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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모든 주일이 의미가 있습니다마는 특별히 가을을 여는 9월의 첫 주일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폭염과 잿빛으로 억눌린 여름 한철에는 하늘을 보지 않잖아요? 무더위에 지쳐 땀으로 뒤덤벅 된 찌든 마음으로는 인생을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산들 바람에 더위가 물러간 가을이 되면 보지 않던 하늘을 보게 됩니다. 청아한 코스모스와 빛바랜 낙엽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 관심 없던 인생에 대해 생각들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고 그 가을을 여는 9월의 첫 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저는 가을이면 라이나 마리아 릴케가 지은 “가을 날”이란 시를 읊조리곤 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이 시를 분석하면서 이런 평가를 내립니다. "내적으로 불안전하고 고독한 인간의 존재와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염원을 잘 드러내었다." 전문가들의 분석이니까 맞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 시를 좋아하는 것은 고독한 존재인 인간을 잘 드러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해 정열적으로 일한 마지막 단계를 놓지 않고 있는 어떤 집요함, 일을 일되게 하고 수고의 열매를 거두어야겠다는 간절함 그런 것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9월 첫 주가 의미 있다는 이야기도 이런 맥락입니다. 일 년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모두 세 차례의 새 출발이 있어요. 1월 첫 주는 새해를 맞는 첫 주이기에 당연히 새 출발이 자연스런 화두이지요? 동면을 끝내고 봄과 함께 시작하는 3월은 두 번째 새 출발이지요? 그리고 폭염에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일 년의 마무리를 향해 허리끈을 조이는 9월은 세 번째 새 출발이지요? 그러기에 9월 첫 주는 의미가 남다른 겁니다. 그리 보면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중에서 어떤 부분은 9월 첫 주에 읽기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봐요. 가령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맘에 안 들어요. 아니거든요? 지금은 마음을 다잡고 집을 지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9월을 어떻게 시작하십니까? 벌써 올 한해 파장하는 기분으로 손을 놓고 계십니까? ‘인자 올해도 다 갔응께 일찌감치 포기하고 손 털어야제.’ 벌써 동면할 준비하시나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군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사막의 황량함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혼자 지내는 것도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훈련이라도 나가는 때면 몇 주씩 홀로 긴 밤을 지새야 했습니다. 참다못한 그녀는 마침내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어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그저 싫을 뿐이에요. 이곳은 살기에 너무 끔찍한 지역이랍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아주 짧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어머니가 보낸 글의 의미를 간파한 새댁은 별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또한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 전통을 연구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무료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의 복무기간이 끝날 즈음에 그녀는 사막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좋은 책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회
우리가 기도를 통해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린다는 것은곧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다는 의미이다.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시다. 인간이 기도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무릎 꿇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결국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올해의 남은 4개월을 어떻게 보느냐 진흙을 보느냐 별을 보느냐? 진흙은 부정을 상징합니다. 별은 긍정을 상징합니다. 진흙은 절망을 상징합니다. 별은 희망을 상징합니다. 동일한 것을 놓고 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낳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오늘 아침 읽은 본문은 이런 문제에 대한 시금석과도 같은 본문이지요. 여러분이 한번 그 때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분들은 그 옛날 보셨던 십계나 엑소더스 같은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민족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집트의 큰 왕궁과 피라미드 스핑크스 같은 거대한 석조물을 건설하는 일에 동원되어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채찍을 맞으며 일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닌 기계였습니다. 동물이었습니다.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일하고 자고, 그들에게 무슨 비전이 보일 리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우셔서 이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장자가 죽어나가는 비애를 맛본 뒤에야 마지못해 이들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허락합니다. 애굽을 떠난다! 그것은 곧 노예 생활을 끝낸다는 말입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나라를 가지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출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족의 새 출발, 가정의 새 출발, 개인의 새 출발! 얼마나 기가 막힌 소식입니까? 가슴 부푼 희망을 안고 새 세계를 향해 출발을 합니다. 그들의 얼굴은 환한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날아갈듯 가볍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의 국경을 넘어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고 있을 즈음 바로가 마음을 바꾼 겁니다. ‘저들을 그냥 저리 보내주면 앞으로 누가 우리를 수발한단 말인가? 이 거대한 건축이며 국가 건설을 누가 한단 말인가? 안되지, 저렇게 그냥 보내서는 안 되지!’ 파라오가 이집트의 병거와 마병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직접 추격해오는 게 아닙니까?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커다란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뒤에는 이집트의 막강한 마병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옵니다. 앞에는 시퍼런 홍해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 있습니다. 이 상황에 가장 잘 맞는 사자성어가 진퇴양난이지요. 나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앞을 보니 홍해입니다. 거기로 들어간다고요? 그것은 곧 죽음뿐이지요. 뒤를 보니 햇살에 반사된 성난 바로 군대의 또 하나의 은빛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퇴양난! 절대절망! 그 절망의 광경이 보이십니까? 그 공포의 잿빛 하늘이 그려지십니까?
