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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강남의 고향을 찾아서
제 이름은 북촌(北村)입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동네인데, 서울이 한양이던 시절 잘나갔답니다. 왕이 부르면 빨리 입궐해야 했던 고위 관료들이 모두 여기 살았으니까요.
경기고(1900년)·휘문고(1906년) 같은 학교가 생기니 지방 부호들도 자녀를 이곳으로 보내더군요. 지금 강남의 뿌리 같은 곳이죠. 하지만 경제개발 바람이 불던 1970년대, 명문고가 한강 다리 너머로 이사갔답니다. 사람들도 그곳 고층아파트로 떠나더군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젊은이들이 카메라 메고 우리 동네 한옥 골목을 누비네요. 처마 밑 돌계단에 예쁜 아가씨가 앉아 책도 읽는다니까요. 이왕 오실거면 우리 동네 옛 사연을 알고 오면 좋겠어요. 멋진 카페나 음식점 말고도 조선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역사에 얽힌 스토리가 담긴 곳이 많으니까요.
혹시 압니까, 골목을 걷다보면 까까머리 고교생이나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열사가 불쑥 튀어나올지….
헌법재판소에서 감사원으로 이어지는 가회동 길에서 창덕궁 서편 길로 넘어가는 돌계단. 고지도에도 나오는 옛 골목으로, 커피숍 고이 옆 길이다. 왼쪽 아래 지도는 18세기 말 한양도성도(리움미술관 소장).
3·1운동 발상지, 노천 목욕탕…
옛길 걸으며 숨은 보물 찾기
일요일인 지난 9일 오후.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감사원으로 이어지는 가회동길에 젊은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여자 친구와 온 최병민(20·경기 산본)씨는 “인터넷에서 ‘서울에서 데이트하기 좋은 곳’을 검색했더니 북촌이 나오더라”며 “예쁜 카페와 멋있는 한옥을 기대하고 왔다”고 말했다. 아내와 함께 온 한상준(53·송파구 마천동)씨는 “서울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뭔가 대단한 걸 기대했는데 어딜 가나 달랑 표지석만 있어 실망스럽다”고 했다. 몰라도 그냥 좋은 사람도 있지만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게 아쉬운 사람도 있다. 그래서 발품 팔아 만들었다. 모두를 위한 북촌 가이드를.
운현궁의 가장 북쪽에 있는 이로당 건물.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가 살던 안채다.
①운현궁
DJ 동교동·YS 상도동 집 문간방의 원조, 대원군 살던 곳에 있다
안국역 4번 출구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50m쯤 가면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자택이자 고종이 열두 살까지 산 운현궁이 나온다. 대원군 섭정 10년간 개혁정책을 추진한 현장이다. 원래 운현궁은 현재의 일본문화원과 덕성여대 종로캠퍼스까지 포함했었다. 대원군 후손에게 상속된 후 상당수 부지가 팔려나가 작아졌다. 지금은 대원군이 국정을 논하던 노안당과 안채 노락당, 별당 이로당, 궁 경비 인력 거처 수직사만 남았다. 서울시가 사들여 공개하고 있다. 장규식 중앙대(역사학) 교수는 “노안당 서행각(西行閣)은 대원군을 따르는 정치 지망생들이 머물던 곳”이라며 “계보 정치의 시작으로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나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동교동·상도동 집 문간방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덕성여대 캠퍼스에 있는 서양건물 양관(洋館)②은 일제가 대원군 손자 이준용을 회유하려 지어준 건물이다. 운현궁 인근 교동초등학교는 1894년 개교한 국내 최초 초등교육 기관이다. 북촌 재동초보다 1년 앞선다. 1927년 큰불이 나 지금 건물로 다시 지었다.
[알고 가세요] 운현궁 이로당 뒤뜰 한쪽에 작은 비석이 있다. 왕이 된 고종이 어릴 때 놀던 소나무를 잊지 못해 정이품 벼슬을 내리면서 세운 경송비(慶松碑)③다. 소나무는 없고 비석만 남았다. 운현궁 유물전시관엔 대원군 호를 딴 난초 그림 석파란(石坡蘭) 사본 등이 있다. 원본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④현대사옥 주변
해방 후 첫 정치집회 열린 휘문고 옛 터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겨간 휘문고(희문의숙)가 있던 곳이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다음날 당시 휘문중학 교정에선 조선건국준비위 집회가 열렸다. 해방 후 첫 정치집회였다.
안국역을 나와 현대사옥 골목으로 접어들면 조선 초 서민 질병을 치료하던 제생원 터④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지금 이 건물엔 보건복지부가 입주해 있다.
갑신정변 때 고종이 머물렀던 경우궁과 계동궁도 이 곳에 있었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거사한 개화파 인사들이 고종을 경우궁으로 데려갔다가 다음날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의 거처 계동궁으로 옮긴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는데, 경우궁은 1908년 청와대 칠궁(七宮)으로 옮겨졌다. 계동궁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알고 가세요] 현대사옥 동쪽 편에는 경주 첨성대를 연상시키는 관상감 관천대(觀天臺)가 있다. 이곳 앞 고개 이름이 운현이었는데, 관상감의 이전 명칭인 서운관(書雲觀)에서 유래했다. 대원군의 운현궁도 이 고개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중앙고까지 이어진 계동길의 현대사옥 주차장 입구 맞은 편에는 검은색 보헌빌딩이 있다. 원래 건국준비위 창립본부로 쓰이던 2층 양옥이 있었는데 이 집을 소유한 한 기업 총수 일가가 2003년 철거 후 이 빌딩을 올렸다.
