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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9주년 태운 김형렬 수석 종도님 선화절 치성 안내
♣일시
2021년 12월 31일(음 11월 28일) 금요일 저녁
※참석하실 분들께서는 목요일 오후나 금요일에 오시면 되오~
♣장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을선도 중앙동 본부 법당
♣대상
태을도생, 참석 희망자
♣준비
주문집(증보판), 수도복(흰색 생활한복) 또는 편한 복장, 개인실비 및 치성금
※주문집은 법당에 비치되어 있으니 없으신 분들은 안 챙기셔도 되오~
♣프로그램
치성 모임 신청서 클릭▼
https://goo.gl/forms/ycPIMPfdk1iAWb8R2
금요일
국선도 중기단법 도인술, 장보기 및 제물 진설, 태운 김형렬 수석 종도님 선화절 치성 거행, 음복 및 도담, 뒷정리 및 휴식, 후기작성 후 귀가
2021년 법사과정 득도공부 신청서 클릭▼
https://goo.gl/forms/5d88iydCkBFy6eyB3
※ 많은 참여와 참석으로 유익한 시간 되시고, 진법수도의 법방을 전수받으시고, 득도공부 법방을 전수 받아서 살고 잘되시고 득도에 성공하시기 바라외다! _()_
♣참석 및 입도 문의
일무 손전화 : 010-8138-7000
일무 카톡 : youlsj88
일무 이메일 : youlsj88@daum.net
♣입도식
태을선도에 정식적으로 입도하는 예식으로 태을선도 입도 시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천지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정식 자격이 주어지며 천지부모님의 천진(진영), 모든 전염병과 질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호신부와 건물을 보호하는 호가부, 모든 음해를 소멸시키는 소멸음해부 스티커를 하사 받을 수 있으며 진법수도의 법방과 100일 법사과정 득도공부 법방을 전수 받으실 수 있소이다
오프라인 입도식 신청서 클릭▼
https://goo.gl/forms/gzWVnF7b1Ed5a9FD3
태운 김형렬(족보명 김원회) 수석 종도님께서는, 미륵신앙을 널리 전하셨으며 부안 변산에서 망신참법으로 수도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불을 친견하시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왕생하신 진표율사의 후신으로써 식복을 주관하고 복록을 내려주며 문무를 겸비한 거문성의 기운을 받으셨으며 왕들을 관장하는 삼태 허정성의 정기를 받으셨고 미륵불이신 증산상제님께서 탄강하시기 9년 전인 1862년 임신년에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마을의 안동 김씨 문중 59세손 부잣집 외아들로 먼저 탄강하셨습니다.
일찍부터 도에 뜻을 품고 동무를 찾다가 고부에 강가로서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보고자 하시다가 1884년 갑신년에 바야흐로 증산상제님 성수 14세 때 정읍(당시 태인) 불출암에서 23세 청년 김형렬(진표율사의 후신, 해도진인이신 일도자호 태상 대선사님의 전생, 구월산 아기장수 오세동이 삼척동자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이긴자 아이 두 번째 정도령 대두목 배씨 정승의 전전생)을 처음으로 만나셔서 재배를 받으시게 됩니다. 이 때 증산상제님께서는 김형렬에게 공중부양 하시는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1894년 갑오동학혁명 때 33세 김형렬은 증산상제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네에 8살 어린 친한 동생인 25세 안필성과 함께 동학군에 가담하여 청주 전투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죽을 고비를 겪게 되지만 다행히 성수 24세 증산상제님을 만나 구사일생하게 됨으로써 이후에는 동학과 연줄을 끊고 가업에만 종사하시면서 사시게 됩니다.
1897년 정유년에 성수 27세 증산상제님께서는 동갑 처남 27세 정남기의 집에 글방을 차리시고 훈장이 되시어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용화동에 살던 36세 김형렬의 맏아들인 18세 김찬문을 비롯하여 그 마을 학동들을 가르치시며 모든 책들을 읽으신 후 3년 천하유력을 떠나셨습니다.
