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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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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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1418년 ~ 1450년 |
성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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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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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비 |
소헌왕후 |
황 후 |
{{{황후}}} |
왕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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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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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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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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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왕 |
태종 |
부 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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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친 |
{{{부친}}} |
모 비 |
원경왕후 |
모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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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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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왕 |
태종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앞선 천황 |
{{{이전 천황}}} |
다음 왕 |
문종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다음 천황 |
{{{다음 천황}}} |
조선의 제4대 국왕 |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1450년 음력 4월 8일/양력 5월 26일, 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휘는 도(裪), 자는 원정(元正), 정식 칭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1]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흔히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10월 9일은 한글날로 정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10,000원권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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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출생
세종대왕은 1397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 16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 뒤 1418년에 맏형 양녕대군이 태종이 '법을 존중하지 않는 양녕이 군주가 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심각한 비행[2]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충녕대군의 학문이 높이 평가되어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 22살에 새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편집] 재위
먼저 황희, 맹사성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1419년 6월 19일 이종무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경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이후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보급시키려고 여러 책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또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관측 기구인 간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편집] 말년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세종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각종 질병(중풍, 임질, 노안)에 시달려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1450년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영릉(英陵)이다.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세종과 관련이 있는 것
[편집] 세종의 이름이 붙은 것
[편집] 기타
- 과거에 사용하던 1000환, 500환 지폐의 도안
- 대한민국의 1만원권 지폐의 도안.
- 대한민국의 기념일 스승의 날 : 세종의 탄신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을 스승을 기리는 날로 삼음.
- 대한민국의 기념일 한글날 : 한글을 반포하였으리라 여겨지는 날을 한글 창제를 기리는 날로 삼음.
[편집] 세종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한자로는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 ↑ 보통 양녕대군이 일부러 비행을 해서 세종에게 왕위가 가게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비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
[편집] 바깥 고리
1. 세종의 가족
▶ 세종은 총 6명의 부인에게서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정비 소헌왕후 심씨 소생은 8남 2녀이고, 영빈 강씨는 1남, 신빈 김씨 6남, 혜빈 양씨 3남, 숙의 이씨 1녀, 상침 송씨가 1녀를 낳았다.
▶ 1)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沈氏, 1395∼1445)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이다. 1408년(태종 8년)에 충녕과 가뽈를 올리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에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으며, 경빈(敬嬪)에 진봉되었다가 공비(恭妃)로 고쳐 봉해지고, 1432년(세종 14년)에 왕비로 고쳐 봉해졌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으나 비(妃)로서의 내조의 공이 크다고 하여 무사하였다. 문종·세조 등 8남 2녀의 소생이 있었다. 1452년(문종 2년)에 휘호 선인제성(宣仁齊聖)이 추상(追上)되었고, 능은 영릉(英陵)이다.
▶ 2) 안평대군 (安平大君, 1418∼1453)
세종의 셋째아들로,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뗘居土)·매죽헌(梅竹軒)이다. 1428년(세종 10년)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이듬해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하였고, 14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함경도에 육진이 설치되자 1438년 다른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황보인·김종서 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양대군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점차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자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하였으나,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꾸며 김종서 등을 죽일 때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귀양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옮겨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영조 때 복호(復號)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가 내렸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하였고, 시(詩)·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고 전한다. 그의 서풍은 고려말의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독창성도 발휘하여,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이 있고, 유필로는 금석문인 세종대왕 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관련유적 참조)(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재)가 있다.
▶ 3) 임영대군 (臨瀛大君, 1419∼1469)
세종의 넷째아들로, 이름은 구, 자는 헌지(獻之),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428년 대광보국(大匡輔國)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안평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임영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 원윤이 되었으며,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 제작을 감독하였고, 1450년(문종 1년)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계유정난 후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 4) 광평대군 (廣平大君, 1425∼1444)
세종의 다섯째아들로, 이름은 여(璵), 자는 환자(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 신자수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광평은 『효경』, 『소학』 등 사서삼경과 『좌전』등에 능통하였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일곱째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번째 소생인 빙번에게 봉사손으로 입양되어 아버지 세종과는 오촌지간이 되고 왕가의 종실이 되었다. 이듬해 새로 개척한 북방의 육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 교화를 위해 서울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이 주관하도록 할 때 종성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다고 전해지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다고 하나,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5) 금성대군 (錦城大君, 1426∼1457)
세종의 여섯째아들로, 이름은 유(瑜)이다. 1433년(세종 15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가 혼인하였으며, 그 해 태조의 여덟째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두 번째 소생인 방석(芳碩)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장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살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수양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다가, 1455년(단종 3년)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 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 후에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는데, 1456년(세조 1년)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안치되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자, 금성은 순흥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基川) 현감의 고발로 사사(賜死)되었다. 1791년(정조 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 6) 평원대군 (平原大君, 1427∼1445)
세종의 일곱째아들로, 이름은 임(琳), 자는 진지(珍之)이다. 1434년 평원대군에 봉해졌으며, 1437년 종학에 입학하고 호군 홍이용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다가, 1445년 1월 두창(천연두)으로 죽었다. 광평대군이 죽은 이듬해에 닥친 평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종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으며, 세종의 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종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고는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의 억불정책은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 현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 7) 영응대군 (永膺大君, 1434∼1467)
세종의 여덟째아들로, 이름은 염(琰)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졌다가, 1443년 역양대군, 1447년 영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전한다.
▶ 8) 계양군 (桂陽君, ?∼1464)
세종의 서자로, 자는 현지(顯之), 이름은 증,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어머니는 신빈(愼嬪) 김씨(金氏)이며, 처는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즐기고 특히 글씨에 능하였다. 동생 익현군(翼峴君) 및 한명회(韓明澮)·한확 등과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일파가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거하였다. 그 공으로 1456년(세조 2) 좌익공신 1등에 책록된 뒤부터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庶務)의 출납을 맡아 크게 신임을 얻었으며, 1460년 세자가 결혼할 때 도감 제조를 겸하였다. 사람을 접대할 때 공손하였고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세종대왕의 셍애와업적
1397∼1450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년).
이름은 도, 시호는 장헌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충녕 대군으로 있다가 2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곧이어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 정치에 대한 자문과 왕실의 교육을 맡아보게 하였다
궁중에 정음청을 두어 1443년에는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다.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함
과학 기술 부문에도 관심을 가져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고, 궁중에 흠경각을 세워 과학 기구들을 비치하게 했다. 그 밖에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세제를 정비했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 변경 지방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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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일본과는 제포, 염포, 부산포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국교를 지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