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24년 4월 20일) 영상 문공신 교단을 계승하고 있는 분을 만나 취재를 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기록 입니다.
영상(瀛祥) 문공신(文公信)은 증산천주(甑山天主)님의 존칭에 대하여 대선생(大先生)으로 부르라 했으며, 교도(敎徒)들이 본인을 부를 때는 문선생(文先生)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태을주(太乙呪)는 대선생(大先生: 甑山)이 만든 주문(呪文)이 아니므로 읽지 말라고 하였다.
증산대선생(甑山大先生)께서 화천(化天)하시며 당신께서 구년(九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마쳤으니 문공신(文公信)은 7년 공사를 맡으라고 하셨다 전해짐. 7년 공사의 내용은 충청도, 안면도 등 바다를 다니면서 기도를 하며 공사를 하심, 집오장(망태로 만든 가방)에 보리 미숫가루, 물병을 가지고 다니며 기도를 하고 공사를 하심. 공사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증산계열(甑山系列) 신앙을 하다가 재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과 말을 하게 됨.
증언자의 아버지(양대식)께서 증산(甑山)의 도(道)를 믿기 위하여 김제 금산면 백운리에 가야 올바른 신앙이 된다는 말을 듣고 증언자의 큰아버지, 아버지 모두 가산을 정리하여 백운리 안내성(安乃成) 교단으로 이주함, 태을주(太乙呪)을 읽으며 가진 재산으로 장을 보고 치성을 하다 보니 4년만에 가산을 탕진함,
그 후 금광에서 일을 하다가 낙상을 당하여 병원에서 치료함. 그 후 먹고 살기 위하여 부산(釜山)으로 일을 가려고 마음을 먹던 중 문영상(文瀛祥)을 따르던 김찬숙이란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문영상(文瀛祥)을 직접 만나게 됨. 문영상(文瀛祥)의 인품과 도덕에 감화되어 참 도(道)를 찾았다고 믿게 되어 마음을 돌리고 문영상(文瀛祥) 교단에 입교 하게 됨. 참고로 문영상(文瀛祥) 교단의 입교식은 입교식에 사용된 비용을 천지에 고함.
문영상은 김찬숙을 교주(敎主)로 임명하고 양대식을 교장(敎長)으로 임명하고 교도(敎徒)들에게 이 두 사람의 말은 나의 말과 동일하니 이 두 사람의 말을 따르라 하시고 일선에서 물러남. 그 후 증산계열(甑山系列) 신앙에 재산을 탕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입교되면서 교단이 형성됨, 가장 사람이 많았을 때는 80가구 였음. 문영상(文瀛祥)은 교도(敎徒)들이 교당(敎堂)을 건설하자고 하였을 때 이를 반대함. 교당(敎堂)을 건설하게 되면 교당(敎堂)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 사람의 식사 및 기타 비용을 교도(敎徒)들이 부담하여야 하기에 반대하였다. 형편되는 대로 각자의 집을 치성실로 하고 교도(敎徒)들의 집을 돌아가며 치성을 모시게 하였음. 예전 집은 방이 비좁아 방안에 한 두사람 들어가서 치성을 모시고 나머지 인원은 마당에서 멍석깔아 놓고 치성을 모셨다.
문영상(文瀛祥)은 갑오(甲午 1954)년 3월에 신태인에 도술약국(道術藥局)을 만드는데, 도술약국(道術藥局)은 문영상(文瀛祥) 스스로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기에 만들었다. 문영상(文瀛祥)은 진주도수(眞主度數) 15에 의하여 각 구역을 15호 구획하여 5개 지역 15호가 구성되었다. 그 후 각 지역이 5일씩 돌아가며 도술약국(道術藥局)에서 수련을 하였다. 도술약국(道術藥局)은 기와집으로 만들어 동곡약방(銅谷藥房)보다 좋았다. 문영상(文瀛祥)은 이곳에서 공사를 보았다. 문공신은 마지막 공사를 하고 도술약국(道術藥局)을 폐쇄시켰다. 도술약국(道術藥局)의 위치는 신태인 시장 근처였는데 현재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다. 공사를 마친 그해 5월에 문영상(文瀛祥)은 선화(仙化)하였다.