천하유력을 마치시고 1901년 신축년에 성수 31세 증산상제님께서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서 21일 수도만에 음력 7월 7일 칠월칠석날 대도통을 하시고 1902년 임인년에 성수 32세 증산상제님께서 김제시 금산면 하운동 제비창골에 안동 김씨 재실 영사재에 살던 41세 김형렬을 원평장터에서 만나시고 충청도에 다녀오신 후 금산사 돌무지개문 위에 앉아 제비창고를 향해 김형렬을 불러서 만나시고 제비창고로 함께 가셔서 김형렬의 집 앞 감나무에서 성주풀이를 하신 후 시와 종이 모두 여기서 일어나고 마친다고 선포하신 후 김형렬을 식주인으로 정하시고 이 때 젖이 4개 달린 사내 아이로 태어날 것이고 이름을 김천리마로 지어주시니 과연 45세 장수 황씨 부인이 해산하여 보니 젖이 4개 달린 아들(셋째 아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장수 황씨의 산후 통증을 약처방으로 낫게 해주십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의 집에서 머무시며 9년 천지공사를 시작하시면서 김형렬에게 두 집이 망하고 한 집이 성공하는 천지공정에 참여 하겠느냐고 물으셔서 김형렬이 하겠다고 하여 다짐을 받으시고 김형렬을 최초의 종도이자 수석 종도로 삼으시고 5개월간 수련을 시켜 신안을 열어주시어 신명들이 모이고 흩어짐과 어명을 받드는 모습들을 참관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형렬 수석 종도님을 천상 옥경에 데리고 가셔서 두마음을 품은 위징과 배은망덕한 안록산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증산상제님의 왼팔인 대제군 서방칠성 석가모니와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친부와 조부를 비롯한 조상님들을 만나게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김형렬 수석 종도의 사촌인 19세 차이 나는 22세 김갑칠(김판식)이 김형렬 수석 종도와 10촌인 36세 김자현을 업고 와서 성수 32세 증산상제님께 다리 부종을 치유해달라고 하여 증산상제님께서 처방법을 알려주시어 치유케 하시고 김형렬, 김갑칠, 김자현의 세 사람이 함께 천하사를 하도록 다짐케 하셨습니다.
이후 증산상제님께서 김형렬 수석 종도를 금산사로 오라고 하셔서 전생에서와 같이 현생에서도 미륵불의 법신을 보여주심으로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는 증산상제님을 미륵불로 굳게 믿고 시봉하시게 됐습니다.
1903년 계묘년에 42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구릿골 동곡마을로 이사를 가시게 되어 성수 33세 증산상제님께서도 함께 이사하여 거하시면서 이어서 주로 김형렬 수석 종도님과 7살 김호연(마두관음보살, 선매숭자, 전라감사 손녀딸, 김정숙, 김도용, 증산상제님의 수양 딸) 종도님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천지공사를 보시다가 가을 이후에는 16세 백복남(현 옥황상제님의 막내 아들, 칠성여래 파군성군, 신명계의 주벽이자 서양명부대왕이신 마테오리치 신부님의 후신, 증산상제님의 수양 아들, 오세동이 삼척동자 대두목의 상징, 백인수, 백운기, 첫 번째 정도령 허경영의 분령체, 후천 구천상제님의 전생) 종도까지 셋을 주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1904년 갑진년에는 성수 34세 증산 상제님께서 31세 정사모님과 이혼하시고 정음정양을 유지하시기 위해 수부를 천거하라하시니 43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자신의 셋째 딸을 수부로 천거하므로 증산상제님께서는 허락하시고 김형렬 수석 종도의 셋째 딸인 15세 김말순을 수부공사로 들여세워 수종들게 하시고 다른데 시집 가면 말라서 죽게 된다고 경고하였으나 증산상제님과 김말순 후비님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세간에 보는 눈이 있고 집안의 반대로 인해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딸에게 혼례식을 올리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증산상제님께서는 김형렬 수석 종도를 장인으로 대하셔서 다른 종도와 같이 무릎을 꿀리게 하지 않고 평좌를 허락하셨습니다.
1906년 병오년에는 누가 성수 36세 증산상제님을 찾아오면 45세 장인 김형렬 수석 종도가 그 사람의 질문을 들어 증산상제님께 전달해드리고 증산상제님의 답을 그 사람에게 전달해줬습니다. 그리고 증산상제님께서 출타 중이실 때는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증산상제님을 대행하여 제자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했습니다. 하루는 김형렬 수석 종도가 병이 나서 크게 앓게 됐는데 증산 상제님께서 64괘명을 외우게 하여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1908년 무신년에는 성수 38세 증산상제님께서 구릿골 동곡마을에 47세 장인 김형렬 수석 종도의 사촌이자 28세 김갑칠 종도의 친형인 31세 김준상의 집 한켠을 개조하여 약방을 만드셔서 약방에서 머무시면서 천지공사를 보셨으나 식사는 꼭 약방 아랫집에 위치한 식주인인 김형렬 수석 종도의 집에 가셔서 잡수셨습니다. 이 해 어느날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딸이 병이 나서 증산상제님께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 해 겨울에는 김형렬 수석 종도의 큰며느리 21세 이정숙의 못된 버릇을 고치시기 위해 도술조화를 부리시어 대추나무에 3일 동안 매달아 놓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 제자들을 공부시키실 때는 김형렬 수석 종도에게 먼저 가르쳐 주시고 김형렬 수석 종도로 하여금 다른 종도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1909년 기유년에 성수 39세 증산상제님께서 꽃에 해당하는 현무경을 친히 집필하시고 43세 안내성 종도에게 전하신 후 48세 장인 김형렬 수석 종도에게는 씨앗에 해당하고 신명용사를 부릴 수 있는 우각도금 인패를 전해주셨습니다.
