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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陽洞 有感
김종호(1구대)
화양계곡.
소재지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일대이다. 물이 맑고, 모래가 곱고, 반석이 정갈하고, 정자도 품격이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그런데 자연은 이토록 빼어나지만, 여기에 역사와 문화가 얽히면 보는 사람의 심사가 복잡해진다. 국가지정 사적인 송시열 유적지로서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기 때문이다. 華陽洞의 원래의 이름은 黃楊洞이었다고 한다. 黃楊木 즉 회양목이 많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이 이것을 화양동으로 고쳤다. 華陽洞의 華는 중국 즉 명나라를 의미하고, 陽은 一陽來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一陽來復는 어두운 상태에서 밝은 상태로 회복한다는 뜻이므로, 결국 화양동의 ‘華陽’에는 淸이 망하고 中華大國인 明이 부활하기를 바라는 송시열의 염원이 담겨있는 셈이다.
내가 이 계곡에 처음 온 것은 1980년 4월의 식목일을 낀 연휴 때였다. 대구에서 아침 일찍 노선버스를 타고 청주에 와서 다시 시골 버스로 갈아탔다. 먼지를 폴폴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 화양동에 이르니 벌써 날이 해거름이었다. 민박집에서 자고, 아침에 보니 말로만 듣던 만동묘나 화양서원은 철폐되어 자취도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뭔가 역사의 시퍼런 칼날이 스쳐 지나간 듯한 서늘한 기운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 계곡에 다시 온 것은 2011년 11월. 아내와 함께 수원 아들네 집에 갔다 오는 길에 일부러 길을 돌아 거길 들렸다. 30년이나 세월이 지난 만큼 강산이 크게 변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길도 잘 닦여지고 번듯한 관광단지로 조성되어있었다. 그런데 그에 더해 만동묘와 화양서원까지 떡하니 복원되어있지 않은가. 역사를 조롱하듯이! 예전에 복원 소식을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걸 보니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러다 2017년 5월에 다시 아내와 같이 아들네 집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렸더니, 이번에는 문화해설사가 배치돼 있었다. 그는 화양서원에 모셔진 송시열(1607, 선조 40 ~ 1689, 숙종 15)이 민족자주정신을 고양한 인물이라고 찬양했다. 즉 효종·숙종을 보좌하여 반청북벌론을 주창했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북벌론은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 북벌론에는 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씻자는 명분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었다. 실현 가능성도 전무 했다. 왜냐하면 당시 청나라에는 성조 강희제의 치세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 역대 최고의 황제로 꼽는 사람이 바로 이 성조 강희제이다. 이로부터 세종 옹정제를 거쳐 고종 건륭제에 이르는 3대 150여 년간(조선의 효종 ~ 정조)은 청나라의 최전성기였다. 영토 면에서도 정복 활동을 통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의 중국이 티베트와 위구르와 내몽골 등을 자기네 영토로 편입시킨 ‘역사적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당시의 ‘북벌론’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시대 반청북벌론의 진정한 명분은 오히려 ‘尊明事大’에 있다. 춘추대의에 입각해 명나라야말로 中華로서 우리가 받들어야 할 나라이고, 이 명을 정복한 청나라는 오랑캐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명은 왜란 때 거의 멸망할 뻔한 조선을 구해주지 않았던가. 선조는 이 은혜, 즉 ‘再造之恩’을 잊지 못해 ‘再造藩邦’ ‘萬折必東’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숙종 때는 경기도 가평군 朝宗巖이라는 바위에다 이 두 휘호를 새겨놓았다. 청의 눈길을 피해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곳을 택한 것이다. ‘조종암’의 朝宗은 제후가 황제를 배알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조번방’은 망할 뻔한 변방의 속국을 다시 세워주었다는 것이고, ‘만절필동’이란 중국의 황하가 만 번을 꺾어 흐르더라도 결국은 동쪽의 황해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지조 또는 중국에 대한 충성을 뜻한다. 최근, 이 萬折必東이라는 글귀를 쓴 족자를 주중대사로 파견된 자가 시진핑에게, 또 명색이 국회의장이란 자가 미국 하원의장에게 각각 건네는 얼간이 같은 짓거리들을 한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화양계곡에는 송시열을 배향하는 화양서원과 함께 송시열의 간곡한 유지를 받들어 그의 제자들이 세운 萬東廟가 있다. 만동묘의 萬東은 ‘萬折必東’에서 두 글자를 딴 것으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모시는 사당이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황제이고, 의종은 명의 마지막 황제이다. 이 계곡의 바위에도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이 새겨져 있다. 조종암에 새겨놓은 것과 같다. 다른 바위에는 또 송시열의 글씨로 ‘蒼梧雲斷 武夷空山’이 각자 돼 있다. 창오산은 예부터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산인데 거기에 구름이 끊어졌고, 무이산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주자가 살던 곳인데 그 산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중화의 명이 망하고 오랑캐 청이 들어선 것을 탄식하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송시열이 주창한 반청북벌은 ‘小中華’인 조선이 오랑캐 청을 치고 ‘中華大國’인 명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지 민족자주정신의 표출은 아니었다. 그는 뼛속까지 존명사대주의자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창덕궁에는 大報壇을, 조종암에는 大統廟를, 화양계곡에는 萬東廟를 두고 이미 멸망하고 없는 명나라 황제에게 매년 청나라의 눈을 피해 몰래 제사를 지냈다. 또 송시열은 화양계곡의 바위에다 친히 휘호한 ‘大明天地 崇禎日月’을 새겨놓기도 했다. 천하는 명의 것이며, 세상은 아직도 이미 죽고 없는 숭정제 즉 의종이 다스리고 있다는 뜻으로 청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래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썼지만, 조야를 막론하고 내적으로는 청의 눈을 피해 광범위하게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인 ‘崇禎’을 썼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화양계곡에는 송시열의 다음과 같은 오언절구를 새긴 석비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명나라의 멸망을 애통해하는 내용이다.
