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산복 차림이긴 해도 방향을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의령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나하고 다른 할머니 두 분이 아침 여덟시 출발 버스의 승객 모두였습니다. 자가용이 보편화되어 이렇게 손님이 없다보니 대중교통은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하나 싶었습니다.
바쁜 일 철엔 읍에 내려서 고향집까지 갈 땐 택시를 탔다만, 그 날은 바쁘지 않아 걸어서 갔습니다. 저자에서 조기와 고등어 한 손을 사고, 포도 몇 송이와 요구르트를 사서 담은 비닐 봉지를 한 손에 들고 배낭은 짊어졌습니다. 예전에 중고등학교 다닐 때 걸었던 그 둑길을 지나 한 삼십분 걸어 고향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에 닿아 어머님께 문안 인사를 드려도 누가 와 곁에 있는 줄도 모르시는 듯했습니다. 그 해 겨울 병석에 누우신 이후 다섯 번째 맞은 여름이니 햇수로는 어언 5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손목을 잡아보니 더 많이 야위어지시고, 기력이 자꾸 쇠잔해 가시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보다 앞서 고향을 찾은 것은 일요일과 현충일이 이어 있은 연휴 때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병석에 누우신 이후 큰형님 내외분의 병간호로 무척 고생하시는 것을 이 못난 아우는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양파와 마늘을 수확하느라 다른 형제들도 와서 이틀 간 일손을 도왔습니다.
일이 몸에 익숙하지 않아 양파를 그물 자루에 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이튿날 오후까지 들판에서 양파 수확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조금 지친 핑계로 먼저 집으로 들어와 혼자 누워 계신 어머님을 목욕시켜 드렸습니다. 마당으로 모시어 목욕 후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빗어 묶어 드렸습니다. 이어 방을 쓸고 닦고 이부자리도 털어 햇볕에 바래었습니다.
그 해 겨울부터
당신은 뇌졸중으로 자리에 누우셨다.
고향집에 들릴 때마다
한 마리 고동이 마치는 생애를 예감했다.
아직 더운 육신으로 할 일 많으실 터인데
어디로 먼길 떠나실 채비를 하시옵니까.
어쩌자고 추운 영혼만 채우려 하시나이까.
막내아들은
무량한 세월의 강물을 흘러보내고서야
더 야위진 팔목에서 맥박을 짚어보고는
우주보다 넓으셨던 가슴팍을 알았나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문을 찾았나이다.
<껍데기 찬가 전문>
위의 졸시가 막내아들이 시켜드린 목욕으로는 마지막으로 되고만 그 날 남긴 부끄러운 부스러기였습니다.
올해는 잎담배 농사를 짓지 않아 예년보다 덜 바빴습니다. 작년까지는 이맘때면 잎담배를 거두고 논을 갈아 모내기를 해야 하기에 무척 바빴습니다. 이날은 다른 일 거리가 없어서 배낭에 얼음물과 비닐 봉지를 하나 챙겨서 선산이 있는 동네 뒤의 벽화산을 올랐습니다.
한 이십 분 정도 오르면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 누워 계신 바로 아랫자리에 아버님이 먼저 가 계십니다. 올해 간지가 을유년이니 꼭 12년 전 계유년 봄에 아버님이 가셨습니다. 당시 천수를 누리신 햇수가 일흔 둘이셨습니다. 조부모님 산소에 먼저 절을 드리고, 아버님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불초한 자식은 어머님께 더 잘해 드릴 여력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더 차도가 있어 좋아지지도 않으시고 점차 기력이 떨어져가고 계신다고 보고 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 좋은 날 좋은 시를 잡아주시면 어머님을 곁으로 잘 모셨으면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는 추석이 지나면 큰댁 큰조카와 울산 형님댁의 조카가 장가들게 된다고도 말씀 드렸습니다. 청년실업난이 혹심하다고 합니다만 조카들은 관공서, 대기업, 한의원, 학교 등에서 당당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카들이 할머님께 드릴 용돈으로 좋은 세상을 더 누리시지 못함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버님께 이런 보고를 드린 후에 임도를 따라 벽화산 꼭대기로 올랐습니다. 철 지난 산딸기가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어 비닐 봉지에 채워 담았습니다. 중간에 가져간 얼음물로 땀을 식혀 가면서 벽화산 정상을 지나 벽화산성을 돌아 내려왔습니다. 그 날 형수님이 만들어 주신 콩국수가 참 시원했습니다.
나는 해거름엔 밭둑에 가서 고구마 잎을 따오고 풋고추도 따왔습니다. 이것은 내일 아침 창원 집으로 가져갈 반찬거리입니다. 사실 큰집에 오려면 교통비나 생선 값이 얼마가 들긴 해도 고향집에서 무공해 반찬거리를 가져가기에 나는 늘 득입니다. 어머님도 보고 신선한 찬거리도 생기고 말입니다.
어머님이 병석에 누우시고는 사랑채에 지내셨습니다. 어머님이 드시는 음식이 많으시진 않지만 대소변을 받아 내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간 세월에 어머님 병환 수발을 해오신 형님 내외분을 아우는 정말 존경합니다. 그 날밤 나는 모기장 안에서 어머님 손을 잡고 날이 더디 새기를 기다렸다만 네 시가 되니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이튿날 큰조카가 읍내 주차장까지 태워 주어서 점심 무렵에 창원에 닿았습니다. 전화야 아침저녁으로 자주 드립니다만, 이것도 병간호에 바쁘신 형님 내외분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나 싶어 조심스러웠습니다. 매 주 찾아가고 싶다만 그럴 일 없이 어머님이 많이 위독하시면 그 때 연락 할 테니 걱정 말라 하셨습니다.
