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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역사적 배경
I. 중간 시대의 역사
1. 페르시아의 팔레스틴 통치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통치
3. 시리아의 통치와 마카비 혁명
4. 하스몬 왕가의 통치
II.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1. 정치적 상황
2. 반 로마 혁명
3. 사회 경제적 상황
III. 예수 당시의 종교적 상황
1. 배타적 유일신 신앙
2. 율법과 성전
3. 사두개파
4. 바리새파
5. 젤롯당원
6. 엣세네파
7. 쿰란 공동체
8. 서기관들
9. 묵시 사상
━ 예수는 한 역사적 인물로서, 그가 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태어났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의 구체적 상황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모든 활동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의 역사적 상황이 고려되지 않는 예수에 대한 모든 진술은, 예수 자신의 의도를 벗어난 추상적인 것, 비성경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바로 여기에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오류가 있습니다.
I. 중간 시대의 역사
━ 예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그의 이름은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여호수아(Jehoshua), 곧 "여호와가 도움이시다"를 뜻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친아버지는 누구인지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를 양육한 아버지는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예수가 태어났으므로 요셉은 친아버지는 아닌 셈입니다.
━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전통과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살았으며 먼저 유대인을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씀과 행위는 그 당시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예수가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생존하였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알 때, 우리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요, 그 상황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도 예언자들이 살던 그 당시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이 상황에 대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약 성경 기자는 예수가 살던 그 당시의 제반 상황에 대하여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헌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암시가 제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단지 종교적 문제와 관련된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도 단지 종교적 충돌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씀과 행위, 그의 고난과 죽음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과 직결되지 않은, 예수가 속한 사회의 구체적 문제들에 대하여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지 인류의 죄의 용서라고 하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해당하는 보편적 문제와 관계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 신약 성경의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하여 더욱 강화됩니다. 이 구절을 통하여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위, 그의 고난과 죽음은 황제가 다스리는 세속의 현실과 관계없는, 이 현실에 대하여 아무 의미도 갖지 않은 단지 "종교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모든 시대에 해당하는 소위 보편적 진리는 어느 시대에도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체적 상황과 문제와 갈등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해당하는 보편적 진리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통하여 특정한 상황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소위 보편적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체적인 상황과 문제들을 파악하고 이 상황과 문제들과 관련된 구체적인 말씀을 하였을 것이며 구체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도 그가 속한 사회의 구체적 상황과 문제들과 관련하여 일어났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보편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말씀과 행위와 고난과 죽음을 바르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가 속하였던 사회의 구체적인 상황 곧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물론 역사적 배경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가 오기까지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의 중간 시대 역사를 파악함으로서 예수의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예수 당시 팔레스틴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배경은 중간 시대의 빛 속에서 보다 더 분명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페르시아의 팔레스틴 통치
━ 유대교의 역사는 바빌론 포로 시대와 함께 시작합니다.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사마리아가 앗시리아 군대에 의하여 정복됨으로써 멸망하였습니다. 남 유대는 주전 587년 바빌론에 의하여 정복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상층 계급에 속한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빌론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고, 안식일과 할례의 계명은 그들을 선민으로 구별하는 표식이라고 믿었습니다.