此日知何日(이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孤衷上帝臨(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는 도다)
侵晨痛哭後(새벽이 되도록 통곡한 후에) 抱膝更長吟(무릎 꿇고 엎드려 다시 탄식하노라)
우리는 학교의 국사 시간에 서원의 폐단과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 관한 공부를 한 바 있다. 서원의 폐단이란 학벌·문벌과 연결된 붕당의 소굴화, 군역면제 특권으로 야기된 불법적 군역 기피의 온상화, 지방 양반의 이익집단화와 대민 수탈 등이다. 대원군은 1865년(고종 2년) 전국에 산재한 9백여 개의 書院·廟宇·祠宇 중 제일 먼저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철폐했다. 본보기였다. 그리하여 사액서원 중 47개소만 남기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차례차례 부숴버렸다.
조선 후기 집권세력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과 명나라의 두 황제를 모신 만동묘가 같이 있다 보니 ‘화양동’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화양묵패’란 것이 있다. 화양서원에서 발행하는 일종의 ‘협찬금’ 요청서이다. 요즘 힘 있는 시민단체가 대기업에 보내는 협조 공문 같은 것이다. 묵패 발행의 명목은 제수전 마련 등이었다. 이것을 받은 수령이나 개인은 빚을 내서라도 갖다 바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령은 나쁜 여론이 조성되어 승진에 불이익을 당하고, 개인은 서원에 붙들려 가서 감금당하고 私刑을 받았다. 이 묵패는 우리 시대 조폭들의 용어로 말하면 ‘전국구’여서 나라 각지에 뿌려졌다.
김삿갓도 화양동을 풍자하는 시를 남겼다. 일찍이 남인의 영수 허목이 정적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만나러 화양동에 왔다가 송시열이 출타하고 없어서 못 만나자 남긴 글이 있는데, 김삿갓은 이를 차용한 것이다. 두 글 모두 뜻보다는 우리 말의 취음에 묘미가 있다.
*허목의 글
步之華陽洞(걸어 화양동에 왔는데) 不謁宋先生(송 선생을 못 만났네)
*김삿갓의 시
書堂來早至(서당에 아침 일찍 이르렀는데) 房中皆尊物(방안의 물건들은 다 귀한 것이나)
生徒諸未十(학동은 채 열 명이 되지 않고) 先生來不謁(훈장 선생은 나와 보지도 않더라)
만동묘의 권위는 당시 임금도 능가한다고 풍자한 노래가 있을 정도였다.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것이다. 흥선대원군도 파락호 시절에 바로 그 만동묘지기에게 호되게 경을 친 일이 있었다. 대원군이 어느 때 만동묘에 들렸다. 만동묘는 복원된 지금도 그렇듯이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올라가는 계단이 매우 가파르고 폭도 좁아서 오르기가 불편하다. 그곳에 모셔진 명나라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는 설이 있다. 대원군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조심스럽게 올라가다가 만동묘 묘지기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곳은 임금님도 부축 없이 오르는 곳인데 무엄하다는 묘지기의 호통도 들어야 했다. 대원군이 제일 먼저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철폐한 것은 이때 받은 수모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곳은 이처럼 위세가 등등한 곳이라, “좆 잡고 화양동 간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곳을 지나갈 때는 허리를 굽혀 두 손을 공손하게 아래로 내려 모아 잡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그 꼴을 빗댄 것이었다.
