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2월 19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대림절 넷째 주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창32:22~32/눅2:8~16
지금 우리가 전해 듣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전해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전해주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보도보다는 상징과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령 그 이미지들은 이런 것입니다. 캄캄한 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마구간과 말구유, 별을 찾아 나선 동방 박사들, 동정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 등입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밤의 이미지입니다. 성탄절이면 부르는 찬양,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성탄절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 탄생의 밤은 매우 고요하고 거룩합니다. 이 밤은 천사들이 나타나는 밤이요, 별들이 갈 길을 지시하는 밤입니다. 이 밤은 아기 예수가 태어나 말구유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축복받은 밤입니다.
그러나 예부터 밤은 두려운 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혼자 있다고 느끼는 밤의 어두움을 무서워합니다. 고대인들은 밤에 돌아다니는 악마, 마을을 불안하게 하는 도둑과 강도, 그리고 꿈에 패악을 부리는 악령 따위를 두려워했습니다. 더욱이 밤에는 자기 마음도 믿을 것이 못되었습니다. 악령들이 마음을 차지하고, 낮에는 부끄러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도록 몰아댈까 두려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위치 하나만으로 밤을 낮처럼 밝힐 수 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안에는 밤의 어둠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밤은 하나의 상징이 되엇습니다. 누군가 자기 주변에 밤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삶은 무너졌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밤은 잦은 우울증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터널 속에 있는 것처럼 내면이 어두워집니다. 모든 것은 캄캄하고 공허하며 무의미합니다. 터널 끝은 보이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마비된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밤을 특히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불안스레 이리저리 뒤척입니다.
밤은 영적 상태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한 사람이 영적 성장에서 거쳐야 할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밤은 하나님이 그로부터 멀리 계시는 시간입니다. 그는 그 분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가 경험했던 영적 체험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밤은 그동안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이,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감지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밤은 자신의 무력함과 왜소함을 경험하는 때입니다. 자신의 초라하고 거짓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밤에는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자신이 낮에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때입니다.
우리는 야곱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야곱은 이삭에게서 에서와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지만 에서 다음에 태어남으로서 그의 쌍둥이 동생이 됩니다. 야곱은 태어나는 시간부터 그의 형 에서와 심한 경쟁심을 나타내게 됩니다. 야곱은 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노년기에 아버지로부터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채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와 같이 살 수가 없어서 자기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여 년 간 몸 붙여 살게 됩니다. 그 사이에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두 아내와 많은 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거느린 가장이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야곱은 그의 경쟁심과 꾀를 이용해서 외삼촌 라반을 속이는 일도 불사합니다.
야곱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가 도망쳐 나온 고향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니다. 이제는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가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20여년을 가슴에 묻어 놓아 둔 것이었습니다. 동생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는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 큰 장벽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형 에서는 그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자신이 늘 하던 대로 먼저 수를 씁니다.
야곱은 자기보다 먼저 심부름꾼을 보내서 이렇게 자기 형편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주인의 종 야곱이 이렇게 아룁니다. 저는 그 동안 라반에게 몸붙여 살며 최근까지도 거기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소와 나귀, 양떼와 염소 떼, 남종과 여종이 있습니다. 형님께 이렇게 소식을 전하여 드립니다. 형님께서는 저를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그런데 심부름꾼이 에서에게 갔다가 야곱에게 돌아와서 전하는 말은 심각한 소식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지금 부하 4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어른을 치려고 이리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야곱은 너무나 두렵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기 일행과 양 떼와 소 떼를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와서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 패라도 피하게 해야겠다고 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야곱은 우선 자기 가진 것 중에서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따로 골라냈습니다. 암염소 2백 마리, 숫염소 스무 마리, 암 양 2백 마리, 숫양 스무 마리, 젓을 빨리는 낙타 서른 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마흔 마리와 황소 열 마리, 암나귀 스무 마리와 새끼 나귀 열 마리 등이었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한 번에 보내지 않고 세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형 에서에게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가는 종들에게는 에서를 만나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인의 종 야곱의 것인데, 야곱이 그 형님 에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야곱은 우리 뒤에 옵니다” 야곱이 이렇게 지시한 데는, 자기가 미리 여러 차례 보낸 선물들이 그 형 에서의 분노를 서서히 풀어 주고, 마침내 서로 만날 때에는 형이 자기를 반가이 맞아 주리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야곱은 선물을 실은 떼를 앞세워 보내고 자기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자신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얍복 개울을 건너보낸 다음에 뒤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았습니다.
