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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계림동서 계엄장갑차 M16발포
생존권 보호 "시민 무장봉기 촉발계기 11공수 61·62·63대대 광주에 추가투입
장*·*상등 기관장 대책회의…[군 상황일지] 당시 총격사실 전혀 언급안돼
5월19일 월요일.
광주의날씨는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더니 오후부터는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한다. 이날오전 상부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서 열린 군·관·민방위협의회대책회의장에 나타난 전교사사령관겸 전남북계엄분소장 윤흥정중장의 얼굴은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이날의 날씨처럼 안색이 흐려 있다.
계엄분소장자격으로 윤사령관이 소집한 이날회의는 일요일인 전날 시내에서 벌어진 7공수 33,35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에 대한 기관장들의 항의와 윤사령관의 공수여단장등 군요인들에 대한 훈시가 하달된다.
31수 지휘계통무시
[그때 그 기관장들로부터 군복입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기관장들이 얘기하는 내용으로 보아 또 주민들이 저한테 직접 전화를 하는 그러한 과정으로 보아 18일 진압에 군의 과잉진압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당시 전남도교육감이었던 이대순씨 (현 호남대총장)가 발언한 당시 이자리에는 7공수여단장 신우식준장도 보였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정웅31사단장은 자신의 부대에 배속받아 지휘권을 인계받은 7여단의 두 대대장으로부터 아무런 문제없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보고만을 받았을뿐이어서 더욱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당시 회의참석 기관장은 장형태지사와 구용상시장 그리고 송종진 광주고검장 및 배명인 광주지검장등.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이교육감의 경우 피의 일요일 참상을 목격하고 등교한 학생들의 동요를 막기위해 각 학교에 철저한 학생관리를 당부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했으나 대동고와 중앙여고 광산여고 등에서 학생들의 수업거부가 잇따르고 시내상황도 오전에만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을뿐 오히려 공수부대는 증파되고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전면 가정학습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이날 시내에는 7공수여단 2개 대대병력에 이어 오전10시부터 서울에서 증파된 11공수 (여단장 최웅준장)의 61·62·63대대병력이 추가투입돼 31사단에 배속된다.
정웅 31사단장은 전날밤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유혈진압을 금지하는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내린터였다. 그러나 대대병력으로 증파된 공수부대는 뒤늦은 현지 지휘관들의 충정과는 반대로 신군부의 비공식 지휘계통을 통해 시민들의 분노를 완전히 도외시한 더욱 강력한 진압방식으로 활동반경을 넓혀가며 곳곳에서 살륙전을 감행한다.
공수부대 최초의 발포는 이런 와중에서 시내중심가를 다소 벗어난 계림동에서 발생한다.
시내 다른 고등학교와는 달리 공수부대가 진주한 조대부고는 오전수업만을 마친채 휴교를 실시했고, 하교하던 이학교 3학년생 김영찬군 (당시18세)은 계엄군발포에 의한 최초의 사상자가 된다.
전교사의 광주사태교훈집 진압작전을 위한 병력 배치상황에 따르면 당시 광주고를 중심으로 한 계림동지역은 조창구중령이 지휘하는 11공수 63대대의 작전지역. 교훈집에는 물론 이곳에서의 발포사실이 전혀 적시돼잇지 않다.
이곳의 상황을 공식기록으로 남긴 유일한 자료인 시청상황일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오후4시20분 광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빌딩앞에 고장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백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중고생 4명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실고감.] 또 당시 비교적 정확히 현장을 목격했다는 위성삼씨 (당시26·조대4)는 이때의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털어 놓는다.
[군중들이 MBC차고에서 취재차량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 계엄군이 밀고 들어왔고 시위대는 계림동으로 다시 후퇴했다. 그곳에는 장갑차 1대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감시경이 시민들에 의해 파손돼 있었다. 누군가 볏짚을 가져와 바퀴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고 내가 다시 볏짚을 뚜껑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덮개가 열리면서 M16총구가 불을 뿜었다. 사람들이 당황해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장갑차는 도주해버렸다. 그때 고교생 1명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어 다른 시민들과 함께 파출소부근까지 옮기고 뒷일을 부탁한 다음 시위대에 합류했다.] (현대사회연구소 편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
또다른 목격자 이석하씨 (당시30·무직)는 장갑차발포를 목격하고 교대쪽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공수대원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뒤 본격적으로 시민항쟁에 참가한 경우. 이씨는 [광고앞에서 고립된 장갑차에 청년 20여명이 달려들더니 종이에 불을 붙여 장갑차 포신속으로 넣으려하자 갑자기 시민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때 사상자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계엄군 실탄휴대"입증"
바로 그 일이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최초로 발포한 사건으로 알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어쩔수없이 도망가야 했다]고 술회한다. 이날 발포는 다음날밤 광주역에서의 집단발포와 21일 도청앞에서의 집단발포로 이어져 시민들의 무장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고 계엄군의 실탄 전휴대를 둘러싼 훗날의 공방이 무의미한 것임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사건을 계기로 공수부대는 다음날부터 지역대별 저지선이 위협받으면서 집단발포를 가해왔고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이제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군에 가담 도청에서 최후까지 폭약관리반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생포된 양홍범씨 (당시20·농업)의 사례는 [싸우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절박했던 5월, 몽둥이와 대검 군홧발로도 모자라 국민의 군대가 눈앞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통한의 5월을 웅변해주는 또다른 예다.
