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밥벌이가 못 된다. 연극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연극인을 아는 사람들도, "연극하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뭐 할라고 연극하나?" 이렇게 빈정거릴 줄도 안다.
그런데도 한사코 연극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세상도 참 희한하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돈도 안 생기는 일에 골몰하는 바보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건 새삼 낯설게 다가오는 야릇함이다. 그런데도 사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하는데는 그런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는지? 한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 속을, 먹고 살 걱정만으로 채우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비교적 밥 걱정은 덜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도 연극은 있지만 그 때보다 좋은 상태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극장은 많아졌으나 관객은 더 적다. 이것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사실이지 영화나 텔레비전에는 재미있는 볼거리가 차고 넘친다. 안방에서 편안한 자세로 채널만 조절하면 환상적이고 통속적인 흥미거리가 통째로 쏟아진다. 그런데 뭐 하려고 멀리 극장까지 찾아가서 어렵사리 주차하고 비싼 입장료를 낼까보냐?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상설 극장에 연극 관객이 늘 가득가득 찬다고 한다. 호기심으로 온 관광객이 아니라 평상시에 그 지방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영화관에 갈 줄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집에 텔레비전도 없는 사람은 물론 아니다. 참 이상할 정도로 연극을 즐기고 있다. 그 덕분에 유럽 연극은 그 수준도 높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는 호화찬란한 뮤지컬 한 작품이 수 년간, 또는 십수 년간 관객을 붙들고 놓아줄 줄을 모른다. 심지어 유럽에서 비행기까지 타고 와서 구경하고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정말 돈 많고 할 일 없는 사람들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문화를 향유한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 주는 듯하다.
현실에 효용없는 연극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서울에서 영화제작비에 육박하는 기금을 들여 만든 연극을 대구까지 가지고 와서 구경하시라고 하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름난 공연이 전국을 순회할 때, 무식하게도(?) 흥행이 안 될 것을 염려하여 더러 빠뜨리기도 하여, 용돈을 절약시켜주는 이 대구에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서울 연극이 관객을 다 휩쓸어 가고 난 뒤에 소수의 뜻 있는 관객들 앞에서 펼치는 대구 연극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다고 해서 벗기기 연극이라도 하여 관객을 모아서야 되겠는가.
서투른(아무래도 본 고장 사람들만 못할 것이니) 브로드웨이 뮤지컬 흉내를 내서야 되겠는가. 관객의 입맛에 찰싹 달라붙는 상업극으로 예술을 타락시켰다는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일단 관객을 붙잡아 두고보자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척박한 이 고장의 풍토라도, 그래도 '쟁이'의 양심이 있는데. 비록 대구 사람이 대구다운 빛깔을 가진 연극을 한다고 버티어 온 보람이 지금은 없을지라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물론 '파도'는 '연극'이고 '임'은 '관객'이다. 연극이 지금 이 시대에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연극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뻔하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효용은 없다. 연극은 굶주린 사람에게 밥을 주지 못한다. 교통 사고도 막아 주지 못한다. 공장의 폐수 방류를 그만 두게 할 줄도 모른다. 환자의 위암을 낫게하지도 못한다. 누명을 쓴 죄 없는 사람을 구해주지도 못한다. 작게는, 나뭇잎 하나도 흔들지 못한다. 그런 연극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언젠가 영화가 텔레비전에 밀려 사양산업이란 딱지가 붙어 고전하다가 제자리를 찾은 것도 바로 얼마 전이다. 이제 영화는 한 편의 관객을 수십 만에서 백 만, 이백 만을 단위로 센다.연극의 경우 관객이 만 명만 와도 신문에서 대서 특필한다. 그러면 더 이상 망신당하기 전에 일찌감치 연극은 박물관 자료 속으로 숨어 들어가야할 운명인가.
연극만이 가진 감동 관객에게 전달해야
연극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텔레비전과 차별화된 영화가 제자리를 찾았듯이, 연극도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물론 영화와 텔레비전과 다른 나름대로 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연극만이 가진 감동을 충분히 전해야 한다. 영화와 텔레비전의 비현실적 환상과 흥미본위의 허구적 영상을 벗어나 '살아 있는 사람'인 배우와 관객이 직접 '만나는' 항상 '살아 움직이는' 작품이 '현장성'의 강점을 살리는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관객은 객석의 의자와는 다른 존재다. 무대와 함께 호흡하고, 배우와 함께 현장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연극인에 다름 아니다. 배우는 적어도 무대 위에서 관객의 호흡을 느끼고 그 정서의 실오라기 하나까지도 파악하면서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관객과 주고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컴컴한 객석과 환한 무대 사이에 모이지 않는 교감이 무르익을 때 관객은 감동의 과일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중계 방송이 아무리 생생해도 야구장을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열성 팬들 덕분에 프로야구가 존재하듯이, 연극도 그런 열성 팬을 만들어야 한다. 진지한 감동의 물결로 팬들을 감싸야 한다. 연극은 그런 열성 팬들이 얻어갈 '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예술적 감동을 맛본 사람들은 이 사회를 밝게 만들 소양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둘째, 인생의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 본래의 가치를 깊이 있게 보여 주어야 한다. 가볍고 단순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경박한 현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깊은 삶의 맛을 전해 주어야 한다. 보는 동안에 재미를 느끼는 심미적 쾌감과 아울러 정서적 공감대에서 형성되는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바탕 위에 인생과 사회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의 형성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예술적 기교를 넉넉히 발휘하여 관객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맛보게 하면서,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이 긴 작품을 펼쳐 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인격의 완성에 보탬이 될 것이다.
예술의 본래 가치 보여줘야 한다.
셋째,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 사랑의 가치를 드높이고, 자연을 사랑하는 가치를 배양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여 그 사회를 변화시킨다. 인명 경시 내지 생명 경시,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금 만능의 풍조를 막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기계 문명에 의한 환경 파괴도 인류의 삶 자체가 위협받은 현대에 모든 동식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연극도 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상을 연극의 주제로 담아 관객 앞에 멋지게 펼쳐 보여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
넷째,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야 한다. 먼저 연극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 자기 훈련을 충실히 해야 한다. 배우는 흉내 내는 것을 탈피하여, 몸에 밴 연기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감동의 순간을 만들 수 있도록 끊임없는 신체 훈련과 발음, 억양, 발성의 완벽한 완성을 지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폭넓은 인간 이해의 바탕 위에,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세상과 인생에 대한 철학까지도 연기에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스탭은 무대상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도록 손톱만큼의 실수도 없이 참신한 발상과 효과적인 무대 형상화를 위해 능숙한 솜씨를 발휘해야 한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솜씨에 따라 일류 요리도 될 수 있고, 쓰레기통으로 바로 갈 수도 있다. 귀한 손님인 관객들에게 일류 요리를 대접해야 하지 않겠는가. 손님은 왕이다. 완성도 높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가다 보면, 우리도 어느 날 어떤 한 작품을 1000회 이상 공연하는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연극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참으로 중요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