⑤계동 중앙탕
낡았다고? 홍성흔·김주성 단골이었는데…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다. 입구에서 만난 박희원(67)씨는 원래 목욕탕 이발사였는데, 지금은 관리인과 이발사, 때밀이를 겸하고 있다. 이 목욕탕은 중앙고 운동부 선수용으로 1960년대에 지었다가 대중목욕탕으로 바뀌었다. 수지가 안 맞지만 단골 동네 손님들 때문에 영업을 계속한다고 한다. 박씨는 “중앙고 야구부 출신 홍성흔(두산 베어스) 선수가 다녔고 축구부 김주성 선수도 자주 왔다”고 기억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80년대 후반 찾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종로구가 지역구였을 때 종종 들렀다고 한다. 요즘은 주변에 게스트하우스가 많아 외국인도 온단다. “어떤 외국인은 좁은 공간에서 홀랑 벗고 돌아다니는 걸 보더니 줄행랑을 치더라고요.”
중앙탕 골목 한옥에 ‘만해당’이란 현판이 있다.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1918년 월간지 ‘유심’을 창간, 발행한 장소다. 이 집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유리 대표는 “만해 선생 거처로 알려지면서 일본 순사들이 자주 급습하는 바람에 독립운동가들이 중앙탕 옆 한옥집 지하 광에 숨곤 했다더라”고 했다.
[알고 가세요] 중앙탕은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수애가 다니는 목욕탕이다. 맞은편 식당은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고두심의 황금알 식당으로 나왔다. 지금도 그 간판을 쓴다.
⑥중앙고
'겨울연가' 일본 팬 몰리는 학교 숙직실은 3·1운동 발상지
현대사옥에서 계동길을 따라 북쪽 끝까지 오르면 고딕 양식의 근사한 건물이 나온다.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 모교로 나왔던 중앙고다. 이혜영 북촌 골목길해설사는 “북촌엔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 엄청 많다”며 “중앙고는 3·1운동의 발상지”라고 소개했다. 중앙고는 주말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본관 오른편 언덕에 있는 작은 기와집은 3·1기념관⑥이다.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을 모의했던 당시의 숙직실을 재현해 지은 건물이다. 원래 숙직실이 학교 강당을 짓느라 헐리는 바람에 강당 앞 담벼락에 위치를 알리는 안내문만 남아있다.
[알고 가세요] 중앙고를 나와 현대사옥 쪽으로 내려가다 대동세무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인촌 김성수 선생 고택⑦이 있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인사들이 독립운동을 함께하자고 의견을 모은 장소다. 고택 관리인은 “당시 집은 일본식 양옥이었는데 헐고 정원을 꾸몄다”고 말했다. 일반에 개방하지 않지만 쪽문이 열리면 덩치 큰 말라뮤트 개를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 기당 현상윤 선생 업적 담은 전집 출간
1922년 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졸업생 앞에 앉아 있는 중앙고보 설립자 김성수 선생, 최두선 전 교장,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 현상윤 교장(왼쪽부터).
⑧정독도서관
대표 명문 경기고 자리서 추억의 배지 찾기
경기고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기기 전 있던 곳이 지금의 정독도서관이다. 정문 오른쪽 서울교육박물관이 학교 본관이었다. 황동진 교육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벤치와 잔디밭이 있는 곳이 옛 운동장”이라고 소개했다.
1900년 최초의 관립 중학교인 한성중학교(경기고의 전신)가 이곳에 있었다. 배재학당·이화학당 같은 사립학교의 성과를 보고 대한제국이 중학교를 세운 것이다. 또 사육신 성삼문과 조선 말 갑신정변을 이끈 김옥균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400년 간격을 두고 두 거물급 인사가 정치적 꿈을 키운 셈이다.
[알고 가세요] 교육박물관⑨은 1990년대까지 서울에 있던 거의 모든 중·고교의 학교 배지를 전시하고 있다. 모자에 달았던 모표와 허리띠까지 합쳐 700여 개 학교 물품을 모아놨다. 황 학예사는 “박물관에 들른 한 경기고 출신 신사가 ‘그땐 외출복이 따로 없어 잠잘 때 빼곤 교복을 입었는데 다른 학교 배지와 달리 마름모여서 100m 거리에서도 알아봤다’고 하더라”고 했다.
정독도서관을 나와 왼쪽 화동고개를 넘으면 한옥과 현대건축이 어우러진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⑪가 있다. 최근 CJ비자금 수사에 이름을 올린 홍성원 대표의 서미갤러리가 있던 곳을 임대했다. 북촌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서미가 2000년 청담동에서 가회동으로 옮겨오면서 부유층이 북촌에 많이 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갑신정변의 주역
건설업을 하던 권씨는 강남서 살다 2006년 북촌 주택을 사들여 박물관으로 꾸몄다. 맹사성의 스승 권근이 18대조라고 밝힌 권씨는 “박물관 만드느라 아파트를 78평에서 56평, 45평으로 줄였다가 지금은 박물관 옆 다세대 주택 18평에 산다”고 했다. 박물관 꽃담을 직접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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