━ 그러나 페르시아의 고레스(Kyrus) 대왕이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하고 중동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는 정복된 타민족에 대하여 앗시리아와 바빌론과는 다른 정책을 실천하였습니다. 페르시아는 피지배 민족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지도 않았고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페르시아는 피지배 민족들의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특이성을 인정하였고 이를 통하여 그들을 자신의 통치권 아래 두고자 하였습니다. 페르시아는 언어 소통을 위하여 자신의 언어를 요구하지 않고 그 당시 팔레스틴과 시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아랍어를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이러한 유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자신의 종교적인 삶과 특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레스 대왕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였고 느부갓네살 대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집기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주전 5세기 고레스 대왕의 칙령으로 고국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하였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결혼을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는데, 이 율법은 페르시아의 속국의 법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는 페르시아의 보호를 받았고 율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대와 페르시아의 이러한 유화적인 관계에 대하여 북쪽의 사마리아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앗시리아가 북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후 이방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고 사마리아인들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속한 남쪽의 유대인들은 북쪽의 사마리아들을 천시하였고 그들과의 관계를 피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남쪽의 유대와 북쪽의 사마리아는 결국 정치적으로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성전을 가지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으로 그리심 산에 그들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 그들 자신의 성전을 세운 이후로 사마리아와 유대의 관계는 적대 관계로 변하였고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마침내 유대는 주전 128년 요한네스 힐카누스(Johannes Hyrkanus)의 영도 하에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을 재건하지 않았으나 그리심 산을 그들의 성소로 지켰습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에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들은 서로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눅 17:18 참조).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에 대한 욕이었습니다(요 8:48).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으나 유대인들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의 땅에 들어갔으며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동을 찬양합니다(눅 10:30∼37). 그리고 몸이 깨끗해진 열 사람의 나병환자 가운데 아홉 사람의 유대인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던 반면, 단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음을 칭찬합니다(눅 17:11∼19).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통치
━ 주전 333년 이쑤스(Issus)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3세를 이긴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틴은 물론 이집트까지 정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막강한 힘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있었던 그들의 자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아무 어려움 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 그러나 유대인들은 희랍의 문화적 영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희랍의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팔레스틴으로 와서 그들의 문물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희랍인들의 주거지와 도시들이 세워졌고 희랍어가 통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희랍어를 할 수 없었던 사람은 야만인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게 저항한 사마리아에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많은 도시들이 희랍어로 된 도시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희랍의 법률을 받아들였습니다. 희랍 양식의 건물들과 극장과 운동 경기장이 건축되었고 희랍의 운동경기가 개최되기도 하였습니다. 희랍의 생활 습관도 유대인 속에 침투하였습니다.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진리를 찾는 대화법을 유대인들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련의 유대인들은 희랍의 문물에 대하여 호감을 보였고 그것을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희랍의 스파르타인과 유대인들이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제1 마카비서 12:21). 그러나 이와 같은 희랍 문물의 영향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렸고 그들의 선민 의식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23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후 희랍은 후계자들의 정권 투쟁에 빠졌습니다. 결국 희랍은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있었던 네 장군에게 분할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땅 팔레스틴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프톨레미 장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 지역의 장군이었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주전 315년 팔레스틴을 점령하였습니다. 안티고누스의 세력이 막강하게 되자 다른 장군들이 이를 시기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이집트의 프톨레미가 다시 팔레스틴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프톨레미 왕가의 통치로 말미암아 희랍 문물의 영향을 더욱더 크게 받게 되었습니다.
━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로 프톨레미 왕가도 유대인들의 종교와 내정의 자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지들)에 의하여 구성된 산헤드린이 구체적인 문제들을 결정하였습니다.
3. 시리아의 통치와 마카비 혁명
━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Antiochus) 3세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가를 물리치고 팔레스틴을 장악하였습니다. 세력권이 에집트에서 시리아로 옮겨진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3세의 세력에 가담하였고 이를 통하여 그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셀류시스 왕가는 희랍의 문화를 그들의 점령 지역에 확장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 특히 제사장들이 이에 호응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대표로서 시리아 왕의 명령과 법을 시행해야 했으며 시리아 왕이 부과한 세금을 거두어 바쳤습니다. 주전 175년 안티오쿠스 4세가 시리아의 왕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Onias)였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그의 친동생 요수아(Josua)는 그를 시기하였습니다. 요수아는 자기의 이름을 희랍 풍의 야손(Jason)으로 고치고 시리아에게 거액의 뇌물을 줌으로써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오니아스는 몇 년 후 안디옥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형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은 야손은 팔레스틴의 희랍화를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 메넬라우스(Menelaus)가 야손보다 더 많은 뇌물을 공여함으로써 야손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을 이긴 로마가 이집트와 시리아를 공격하는 정치적 공백기를 이용하여 야손은 무력으로 메넬라우스를 추방하고 대제사장직을 다시 빼앗고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 4세는 크게 노하여 메넬라우스를 복권시켰습니다. 복권된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스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전 169년 안티오쿠스가 전쟁으로 바닥 난 그의 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집기들을 시리아로 빼앗아 갈 때에도 그는 저항하지 못하였습니다.
