화 개 불 대 춘 풍 리지 않네.
구랑(九娘)이 읊었다.
圓輝漸皎三更外 둥근 달빛은 삼경을 넘어 점점 희어
원휘 점 교 삼 경 외 지는데
離思偏傷一望中 이별의 생각은 한결같이 바라보는 가
이사 편 상 일 망 중 운데 애닲도다.
최치원이 읊었다.
練色舒時分錦帳 뿌연 새벽빛이 펼쳐질 때 비단 장막
련색 서 시 분 금 장 걷히고
珪模映處透珠櫳 밝은 빛 비치는 곳 구슬창문 뚫어오네.
규모 영 처 투 주 농
팔랑(八娘)이 읊었다.
人間遠別腸堪斷 인간세상 멀리 이별함에 애간장 끊어
인간 원 별 장 감 단 질 듯
泉下孤眠恨莫窮 황천에서 외로운 잠 한도 끝도 없어라.
천하 고 면 한 막 궁
또 구랑(九娘)이 읊었다.
每羨嫦娥23)多計校상아의 많은 계교 못내 부러워하노니
매선 항 아 다 계 교
能抛香閣24)到仙宮 향각을 버리고 선궁에 이르렀네.
능포 향 각 도 선 궁
최치원이 더욱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때 연주하는 음악이 없으니 구색을 다 갖추지 못하는 것이 섭섭합니다.”하니
이에 붉은 소매의 여인이 하녀 취금을 돌아보고서 최치원에게 말하기를
“현악기가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가 성악만 못합니다. 이 아이가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하고 곧 충정(衷情)의 노래를 부르라고 말한다.
취금이 옷깃을 여미고 한 곡조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맑고 청아하여 세상에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이에 세 사람은 얼큰히 취했다. 최치원이 두 여인을 희롱하면서
“전에 듣자니 노충(盧充)25)은 사냥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좋은 짝을 얻었고 완조(阮肇)26)는 신선을 찾다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났다고 하더이다.
이제 아름다운 그대들의 꽃다운 마음을 허락한다면 좋은 연분을 맺고 싶습니다.”하니
두 여인 모두가 허락하며 말하였다.
“순(舜)임금도 임금이 될 때에 두 여자가 모시었고 주량(周良)이 장수가 되었을 때도 두 여자가 따랐지요. 옛날에도 그랬는데 이젠들 그렇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최치원이 뜻밖의 허락에 기뻐하였다. 곧 정갈한 베개 셋을 늘어놓고 새 이불 한 채를 펴놓았다.
세 사람이 한 이불 속에 누우니 그 곡진한 사연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최치원이 두 여인에게 장난스레 말하였다.
“규방(閨房)에 가서 황공(黃公)27)의 사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덤가에 와서 진씨(陳氏)28)의 여자를 껴안았으니 무슨 인연으로 이런 만남 이루었는지 모르겠도다.”하니 언니가 시를 지어 말했다.
聞語知君不是賢 그대의 말 들으니 어질지 못하군요
문어 지 군 불 시 현
應緣慣與女奴眠 인연 따라 여종과 함께 잔들 어떠리요.
응연 관 여 여 노 면
동생이 그 뒤를 이어 읊었다.
無端嫁得風狂漢 까닭 없이 바람둥이와 인연을 맺었으니
무단 가 득 풍 광 한
强被輕言辱地仙 억지로 지선(地仙)을 모욕하는 경박한
강피 경 언 욕 지 선 말 듣겠네.
최치원이 회답시를 지어 읊었는데
五百年來始遇賢 오백년 만에 처음으로 어진 이 만나
오백 년 래 시 우 현
且歡今夜得雙眠 오늘 밤 나란히 잠자리 즐겼네.
차환 금 야 득 쌍 면
芳心莫怪親狂客 꽃다운 순정 광객(狂客)과 친한 것
방심 막 괴 친 광 객 괴상해 마오
曾向春風占謫仙29)일찍이 봄바람에 적선(謫仙)이되었도다.
