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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기행문
2012.7.7.(토) 21.50분 김해공항을 출발하여 00.35분 연길공항에 도착한다. 연길은 북경기준시를 적용함으로 중국시간으로 1시간 늦은 11시35분이다.
경도 상으로 한국과 같은데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동경 120도 (베이징과 상하이 가운데)을 표준시로 하고 한국은 동경 135도을 표준시로 채택함으로 인한 차이다.
大州酒店(중국에서는 호텔은 주점, 여관은 병관)은 4성급 호텔임에도 온수도,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특히, 비누와 화장지가 없다. 날씨는 부산날씨와 별반 차이가 없어 매우 무덥다. 호텔로비에서 청도맥주를 1병당 15위안, 한국 돈 3,000원(환율 1:190임. 새벽에 근처 마트에 갔더니 8위안임)에 5병을 사서 마셨다. 청도맥주는 일본 아사히맥주에서 기술전수 받았다고 하는데 약간 진한 맛이 입에 잘 맞았다.
2012.7.8(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니 햇살이 뜨겁다.(한국기준 7시 반이다) 호텔조식은 밀가루 빵, 옥수수 빵, 만두, 안남미 쌀밥 등이고 반찬은 오이, 무김치, 목이버섯, 고사리나물 등이며 맛은 별로다.
밖으로 나오니 번화가 임에도 몇 대 되지 않는 차량, 경운기, 오토바이, 자전거, 행인이 뒤섞여 움직였다. 계속해서 빵빵거리는 차량 경적은 서로 간에 알아서 피하라는 신호등 역할을 하는 것 같다.
7시 백두산(중국에서는 長白山으로만 표기함) 서파(西坡:파는 언덕)로 가면서 중국인 기사 유氏와 인사했다. 가이드는 임oo인데 28세로 결혼했고, 연길에 살며 조부가 평택에서 북간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20년 전에 공산당원으로 한국에 6개월 연수차 가서, 눌러앉아 10년 전 2만 위안(당시 한화 약2천만 원)을 주고 한국국적을 취득하여 서울 신림동에서 형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1년 일하면 연길에서 10년 일하는 것만큼 벌고, 연길은 먼지만 많고, 볼 것도 없어 연길에 자주 오지 않으신다고 한다.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약 200만 명이고, 가장 큰 도시인 연길 인구는 약 50만 명이다. 한족과 조선족이 반반가량 된다고 하며, 갈수록 한족의 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2012.8.3.일이 연변 조선족자치주 승격 60주년 기념일이어서, 군데군데 건설현장이 많은데 이는 한국으로 간 조선족들이 보내온 돈 덕분이란다. 간판은 한글을 위에 쓰고, 한자는 밑에 써야 한다는 것이 연길조선족자치주의 법률로 규정되어있고, 위반하면 벌금이 많다고 한다.
연길에서는 벌금· 입장료· 휴지가 비싼 것이 특징이라 한다. 거리에는【문명한 연길사람 되어 전국 명문도시 건설하자】등등의 구호가 줄줄이 붙어있다.
12시 도착예정인 백두산 전진기지격인 이도백하로 가는 길은 끝이 없는 구릉지(70 리 벌판)와 평원인데 옥수수 밭의 연속이다. 농지는 잡석이 별로 없는 아주 기름진 땅으로 사유화된 것이나 마찬가지(30-50년 임차하고 끝나면 연장한다고 함)이고 기계화 되지 않고 거의 사람 손으로 농사를 짓는데 옥수수가 빨리 자라 잡풀이 거의 나지 않아 밭고랑이 깨끗하다. 농산물 생산은 풍부한데 현대화된 저장수단이 없어 별도 시설이 없어도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옥수수, 콩 등의 농산물을 주로 재배한다고 한다.
10시30분경 간이 휴게소에 들러 장려 삼 11뿌리를 샀다. 한 뿌리 3만원 부르는 것을 비싸다고 하니 2만원으로, 또 비싸다고 1만원하자고하니 안 판다고 한다. 가이드가 잘 말해서 뿌리 당 1만원에 1인당 한 뿌리씩 먹고 남은 것은 조덕승 산행대장 몫으로 남겼다. 중국어로 비싸다는 말은 타이 꾸에이로 가이드가 나보고 너무 알아서 곤란하다고 한다. 화장지가 없고 문이 없어 통로에서 보면 큰 일보는 사람의 앞이 다보여 민망스럽다. 그래도 옆에는 간단한 나무 벽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옛날에는 흐르는 개울에 아침이면 줄줄이 앉아서 앞사람의 항문을 보며 일을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모습이다.
