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양 교수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빈혈, 사회변화-약물발전 '완치시대'
악성질환도 '조혈모 이식' 개발 정복단계
백혈병 치료의 꽃 항암요법제 속속등장
전반적인 경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혈액질환의 발생 양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다음에 적혈구, 백혈구와 혈소판 및 혈액응고인자의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혈액질환에 관하여 지난 30년간 발생 양상과 치료법이 많이 변화된 질환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대표적인 혈액질환인 빈혈은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진됨에 따라 철결핍성 빈혈이 크게 줄었다. 철결핍성 빈혈은 가장 흔한 빈혈의 원인으로 거의 모든 환자에서 만성적인 출혈에 의해 발생한다. 출혈 원인은 여성에서는 월경과다가 흔하고, 그 외에는 남성, 여성에서 모두 장출혈이 원인이다.
위내시경의 보급은 위궤양, 위암에 의한 출혈과 철결핍성 빈혈을 감소시켰고, 특화된 항문외과의 활동은 치질, 치핵 등 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문부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게 하여 철결핍성 빈혈의 감소에 기여하였다. 임신 빈혈도 임신 중 철제제 사용의 증가에 따라 줄어들어, 전형적인 후진국형 빈혈인 철결핍성 빈혈의 감소에 한 몫을 하였다.
한편, 위 수술의 증가는 거대적아구성 빈혈 환자를 증가시켰다. 범국민적인 위내시경의 보급으로 조기 위암에 대한 위절제 수술이 증가하였고, 위 절제 환자는 필연적으로 비타민 B12 흡수에 필수적인 위에서 분비되는 내인자의 결핍에 따른 거대적아구성 빈혈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위 절제 환자에서의 거대적아구성 빈혈은 진단이 쉽고 비타민 B12의 정기적인 주사로 완치되기 때문에 큰 국민적 건강문제로 대두되지는 않았다.
내인자 분비부전으로 비타민 B12 결핍증이 발생하는 또 다른 거대적아구성 빈혈인 악성 빈혈은 이제는 진단과 치료가 쉽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악성 빈혈이라고 부르는 병명이 무색하게 되었다. 악성 빈혈은 한달이나 두 달에 한번씩만 비타민 B12 주사를 맞으면 평생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국민건강 관리체제의 발전 그리고 평균 수명의 증가에 따라 소모성, 염증성 만성질환 환자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만성질환 빈혈 환자도 증가하였다. 만성질환 빈혈은 혼동하기 쉬운 철결핍성 빈혈과 달리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편, 만성 신부전 환자에 대한 범국가적인 지원에 따라 혈액투석을 받는 환자들 수가 크게 증가되었다. 만성 신부전 환자는 신성빈혈로 요독증 못지않게 빈혈에 따른 고통을 겪어 왔으나, 에리트로포이에틴 주사의 보급으로 진료면에서 질적인 향상을 가져 왔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우리나라에서 서양보다 5배 정도나 많이 발생하는 난치성 혈액질환이었으나 최근 그 발생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통계는 부족하나 재생불량성 빈혈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양약, 한약의 무분별한 남용, 휘발류, 벤진 등 유기용매와 농약, 살충제에의 노출이 국민 건강의식의 향상과 의약분업제도의 정착, 그리고 영농기술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크게 줄어 든 때문으로 생각된다. 치료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어 면역억제요법과 조혈모세포이식술의 발전에 따라 중증인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에서도 80 90%가 완치될 수 있게 되었다.
백혈구에 발생하는 질환 중 백혈병은 국민 수명의 증가에 따라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증가하였으나, 출생률의 감소에 따라 소아에 흔히 발생하는 급성림프성백혈병은 많이 감소하였다. 성인에서 가장 흔한 급성골수성백혈병은 30년 전에는 진단만 하고 완치는 불가능한 가장 무서운 악성 혈액질환이었다. 그러나 항암화학요법과 조혈모세포이식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는 전체 환자의 약 1/3은 완치될 수 있을 정도로 치료 성적이 향상되었다.
특히 급성전골수구성백혈병에 특효가 있는 '올트랜스레티노익애시드(아트라)'의 보급은 과거 출혈 합병증 때문에 초기 치료가 가장 어려웠던 이 질환의 치료성적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항암화학요법 만으로 80%의 환자을 완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만성백혈병인 만성골수성백혈병도 30년 전에는 완치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조혈모세포이식과 최근 개발된 획기적인 항암제인 이마티닙(글리벡)의 보급으로 수명 연장은 물론 완치율이 70%에 이르게 되었다.