증향 춘 풍 점 적 선
잠시 후에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 모두 놀라며 최치원에게 말했다.
“즐거움이 다 하면 슬픔이 오는 것이요, 이별이 길고 만남이 짧은 것은 인간세상 귀천을 막론하고 다같이 애달파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삶과 죽음의 길이 다르고, 오르고(昇), 잠기는(沈) 길이 구별되어 언제나 환한 대낮을 꺼리어 꽃다운 시절 헛되이 보냄에랴!
다만 오늘 하룻밤을 모시게 된 즐거움으로 천년의 한을 풀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침의 행복 있음을 기뻐하였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나 다시 기약 없음을 탄식할 뿐입니다.”
하고 두 여인은 각기 시를 지어 주었다.
星斗初回更漏闌 북두(北斗)는 돌고 시간은 늦어 가는데
성두 초 회 갱 누 란
欲言離緖淚欄干 이별의 말하려니 눈물 먼저 흐르네.
욕언 이 서 누 난 간
從茲便結千年恨이로부터 천년의 기나긴 한탄만 맺히고
종자 편 결 천 년 한
無計重尋五夜歡 아득한 합환(合歡)의 밤 찾을 기약
무계 중 심 오 야 환 없어라.
또 이어서
斜月照窓紅臉冷 기운 달 창에 비춰 붉은 뺨 차가옵고
사월 조 창 홍 검 냉
曉風飄岫翠眉攢 새벽바람 옷깃에 스쳐 비취눈썹 감기네.
효풍 표 수 취 미 찬
辭君步步偏腸斷 그대와 이별하는 걸음걸음 애간장 끊
사군 보 보 편 장 단 어지고
雨散雲歸入夢難 비 흩어지고 구름 돌아가니 꿈에 들
우산 운 귀 입 몽 란 기 어려워라.
최치원이 시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두 여인이 최치원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다른 날 이곳을 지나게 되신다면 황폐한 무덤을 쓸고 돌보아 주옵소서.”(徜或他時 重經此處 修掃荒塚)하고 말이 끝나자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 최치원은 무덤을 다시 찾아 쓸쓸히 거닐면서 읊조렸다. 깊이 탄식하면서 긴 시를 지어 자신을 위로했다.
草暗塵昏雙女墳 풀 우거지고 먼지 덮혀 컴컴한 두 여
초암 진 혼 쌍 녀 분 인의 무덤
古來名迹竟誰聞 예부터 이름난 유적인 줄 그 뉘가 들
고래 명 적 경 수 문 었던가.
唯傷廣野千秋月 넓은 들판에 변함없이 떠 있는 달만
유상 광 야 천 추 월 애달프고
空鎖巫山兩片雲 부질없이 무산에 두 조각구름만이 떠
공쇄 무 산 양 편 운 있네.
自恨雄才爲遠吏 한 하노니 웅재로서 타국 땅에 관리
차한 웅 재 위 원 리 되어
偶來孤館尋幽邃 우연히 외로운 관사(館舍)에 왔다가 저
우래 고 관 심 유 수 승의 깊숙한 곳 찾았네.
戱將詞句向門題 장난삼아 석문에다 시구를 썼더니
회장 사 구 향 문 제
感得仙姿侵夜至 감동한 선녀 깊은 밤에 찾아왔네.
감득 선 자 침 야 지
紅錦袖紫羅裙 붉은 비단 소매의 여인, 붉은 비단
홍금 수 자 라 군 치마의 여인
坐來蘭麝逼人薰 앉아 있으니 난초향기 사향향기 사람
좌래 난 사 핍 인 훈 냄새 풍기네.
翠眉丹頰皆超俗 비취 눈썹 붉은 뺨 모두가 속세를 벗
취미 단 협 개 초 속 어났고
飮態詩情又出群 마시는 태도 시 읊는 정서 또한 출중
음태 시 정 우 출 군 하였네.
對殘花傾美酒 지고 남은 꽃 마주하여 좋은 술 기울
대잔 화 경 미 주 이고
雙雙妙舞呈纖手 한 쌍의 묘한 춤에 섬섬옥수 드러나네.
