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
- 망향가, 오늘이 오늘이소서 -
남원시민신문 논설고문 서 호 련
<12월 15일 남원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沈壽官(심수관)도예전시관 개관식이 그것이다. 일본에서 15대 심수관과 히오키시 미야지 타카미스시장이 참석헸다. 420여 년 전 정유재란의 도자기전쟁과 남원, 일본도자기의 금자탑 -사쓰마도자기의 기원과 역사와 함께 12대부터 15대까지의 심수관가 도예기증 작품 13점이 전시장에 선 보였다. 다시 뵙고자 했던 14대 심수관은 노령으로 참석치 못하고, 대신 그의 아들 15대 심수관(一輝)이 참석한 것이다.>
우리 집 거실에는 보기 좋은 도자기 한 점이 있다. 달덩어리 같은 둥그런 원형의 몸체에 목이 길고 가느다랗게 올라 왔는데 딱 표현할 수 없는 맑고 옅은 미묘한 색깔이다. 옅은 갈색 같기도 하고 베이지색 같기도 하다. 용도는 알 수 없다. 몸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실금이 도자기 전체에 깔려 있다. 강진의 청자 몇 점도 함께 놓여 있지만, 이것은 그것과 달리 유난히 밝고 빛이 난다. 맨 아랫부분엔 보일 듯 말듯 수관(壽官)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수년전에 가고시마의 심수관가(家)에서 가져 온 것이다. 도자기 밑엔 14대 심수관에게 기념품을 드리는 사진 한 장을 놓아두고 있다.
심수관가(沈壽官家)!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끌려간 도공가문이다. 정유재란(1598)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이때 남원성에서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400년 전의 일이다. 조선 도공 심당길로부터 비롯해 400년간에 걸쳐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인 사츠마야키(薩魔 窯)의 종가가 된 심수관가의 삶을 조명한 연극< 그, 불!>. 도올 김용옥이 쓴 각본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들어 있다.
“보아라, 저 풀씨는 스스로가 원해서 저기에 날아온 것이 아닐 것이다. 바람이, 혹은 비가 그렇게 했겠지. 그러나 저 풀은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뿌리를 내리고 잎을 벌려,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그는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 남원 도공들의 운명을, 바람에 혹은 비에 날아온 풀씨에 빗대었다. 그들은 그렇게 풀씨와 같이 가고시마에 날아가서 오늘의 일본 도자기 대명사인 사쓰마 야키(蕯魔 窯) 종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2007년 가고시마 심수관가에서 만난 14대 심수관은 이렇게 말했다.
“돈과 안락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반드시 꿈과 뜻이 있어야 한다. 선조 도공들은 먹고사는데 급급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일본작가 ‘시바료타로’가 심수관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네 선조들은 심장이 두 개 있군요. 하나는 바다건너 한국을 생각하는 심장이고, 또 하나는 일본 속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심장 말입니다.”
1597년 8월 12일, 왜군은 5만 6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원성을 공격하였고 16일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개전 전, 대마도 도주 종의지(宗義智)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령을 받고 왜군의 침탈용 지도를 그렸는데 거기에는 조선 8도를 5가지 색깔로 구분하여 공격의 경중을 분류하였다.
전라도가 적색인 것은 공격목표 제1순위임을 의미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란의 패배원인을 전라도 사람들의 강력한 항거와 풍부한 물산의 보급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정유년 재침을 명령하면서 개전 명령서에 전라도를 제일 먼저 점령하여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왜군은 육로와 해로를 따라 전라도의 관문인 남원성으로 단숨에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때 남원 성을 수비하는 명나라 병사 3천여 명과 조선군 1,300여 명 등 4,300여명과 성내 주민들이 10배가 넘는 왜적과 싸웠지만 명군 부총병 양원은 홀로 도망치고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군 등 성안의 모든 주민 일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남원성 싸움에서는 대량 살육과 코 베기가 자행되었다. 살육상황은 당시 왜군의 종군 승려였던 경염(慶念)의 일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발행 감사장에 잘 나타나 있다.