순식간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십니다. 방금 전까지 입가에 붙어있던 노래가 싹 멈춰버립니다. 희망을 보던 두 눈은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소식으로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패닉, 공황 상태!! 너무나 당연한 그림 아닌가요? 갑자기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니 우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와서 한꺼번에 죽이려 한 거요? 애굽에는 사람 묻을 데가 없어서 여기에다 묻으려고 예까지 온 겁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러기에 우리가 뭐라 했소? 당신이 애굽을 떠나자 할 때 그냥 두소마, 우리는 여기서 살랍니다. 가다가 괜히 개죽음 당하니 보다는 차라리 애굽 사람 섬기며 그리 사는 게 낫제... 그란디 그런 우리를 꼬셔서 결국 여기서 죽여야?”
이들이 지금 너무 믿음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없기에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여유는 무슨 여유란 말입니까?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매우 극단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감동은 큰데 실감은 나지 않습니다. 이해는 가는데 내 일처럼 공감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줄여 놓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천국이 아니잖아요? 크고 작을 뿐이지 문제 속에 사로잡혀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매일처럼 천국을 사느냐 지옥을 사느냐 물으면 즉각 대답하기 곤란한 분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 입에서 천국이란 말이 즉각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는 게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잖아요? 힘들어 죽겠어, 피곤해 죽겠어 바빠 죽겠어 사는 게 고해야.... 건강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분들 참 많아요, 멀쩡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노라면 차라리 골골 팔십이 안심되기도 합니다. 힘들게 힘들게 10달 배앓이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얼마나 기쁘던가요? 그런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왜 그리도 부모 속을 썩이는지 몰라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지요. 사랑하기에 결혼했잖아요? 그런데 인생의 반려자로 맞은 아내와 남편이 얼마나 서로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 자체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장 내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만 해도 골치가 아픕니다. 때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 사는지, 삶의 의미를 못 찾아서 마음이 허전합니다. 사회 정치 문제 남북문제 세계 평화... 사실 이런 것에 비하면 우리 개인의 문제는 비할 수 없이 작지요. 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건 내 문제가 더 크게 와 닿지요. 더 심각하지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좀 더 크고 절박하고 직접적인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급박할 뿐입니다. 엄청난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아우성친다? 꼼짝없이 잡혀 죽을 상황에서 모세를 원망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큰 소란을 일으켰다? 이해가 갑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무료함에 젖어 투정부리는 여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진흙을 보느냐 별을 보느냐 하는 이야기도 이들에게는 사치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홍해도 애굽 군대도 전부 진흙이기 때문입니다. 별이란 게 아예 보이지 않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 있는 게 이스라엘이고 우리 인간들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이 너무 뻔 하지 않은가요? 원망 불평 울분 절망! 이런 단어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을까요?
얼마 전 ‘긍정의 힘’이란 책이 미국에서 200만 부 이상이 팔리면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는 이 책에서 긍정적인 생각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음에 품지 않는 복은 절대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패배와 실패의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은 실패의 인생을 살고 승리, 풍요로움, 성공을 꿈꾸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런 인생을 살 수 있다! 인생은 믿는 대로 된다. 비전을 가져라! 이것이 조엘 오스틴이 주장하는 긍정의 힘입니다.