부근의 書院村도 행패가 못지않았다. 화양서원과 만동묘에는 언제나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다. 제사 때는 전국 각지에서 수천 명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주변에 설치를 허가한 것이 福酒戶였다. 이들에게는 면역의 특권이 주어졌다. 복주호가 늘어나 나중에는 福酒村을 형성하게 되었다. 자연히 군역 면제자가 늘어났다. 더 나아가 서원에서 아예 대가를 받고 멀쩡한 양인들을 받아들여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군역 면제자는 더 늘어났다. 군역 면제자의 증가는 양인들의 부담을 늘리고 국가의 재정을 좀먹기 마련이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양인들에게는 온갖 패악도 저질렀다.
이렇다 보니 조정에서도 자주 서원철폐가 거론되었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마침내 대원군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철폐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만동묘는 불과 9년 후인 1874년(고종 11년)에 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시 복원되었다. 이는 당시 민비 정권이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린 조처였으나, 이항로·최익현 등 慕華思想이 골수에 각인돼있는 유림의 강력한 청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생들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코미디 같은 일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알게 된 총독부는 ‘어이없어’하며 1942년 드디어 만동묘를 완전 철거 해버렸다. 거기서 나온 폐자재들은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데 사용됐다고 전한다.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이었을까.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괴이쩍기만 한 이 모든 일을 포함해 조선 5백 년을 이해하는 마스터키는 이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이다.
일찍이 헤겔은 “공자는 위대한 상식인”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의 내용은 사람 상호 간의 관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윤리와, 임금은 나라를 이렇게 저렇게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 이야기로 시종한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윤리와 정치는 상식이다. 철학은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어야 한다. 중국에서 유교가 철학화 한 것은 宋代에 불교의 영향을 받고 정립한 性理學에 의해서이다. 유교는 성리학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세상의 근본 이치를 ‘哲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을 新儒學, 또는 朱熹가 집대성했다고 해서 朱子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여말선초에 원·명으로부터 전래·보급됐는데, 이른바 신진사대부들의 적극적인 수용·탐구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정치세력 이전에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에 열광적이었다. 그들이 성리학을 공부함으로써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사상 처음으로 사물에 대해 ‘철학’을 하게 됐다. 마침내 16세기에는 이황·이이 등에 의해 일정한 발전과 한국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취’는 당시의 우리 지식사회에서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당연히 퇴계·율곡은 높이 떠받들려 졌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들은 지금도 무비판적으로 실제 이상으로 과하게 추켜세워지고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성리학은 그냥 二元論일 뿐이다. 학자에 따라 ‘理’와 ‘氣’의 역할이 조금씩 다르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 그 다름을 가지고 서로 옥신각신했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원론은 서양의 경우 이미 BC 5·4세기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나타난 바 있다. 주자로부터 거의 천 육백 년 전, 이황으로부터는 이천 년 전의 일이다. 이 이원론은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일원론으로 발전해 갔다. 즉 존재론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이기이원론은 끝내 이원론에 머무르고 말았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이다. 주자도 퇴계·율곡도 모두 세계의 철학사·사상사에서 그 위상을 찾아야 한다. 그냥 매너리즘에 빠져 맹목적으로 떠받들 일은 아니다.
성리학은 단순히 이기이원론이라는 철학적 사변에 그치지 않고 정치·윤리·사회·문화 등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우주·자연의 이치가 인간·사회에 그대로 발현된다는 동양 사상의 특징 때문이다. 성리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회현상을 몇 가지 들어보자.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성리학이 유일했던 까닭으로,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먼저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중화사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 고래로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성리학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성리학이 성립된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영토를 확장하지 못한 유일한 통일왕조였다. 태조 조광윤 이래 文治主義에 따른 국방력의 약화로 탕구트(서하)·거란(요)·여진(금) 등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면서 강남으로 쫓겨 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는 해마다 막대한 양의 당시 기축화폐였던 은과 비단을 갖다 바치는 이른바 ‘歲幣外交’로 평화를 유지했다. 우리나라도 지금 강력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돈과 ‘대화’로 평화를 구걸하려 한다. 어쨌든 송나라는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중국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은 모두 오랑캐이므로 천명을 받은 중국의 천자가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중화사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종의 ‘정신 승리’였던 셈이다.
