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을을 제외하곤 겨울이건 여름이건 송골까지
걸어다니는건 너무 힘들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20리 길을 걸어 올라가면
몸은 파김치가 되고 온 몸이 새카맣게타서 뺀질뺀질한
시골 계집애의표본 모습이 굳이 설명 안해도 그려질거다.^^;
장터 애들하고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모습들이었지?
장사해서 현금을 만지는 부모님들을 둔 챗거리 애들은
머리도 미장원에서 예쁘게 자르고
이쁜 옷도 자주 얻어 입었을것이고 멀리 걸어다닐 일이
없었으니 얼굴탈일도 없었겠지? 밭에나가 일을 안하니
뽀얗고 예쁠수밖에.....넘 부러웠음.
겨울은 겨울대로 그시절엔 유난히도 추웠었지?
지구온난화로 뜨거워진 요즘과는 비교도 안된다.
오리털 파카에 기능성 옷들이 즐비한 요즘애들에 비하면
우리 낀 세대들은 너무도 불쌍했다. ㅠㅠ
누덕누덕 기워 신은 양말에 내복들, 목도리도 변변찮아
늘 떨고 다녔고,감기 비염에 언제나 콧물이 줄줄 흐르니
팔뚝에다 슥슥 문질러댔고 소매자락은 언제나 광이났다~
특히나 유영구(옹구) 정걸이,야들은 더했던걸로 기억나는데,
들으면 이눔의 지지배가 하면서 날 욕할까?ㅎㅎ
도데체 현금은 좀처럼 만질수없는 시골애들은
(송골,특히나 지리실) 하루에 등 하교길 딱 두번 다니는
버스도 태반은 타질 못했고,차 기다리는 친구들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보며 걸어야 했고 부지런히 걷고 뛰어도
늘 지각은 달고 살았고,샘께 혼나고 벌서고
친구들에겐 찌질이로 찍히고 놀림감이되곤했다,ㅠㅠ
양은 도시락에 고추장을 반찬으로 싸오는 날이면
더운 날씨에 점심 먹을땐 한쪽에 벌써 쉰내가 풀풀났었다.
그때는 속도 좋았지,요즘 애들 같앴으면 금방 식중독이다.*^^*
그나마 계란 후라이에 멸치볶음 콩자반은 특급반찬이였고
그런 도시락 먹는 애들은 우리에겐 먼 미지의 사람들이었지?....
중학교를 지나 마령으로 가는길은 어린 우리에겐 너무 멀었다.
한참을 올라가면 장사리가 보이는 굽이길이 나타나고
저멀리 동책이,철현이가 살았다는 마째가 보였다.
장사리에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가 우리송골이나
이식골의 중간쯤이 아니었나 싶다.
마째 친구들이야 거의 다 왔다고 한숨 돌렸겠지만,
우리 송골은 저 멀리 보이면서도 걸어가보면 왜그리 멀기만한지,...
송골과 마째로 갈라지는 삼거리엔(장사리) 집두채가 있었는는데,
그한집에 또 기가 맥힌 사연이 있었다.
몇째 아들인지는 몰라도 어릴때 응가를 했고
다들 들에 나가고 뒷처리를 제대로 못해서인지,
망할놈의 똥개가 응가 먹는것 까진 그땐 흔했지만
그걸로도 양이 안찼는지 아가 엉덩이 까지 널름거리다
글쎄 !! 고추까지 따 먹어 버렸다네???
그래서 그집 아들 하나는 거시기 없는 불구라는 얘기가
떠돌았는데 그말은 사실인지는 확인할수도 없다...
또 그쪽 무슨댁 이라곤 말은 못하겠는데,
찐한 에피소드 하나 그옛날 송골인가 용점
누구네 담배를 엮어 다는날,어느 아지매가 품앗인지
품을 팔러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여름이라 얼마나 덥고 또 담배진이 찐득하니 묻어 나는게
참 힘들었겠지? 이양반이 밑에서 올려주실일이지
사다리위로 높이 올라가서 담배줄을 받아드는데,
띠~용?? 무명치마사이로 속이보이는데,
더워서 그러셨는지 글쎄!! 고쟁이를 안입으셨더라네?
그 아래서 올려주시는 남정네는
그날 그아지매가 담배 막창달고 내려오실때까지
수도없이 그속을 구경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야릇했을것이며
아랫도리에 힘은 또 얼마나 들어갔을까?