이 밤은 야곱에게는 가장 어둡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밤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위기를 막아보려고 자기의 지혜를 다 짜서 전략을 세웠지만 그에게는 심한 고독과 공포가 엄습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 어두운 밤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를 놓아 주지 않고 축복을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마침내 그에게 축복이 내려집니다. 그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야곱과 씨름한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 본문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호세아서에 보면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 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 야곱은 천사와 싸워서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호12:3~4)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씨름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동안은 묻어 두고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된 그의 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훔친 사건은 에서에게는 분노와 복수심을 품게 하는 사건이었고 야곱에게는 수치스럽고 자기 생에서 잘라내 버리고 싶은 사건이엇습니다. 야곱은 이 문제를 그가 전에 하던 방식, 즉 자기의 술수와 꾀와 약삭빠름, 감언이설로 남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햇지만, 이번 만은 그렇게 되지 않앗습니다.
야곱은 또한 자기에게 찾아온 밤에서 자신이 무척 왜소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그런 경험을 받아들이기 어려웟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온갖 전략과 경험과 술수가 능한, 그리고 실패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에서 본 자신은 힘없고 왜소하며, 자신이 쌓아온 재물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 조차도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완전히 무력한 한 인간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 밤은 어두운 밤이었고 두려운 밤이었습니다. 어둡고 두려웠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고, 그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무력화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략과 술수와 자신이 소유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먼저 잡으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힘을 쓰던 상징인 엉덩이뼈(허리뼈, 예렉)을 쳐서 그를 철저하게 무력화 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쓰던 자리가 무너짐으로 그는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성경은 ‘하나님과 겨루다’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마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 혹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를’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남을 속이는 사람’, ‘남의 뒷발꿈치를 잡는 사람’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 하나님께 승복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야곱 자신에게 있어서 얍복 강 나루의 밤은 어두운 밤이고 두려운 밤이었지만 은총의 밤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생의 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현실 생활에서 좌절감을 맛보는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 또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부침과는 관계없이 좀 더 영적인 메마름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좌절감과 메마름은 우리가 꼭꼭 숨겨두었던 우리의 모습, 우리가 부정해버리고 잘라내버렸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 줍니다. 자신의 가장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가오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는다면 우리에게는 은총이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동안 우리가 쌓아 올린 것, 내가 만들어 간 나로 우리 삶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그것이 어떤 삶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삶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삶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탄의 가장 드러나는 이미지는 밤입니다. 그러나 그 밤은 두렵고 공포스런 밤이 아니라 고요하고 거룩한 밤입니다. 그 밤은 이미 하나님께 승복한 밤입니다. 밤의 악령이란 아마도 우리 안에 감추어진 우리의 그림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의 밤은 악령이 설치는 밤이 아니라, 한 아기가 태어난 밤입니다. 그 한 아기는 두렵고 공포스럽고 악령이 설치는 밤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 아기는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아기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가져올 강한 군대나 로마황제의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아니고 무력하고 힘없는 아기로, 말구유에 뉘어져 있습니다. 그 아기는 청결하고 완벽한 요람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두엄과 오물, 짚과 건초가 범벅이 되어 있는 더러운 마굿간 말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 아기 곁에서는 그대 안의 모든 것이 허용된다. 더럽고 버려지고 짓밟히고 비루한 것도 거기서는 초라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온화한 빛 속에서 그대가 외면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얻고, 그분의 사랑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마음의 어둠과 혼돈 속으로 들어오심으로써 그대 안의 모든 것이 변화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마구간이 주는 위로다. 화학적으로 무결하게 청소되지 않은 상태야말로 하늘 아기에게 안전과 고향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누워 쉴 곳을 부드럽고 살 만하게 한다. 아기 곁에는 지나친 완벽이 오히려 낯설다. 아기가 바라는 것은 포근한 잠자리지 절대 무균의 침대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생긴 모습 그대로가 바로 그리스도의 집일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이 그대와 세상을 위해 태어나실 마구간임을 믿어라.
그 아기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권모와 술수, 속임과 과장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엉치뼈가 부러진 채로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비로소 새로운 아침을 열어내는 아기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했던 그 곳을 지날 때 해가 솟아올라 그를 비추었듯이, 내 안에서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는 우리의 삶을 새로 여는 결정적인 분이 될 것입니다.
성탄절은 밤이 가장 길고 어두운 동지 즈음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은 실제로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교회는 밤이 가장 긴 동지를, 그러나 다르게 보면,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성탄절로 제정했습니다.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밤이 깊으면, 빛은 반드시 다시 비추이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밤이 깊다면, 이제 새벽이 온다는 징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깨어 있어 여러분 가운데 태어나고 있는 어린 아기를 볼 수 있다면 비로소 여러분들은 성탄의 참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