쌍쌍 묘 무 정 섬 수
狂心已亂不知羞 미친 듯 산란한 마음 부끄러움 마저
광심 기 란 부 지 수 잊고
芳意試看相許否 꽃다운 뜻 허락할지 시험해 보았다네.
방의 시 간 상 허 부
美人顔色久低迷 미인의 안색 보니 오래도록 어둡더니
미인 안 색 구 저 미
半含笑能半含啼 반은 웃는 자태 반은 우는 듯 하네.
반함 소 태 반 함 제
面熟自然心似火 낯은 익어 마음은 불같이 타오르고
면숙 자 연 심 사 화
臉紅寧假醉如泥 붉은 뺨은 진흙처럼 취한 듯 하네.
검홍 녕 가 취 여 니
歌艶詞打懽合 아름다운 노래 부르며 기쁨 함께 누
가염 사 타 환 합 리니
芳宵良會應前定 꽃다운 밤 좋은 만남 전생이 정함인가.
방소 양 회 응 전 정
纔聞謝女啓淸談 사녀의 맑은 담론 모두 다 듣고 나니
재문 사 녀 계 청 담
又見班姬推雅詠 반희가 고운 노래 읊는 것 보겠도다.
우견 반 의 금 아 영
情深意密始求親 정이 깊어지고 뜻이 친해지기 시작하니
정심 의 밀 시 구 친
正是艶陽桃李辰 바로 늦은 봄날 도리꽃 만발한 때이
정시 염 양 도 리 진 로다.
明月倍添衾枕恩 명월은 베게 맡 생각 곱으로 더하고
명월 배 첨 금 침 사
香風偏惹綺羅身 향기로운 바람 비단 같은 몸 덮어 주
향풍 편 야 기 라 신 었네.
綺羅身衾枕恩 비단 같은 몸 금침속의 간절한 생각
기라 신 금 침 사 이여
幽歡未已離愁至 그윽한 즐거움 다하지 않았는데 이별
유환 미 기 이 수 지 의 근심 왔네.
數聲餘歌斷孤魂 몇 가락 남은 노래는 외로운 혼을 끊
수성 여 가 단 고 혼 는 듯
一點殘燈照雙淚 가물거리는 등잔불은 두 줄기 눈물
일점 잔 등 조 쌍 누 비추네.
曉天鸞鶴各西東 새벽 하늘에 난새와 학은 동과 서로
효천 난 학 각 서 동 날아가고
獨坐思量疑夢中 홀로 앉아 생각하니 꿈인 듯도 아닌 듯.
독좌 사 량 의 몽 중
沈思疑夢又非夢 곰곰이 생각하니 꿈인가 하나 꿈은
심사 의 몽 우 비 몽 아니라
愁對朝雲歸碧空 시름 속에 아침을 대하니 푸른 하늘
수대 조 운 귀 벽 공 구름만이 가고 있네.
匹馬長嘶望行路 말은 길게 울며 가야 할 길 바라보나
필마 장 시 망 행 로
狂生猶再尋遺墓 이 사람은 오히려 버려진 무덤 다시
광생 유 재 심 유 묘 찾았네.
不逢羅襪步芳塵 버선발로 흙먼지 밟으며 걸어 나옴
불봉 라 말 보 방 진 못 만나고
但見花枝泣朝露 다만 아침 이슬에 흐느끼는 꽃가지만
단견 화 지 읍 조 로 보았네.
腸欲斷首頻回 애간장 끊어질 듯 머리 돌려 바라보니
장욕 단 수 빈 회
泉戶寂寥誰爲聞 적막한 황청문 뉘라서 열어주랴.
천호 적 요 수 위 개
頓轡望時無限淚 고삐 잡고 바라 볼 때 한없이 눈물만
돈비 망 시 무 한 누 흘러내리고
垂鞭吟處有餘哀 채찍 드리우고 시 읊던 곳에 슬픔만
수편 음 처 유 여 애 남았구나.