더워서도 땀을 흘렸겠지만 온 몸이 비비 꼬여 견디기힘든
진땀으로 엄청 힘들었겠지? 그리고 짓굿은 남자들의 입으로
소문은 퍼졌을 것이고 두고 두고 회자되었을것이다~!!!~~
그흔한 몸빼 바지라도 입으시지..
그 아지매 달리 내 놓으실건 없고 눈 보시 라도
하라고 일부러 그러셨을까? 워낙에 더웠으니까....
혹여 그집 식구나 친척이 이얘기를 들으면 유언비어
유포죄로 피소당할까 무섭다......
어디까지나 어렴풋이 전해들은 얘길뿐 사실인지는
확인할길이 없음~!!~~~~
어쨋든 용점이나 송골이나 거의가 이씨들
집성촌으로 우리외가 집안들이 살고 계셨다.
만나면 전부 아재요 아지매,할배,할매였으며
누구 연모 할 상대도 없었다,
더러는 처녀들이 머슴살러온 일꾼들과
염문이 돌기도 했고,인심도 좋았고 어느집을가도
숟가락 들고 앉아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가까운 집안들이였다.*^^*~~~`
장사리서 얼마 걸어 올라가면 왼쪽에
용점이라는 작은 동네가 나오고,
그 용점 앞산엔 이상민네 선산이였던가?
암튼 묘지가 엄청많았고,시월 시사때는 떡
받으러도 많이 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두위지는 저녁이면 무서워서 그곳을 지나려면
머리칼이 곤두서는 그런곳이었다,
송골에 상민이 아버님은(내게는 할배) 밤늦게 챗거리서
자전거 타고 올라오시다 뭣에 홀려 밤새 고생하시다
날샌적이 있으시단 얘기도 들었고,
여러사람이 귀신에 홀렸단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엔 각 골마다 이런곳이 한두군데는 있었지?
그위로 무덤실이란 곳도 있었는데, 이름그대로 무덤이
많았고 그곳역시 밤이면 걷고싶지않은 피하고 싶은골이었다.
하지만 어렸을땐 그랬어도 지금생각하니 호젓한 그 길은
아름다웠고, 각종 새들이 지저기는,갈대밭도 한가로이
전형적인 시골의 운치가 느껴지던 그곳이 가끔은 꿈에도
나타나곤한다, 아름다운 송골, 물좋고 뻐꾸기,소쩍새 우는
그 송골이 너무도 그립다. 비롯 없는 서름도 많이
겪었지만 이렇듯 아름다운 산천도 동리 인심도 무척
좋았던 마령3동 송골이 미치도록 그립다~아~송골~~~~
첫댓글 너무 심심 하실까봐 우리까페에 올렸던걸 담아와 봤습니다 혹여 장사리 살았던 분이 보시면 존심 상해할까 걱정도 되지만 픽션으로 읽어주세요^^;
국민학교 3학년까지 걸어다녔던 이식골 가는 길이 눈에 선하게 보이네요..세갈래 길이 있는 그곳이름이 장사리라는 것이 새삼스럽네요..어쩜~~ 기억력도 좋으셔라....십리길 이라는 이식골 가는길이 늘 지치게 멀고 힘들었는데..^^* 그 어린날 지겹게 지루했던 집에가는 길이 어제인양 한눈에 그려지네요...
그 오지(송골)에서 그래도 장군(이상철 소장)이 나고, 판.검사 거쳐 현직 변호사(이원섭)도 있고, 국가 고급 공무원(철도청 이상원국장)도 배출 됐고, 현재 행정고시 합격후 과천 청사(부서는 아리송)에 근무하고있는(이가희)이도 있으며,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허나....그때는 어디던 살기가 어려웠고 가난을 벗지 못했지요. 박 대통령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되었어도,그 분을 욕하는 좌경 용공분자들이 있어 안타까울뿐.......(참고로 송골은 지금 전부 수몰(임하댐)이 되어 옛 송골터 표지석만 자리를 지키고 있음)
네 외당숙님도 고려대 교수로 게시단 얘기 상민이 통해서 알았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많은 분들이 마령동 골짜기에서 배출됬다니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그외 지리실,용점 등에서도 다들 전국 곳곳에서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고 계시니 우리 임동인들 자부심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