━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민족의 희랍화와 종교 탄압을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는 사람들을 사형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물 제단에 제우스를 위한 제단이 세워졌고(주전 167년),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돼지를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독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안티오쿠스의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과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의 사자(使者)들이 팔레스틴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종교 탄압 정책을 수행하였습니다.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안티오쿠스의 정책에 별로 저항하지 않고 희랍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였던 반면, 시골의 주민들은 완강히 저항하고 조상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모데인(Modein)에 사는 하스몬 일가의 우두머리요 제사장이었던 마타티아스(Mattathias)는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하는 왕의 사자를 죽이고 자기의 아들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피신하였습니다(제1 마카비서 1:15∼28).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몰려와 무리를 이루고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이방인의 신전을 파괴하며 타락한 유대인들을 벌하였습니다.
━ 마타티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무리의 지도자가 되어 저항운동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마카비"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것은 아랍어 마카바(makkaba) 곧 "망치"를 뜻합니다. 그들은 좋은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고 망치와 같은 연장이나 농기구를 무기로 변조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마카비라는 이름은 유다의 뛰어난 용맹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안티오쿠스는 그의 장군 리시아스(Lysias)를 팔레스틴으로 보냈으나 유다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유다는 더렵혀진 성소들을 회복하고 주전 164년 12월 25일 예루살렘에 새로운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매년 성전 봉헌의 축제를 거행합니다(요 10:22 참조;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 그러나 시리아 군대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고 용감한 유다는 성을 빼앗고자 하였습니다. 그 당시 안티오쿠스는 사망하였고 나이 어린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섭정관은 리시아스였습니다. 리시아스는 잘 무장된 군대를 팔레스틴에 보내어 유다를 공격하여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이 때 리시아스는 그를 반대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인하여 궁지에 처하였고 이를 모면하기 위하여 유다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통치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유대교의 일대 개혁이 감행되었습니다.
━ 부패한 대제사장 메넬라우스는 이 개혁 운동으로 인하여 제거되었습니다. 그 당시 왕위를 찬탈한 시리아의 왕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아론의 후손이요 희랍화 운동의 지지자였던 알키무스(Alkimus)를 제사장으로 봉하였습니다. 마카비 혁명에 가담하였던 하시딤(경건한 자)들은 알키무스에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는 그를 불신하였습니다. 유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얻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알키무스의 요청으로 그를 공격한 시리아 군대와 싸우다가 주전 160년 전사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살해당하였고 다시 광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유다의 동생 요나단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시리아에 정권 분쟁이 일어난 것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알키무스가 죽은 다음 비어 있었던 대제사장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전쟁의 피로 몸을 더럽힐 수밖에 없었고 제사장 사독의 후손이 아니며 단지 시골 제사장의 아들에 불과한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자 하시딤 일파는 요나단과 결별하였습니다.
━ 요나단이 시리아의 음모로 주전 143년 살해되자 그의 동생 시몬(Simon)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회복하고 세금을 시리아에 바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으며 유대인들만이 사용하는 화폐를 만들었습니다. 주전 140년 그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대제사장인 동시에 세습적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하스몬 왕가가 세워졌습니다. 많은 제사장들과 하시딤이 이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일군의 하시딤은 사해 부근의 광야로 은퇴하여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 당시의 쿰란 수도사들과 엣세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후예들입니다. 시몬은 주전 134년 그의 사위 프톨레미에 의하여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프톨레미는 왕이 되지못하고, 시몬의 아들 요한네스 힐카누스(Johannes Hyrkanus)가 왕이 되었습니다.