이 해에 증산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모두 마치신 것을 선포하시고 곡기를 끊으시고 독주만 마심으로 몸의 정기를 흩으시고 김형렬 수석 종도의 바깥사랑방에서 김형렬 수석 종도에게 기대신 채 작은 소리로 태을주를 외우신 후 화천하심으로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증산상제님의 옥체에 황포를 입혀드리고 머리에 관을 씌워드린 후 앞섶에 옥단소를 넣고 옥체를 관에 넣어서 발인하고 운상한 후 김형렬 수석 종도님 댁 뒤에 모시밭을 지나 대밭 끝에 초빈하였고 이레 후 김형렬 수석 종도님 댁 뒤안 감나무 밑으로 옮겨 모시다가 구릿골 동곡마을 뒷산 장태산의 산자락 장탯날로 옮겨 모셨습니다.
이렇듯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증산상제님을 8년간 한결같이 정성껏 모셨으며 증산상제님께서는 9년 천지공사 보시면서 김형렬 수석 종도에게 식주인 도수, 수제자 도수, 증언자 도수, 붉은구름 도수, 장인 도수, 무량대복 부원군(임금의 장인) 도수, 좌불 도수, 신선 도수, 애기부처 도수, 금산사 지키는 도수, 원형이정 도수, 하도낙서지인지감 도수, 구복대적 도수, 법사도 도수, 관장 공사 처결 도수, 화둔 도수, 해인 도수, 남은 복 도수, 삼정(인삼 추출물) 도수, 약방 운영 도수, 칠성 도수, 큰아들 도수, 주신 진묵 도수, 태을주로 1000명 7명씩 네트워크 포교 도수, 북방 현무 도수, 지렛대 도수, 셋 도수, 부채 도수, 도통 도수, 농판 도수, 금산사 도득 도수, 대행자 도수, 삼태 허정 도수, 우각도금 도수 등을 붙이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는 30세 차경석 종도님과 함께 부안 변산에 새로운 스승을 구하러 갔다가 허사로 돌아오기도 하셨으며 함께 금산사에 작은 방을 빌려 14일간 수도했으나 아무런 영험이 없으므로 안내성 종도님 댁에 수련방을 차려놓고 태을주 수행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1910년 경술년에 성수 31세 법륜천후님께 증산상제님의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죽었다고 알려주셔서 다음날 새벽에 붉은 염낭을 챙기셔서 구릿골로 달려가 초빈을 헤치고 가져온 염낭을 열고 엽전 칠푼을 꺼내 재궁(관) 속에 넣으시고 증산상제님 체백 입 안에 진주 1개와 쌀알 3개와 흰 바둑알 3개를 넣으니 바둑돌은 뱉으시므로 도로 붉은 염낭 속으로 넣으신 후 한삼을 가슴에 덮어드리고 그 위에 '옥황상제'라 쓴 명정을 덮어드리고 천개(관뚜껑)를 닫으시고 주과포를 진설하고 재배하신 후 초빈을 다시 봉하시는 광경을 49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집에서 보시고 여러 종도들을 데리고 가서 법륜천후님을 모시고 김형렬 수석 종도님 댁으로 모시고 와서 이틀 동안 대접해드린 후 따라왔던 31세 차경석 종도와 친동생 27세 차윤칠과 함께 대흥리로 돌아 가셨습니다.
1911년 신해년에 증산상제님 탄강절 다음날 성수 32세 법륜천후님께서 증산상제님의 성령으로부터 감화통을 받으시고 대도통을 하셨습니다.