- 장려삼 삿던 휴계소다. 옆편 통나무집이 화장실이다.
이도백하에 도착하여 고려식당에서 한국식과 유사한 점심을 먹고, 백두산서파(셔틀버스 60원)로 간다. 이도백하는 백두산아래 가장 가까이 사람이 사는 도시로, 여기서부터 백두산까지는 인가가 한 채도 없으므로, 백두산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도백하를 기점으로 할 수 밖에 없고, 인구는 1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도백하에서 서파산문까지는 약 80km로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길 양쪽에는 백두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작나무 숲과 원시림의 연속이다. 서파산문에서 셔틀버스(왕복85원 입장료 100원)를 타고 서파아래 주차장으로 간다.
민족의 聖山이요 靈山인 백두산의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1,800m를 넘어서자 자작나무와 비슷한 악화(岳花)나무들이 나타나고 2,000m를 넘어서자 나무가 살지 않는 초원지대로 수많은 야생초와 꽃들이 장관을 이룬다.
약40분(14시 10분경) 후에 천지를 오르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1,422개의 계단에는 홀수로 1,3,5.... 1421 번호를 매겨놓았고 계단 양쪽에는 이끼류 식물과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군데군데 녹지 않은 만년설을 본다. 걷기 힘든 노약자들은 가마를 이용하는 데 양쪽에서 두 사람이 들고 왕복하는데 한화 12만원이다.
1,422계단을 올라서니(14시50분경) 천지의 경이로운 풍광,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풍경보다도 빼어난 우리민족 기상의 발원지인 천지가 웅장한 백두산의 연봉아래 깊고 고요한 청자 빛 단아한 모습으로 흰 구름을 흩날리며 나타난다.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예로부터 한국의 모든 산들이 백두산에서 뻗어 내렸다하여 聖山으로 숭배되어 왔다. 백두산 연봉과 천지를 보지 아니하고 세계와 한국의 명승지를 논한다는 것은 조상의 내력을 모르고 살아가는 아둔한 뿌리 없는 자의 소신이리라. 【登頂成功 我眞棒! 엄지표시】(등정 성공한 나는 정말 대단하다) 간판 옆 기단 위 돌비석에 【조선37】(조중 5호 경계비)가 있고, 이 비석 오른편은 북한 땅으로 경고판에는【변경을 넘는 것을 엄금하며 변경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엄금 한다】(구호를 외치거나 프랭카드를 꺼내면 공안에게 체포된다고 한다)라는 간판 앞에서 우리는 북한 땅을 밟고 서서 사진을 찍는다.
-새끼줄 안은 북한 영토다.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 정도는 봐준다
백두산과 천지는 1년 중 9월초부터 이듬해 6월 중순까지 겨울이어서 가는 시기 조절이 어렵고, 날씨가 아래 지역과는 상관없이 하루에도 여러 번 천둥과 안개 운무가 변화무상하므로 100번을 와도 천지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한다. 우리가 천지의 모습을 잘 볼 수 있게 된 것을 천지신명께 감사 드린다. 서파의 주봉인 백운봉(2,691m) 아래 능선에 서서 백두산의 주봉인 장군봉과 17개의 봉우리를 천지와 함께 감상한다.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2,400m이상의 봉우리 18개중 10개는 중국에 있고, 가장 높은 장군봉(2,749m)을 포함한 8개는 북한쪽에 있으며 면적 중 1/3은 중국, 2/3은 북한령이다. 백두산의 유역면적은 8,000㎢로 한반도면적의 약 1/3이다.
천지는 중국最高 최대의 화산口湖로서 수면해발 2,194m, 동서길이 3.51km, 남북길이 4.5km, 면적 10평방킬로비터, 평균깊이 200m, 가장 깊은 곳 384m, 총저수량 19.55억㎥로 북파 쪽 장백폭포 쪽으로 흘러가고, 송화강, 두만강(도문강), 압록강의 발원지가 된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신기하게 일정한 수위를 유지한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는 천지는 나에게 항상 조그만 호수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크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서면일대 (범내골에서 양정까지, 전포동에서 신암까지가 전부 평균 200m 깊이의 물속이라고 보면 될 면적)가 모두 물에 잠겨있다고 볼 수 있는 면적이다.