얼마 전 은퇴한 조용기 목사는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우리의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하고 범사에 잘 된 모습을 우리 마음에 그려 넣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신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나 조용기 목사의 바라봄의 법칙을 이 상황에서 말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인가요? 철없는 유아적인 몸상인가요?
저 역시도 이스라엘의 상황을 마음 속으로 상상해 보았어요. 깊이 생각할수록 점점 눈앞이 검은 색으로 변하더군요. 죽음 절망 좌절 몰살. 그런 단어들이 눈앞에 모빌처럼 왔다 갔다 하니까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 몰려 왔습니다. 긍정이니 바라봄이니 하는 단어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전혀 다른 그림이 오버랩 되면서 한쪽으로 쏠리던 저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닙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모세의 모습이 그의 우렁찬 음성과 함께 오버랩 되어 오는 겁니다. 보세요! 똑같은 현장에 있던 모세입니다. 더욱이 그 모든 위기의 책임론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입니다. 바로의 칼날에 쓰러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돌 세례를 받을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 겁니까? 모세도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눈에도 앞에는 홍해가 보입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짧은 본문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시각이 대립하고 있음을 보십니까? 누구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공포, 절망, 좌절과, 누구라도 그리할 수 없는 단 한사람의 희망과 용기 그리고 낙관이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은 갑자기 불행해졌습니다. 감격도 사라지고 꿈도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8절을 보세요.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아갔다!’ 그러던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질겁’을 합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던 모세에 대한 원망이 처음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히브리 민족이 갑자기 불행해 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라오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왔기 때문입니까? 겉으로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속사정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들이 불행해진 건 시선을 그릇된 방향에 두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다른 데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애시 당초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 한 게 누구 때문인가요? 모세 때문인가요? 이스라엘 족장회의 인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들은 감히 꿈도 못 꾸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일을 시작하셨어요. 그러면 이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았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을 바라보았어야지요. 그분에게 매달렸어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려움의 원인을 전혀 다른 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지경이 된 것은 저 모세 때문이야! 저 친구가 우리를 잘못 인도했기 때문이야!’ 불행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그 사람에게 책임전가하기 바쁩니다. 그들은 지금 전혀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뿐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이 짧은 본문 안에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이 지금 위기에 처한 걸 누가 모르나요? 그러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지요.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그 우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요? 모세가 모세가 모세가... 그리 비난을 해서 도대체 무슨 선한 결과를 맺을 수 있는데요?
이런 거대한 물결 앞에 홀로 우뚝 선 모세가 보이십니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 태산 같은 의연함이 그려지십니까? 모두가 죽는다고 아우성칠 때 모두가 너 때문이야, 위기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 때, 그때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부정을 말할 때 모두가 절망을 말할 때 모세는 홀로 긍정을 말합니다, 희망을 말합니다! 백성들은 문제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문제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백성들은 절망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희망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 모세,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모세, 그 모세가 절체정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말했다는 이 사실은 뭘 말합니까? 바로 이 위기의 순간에도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니 조용기 목사의 바라봄의 법칙을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은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것은 굳이 신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사이클 선수인데 고환암에 걸렸어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이 사람이 악명 높기로 유명한 투르드 프랑스 즉 사이클로 프랑스 도로를 일주하는 대회에서 7년 연속 우승했습니다. “내가 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마약의 힘이 아니라 나는 나을 수 있다. 나는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답변입니다.
혁신의 기회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이사 1, 22) 찌꺼기가 섞이고 물이 섞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혁신의 기회입니다.