문영상(文瀛祥)의 선화(仙化) 후 교주(敎主)와 교장(敎長)이 교(敎)를 이어 나갔다. 문영상(文瀛祥) 교단의 치성은 증산대선생(甑山大先生)님 생신치성, 화천치성이 있었으며 위령제를 모셨다. 위령제는 1년에 1번 음력 10월 5일 신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하여 모시는 치성이었다. 때에 따라 동지치성과 경칩치성을 모셨다. 경칩은 겨울잠을 자는 것들이 생명을 들어내고 밖으로 나오는 시절이라 종교인들은 긴 기다림 끝에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기리는 치성이라고 문영상(文瀛祥)은 말을 전했다. 24절기 치성은 모시지 않았다.
치성을 모실 때 청수(淸水)는 한 그릇을 모셨다.
위령제 할 때는 의령을 하는 인원의 위패를 일일이 전부 기록하여 모셨으며 밥 한 그릇, 국 한그릇, 술 한잔 모셨다. 다른 치성은 위패를 모시지 않았다.
문공신 교단에서 전하는 말
남북한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병겁(病劫)이 발생한다. 그 이후 사람이 늙어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낙원(樂園)이 펼쳐진다.
단순하게 좋은 세상이 펼쳐진다는 말로 들릴수 있으나 경전(經典)의 기록으로 보면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증언이다. 대순전경(大巡典經) 재판(1933년 발행)에 다음과 같은 성구가 있다. 재판에는 “당신이 가라사대 중천신은 의탁할 곳이 없어서 황천신에게 붙여 물밥을 얻어 먹어왔나니 그럼으로 원한을 풀었다가 나에게 하소연 함으로 이로부터 중천신에게 녹을 맡겨 사가 없이 고루 나누어주게 하노라. 또 가라사대 황천신은 사람으로 낮고 죽게하기를 주장하고 중천신은 한번 나서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하려고 주장하나 결정치 아니하였노라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와 비슷한 내용이 천지개벽경에도 있다. 하루는 제자가 모셨더니 말씀하시기를, 선천에 중천신은 자손이 없는 신명이요, 황천신은 자손을 둔 신명이라. 그러므로 중천신은 황천신에게 붙어서 얻어먹었더니, 나의 세상에서 중천신은 영원히 영혼이 바꾸어 들게 하여 낳고 기르는 도리를 없애자고 주장하고, 황천신은 영원히 자손을 두어 낳고 기르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천지의 모든 신명이 옳으니 그르니 하여 아직까지도 결정을 짓지 못하였노라. 문영상(文瀛祥) 교단에서 전하는 말이 위 성구(聖句)의 내용이 ‘사람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라는 것으로 결정된 것으로 해석을 하면 큰 의미가 있는 증언이다.
문영상(文瀛祥)은 의통(醫統)법을 전수해 주었다. 의통인패(醫統印牌)가 아님. 이 의통(醫統)의 법방은 문영상(文瀛祥) 교단에 정식으로 입교(入敎)하여야 전수가 가능하다.
모든 천지공사는 증산대선생(甑山大先生)께서 보았고 나머지 공사는 문공신이 보았으므로 일반 교인은 때를 기다리며 덕(德)을 쌓고 수행하라.
문영상(文瀛祥) 비석
묘비(墓碑)에 보면 참봉(參奉)이라는 직책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말에 참봉(參奉)이라는 벼슬은 대부분 왕실의 능을 지키는 능참봉(陵參奉)이었다. (나무위키 참조)
전주(全州)는 조선(朝鮮)을 개국한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가 살었던 곳으로 이성계때부터 고종황제까지 관리를 하고 제사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릉 500년 답사② 조선 왕실의 뿌리 - 브라보 마이 라이프 (etoday.co.kr)
첫댓글 정보에감사드립니다.일월일월만사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