하산 행 셔틀버스를 타고 고산화원에 들러 수많은 야생화(겨울이 길어 수정기간이 짧아 대부분 꽃 색깔이 원색으로 화려하고 크기가 작다)를 구경하고, 금강대협곡으로 간다.
V자형 협곡으로 폭 200m, 깊이 100m, 길이 70km로 기묘한 형태의 바위와 가파른 경사 아래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은 동양의 ‘그랜드캐니언’이라한다.
다시 서파산문에 도착하여 1시간 30분 후에 이도백하 강원도식당에서 한국식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인 예술의 집 호텔(藝術之家飯店)에 도착하여 여정을 푼다. 예술의 집 호텔은 백두산 미인송(美人松: 쭉쭉 뻗은 20m 높이 홍송 군락지)공원 옆에 위치하는데 온통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식사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소주다. 805호실 백종주 실에서 소주 몇 잔 걸치니 피곤한 여정은 고요한 꿈속으로 젖어든다.
2012.7.9(월) 6.30분 기상. 7시 호텔출발 8시 30분 매표소도착, 8시 46분 북파주차장 도착, 한참을 기다려 이스타나(옛날에는 지프차였으나 현재는 쌍용이스타나 1번부터 200번까지 번호순대로 일렬로 운행함) 봉고를 10명씩 타고 25분간 65도의 가파른 길을 72개의 커버를 돌아 올라간다. 수 십대 씩 줄을 지어 올라가는 봉고는 오를 때나 내려올 때나 아무리 승객의 몸 쏠림이 심하더라도 브레이크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200대가 하루 15회 정도 왕복운행 한다.
10시경 천문봉(2,670m)에 올라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중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흩날리더니 천둥번개가 치면서 굵은 빗줄기가 내려 퍼 붓는다. 주차장 대피소로 내려오니 비 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라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소주(공안 때문에 생수병에 담음)와 안주를 꺼내 백두산 천지의 변화무상을 생각하며 무료함을 달랜다.
-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고 비가 퍼붓기 임박, 대피소로 피신하기 전, 북한 가수인 듯한 아름다운 모습의 촬영장면
12시경에 비가 그치고 가이드가 소개하는 중국 측 안내인을 따라 철벽봉(2,550m) 옆을 지나 천지로 내려간다. 원래 천지로 내려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수많은 관관객 중 우리팀만 내려갔다.
- 우리를 천지까지 안내하는 중국공안원과 무슨 말없는 대화를 하는걸까?
약 65-70도 경사로 바위와 돌이 구르는 험난한 길 약 5-600m를 내려가면서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넘어지면서 무릎과 정강이가 까지고 시퍼런 멍이 들었다. 1시 30분에 천지에 도착했다.
엄청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간단한 세수를 해본다. 천지의 물은 그다지 맑지 않고 부유물이 많다. 화산분화구에서 작고 큰 부유석들이 떠올라 둥둥 떠다니는 것 때문이라 한다. 천지의 괴물은 백두산 흑 곰이 헤엄을 치거나, 군인들이 쪽배로 고기 잡는 모습을 오해한 것이라 하며, 많은 어류를 풀어 놓았으나 살지 못하고 산천어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점심 반찬으로 오이와 고추를 씻고 있던 중 또다시 광풍이 불고 빗줄기가 굵어져 중국 측 경비대 군용막사(겨우 10명이 들어갈 넓이)에 한화 1만원을 주고 들어가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한다.
점심을 먹고 나니 비가 조금 가늘어 진다. 천지의 자갈밭은 화산석으로 검고 아주 가볍다. 천지 호수가에 앉아 『통일 한국의 영원한 발전을!』『위하여!』여기서 구호를 외치면 구속되기도 한단다. 화이팅 한번에 속이 후련하다.
-천지에서 유일한 물 배출구인 이 하천이 흘러 장백폭포를 이룬다. 흰부분이 만년설이다.