暮春風暮春日 봄바람 따스해진 늦은 봄날에
모춘 풍 모 춘 일
柳花撩亂迎風疾 버들 꽃만 어지러이 바람에 나부끼네.
유화 요 란 영 품 질
常將旅思怨韶光 늘 나그네의 시름으로 봄빛을 원망하
상장 여 사 원 소 광 는데
況是離情念芳質 하물며 이별의 정이 꽃다운 그대를
황시 이 정 렴 방 질 그리워함에랴.
人間事愁殺人 인간 세상의 일. 수심은 할 짓이 아
인간 사 수 살 인 닌 것
始聞達路又迷津 비로소 통하는 길을 들었는데 또 나
시문 달 로 우 미 진 루가 아득하네.
草沒銅臺千古恨 잡초 우거진 동대(銅臺)엔 천년의 한
초몰 동 대 천 고 한 서려있고
花開金谷一朝春 꽃 만발한 금곡(金谷)은 하루 아침의
화개 금 곡 일 조 춘 봄이로다.
阮肇劉晨是凡物 완조(阮肇)와 유신(劉晨)은 평범한 인
완조 유 신 시 범 물 물이요
秦皇漢帝非仙骨 진시황과 한무제도 신선이 아니라네.
진황 한 제 비 선 골
當時嘉會杳難追 그때의 아름다운 만남 아득하여 쫓아
당시 가 회 묘 난 추 가기 어렵고
後代遺名徒可悲 후세에 이름만 남김이 부질없이 슬프네.
후대 유 명 도 가 비
悠然來忽然倨 유유히 왔다가 홀연히 가버리니
유연 래 홀 연 거
是知風雨無常主 비바람은 언제나 덧없음을 알겠노라.
시지 풍 우 무 상 주
我來此地逢雙女 이 땅에 내가 와서 두 여인을 만난
아래 차 지 봉 쌍 녀 것은
遙似襄王雲雨夢 양왕(襄王)의 운우몽과 어이 다르랴.
요사 양 왕 운 우 몽
大丈夫大丈夫 대장부여 대장부여
대장 부 대 장 부
壯氣須除兒女恨 장부의 기백으로 꽃다운 여인의 한
장기 수 제 아 녀 한 풀어줬을 뿐
莫將心事戀妖狐 앞으로는 마음을 요괴 같은 여우에게
막장 심 사 연 요 호 연연하지 않겠노라.
그 후 최치원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시를 지어 읊었다.
浮世榮華夢中夢 뜬 세상 영화란 꿈속의 꿈이요
부세 영 화 몽 중 몽
白雲深處好安身 흰 구름 깊은 곳에 안신함이 좋겠도다.
백운 심 처 호 안 신
이어서 물러나 아주 속세를 떠나 산림과 강과 바다로 스님을 찾아갔다.
작은 집을 짓고 대(臺)를 쌓아 옛 글을 탐독하고 풍월을 읊조리며 그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남산의 청량사(淸凉寺). 합포현(合浦縣)의 월영대(月影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석남사(石南寺). 묵천석대(墨泉石臺)에 모란을 심어 놓은 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여 그 모형인 대덕(大德) 현준(賢俊)과 남악사(南岳師) 정현(定玄)과 더불어 경론(經論)을 탐구하며 담담한 경지에서 여생을 마쳤다.
※ 위의 쌍녀분기(雙女墳記)는 최치원선생이 쓴 전기소설(傳記小說)로 중국의 많은 사서(史書)와 육조사적편류(六朝事蹟編類)에도 쌍녀분기담(雙女墳記談)으로 기록되어 당(唐), 송(宋), 원(元)나라에 이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이전일문(殊異傳逸文) 13편이 있으며
그 가운데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은 최치원 선생의 친작이라 전해오고,
선생이 당나라에 있을 때 무덤 속 두 여인(혼령)과 하룻밤의 환락을 시(詩)로써 즐기는 기괴한 내용이 오늘날까지 최고의 시문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댓글 귀한 자료를 올리셨네요. 두고두고 공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