1597년 8월 19일; 날이 밝아 남원성 밖을 보니 길가에는 죽은 사람이 산더미 같아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경염(慶念) <朝鮮日 日記> 1597년 8월 19일.
1597년 9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오 도오 다가 도라(藤堂高虎) 귀하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보았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키고 목 421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하였소. 수고했소이다.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 나가 모리, 나 씨가 마사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다 겐이에게 잘 말해 두겠소.
남원 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수많은 문화유산을 침탈하고 도공을 납치해 갔다. 그 중 사가 현 (佐賀縣) 아리다(有田)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李參平)을 비롯한 기술자 150여명과 가고시마(鹿兒島縣)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끌려간 박평의(朴平意) 등 도공은 오늘날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이삼평은 아리따야끼(有田窯)의 도조(陶祖)로 일본 도자기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박평의 등은 사쓰마야끼(薩魔 窯)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의 양대 산맥으로 발전시켰다. 가고시마로 끌려간 도공들은 고향땅 남원을 잊지 못해 단군사당(玉山宮)을 짓고 매년 남원성이 함락된 8월 16일에 우리 식으로 제례를 올리고, 고향에서 부르던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랬다. 이 노래는 오늘날 우리는 잊어버렸지만 끌려간 도공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면서 부르고 있다니 역사를 망각한 우리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2007년 5월 13일 우리는 남원문화가족 일본문화체험단의 일원으로 교토의 귀무덤에 도착했다. 도로가에 있는 커다란 봉분이었다. 무덤 뒤에는 공장같이 생긴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주위에는 주택들이 들어 서 있었다. 그곳은 잘 가꾸어진 묘역이 아니라 그냥 전쟁의 전리품을 전시하는 기념물 같았다. 400년 전, 일본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정유재란은 기필코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자기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조선 병사들의 코와 귀를 베어오게 하여 그들의 공로를 갈음하게 했던 것이다. 왜군들은 귀와 코를 독(항아리)에 넣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갖다 바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참전했던 왜장들에 의해 베어진 코와 귀는 일본의 오카야마 비젤시(千費塚)와 교토(京都), 바로 이곳 이총(耳塚)에 12만여 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 이 무덤 앞에 선 우리는 통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묘 앞에서 묵념을 드리고 묘를 관리하고 있는 일본인 시미즈씨와 함께 잡초들을 제거하였다. 시미즈씨는 묘소 옆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영혼들이 불쌍해서 어떤 보수도 받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이 묘소를 보살피고 있다.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대를 이어 이 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눈물겨운 이야기였다.
우리는 귀 무덤을 나와 그 위쪽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묘역으로 갔다. 귀 무덤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어쩌자는 것인가? 이곳은 왕릉과도 같았다.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 발밑에 귀 무덤을 만들어 놓고 내려다보는 형상이었다. 오래전의 역사라 지만 어찌 열불이 나지 않을 수 있으랴! 최근에 이르러 뜻있는 분들이 임진. 정유재란의 유물인 코 무덤과 귀 무덤의 환국사업을 펼치고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제 우리도 좀 살만하게 되었으니 민족정기의 함양을 위해서도 이러한 호국영령들을 위한 넉넉한 쉼터를 만들어 드렸으면 좋으련만, 위정자들이 이런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곳, 교토 귀 무덤의 영령들이 고국과 고향, 남원의 만인 의총 묘역에 모셔지고, 만인의총도 국가관리로 승격되어 호국영령들에 대한 거국적인 추모가 이루어진다면 그 원혼들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미국정부는 해외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유해를 발굴하여 조국으로 귀환시킬 때 대통령이 손수 나와 거수경례로 영접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았다. 나라를 위하여 희생된 영령들이 이처럼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먹먹한 가슴을 안고 가고시마로 출발했다. 가고시마의 옛 이름은 사 쓰마(에도시대)이다. 일본의 주요 4개 섬 중 하나인 큐슈는 최남단 2,600km의 해안선을 낀 섬으로서, 온난한 기후와 아름다운 산호초에 싸인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7개의 활화산과 곳곳에 온천이 솟아나는 일본의 명승지다. 역사적으로 예로부터 해외교류의 창구로 이용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