용케도 3시50분에 주차장에 도착 셔틀버스로 하산 길에 장백폭포로 간다. 폭포주차장 옆 노천온천탕을 운영하는 한국사장이 폭포에서 천지까지 수천 장의 돌계단을 만들어 걸어 올라가는 트레킹 길을 사비로 만들었는데 중국 측에서 공짜로 달라고 하고, 사장이 거절하니까 북파로 가는 봉고 200대(앞에서 언급한 쌍용 이스타나)를 운행함으로써 계단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파산 위기라 한다. 군데군데 노천온천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오른다. 온도는 약82도라 한다.
웅장한 폭포수 소리와 함께 흰 두 줄기 비단 천을 휘날리면서 장백폭포의 위용이 나타난다. 총길이 1,250m, 낙차 68m로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고 한다.
-폭포옆과 윗부분 하얀 선들이 한국 사장이 자비로 건설한 천지로 걸어서 가는 트레킹 돌계단이다.
북파주차장에서 이도백하로 이동하여 중국전통식당에서 중국식저녁을 먹고 숙소인 예술지가주점에 도착한다. 슈퍼에서 캔 맥주 20캔을 사서 805호실에 모여 거나하게 취했다.
꿈속에 웅장한 백두산의 연봉과 흰 구름 날리는 천지가 조용히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2012.7.10(화) 6시 기상, 식사 후 호텔 앞에서 도시구경을 해본다. 대체로 높은 건물이 없고 높아야 7-8층이다. 아마도 겨울이 길어 난방비가 많이 들고, 터가 만포장이라 높게 지을 이유가 없음 때문이리라. 이도백하는 일자리가 많아 한족 유입인구가 많다고 한다.
호텔을 출발하여 8시 39분에 장뇌삼 샀던 휴게소에 들러 소변을 볼까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큰 거보는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정면으로 앉아있어 민망스러워 참기로 하고 돌아왔다. 창밖은 끝없는 옥수수 밭이다. 10월말부터 4월초까지 겨울이으로 1년1모작으로 빨리 자라는 옥수수나 콩 농사가 적격이라고 하며, 겨울에는 마작과 훌라로 세월을 보낸다고 한다. 지붕은 거의 빨강색 단층 기와나 함석주택이고, 보통 전면기준 4칸, 부자는 5칸, 6칸이다.
차창으로 보는 해란강에서부터 용정까지는 45km다. 해란강(해와 란이라는 오누이가 조선 삼남에서 볍씨를 가져다 논농사를 하면서 해란강이라 불리워졌다고 함)은 온천천 크기로 생각보다 크지 않고 일송정이 있는 산기슭은 차창 밖으로 보기만 하고 가보지는 못했지만, 일제시대 독립군들이 일송정아래서 회의를 자주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소나무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화공약품을 들어부어 나무가 나지 않던 것을 몇 번이나 심었으나 죽어버려, 지금은 다른 곳에서 나무를 가져와 살려놓았다고 한다.
11시 용정경계에 진입한다. 인구는 약 20만 명이고 65%정도가 조선족이라 한다. 조선족 집은 거의 다 접시안테나를 다는데, 접시안테나가 설치된 집은 거의 다 조선족이며 8-90%는 한국채널 28가지를 볼 수 있다한다. 불법으로 간주되어 중국 측 공안은 강제철거하고, 조선족은 다시 달고를 반복한다고 한다. 달고 나면 시청료는 없고, 강호동을 비롯한 한국 탤런트를 훤히 잘 안다고 하며 중국, 북한방송은 재미없어 보지 않는다고 한다.
- 용정시가지 전경
용정대성학교에서 북한뉴스 아나운스와 똑 같은 복장과 말투의 여성안내자의 설명을 듣는다.
안중근 의사는 1904년 러일전쟁 후 중국 망명했고 1908년 대한의군참모총장으로 1909년10월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3.26. 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홍범도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북로군정서 총사령관, 리범석 북로군정서교관은 1926.6.4부터 3일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9사단 1만5천명을 상대로 150명을 사살하였고 일본군이 패전하여 퇴각하는 사진을 본다.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사령관 김일성, 제3방면군 13연대장 최현, 제14연대 정치위원 안길이 1940.3.25일 김일성의 지휘로 일본군 마에다 토벌중대를 매복 습격 100여명을 사살한 화룡현 홍기자전투에 대한 사진이 있어 이 분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 인물인가 묻자 같은 사람이라고 답한다.