4. 하스몬 왕가의 통치
━ 힐카누스는 그의 아버지 시몬의 뒤를 이어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용한 용병을 데리고 유다의 통치 영역을 확장시켰으며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두메의 주민들은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되었고 사마리아는 주전 107년 정복되었습니다. 힐카누스는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사두개인들과 친화하였습니다.
━ 힐카누스는 본래 자기가 죽은 다음 자기의 부인에게 나라를 맡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Aristobul)이 그의 어머니와 세 형제를 감금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남은 형제 안티고누스(Antigonus)를 국정에 참여시켰으나 그를 의심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 아리스토불이 주전 103년 사망하자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가 감옥에 있던 그의 세 형제를 풀어 주고 첫째 형 요나단에게 왕위를 맡기면서 그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그의 이름을 희랍 풍의 얀네우스(Janneus)로 고치고 세력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정복된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화시켰으나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얀네우스는 800명의 반란자들을 생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반란자들 앞에서 자기의 부인들과 향연을 벌리면서 반란자들의 부인과 자녀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게 하였습니다.
━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은 다음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바리새인들의 양해를 얻어 무능한 그의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봉하였습니다. 그녀는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을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게 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환심을 얻은 반면 사두개인들의 원성을 들었습니다.
━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은 다음 그녀의 아들 힐카누스 2세가 왕이 되지못하고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 2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두 형제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로마의 폼페이우스의 환심을 얻어 상대방을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내 힐카누스가 폼페이우스와 가까워지자 아리스토불은 3개월 동안 그에게 저항하다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폼페이우스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방인이 지성소 안에까지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리스토불과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와 안티파테르(Antipater)는 로마에 감금되었고 힐카누스는 다시 대제사장으로 봉함을 받았습니다.
━ 그러나 아리스토불과 그의 두 아들이 팔레스틴으로 다시 돌아왔고 힐카누스의 무능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 때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권력을 노리는 시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시저가 이기고 폼페이우스가 주전 48년 이집트에서 살해당하자 힐카누스는 그의 지지자 안티파테르와 함께 원병을 시저에게 파견함으로써 시저의 환심을 얻었습니다. 힐카누스의 대제사장직은 보존되었고 유대교는 로마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의 아들 파사엘(Phasael)은 유다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헤롯(Herodes)은 갈릴리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 시저가 살해된 후 안토니우스(Antonius)가 로마의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안티타페르는 암살되고 힐카누스와 안티파테르의 두 아들은 그들의 직분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nus)가 반란을 일으켜 힐카누스와 파사엘을 체포하였습니다. 파사엘은 자살하였고 안티고누스는 그의 숙부 힐카누스의 귀를 베어 버린 다음 그의 제사장직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왕인 동시에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약삭빠른 헤롯은 살아남았습니다.