역시 과거에는 완치가 불가능하였던 다발성골수종도 최근에는 자가조혈모세포이식과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의 도입으로 수명 연장과 함께 일부 환자에서는 완치가 가능한 혈액종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악성 림프종 환자에서도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이용하여 항암치료 후 재발된 환자들에서도 장기 생존율이 40% 이상 증가되는 치료성적의 향상을 가져 왔다. 최근에는 다발성골수종에서처럼 악성 림프종에서도 초기 치료로 자가조혈모세포세이식을 시행하여 치료성적이 향상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혈소판, 혈액응고인자의 병변에 기인하는 혈전지혈계 질환도 그간 많은 변화를 보였다. 출혈성 질환 중에는 혈소판수의 감소에 기인하는 자반증을 일으키는 혈소판감소증 환자가 증가되었다. 이는 실제 환자수가 증가되었다기보다는 건강검진의 보급에 따라 무증상 혈소판감소증 환자가 많이 발견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간경변증 등 만성 간질환에 기인하는 혈소판감소증이나 출혈 환자는 간염 백신의 보급에 따라 간질환 환자수와 함께 크게 줄어들었다.
혈우병 환자 수는 예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나 혈우병이 과거 정부에서 지원했던 4대 만성질환에 포함되었고, 한국혈우재단이 환자들의 등록과 진료 지원사업을 활발히 시행하는데 힘입어 체계적인 치료와 재활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검사기법의 보급에 따라 전에는 발생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폰 빌리브란트병 환자들도 많이 진단되게 되었다.
혈전지혈계 질환 중에서 지난 30년간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질환은 혈전증이다. 심근경색증 등 심장동맥 질환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생활 수준의 향상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부정맥혈전증 환자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심부정맥혈전증 환자가 있는지 질문하는 의사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심부정맥혈전증은 최근 10여년간 환자수가 급격히 늘고 있으며, 발생 원인에 관한 국내 연구도 활발하였다. 서양에서는 가장 흔한 5번 응고인자나 2번 응고인자의 유전성 돌연변이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심부정맥혈전증이 서양에서 보다는 발생이 적은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혈액질환의 치료면에서 지난 30년간 발전해 온 것들을 살펴보면, 조혈모세포이식이 가장 획기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제자매의 골수를 기증받는 동종골수이식에서 시작하여 자가조혈모세포이식, 비혈연골수이식, 제대혈이식, 저용량전처치 조혈모세포이식 등으로 다양한 조혈모세포이식의 기법이 개발되었다.
조혈모세포이식은 백혈병과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 등 과거에는 완치가 불가능하였던 많은 악성 혈액질환들을 완치시킬 수 있는 강력한 치료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조혈모세포이식 연구의 개척자인 미국의 토마스 박사는 임상의로는 처음으로 노벨 의학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으며, 이는 지난 30년간 혈액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가장 괄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간 확실한 기반을 닦은 한국조혈모세포은행과 최근 그 수가 급격히 늘고 있는 제대혈은행은 조혈모세포이식의 향후 발전에 새로운 원동력이 될 전망이다.
조혈모세포이식과 함께 많은 종류의 항백혈병제가 개발되었다. 안트라사이클린, 시타라빈, 빈크리스틴, 사이클로포스파미드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전술한 아트라, 글리벡과 림프성 혈액종양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플루다라빈, 그리고 단클론 항체 치료제인 맙테라, 프로테아좀 억제제인 벨케이드 등이 개발되었다. 또한 글리벡을 모델로 한 새로운 신호전달 차단 표적 항백혈병제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항암화학요법제 개발은 백혈병에서 시작하였으며 지금 백혈병에서 그 꽃을 피우고 있다.
혈액질환 환자들의 보조 치료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혈구성분 분획기의 개발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성분수혈이 가능하게 되었고, 백혈구, 적혈구의 생성을 촉진하는 G-CSF, GM-CSF와 에리트로포이에틴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혈소판 생성을 촉진하는 트롬보포이에틴의 개발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유전성 혈액질환인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돕는 한국혈우재단의 설립은 우리나라 혈우병 환자의 진료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혈액질환 환자들의 투병과 재활을 돕는 기구들은 이 밖에도 백혈병 등 혈액암 환자들을 돕는 한국혈액암협회와 백혈병환우회 그리고 혈우병 환우들의 모임인 코헴회가 발족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의 혈액질환은 발생 양상이 변화한 면도 크지만, 효과적인 최신 치료법의 개발과 도입 그리고 환자들의 투병과 재활을 돕는 비정부 기구들의 정착에 따라 진료도 질적인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