대성학교는 구 건물 2층 4개 교실을 역사적 유물관으로 쓰고 있고, 신식 건물 4층 높이 수십 개 규모의 신축교사에 학생 수도 수백명명이다. 조선족학교에 다니면 조선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학교에 다니면 조선어를 배우지 않게 되는 데, 관공서, 국가기관 입사 등 취업과 승진 때문에 가급적 중국학교에 다닐 수 밖에 없도록 구조적으로 차별대우한다고 한다.
현재까지 약 2만 명을 배출했고, 유명인사는 윤동주(가수 윤형주가 6촌 동생임), 문익환(윤동주와 같은 반 급우), 영화아리랑의 감독, 출연 나운규 등이다. 윤동주의 詩碑 序詩(1941.11.20) 앞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숙연히 머리숙여 다짐해본다.
시인 윤동주의 생가는 명동 촌인데 용정에서 차로 약20분 거리에 있고 끝없는 평원구릉의 작은 산기슭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약 2,000평정도의 땅에 전면기준 3칸 기와집 명동학교(사랑채규모임), 10칸 규모의 교회와 살림집 4칸(일자형으로 첫 두 칸은 가로로 반씩 방이 4개, 3칸 째는 부엌, 4칸 째는 창고: 연변의 대표적 가옥형태라 함:칸은 표준적인 칸이 아닌 이해를 돕기위해 눈으로 본 전면 기둥과 기둥사이를 칸으로 칭하였음)으로 되어있고, 윤동주의 아버지는 교회목사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1917.12.30.출생 연희전문을 마치고 일본 릿쿄대학(立敎)을 졸업하고 29세 때 오사카에서 재판받고 생체실험대상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명동촌의 대표작물은 연초재배라고 한다.
- 명동소학교: 칠판에 청소당번 문동환으로 적혀있더라.
-본채 살림칸
윤동주의 【내인생에 가을이 오면】 "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당시 불과 대학생이던 젊은 지식인의 꿈이 생체실험이라는 잔혹한 일제의 만행에, 『내인생에 가을이 오기도』 전인 봄날에 무참히 꺾인 한많은 일대기를 생각하면서 윤동주의 생가를 뒤로하고, 북한과 접경인 도문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차창으로 보는 두만강은 강폭이 10-40m로 가장 넓은 곳이 60m정도다. 2년 전부터 탈북자를 방지하기 위하여 중국 측 강변에 철조망을 설치하여 강을 건너는 탈북자를 막고 있다. 2시경 도문의 아리랑(阿里郞)주가에서 식사를 하고 백두산을 발원지로 하는 중조국경의 두만강(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총길이 490km) 강변공원으로 걸어간다.
-도문 시가지 풍경
도문시와 북한 남양시를 잇는 조중우의교는 1941.11월 준공된 약 500m길이(100m중국소유) 2차선으로 오가는 차량은 거의 없고, 가끔 북한무산의 철광석과 혜산의 구리광석을 실어 나르는 대형트럭만 있는데, 차에서 철광석이 떨어져 주워보니 황토 같은 누른 흙을 입힌 엄지손가락 마디 크기의 눈깔사탕모양의 광석이다.
광산 폐수로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닌 아주 진한 약간의 검은빛을 띤 짙은 누른색이고 수면아래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중조대교 약 2km아래 철교는 중국 측 일부는 페인트칠이 되어있고, 북한 측 일부는 페인트칠을 하지 못해 녹슬어있다.
-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사진의 두번째 가로등이 있는 부분이 국경선이고 더 이상 나아가면 북한이다. 북한 쪽에서 오는 우리나라 관광객과 같이 만나 악수하고 환호 할 수 있는 그날은 언제일까?
건너편 남양시는 모든 건물이 회색이었고, 사람과 차량의 이동은 거의 없으며, 남양시로 들어오는 간선도로는 비포장인 것 같다. 산은 민둥산이며, 6-70도 기울기의 해발 700m 산기슭 5-600m에 밭을 일구어 놓았다. 그냥 등산하기도 힘든 데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북한동포의 삶이 얼마나 궁핍, 곤궁한지 충분히 알 수 있겠다.
- 북한의 거리에는 차량이나 사람들의 이동이 신기할 정도로 없다. 활력없는 무거운 정적속에 도시전체가 가라앉아 있다.