━ 목숨이 위태롭게 된 헤롯은 로마로 도주하여 유다의 왕으로 봉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선 영토가 없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주전 37년 로마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얻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안티고누스는 처형되었고 왕위를 회복하려는 하스몬 왕가의 마지막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헤롯은 매우 잔인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가 권좌에 있을 동안 그는 안토니우스의 편이 되어 그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왕권을 지켰습니다. 그는 그에게 의심스러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귀가 잘려 버린 그의 숙부 힐카누스를 결국 살해하였습니다. 그는 하스몬 왕가의 마지막 공녀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함으로써 하스몬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의 일족이 그의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그의 부인 마리암네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희랍의 문물을 도입함으로써 로마의 환심을 얻는 동시에 성전을 개축하고 회당을 장려하는 등 유대교를 보호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헤롯의 통치 기간 말기에 세례 요한과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롯이 두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게 하였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그의 잔악한 성격을 고려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II. 예수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중간 역사를 개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가 생존하던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1. 정치적 상황
━ 팔레스틴 전역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왕은 그의 생애 말기에 후계자를 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그는 그는 후계자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그의 아들 세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죽기 직전 그가 남긴 유서에서 그는 자기의 왕국을 다른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아켈라우스(Archelaus)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메의 왕으로 봉하였고, 헤롯 안티파스(Herodes Antipas)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 왕으로 봉하였으며, 필립보(Philippus)는 북쪽의 요단강 동편(베다니, 드라고닛) 지역의 분봉 왕으로 봉하였습니다. 이 세 형제는 아버지 헤롯 왕이 사망한 직후 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갔습니다. 이 때 유대인의 대표들도 로마로 가서 헤롯 왕가를 철폐하고 유대교의 자율성을 회복시켜 줄 것을 황제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누가복음 19장 12-14절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황제는 유대인 대표들의 진정을 묵살하고 헤롯의 유언에 따라 그의 세 아들을 팔레스틴 지역의 통치자로 인준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버지 헤롯과 같은 왕의 칭호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통치하는 자가 곧 그들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은 아켈라우스는 물론 안티파스도 왕이라고 부릅니다(마 2:22, 막 6:14,26, 마 14:9).
━ 유대인들은 아켈라우스를 가장 미워하였습니다. 그는 너무도 잔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유대인 3,000명을 처형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절단이 다시 로마로 가서 황제에게 아켈라우스를 고발하였고 아켈라우스는 주후 6년 갈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아켈라우스를 몰아낸 유대인들은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켈라우스가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메를 로마의 속주로 격하시키고 시리아 지역의 로마 황실 총독에게 병합시켰습니다. 시리아의 황실 총독은 가이사랴에 유다 총독을 거주케 하고 유다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유다 총독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고 산헤드린에게 국정의 세부적인 일들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사형 언도와 사형 집행은 총독의 권한에 속하였습니다(요 18:31).
━ 아켈라우스를 대신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역을 다스리게 된 로마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 의하면 그는 부패하였고 간교하며 잔인하였습니다. 그는 정당한 판결 없이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황제의 상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예루살렘으로 가져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손상시키기보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탄원하자 빌라도는 그 깃발을 예루살렘에서 치우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관개 시설을 건축하기 위하여 빌라도가 성전의 금품을 취하였을 때 큰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빌라도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참하게 폭동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리심 산에 모세 시대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모여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빌라도는 죽이거나 체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은 모두 체포하여 처형하였습니다(막 15:7,27 참조). 예루살렘은 유다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예수는 당시 유다 지역의 통치를 맡고 있던 빌라도 밑에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 요단강 동편 지역의 통치를 맡고 있던 빌립보는 새로운 마을을 건축하고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지었습니다(막 8:27 참조). 겐네사렛 호수는 그의 통치 지역과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지역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가버나움에는 세관과 더불어 안티파스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경비병들의 대장(백인 대장)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8:5-13). 처음으로 동전에 로마 황제의 상을 새겨 넣게 하였습니다. 그는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주후 37년에 사망하였습니다.
━ 예수 당시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는 헤롯 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겐네사렛 호숫가에 마을을 건축하고 당시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는 표시로 이 마을의 이름을 티베리아라고 이름지었습니다(요 6:1,23, 21:1). 이 마을의 자리는 본래 묘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마을을 불경스러운 마을로 생각하였고 거기에 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안티파스는 이런 일에 개의하지 않았고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였습니다. 본래 그는 나밭족 왕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그의 동생의 부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롯 왕과 마리암네의 손녀였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을 금하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욕심 많은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한 다음 그의 본 부인을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내어쫓고 딸 살로메를 낳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안티파스의 이 부정한 일을 고발하였고 결국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죽음은 사실 안티파스가 사전에 조작한 연극임을 삼척동자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안티파스는 이와 같이 간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불렀습니다(눅 13:32). 안티파스는 결국 헤로디아 때문에 망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남편 안티파스에게 당시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게 왕의 직분을 간청하라고 속삭였습니다. 안티파스를 의심한 칼리굴라는 그에게 왕의 직분을 하사하는 대신 그를 갈리아로 유배시켰습니다(주후 39년).