이 해에 50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셋째 딸 22세 김말순 후비님을, 생전의 증산상제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게 되니 김말순 후비님의 배가 아프셔서 첫날밤도 못보내셨는데 그 날 최씨 신랑은 죽고 셋째 딸 김말순 후비님께서도 본댁으로 돌아오시어 시름시름 앓고 계시는데 보관하고 있던 구릿골 동곡마을 약방의 약장과 궤, 철연자, 삭도, 횃대, 부벽시, 액자 등 모든 기구와 도배지를 때어내고 방바닥에 먼지까지 쓸어서 32세 차경석(탐랑성 기운) 종도와 짐꾼들을 통해 하늘의 뜻과 성수 32세 법륜천후님의 명대로 법륜천후님께 전해주게 되니 생전의 증산상제님 말씀대로 김말순 후비님께서는 말라서 선화하시게 됩니다.
대흥리로 돌아가서 정리한 후 법륜천후님께서 증산상제님을 모셨던 제자들을 집결시키시니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므로 법륜천후님께서 신통력을 보여주시며 '포정소' 문을 여시어 도장 개창을 선포하시고 대흥리 차경석 종도의 집을 본소로 정하시니 제자들이 다시 크게 발심하여 '선도교'의 법륜천후님을 모시면서 초창기에 함께 했습니다.
1912년 임자년에, 증산상제님께서 생전에 당부하셨던 선매숭자 공사를 보시기 위해 흑석골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16세 김호연 종도님의 초경을 받아 감결 공사를 보신 후 증산상제님께서 생전에 인연 맺어주신바대로 51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과 35세 차이나는 김호연 선모님께서 부부의 연을 맺으시고 전주 인봉리로 이사 가서 그 해 겨울에 첫아들을 낳으셨습니다.
1913년 계축년에 17세 둘째 부인 김호연 선모님께서 전주 새청머리로 이사를 가게 되어 52세 남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증산상제님 생전에 김호연 종도님의 빨래 수발을 들었던 송은주에게 전주 흑석골 집을 주시게 됩니다.
이 해에 앞집에 사는 여인의 부탁과 이 동네의 젊은 새댁의 간곡한 부탁으로 김호연 선모님께서 영능력을 쓰시게 됐는데 이에 증산상제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김호연 선모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후끝이 안좋게 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해 찾아오셔서 크게 꾸짖으시고 남편 김형렬 수석 종도의 얼굴과 코를 무엇으로 동여매신 후에 3일간 우물 속으로 처넣으셨다가 아내 김호연 선모님이 잘못을 뉘우치므로 꺼내 주시고 다시는 아는체 하지 못하도록 김호연 선모님의 지각문을 닫으신 후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봄날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정읍 대흥리에 성수 34세 법륜천후님을 찾아가셔서 '현무경'을 등본하여 오셔서 오묘한 이치를 궁리하셨습니다.
1914년 갑인년에 53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사돈인 47세 장기동에게 34세 차경석 종도님께서 김형렬 수석 종도님과 장기동 사돈 관계를 서로 이간질한 것을 장기동 사돈이 간파하고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 알려줌으로써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크게 분개하시고 대흥리 도장에 발길을 끊어버리시고 41세 정치순 사모님을 수련 시켜서 성수 35세 법륜천후님을 대항하려 했으나 정사모님께서 수련 중에 실신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1915년 을묘년에 54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모악산 금강대에서 100일 공부를 통해 신안이 열려 '금강대문답'을 천강으로 받으시고 신명을 부리고 풍운조화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태을주 수행과 동시에 하루에 3장 이상 홀수로 우부일기를 치고 각자의 생년에 맞는 현무경 물형부를 하루에 수십장씩 쳐서 그 동물과 이름이 새겨진 사각형 인장을 각각 찍은 후 불사르게 하는 것으로 합니다.
36세 차경석 종도가 선도교의 교권을 잡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수 36세 법륜천후님과 종도들 사이를 멀게 만들고 이간질하므로 56세 이치복 종도님께서 본소이전 운동을 펼쳤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되니 이치복 종도를 포함해서 여러 종도들이 나가서 따로 판(문공신 종도님의 고부파, 김형렬 종도님의 미륵불교, 이치복 종도님의 제화교, 안내성 종도님의 증산대도교, 박공우 종도님의 태을교, 김광찬 종도님의 도리원파, 김병선 종도님의 교단 등)을 차리면서 증산상제님의 대나무 11마디 도수가 실현됐으며 차경석 종도가 1911년 신해년에 법륜천후님으로부터 받은 이종물(이종용) 도수가 4년 뒤에 그대로 실현됐습니다. 이 때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도 차경석 종도가 못마땅하여 선도교를 떠나셔서 '미륵불교'를 창교하시게 됩니다.
