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해외에 있는 한 주의 종과 카톡으로 대화를 하는 중에 '징그럽도록 계속되는 목사님의 말씀이 이제 날마다 새롭다'는 말을 듣고 내심 크게 웃었다. too much talk는 말이 엄청 많다는 뜻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too much talk를 하니 이제 마음 판에 깔린 거다. 얼마 전에 한 목사가 방문을 했는데 20년 전의 말씀을 그대로 들려줬더니 아마 제 too much talk에 질렸는지 ‘목사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으시네요’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목회를 하다 쉬고 있는 주의 종에게 나의 too much talk를 간혹 보내는데 아마 아직 그 뜻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 자신의 귀에 닿는 유용한 선생을 찾는다. 그래서 현란한 too much talk의 채널을 선호한다. 방송에서 개그수준의 목사의 현란한 too much talk를 보라. 인터넷이 발달해서 다양한 설교나 강의를 제자리에서 언텍트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거기에다 코로나로 인해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도무지 알맹이가 없다. 앙꼬 없는 찐빵이다. 무엇을 위한 too much talk인지 누구를 위한 투 머치 토크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을 어디로 끌고 가서 무엇을 얻어 어떤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로드맵이 없는 too much talk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고백하고 시인하고 전파하도록 입이 만들어졌다. 밥만 삼키고는 못 산다. 입으로 주를 시인하고 노래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별(star) 다방이 잘 되고 콩(bean) 다방도 잘 된다. 거기서 사람들이 아무 쓸데없는 too much talk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마스크를 씌워 망을 쓴 소처럼 묵묵히 앉아 마시는 것뿐이다. 이 상황에 혼자 too much talk를 하면 남의 눈총도 무섭고 제도적인 제재도 받는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입을 봉해 더 이상 잡다한 too much talk를 못하게 하신 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기도로 주님께 too much talk를 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세상 이야기의 too much talk에 빨려들면 자신의 실존을 상실하고 만다. 하와가 마귀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고 talk show를 하다가 그만 입이 바뀌고 말았다. 사람이 망하려면 귀부터 망하는데 마귀의 우아하고 포근한 too much talk에 혼을 빼앗겼다. 아담을 망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의 불행이 시작 되었다. 특별히 하와의 후예들은 더 조심을 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too much talk를 좋아하는 여인들이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이들도 있다고 증언한다(딤전5:15) 코로나가 왜 왔겠는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행불행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왜 입에 망을 씌우고 입을 다물라고 할까? 생명이 없는 허황되고 말초적인 희열을 느끼는 too much talk를 멈추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제출하고 하나님의 사정을 듣는 too much talk를 원하신다(사1:18) 따라서 우리는 다윗처럼 주의 말씀이 스며든 채로 성령 안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too much talk를 하면서 영광의 주와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할 때다. 아직도 하나님의 too much talk를 피하고 세상을 향한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가? 전화를 여기저기에 걸고 있는가? 가상의 현실인 텔레비전의 투 머치 토크에 매몰 되어 허우적거리는가? 아니면 트롯에 푹 빠져 있는가? 그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못한 자신의 헛된 욕망의 발언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세상에서 빼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 기도와 간구와 감사로 too much talk할 수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