━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할 때 예수는 헤롯 왕이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리고 있을 당시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린 소년일 때 헤롯 왕이 죽었고 그의 세 아들(아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빌립보)이 나라를 나누어 받아 통치하였으며, 아켈라우스가 갈리아로 유배당하고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그의 땅을 다스리는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헤롯 왕이 주전 4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주전 4년 이후에 태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주전 7년 또는 6년으로 추산됩니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던 헤롯 왕이 죽었을 때 예수는 2 살이나 3 살이었을 것입니다.
━ 예수가 살던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하였고 흉흉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탄압과 착취, 로마와 결탁한 이스라엘 지도층의 횡포와 매국적 행위에 분개한 백성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헤롯 왕이 성전의 현관 위에 황금 독수리 상을 세웠는데, 청년들이 율법 학자들의 사주를 받아 대낮에 밧줄을 타고 지붕에서 내려와 황금 독수리 상을 도끼로 부수어 버렸습니다. 40명이 주모자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헤롯이 죽은 다음 아켈라우스가 유다 지역의 통치를 맡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이 청년들을 처형케 한 대제사장과 관리들의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아켈라우스가 망설이자 격노한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켈라우스는 군인과 기마병을 풀어 유대인 3,000명을 죽였습니다. 나머지 유대인들은 산으로 피신하였습니다.
━ 아켈라우스가 그의 두 형제들과 로마 황제를 방문하고 있을 동안 유대인들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시리아 지역의 로마 황실의 총독 바루스(Varus)가 반란을 진압하고 일개 군단 즉 6,000명의 로마 수비대와 아우구스투스의 재정 장관 사비누스를 예루살렘에 남겨 두어 죽은 헤롯 왕의 유산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사비누스는 매우 욕심이 많고 부패한 자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습니다. 그는 성전의 보물도 삼키려고 하였습니다. 마침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던 유대인들이 3열로 서서 사비누스와 왕궁에 있던 그의 수비대를 포위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회당에 불을 질러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으며 성전의 보물을 약탈하였습니다. 사비누스는 알려진 것만으로도 400달란트를 차지했습니다. 이에 분노하여 아켈라우스의 유대인 부대마저 유대인 민중과 합세하여 로마 군대를 포위하였습니다. 사비누스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바루스는 새로 2개 군단과 거기에 딸린 기마병을 이끌고 팔레스틴으로 진군하였습니다. 2만 명의 유대인들은 추풍낙엽과 같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나머지 1만 명이 산으로 피신하여 재집결하였으나 바루스의 로마 군대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 이 때 헤롯의 사촌 아히압(Achiab)이 개입하여 유대인들의 반란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설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투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유대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 저항하였습니다. 로마 군대는 끝까지 저항하는 유대인 2,000명을 생포하여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로마 군대가 점령한 엠마오 마을은 바루스의 명령으로 완전히 불에 타 버렸습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31-32).
━ 수많은 농민들이 빈곤에 찌들 리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농토를 포기하고 산적의 무리에 가담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도적 떼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결탁한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하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헤롯과 그의 아들들은 언제나 다시금 되살아나는 그들의 반란을 진압하느라고 고심하였습니다. 바라바와 예수의 십자가 양편에 달렸던 두 강도도 아마 이러한 종류의 의적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가는 곳마다 도적의 무리로 흉흉하였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눅 10:30).