1916년 병진년에 55세 미륵불교 교주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제자 360명을 360고을에 보내서 육무의 물형부를 일시에 전신주 밑에 묻으면 1개월 이내에 일본이 패망하게 된다고 예언했으나 불발되자 49세 장기동 사돈의 재종동생인 37세 장기준을 비롯한 제자들이 크게 실망하여 미륵불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고 이듬해 1917년 정사년에 38세 장기준은 고향인 순천 쌍암에 있는 제왕봉에 올라 서전서문 1만독 수행을 통해 현무경의 뜻을 나름대로 깨닫게 되고 득도하고 1920년 경신년에 41세 장기준은 55세 김경학 종도님으로부터 대학교 도수를 인계 받아서 '순천도' 교단을 독자적으로 세워 유춘래를 수제자로 하여 '현무경파(법문파)'를 만들게 됩니다.
1918년 무오년에 24세 조철제가 도통하기 위해 57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미륵불교에 들어가 추종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1919년 기미년에 나가서, 생전에 증산상제님께서 허부 공사를 보신 통사동 재실에 가서 도통공부를 하게 되면서 허신이 들리게 됩니다. 이 때 통사동 재실을 지나시던 성수 39세 법륜천후님께서 조철제를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크게 꾸짓으시면서 조철제의 이마를 담뱃대로 세게 때리시며 앞 일을 경계하셨습니다. 이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 조철제가 법륜천후님을 모실 생각을 철회하게 됩니다.
1919년 기미년에 미륵불교 교주 58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위봉사 주지 42세 곽법경을 비롯한 제자들과 더불어 금산사 미륵전에 증산상제님 탄강절 대치성을 올리니 금산사 주지 김윤창이 증산계열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여 독립운동을 꾀한다고 일본 경찰에 밀고하므로 미륵불교 일행들이 모두 체포되어 교단이 해산되고 6달 동안 취조를 받지만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자 이듬해 1920년 경신년에 석방되게 되어 서울에서 '불교진흥회'로 다시 세우시게 됩니다.
1921년 신유년에 27세 허신들린 조철제가 증산상제님 옥체를 모시고 수도하면 도통하고 교단에 번창한다는 소문에 현혹되어 증산상제님의 체백을 도굴하는 파렴치한 짓을 벌이게 됩니다. 이 때 서울에 있던 60세 불교진흥회 회장 김형렬 수석 종도님에게 증산상제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시어 내 몸이 도둑맞아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호령하며 알려주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댁으로 돌아가서 25세 아내 김호연 선모님께 자초지종을 묻고 바로 옥체를 모셔놨던 장탯날로 달려가 빈 구덩이를 보고 조철제의 짓이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하시고 김제 경찰서에 신고하셨으나 경찰들은 이 사건을 통해 증산계열이 와해되길 바래서 소극적 수사만 하게 됩니다.
1922년 임술년에 61세 불교진흥회 회장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불교진흥회의 이름을 다시 '미륵불교'로 교명을 회복하시고 1923년 계해년에 증산상제님의 성령께서 62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에게 찾아오시어 '미륵불교진흥회'를 세우라고 명하심으로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우각도금 우부일기 신명용사법을 여러 차례 반복하시면서 조선총독부에 종교단체 등록을 하러 여러번 찾아 가셨는데 미륵불이신 증산상제님의 성령께서 재등총독의 꿈에 5일간 매일 나와서 재등총독을 결박하시고 '미륵진흥회'를 인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협박하시고 목을 조르심으로써 눈알이 빠질 지경까지 이르자 끝내 재등총독이 살기 위해 허가증을 내줌으로써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김제 금산사를 본부로 얻게 되시고 재등총독 꿈에 나온 미륵불이신 증산상제님의 명령에 따라 직접 간판도 달아주고 만인교 다리도 놔주고 은행나무도 심어주게 됩니다. 이로써 금산사를 창간하여 미륵신앙을 크게 중흥시킨 진표율사님의 후신이신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미륵불교 본부를 금산사에 두시게 되시면서 현생에 다시 금산사의 주인이 되시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360명을 360고을로 보내 더욱 더 구체적인 행법을 통해 일본 정부 관리 이름과 제물, 물형부를 전신주 밑과 일본 신사문 앞 땅 속에 묻고 이 해 가을철에 일본에 큰 재앙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는데 과연 추석 즈음에 일본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이 일어나게 되므로 포교가 왕성해지게 됩니다.