"불일치(incongruity)란 현재의 것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또는 실제 일어나는 일과 모두들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사이의 괴리이자 부조화다. 우리는 불일치가 발생한 이유를 잘 모를 수도 있으며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분명한 것은 어떤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혁신의 기회가 왔음을 알리는 징후라는 것이다." -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 중에서 -
기회의 사인
‘위기’는 ‘변화의 사인 sign'이다. 변화의 사인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위험’이 되기도 하고 ‘기회’가 되기도 하고, ‘죽음’이 되기도 하고 ‘생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변화’,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승리를 향한 아름다운 동행을 지금 시작하라! -김석년 목사의 ‘인생 승리를 향한 끝없는 도전 변화’ 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우리는 용서를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새로운 관계에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할 어리석은 행동과 비뚤어진 습관들을 발견하고 그것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깨뜨려왔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 역시 용서받음으로 자신의 잘못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용서하기로 결심할 때우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을 품는 긍정적인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나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그리하여 모두가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 기회는 용서만이 부릴 수 있는 마술입니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 수업’ 중에서-
종교와 신앙이 아니어도 긍정적 사고가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가졌는지 몰라요. 이건 인생을 희망으로 몰고 가는 위대한 추진력이 있습니다. 일본 교세라 그룹의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 회장은 긍정적 사고를 경영에 도입해 성공을 거둔 분입니다. 이 분이 ‘카르마 경영’이란 자서전을 펴냈어요. ‘인생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 인생은 마음에 그리는 대로 이루어지며 강렬하게 생각하는 게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결과가 나타난다!’ 이게 카르마 경영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긍정적 사고는 희망을 낳고 열정을 낳습니다. 적극성을 띠고 생산적이 되며 창의성을 갖게 합니다. 국민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기질을 가질수록 그 사회가 더욱 발전한다는 게 역사의 증언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신앙이라는 버팀목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대준 장로라는 분이 있어요.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거제도에서 어렵게 자랐습니다. 어느 날 동네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겁니다. ‘어라? 주 예수? 나도 주씨인데 예수도 주씨네? 그럼 이집 주인인 예수는 내 친척 아저씨뻘 되네.’ 그날부터 주장로님은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고 평생의 멘토로 삼았습니다.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청와대 앞을 지나가던 주 장로님은 경찰의 제지를 받게 됩니다. 아마 오기도 나고 분하기도 했겠지요.’ 그래 내가 반드시 저 청와대 안으로 들어가리라! 주장로님은 그때부터 자신의 달란트인 컴퓨터 기술을 통해 청와대에 들어가는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청와대에 전산실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꿈을 꾸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고 꿈을 키워갔습니다. 그렇게 청와대를 바라보며 꿈을 꾼 지 10년 만에 청와대 전산실 창립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사이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며 카이스트 공학 박사를 취득한 주 장로님은 전산실 팀장으로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대통령이 바뀌기까지 청와대 경호 시스템을 IT로 바꾸었고 경호실 차장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때 가졌던 그 꿈 한 자락이, 그 꿈을 품고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면 반드시 이뤄질 것을 확신했던 나의 단순한 생각이 지금까지의 나를 움직여 왔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여러분, 믿음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쉽게 절망합니다, 자포자기 합니다. 도피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역경을 만납니다. 참 모질고 모진 어려움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신앙 자체가 긍정입니다. 신앙에 비관이니 부정이니 좌절이니 하는 단어는 아예 존재하질 않아요. 여러분이 지하철 같은데서 나눠주는 순복음교회 신문을 받아 보셨을 겁니다. 거기 보면 간증이 실려 있어요. 어느 기자가 거기 간증한 성도 중 불치의 병을 앓았던 성도 52명을 추려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어요. 이들 52명은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지내온 내력도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의학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좌절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그 모든 질병을 이겨냈어요. 그들이 병을 이긴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이 내 병을 고쳐 주실 것이다. 나를 튼튼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병마를 털고 일어서는 자신을 매일처럼 마음 속에 그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포기한 그 병들이 하나같이 씻은 듯 나았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모세가 하는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시선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시선을 바꾸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시선을 바꾸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시선을 바꾸면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시선을 바꾸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시선을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행복의 법칙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고,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면 행복은 오늘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 새롭게 출발합시다. 이 한해의 마지막 남은 출발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더라도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오늘 여러분의 삶의 자리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베푸실 일들을 마음속에 그리십시오. 하나님이 마지막 햇살로 마지막 바람으로 여러분을 도우실 겁니다! 이 하나님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을을 열어 가시는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