[장갑차는 광고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더니 시민들이 각목 등으로 투시경을 깨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순식간에 불어난 시민들사이로 갑자기 해치를 열고 무차별 격을 가했다. 계림파출소쪽으로 달아나던 시민 3명이 쓰러졌고 그중 1명은 즉사한것 같았다. 그사이 다시 속력을 내 달리던 장갑차가 갑자기 우측으로 90도 꺾더니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분을 치어버렸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공포감에 재빨리 문을 닫고 한참동안을 바닥에 엎드렸다는 양씨는 다음날부터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조직화되지 않은 수많은 시민들 역시 무수한 살상장면을 목격하고 죽음을 각오하며 싸움의 대열애 나선다.
[왜 쏘았지 왜 질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갔지?] 훗날 광주출정가의 가사내용으로 입에서 입으로 회자돼온 계엄군 학살만행의 전주곡, 최초의 발포는 이처럼 학살의 중심지와 다소 동떨어진 곳에서 고립된 장갑차에 의해 저질러진다.
군측의 기록이 없어 당시 이 장갑차의 탑승자명단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애당초 군중들에 대한 무력저지를 목적으로 시내요지마다 배치된 장갑차가 시민들이 놀라 달아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둘러싸고 파괴하려고하자 당황했던 기색이 역력했음이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무차별 소총난사로 위기를 돌파한 장갑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인도로 돌진, 노인을 치고 달아난 것은 자위권발동이 아닌 분풀이 차원의 맹목적인 학살만행에 다름아니었다.
더욱이 이후 잇따라 발생한 신역앞과 도청앞에서의 집단발포는 장갑차에서의 최초의 발포처럼 우발적 상황의 요소가 적었고 계획적인 살인 행으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 아직까지 발포명령자가 없을뿐만 아니라 여전히 군의 자위권발동으로 호도되고 있을뿐이다. 이날 계림동지역 시위양상 및 공수부대의 대응방식을 좀더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목격자가 임낙평씨 (당시22·대학생·현 광주·전남환경운동연합사무국장)의 회고.
광주공수10개대대 투입
[시위양상이 격렬해졌고 진압태도는 더욱 잔인해져 있었다. 계엄군에 밀려 계림국교 처까지 시위대가 후퇴했는데 젊은 청년·학생보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더 많아 깜짝놀랐다. 공수부대의 젊은이 살상작전은 18일보다 더 극심해 시민들은 어디를 가나 분노했고 시 전역이 아수라장이었다.] 임씨는 산장입구쪽을 통해 지산동방면으로 빠져나가려다 갑자기 민간인 트럭을 타고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공수부대병력에 맞닥뜨려 계림국교 담을 뛰어넘어 교장실로 몸을 숨었다.
곧이어 전대농대생1명이 머리를 난타당해 피를 흘린채 피신해 들어왔는데 교장은 임씨를 숙직실로 가게 하고 여교사에게 부상학생을 치료하게 했다.
한편 20일 새벽1시 청량리역을 출발한 3공수 (여단장 최세창)의 5개대대 병력은 밤새 내린 빗속을 뚫고 이날 오전7시30분 숙영지인 전남대에 도착, 그들만의 잔치를 잔치를 준비한다.
현지 지휘관들이 전혀 요청한바 없는 공수병력의 증파로 20일오전부터 광주에는 무려 10개대대 장교 하사관병 포함 총 3,405명(504/2,901명)의 공수요원이 진주하게 된것이다.
공수병의 2번째 증파에 앞서 19일 오후 진종태 2군사령관이 하달한 충정작전 추가지침은 이른바 광주사태의 전개방향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댓글 이런넘의 새끼들이 대통령 되는 나라.
이런나라에 살아가는 우리는 불행일까요.축복일까요.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