2. 반 로마 혁명
━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의 탄압과 모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악화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희랍인들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보호를 요청하였으나 아무 도움도 얻지 못하자 유대인들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총독 플로루스(Gessius Florus)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후 66년 그는 성전의 금고에서 17달란트를 탈취하였습니다. 이것이 발화점이 되어 큰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노한 군중들을 유화시키려 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팔레스틴의 로마 주둔군이 참패당하고 대제사장과 친 로마 지도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시리아 지역의 로마 총독 체스티우스(Cestius)가 군대를 끌고 왔으나 무장된 유대인들을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 여러 곳에 요새가 구축되었습니다.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당시 젊은 제사장이었던 요세푸스(역사가 Josephus를 말함)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되었습니다.
━ 마침내 로마의 황제 네로(Nero)가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을 팔레스틴으로 보내었습니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는 안디옥을 거쳐 팔레스틴으로 진군하였고, 그의 아들 티투스는 이집트의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틴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먼저 갈릴리가 함락되었습니다. 47일간의 저항이 실패로 끝나자 젤롯당원들은 자결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를 반대하고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진영에 머물면서 전쟁의 목격자가 되었고 나중에 로마의 국록을 받는 사가(史家)가 되어 "유다 전쟁사"를 기술하였습니다. 젤롯당원의 지도자 기샬라(Johannes von Gischala)는 주후 67년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도피하였습니다. 로마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사태의 진전을 관망하였습니다. 주후 69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의 황제로 추대되자 그는 자기의 아들 티투스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주후 70년 유월절에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눅 21:20∼22;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참조 눅 19:43∼44).
━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티투스에게 붙들린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였습니다. 생포된 기샬라는 승리의 축제를 위하여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저항은 곳곳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맛사다의 저항이 가장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오랜 투쟁 끝에 로마 군인들이 맛사다를 점령했을 때 모두 자결한 젤롯당원들의 시체만 발견되었습니다. 단지 지하의 수로에 숨어 있었던 두 여자와 다섯 아이들만 살아 있었습니다. 주후 70년 맛사다가 함락되면서 제1차 반 로마 혁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유대는 시리아 행정구역에서 분리되어 로마 황제의 지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로마의 제10군단이 예루살렘에 주둔하였습니다.
━ 그러나 유대교 재건 운동이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파멸과 함께 사두개인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 희생 제사를 더이상 드릴 수 없었으므로 회당이 유대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야브네(Jabne)에 산헤드린이 다시 형성되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의 유지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서기관들만이 산헤드린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로마는 이것을 허용하였습니다.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에서 징수되었던 성전세는 계속 징수되었으며 로마의 국고로 환수되었습니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2차 혁명이 주후 132년 일어났습니다. 당시 로마의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중동 일대를 여행하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 위에 로마의 신전을 건축하게 하고 유대인의 할례를 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서 있던 자리에 이방인의 신전이 세워지고 하나님과의 계약의 표시인 할례가 금지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마침내 발 코바(Bar Kochba)가 주동이 되어 반 로마 혁명이 다시 일어났고, 랍비 아키바는 그가 메시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야는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코바가 전사하고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발 코바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주후 135년 예루살렘은 폐허화되었습니다. 로마는 여기에 새로운 로마의 도시를 세우고 "Colonia Aelia Capitolina"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쥬피터 신전이 여기에 세워졌습니다. 이방인들이 이 도시에 입주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혁명을 주도한 서기관들은 몰살되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로만 군인들은 랍비 아키바를 생포하여 쇠로 된 빗으로 그의 살을 빗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다"(신 6:4)라는 마지막 고백을 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랍비 아키바는 "한 분뿐"이라는 이 말을 입술에 길게 남기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혁명의 실패와 함께 유대인들은 1948년 팔레스틴에 정부를 다시 세우기까지 나라와 영토를 잃어버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랑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유대인들은 1813년 동안 그들의 영토를 잃어버렸다. 이 기간은 한국 민족이 발해의 멸망과 함께 지금까지 만주를 중국에 빼앗긴 기간보다 훨씬 더 길다).