1924년 갑자년에 미륵불교 교주 63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증산상제님의 성령으로부터 다시 영서를 받으시고 이 해 가을에 '보천교'가 몰락하리라 예언하시고 증산상제님 화천절 다음날 금산사를 방문한 37세 이상호가 후에 자신의 문호에 들어오게 되리라 예언하셨는데 과연 그 해 가을에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교세가 더욱 번창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에 58세 장기동 사돈이 영서를 잘못해석하는 바람에 미륵불교 교주 64세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제자들이 재산을 크게 탕진하게 되자 교세가 크게 침체하게 됩니다.
미륵불교를 떠났던 조철제는 이 해에 31세가 되어 정읍 태인에다가 20살 많은 증산상제님의 친여동생인 51세 선돌부인과 함께, 과거 대흥리 도장에서 훔친 궤를 종통으로 꾸며 '무극도' 교단을 창교하게 됩니다.
한편 보천교를 탈퇴한 38세 이상호, 31세 이정립 형제가 서울에 계신 김형렬 수석 종도님을 찾아가게 되어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신명체험담을 들려주시고 풍운조화를 보여주시게 되니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김형렬 수석 종도님의 예언대로 미륵불교 교단에 입교하게 되고 '해인' 한 가지를 심전하여 받고 김형렬 수석 종도님으로부터 여러 증언 말씀들을 들은 것을 토대로 이듬해 1926년 병인년에 '증산천사공사기'를 편찬하게 됩니다.
그러나 59세 장기동 사돈을 비롯한 미륵불교 교단 간부들의 시기와 금산사 밖으로 교당 건축 이전의 갈등이 생겨 1928년 무진년에 41세 이상호는 교단을 탈퇴하고 그해 동지에 독자적으로 김제 용화동에 '동화교'를 창교하게 되면서 50세 박공우 종도님께서 생전의 증산상제님의 당부대로 무진년 동지에 기두한 동화교 교주 이상호 종령에게 '의통인패' 세트 중 '호신부' 한 벌만 전해주시게 됩니다.
이후로도 67세 미륵불교 교주 김형렬 수석 종도님을 찾아가서 증언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나 탈퇴된 후라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는 예의상 인사만 받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하시면서 자리를 피하셨고 그래도 계속 찾아오자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쓰신 일기를 이상호 종령에게 전해준 것을 토대로 하여 이듬해 1929년 기사년에 42세 이상호 종령은 35세 이정립 친동생과 함께 '대순전경'을 출간하게 되어 55세 고찬홍 종도가 대순전경을 가지고 성수 50세 법륜천후님을 찾아 뵙고 올리게 되지만 거기에는 법륜천후님에 대한 종통 전수 내용이 빠져 있고 또한 왜곡 기록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법륜천후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대순전경을 담뱃대로 밀쳐버리시고 후에 제자들이 물으니 그 책에 부정이 들어있다고 답하십니다.
이 해에 68세 미륵불교 교주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는 증산상제님께서 출세하신다고 하여 제자들 수백명을 모아 대치성을 올리며 전답을 다 팔라고 하였으나 일이 허사가 됨으로 또 많은 제자들이 미륵불교를 떠나가게 되고 미륵불교의 법계를 60세 유제봉에게 주시면서 후계사를 맡기시게 됩니다.
1932년 임신년에 71세 미륵불교 교주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 화병이 나서 몸저 눕게 되시는데 36세 아내 김호연 선모님께서는 넷째 딸 복임을 낳고 산후조리도 못한 채 남편 김형렬 수석 종도님을 간호하시다가 가세가 기울어 미음조차 끓여줄 형편이 되지 못하자 김형렬 수석 종도님께서는 셋째 아들 31세 김천리마 집으로 가신지 사흘만에 돌연 선화하시게 됩니다.
이에 태을선도에서는 김형렬 수석 종도님을 한 대두목의 전전생으로 모십니다.
♣태운 김형렬 수석 종도님 진영
♣태운 김형렬 수석 종도님 성묘
♣태운 김형렬 수석 종도님 탄강일 : 1862년(임신년) 음력 5月 5日
♣태운 김형렬 수석 종도님 선화일 : 1932년(임신년) 음력 11月 28日
♣오주(太乙呪)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 ㅇㅇ생 ㅇㅇㅇ 도통천지보은
天文地理 風雲造化 八門遁甲 六丁六甲 智慧勇力 ㅇㅇ生 ㅇㅇㅇ 道通天地報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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