노점에서 북한산 담배(이름: 평양, 금수강산, 강선, 청송, 해돋이, 백산, 천리마, 백두산)중 가장 비싼 평양(내가피우는 담배는 에세 순인데 개비당 타르 0.1㎎ 니코틴 0.01㎎이고 평양은 타르 14㎎ 니코틴 1.2㎎으로 타르 140배, 니코틴 120배다) 한갑을 우리 돈 2,500원에 사서 기념으로 한 대 피웠더니 독해서 머리가 핑돈다.
북한 우표3장(장 당50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 동지라 새겨짐)과 진짜 돈(5,000원, 1,000원, 500원, 200원, 100원, 50원, 10원, 5원,1원의 지폐와 동전1원, 10전, 5전, 1전) 전체금액 7,017원 16전을 우리 돈 5,000원에 샀다. 2012.1.6.일 통계청보고에 의하면 북한은 2009년부터 공식 환율은 1달러당 100원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산 북한돈 7,017원16전은 달러로 70달러가 넘는 돈이고 70달러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80,000원이다. 80,000원을 5,000원과 교환하고, 담배 한 갑을 우리돈 2,500원에 삿지만 북한돈을 한화로 환산하면 40,000원에 샀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여자 판매원이 들고 있는 우표와 화폐 : 우표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이 새겨져 있고, 밑으로 5,000원 부터 1원까지 김일성이 새겨진 지폐이며, 맨밑에 1원부터 1전까지 동전이다
사진과 같이 북한돈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중앙은행 발행이고 5천원권, 천원권, 백원권은 김일성의 초상이, 일권권은 김정숙의 개인인물화가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사진과 같다.
동전은 1원의 크기가 우리나라 500원 동전 크기이며 「인민대학습당」이 새겨져 있고, 1전 동전 크기는 우리의 1원 동전 크기다.
북한의 암시장환율은 공식 환율보다 약 4-50배 수준이다. 중국 의존도가 수입 90%, 대외직접투자유입액 94%로 너무 높고, 북한령 두산 남파를 중국 측이 빌려 중국이 개발한다고 하며, ‘남북, 조국, 민족통일’이라는 말을 쓰면 공안에게 단속된다. 이러다가 백두산 뿐만 아니라 북한 전체가 중국에 종속된 속국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 선군 조선의 태양은 선거도 없이 붉은 페인트로 (일)에서 (은)으로 바꾸면 되는 편리함.
남한도 중국무역액이 일본, 미국합계액보다 많아 남,북이 모두 중국에 편중된다면 통일은 요원하지 않은가? 국경에 서서 3분만 조망하면 북한의 실상을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본능적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북한 위정자를 추종하는 자들은 자유로운 자유방임의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향유하면서, 세습 김씨왕조의 주체사상을 맹신하는 이념의 맹종자이거나, 무작정 자유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정신착란 파괴분자이거나, 기존질서를 뒤엎어야만 자신들이 돋보이고 출세할 수 있다는기회주의자이거나, 충동적이고 우매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위선자, 사기꾼으로 대한민국의 요직에 꽈리를 틀고 양지에서 또는 어둠속에 숨어서 국가에 반역하고 국가의 기반을 허물어 나가고 있다.
날로 발전하는 중국과 고요하고 음울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북한을 보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이시우 작사, 김정국 노래: 독립군 남편이 죽고, 처가 구슬프게 우는 사연을 듣고 작사했다고 함)에 서서 분단된 현실과 고통속의 북한동포를 생각하면서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슬픔에 젖은 탁류는 말이 없고 뗏목 보트는 흘러 흘러만 간다.
5시30분에 연길도착 한라산주가(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라산주점에서 마침)에서 저녁을 먹고 라텍스, 보이차, 농산물 판매점에 들렀고, 전신마사지를 두시간정도 받았다. 마사지는 40위안(약 8,000원)인데 바가지를 써서 33,000원과 팁 2,000원을 지불했다.
10시 연변공항에 도착하여 새벽 2시까지 남은 시간은 남은 소주로 공항마당에 퍼질러 앉아서 어둠을 배경으로 백두산여행 중국일정을 마감한다.
사진은 청솔산우회 산행대장 조덕승님이 제공한 것이며, 여행내내 따듯이 대해주신 청솔산우회 윤원묵회장님과 동행 대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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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두산 기행기 잘 읽었수다.
말 그대로 기행문이라 두번에 걸쳐 나눠 재밌게 읽었습니다. 주변동네의 불량배같이 행동하는 갸들의 점령지를 거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땅으로 올라가 천지를 구경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