3. 사회ㅑ경제적 상황
━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매우 불안하였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소수의 권력층과 갈릴리의 대지주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땅의 대부분은 오늘과 마찬가지로 메마른 광야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생계는 별로 많지 않은 농업, 목축업, 수공업, 상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갈릴리와 겐네사렛 호수 주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요단강 가의 주민들은 포도, 무화과 나무 등을 재배하였습니다. 어떤 직업은 천시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정결법을 지킬 수 없었던 피혁 공이나 로마 총독의 임명을 받아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리의 직업은 부정한 직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헤롯 왕과 그의 아들들이 일으킨 많은 건축 사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반면, 많은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수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직 상태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3절("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은 청지기 직업을 잃어버렸을 때 남의 땅을 소작하거나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무거운 세금의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개개인에게 부과된 성전세를 냈습니다. 또 레위 자손을 부양하기 위하여 모세가 정한 십일조와 모든 소득의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고위 성직자들이 착복하여 치부하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도 냈는데, 이것 역시 종종 고위 성직자들이 착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세금 외에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나 조공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금에는 토지세, 로마의 세무원에게 직접 지불하는 개인세, 유대인 수납원을 통해 바치는 간접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팔레스틴 땅이 여러 징세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경계선마다 세무소 내지 세관이 있었습니다(마 9:9, 막 2:14 참조). 세리들의 사무실이 길과 다리와 국경 지역과 호숫가 등을 지키면서 각종 사용료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이 세금은 권력층을 살찌웠습니다.
━ 농민들 수입의 약 60 퍼센트가 세리와 채권자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자가 붙는 금전 대여는 유대교에 의하여 금지되어 있었지만 세금에 허덕이던 납세자들은 고리대금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고리대금 업자들은 연리 24 퍼센트(월 2부)의 이자를 채무자들에게서 뜯어냈습니다. 채권자와 때로는 왕까지 변제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게 부채가 청산될 때까지 그 자신과 그의 아내와 자식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리하여 중산층과 소자산층이 사라진 반면, 왕을 중심한 관료들과 성전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신이상이 된 자들(소위 마귀에 걸린 자들)과 병든 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집뿐만 아니라 의복마저 저당 잡고 마지막에는 자식들과 함께 고리대금 업자의 종이 되어 고엘(희생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을 말함)로도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과부들도 있었습니다. 부의 잉여는 모두 지배 계층으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집결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가난한 대중의 경제적 차이는 극복할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반발은 극도로 심화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반란이 거듭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반란자들을 생포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많은 부인들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아힘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는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계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A. (1) 사제들
B. (2) 레위인 및 종교 지도자층(바리새인, 랍비 등)
C. (3) 이스라엘인(순수한 혈통, 평신도)
D. (4) 사제들의 사생아
(5) 이방인 개종자들
(6) 성전 노예의 개종자들
E. (7) 사생아
(8)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들
(9) 미아들
(10) 인공으로 거세된 자들
F. (11) 자연적으로 거세된 자들
(12) 성 불구자들
(13) 양성(兩性) 소유자들
G. (14) 이방인, 세리들
━ 참 이스라엘은 A∼C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D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속할 수는 있으나 종교적 지도층이 될 수 없었습니다. E항의 사람들은 완전하지 못한 계층으로 A∼C의 계층과는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F항의 사람들에게는 결혼 자체도 허용되지 않았고, G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대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러한 엄격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은 출생과 결혼을 통하여 결정되었습니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빈민들은 억압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여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지주들이나 로마 제국에 의하여 파송된 자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으며, 주로 동굴에 은거하면서 다른 지역의 도적들과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적의 두목들은 "왕"으로 자처하였으며, 자기를 "메시야"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요세푸스, 유다전쟁사, 제1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