문제는 조선이 성리학을 도입하면서 이 중화사상까지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우리도 오랑캐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화를 열심히 따라 배우고 있으므로 다른 오랑캐보다는 훌륭하다는 ‘소중화’사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에 더해 선조 때 ‘再造之恩’까지 입었으니 모화사상·사대주의는 골수에 깊이 박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 외에는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다. 그에 반해 일본이 상대적으로 중국에 대해서 ‘자주적’인 것은 그들이 성리학을 몰랐고, 임란 후 조선을 통해 유입되기는 했으나 이미 시대성을 상실한 때였으므로 별 사회적 영향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과학기술을 중국보다 더 등한시하고 천시했다. 그들은 오직 이기론에만 몰두했다. 그것도 퇴계·율곡 이후로는 더 이상 발전 없이 반추만 할 뿐이었다. 이기론은 형이상학이므로 선험적인 연역법으로 추구할 수 있다. 사랑방에 누워 머리만 굴려도 가능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경험적인 귀납법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 관찰·실험이 필수적이다. 그러자면 두 발을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은 사대부들이 가장 기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포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페어플레이 정신도 배양될 리 없었던 게 아닌가. 그들은 인상적인 자연현상을 목격할 경우 시나 지을 줄 알았지, 그에 대한 과학적 관찰이나 기록 같은 것은 할 줄 몰랐다. 물질적 풍요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얻어지는 것인데, 당대의 지식인들이 그것을 도외시했으니 조선은 가난뱅이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선비정신’을 이어받자는 담론이 부쩍 유행하고 있다. 선비란 학식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사대부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의 지배층으로서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의관을 정제하고, 행동거지가 바르며, 단아한 풍모를 지닌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매우 추했다. 그들은 사회의 ‘기생충’이었다.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모든 지배층은 하층민을 수탈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국방만은 그들이 담당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생산력 증대를 도모하고 부를 축적하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부가 증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인 ‘선비’는 국방까지 하층민에게 떠넘겼다. 그들의 제일 큰 특권이 군역 즉 병역의 면제였다. 그러면서 무를 천시까지 했다. 그 악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사유를 조작해 병역을 기피 하면서도 오히려 군에 간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하고, 권력을 쥔 자는 군을 비하·모욕하고 정치화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의 선비들은 재생산의 의지를 잃을 정도로 하층민을 수탈하면서, 정작 부의 사회적 증가를 가져올 상공업은 천시했다. 또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농법연구 같은 생산적인 일에는 자신의 지적능력을 투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세계사적으로 보면 별 의미 없는 이기론과 형식적인 의례, 이기적인 풍수지리, 음풍농월의 천편일률적인 시 나부랭이 따위였다.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것이 기껏 훼철된 서원의 복원이고, ‘선비정신’의 계승인가. 실제로 웬만한 가문에서는 이미 서원을 다 복원했고, 방학 때면 우리 후세들에게 이른바 ‘충효교육’ 따위나 실시하고들 있다. 또 전통문화의 계승이랍시고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2백 30여 개의 향교에서 봄이면 일제히 공자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 모든 일에는 국고의 보조도 있다. 왜 이런 일에 세금이 쓰여야 하는가. 이 시대 우리에게 공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자의 나라인 중국에서도 이미 사라진 공자 제사를 어째서 우리가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지내는가. 이미 망하고 없는 명나라의 황제에게 제사 지냈던 조선 후기의 우스꽝스러운 짓과 무엇이 다른가. 더 나아가 유교·유학이라는 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균관과 향교에는 유림단체가 구성돼 있다. 그 단체의 존재 자체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정작 ‘유림’들은 대부분 이기론은 고사하고 초급 한문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참 웃기는 일이다, 그 단체에 직간접적인 국고 보조도 있다.
우리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을 한탄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왜 나라를 빼앗겼느냐에 대한 성찰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해방되자마자 바로 6·25전쟁이 터지고 남북이 분단됐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성찰이 없다 보니 그저 일본을 욕하고 배척하는 것만이 능사였다. 사실은 조선을 망친 주범은 성리학이었다. 비유하자면 조선이라는 컴퓨터를 구동하는 CPU가 성리학이었던 셈인데, 그것이 요즘 말로 ‘구리고’ ‘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전통문화’ ‘선비정신’ 어쩌고 하면서 그것을 떠받들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을 입에 달고 있는 북한이나 종북좌파세력이 우리보다 더 ‘조선스럽고’, 더 ‘성리학스럽다’. 특정 이념에 교조적으로 매몰돼 있다든지, 그로 말미암아 사고에 균형감각이 결여돼 시대착오적인 명분에 집착한다든지, 민생보다는 이념놀이에 더 열성적이라는 점 등이 바로 그러하다. 심지어 그들의 ‘친중반미’마저 조선의 ‘숭명반청’과 닮았다. 명산의 아름다운 바위에 되잖은 글자를 새겨 자연을 훼손하는 짓도 그렇다. 그들의 경우 인민들은 물론이고, 그 체제를 설계한 지도자들조차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도 사실은 북한 땅의 인민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운 좋게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어 나라를 제대로 설계했다. 그 덕택에 우리는 여러 문명국가가 걸어가고 있는 세계사의 바른 물줄기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성리학이라는 CPU의 한계를 젊어서부터 통감한 사람이었다.
최근 화양동에 가서, 아무런 고민의 흔적 없이 복원된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보면서 떠올린 이런저런 소회는 아마 그대로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마침 공군학사장교57기 임관50주년 기념문집에 게재할 원고가 필요해 단편적으로나마 그것을 적어볼 기회가 되었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