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허씨는 허염을 시조로 하고, 허동·허기 형제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이다.
<뿌리>
시조 허염(許琰)은 수로왕비인 보주태후(普州太后)허황옥 35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문종 때 태어나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에 오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 김해허씨(金海許氏)는 허씨 중에서 종통(宗統)으로, 가락이 신라에 의해 망함으로써 왕손들이 각 지방에 유리되었으나 종파는 김해에 머물러 있었다. 허염도 김해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김해허씨는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문과 급제자 16명, 호당 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시대 허유전(許有全)과 조선시대 허백기(許伯琦) 등을 들 수 있다. 근대 인물로는 한말에 일본 정부로부터 칙임관(勅任官) 2등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왕산(旺山)허위(許蔿)가 있다.
<입향경위>
조선 영조 때 허동(許棟)·허기(許琪) 형제가 진천군 광혜원면 금곡리 금천마을로 이주하면서 진천군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진천군 광혜원면 금곡리 금천마을은 조선 숙종 때 정승(政丞)을 지낸 허적(許積)이 출생한 곳이다. 이곳에 별장(別莊)을 마련하고 우물을 만들었는데, 돌 대신 쇠를 녹여서 만들었다 하여 쇠 ‘금(金)’자와 샘 ‘천(泉)’자를 써서 ‘금천’이라 하고 쇠물이라 불렀다고 한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김해허씨는 47가구 131명으로 나타났다. 광혜원면 금곡리 금천마을 50여 가구 중 김해허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금한리(琴閑里)의 ‘금(琴)’자와 이곡리(栭谷里)의 ‘곡(谷)’자를 따서 금곡리(琴谷里)라 하였다. 금한은 서원말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마을로, 마을 지형이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또는 뒷산 줄기가 거문고 줄처럼 내려와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곡은 서원말 정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쓰레골이라고도 한다. 골짜기가 양쪽으로 써레의 발처럼 갈라져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1914년 이전에 발간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씌레골로 나오고, 이곡(栭谷)이라는 한자 지명이 대응되어 있다.
조선 말기 진천군 초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곡리·수문리·삼봉리·하영리·금한리, 산정면 기지리·두상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곡리라 하고 초평면에 편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