달이 바뀌어 칠월 초엔 다시 고향집에 가려고 하니 형님이 오지 말라고 해서 등산복 차림으로 성주사로 갔습니다. 내가 마음 둔 종교가 없다만 체질로는 참선의 길이 있는 불교에 끌렸습니다. 이날은 드물게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합장하였습니다. 아버님 산소에서와 같이 빌고는 불모산을 오르면서 땀을 좀 흘렸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오후 큰 형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산 형님한테 연락해서 시골에 한 번 다녀가라는 연락이었습니다. 어머님이 미열이 있고 평소와 다르신 듯해서 읍내 선진병원에 모셔서 진찰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의료보험카드가 부산 형님 밑으로 되어 있기에 먼저 병원으로 와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창원의 교육연수원에서 열흘 짜리 직무연수를 받는 기간 중이었습니다.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부산, 울산, 진주 등으로 흩어져 지내는 형제들한테 연락을 해 놓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잠에 쉬 들지 못했습니다. 나는 승용차가 없는지라 이럴 때 기동력의 불편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나는 연수중이라 마음만 졸이면서 창원에서 밤을 세웠습니다. 형제간에 의논하여 어머님을 병원에서 모셔도 더 차도가 있을 것도 아니고, 위생적으로도 더 깨끗하지 않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건강검진만 한 번 더 확인하고 그 날 밤에 고향집으로 모셨습니다. 평소보다 열이 조금 올라 내려가지 않는 상황이라는 연락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흩어진 형제자매들이 어머님의 병환을 걱정하면서 모두 다녀갔습니다. 집사람도 막내며느리 도리로써 주중에 고향집으로 보내 병환의 차도를 지켜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미음조차 제대로 드시기가 힘드시어 읍내 병원에서 의사가 왕진으로 영양제 주사를 놓고 가게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내가 연수과정을 마친 주말에 시골에 갔을 때도 영양제를 맞고 계셨지만 손목에 주사바늘이 들어갈 혈관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 이렇게 어머님의 생애는 마감이 되어 가시는가 싶은 안타까운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추석이 지나면 집안에 조카며느리를 새 식구로 맞아 들여야하는 상황에서 어머님은 생을 하직하시나 싶었습니다.
이후 마음 조이는 나날이 경각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 형제자매와 집안 사람들이 어머님의 마지막을 문안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미열이 오르면서 병세가 악화되시길 시작한지 보름이 지날 즈음이었습니다. 방학중이라 시골 가서 얼마간 지내리라 마음먹어도 형수님한테 시동생 수발거리가 더 생길까 봐 가지 못해 마음만 앞섰습니다.
장마가 끝나간지도 꽤 지났건만 무더위에 간간이 소낙비가 쏟아지는 전형적인 여름 날씨였습니다. 형님이 오지 말래도 이 비 그치면 며칠 간 묶을 옷가지를 꾸려 걸어서 고향집까지 가려고 작정했습니다. 내 구상을 들은 큰 녀석은 ‘아버지는 조선시대 사람이예요’라면서 의아해했습니다. 새벽 세 시에 반림동 집을 나서서 창원대로와 마산역을 지나 중리 마산대학을 돌아 함안을 거쳐 정암다리를 건너 고향집까지 대략 열 시간이면 가지 싶었다.
이렇게 날짜를 꼽아 놓고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던 어느 이른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예감한 데로 큰형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님이 기체후가 조금 다른 듯하니 창원 동생은 먼저 집에 와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고3, 중2의 두 아이 때문에 나중에 오도록 하고 나는 우산을 받쳐들고 서둘러 시골로 갔습니다. 계획한 걸어서 고향 가기는 뒤로 미루고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어머님께선 숨결이 거칠어지시고 맥박이 늦어져서 며칠 전부터 윗채 큰방에다 모셔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가만히 누워 계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영양제 주사도 어려웠습니다. 막내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곁에서 야윈 손목을 잡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금 힘드실 때 요구르트나 보리오차를 입술에 조금 적시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님과 밤을 꼬박 세우고 이튿날 낮엔 형수님을 집안에 계시게 하고 비 사이로 큰 형님과 같이 벼논에 농약을 뿌리고 외양간을 치웠습니다. 저녁엔 다른 형제들도 속속 모이고 게릴라성 집중호우는 밤사이 그치지 않고 세차게 퍼부었습니다. 텔레비전 자막엔 곳곳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지만 날이 밝아오자 비바람도 잦아들어 그치고 있었습니다.
밝아온 새날이 음력으로 유월 스무 아흐레였습니다. 양력으로 8월 3일 아침 7시 30분. 밤사이 발끝 손끝에서부터 체온이 점차 식어가던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날숨을 한 번 내쉬시곤 편안히 눈감으셨습니다. 유월 그믐달 조각배를 타시고 어머님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누리신 천수가 여든 한 살이십니다. 아래로 일곱 남매와 그 배필을 두었고, 친손외손에다 외증손까지 합치면 현재 열 아홉 명입니다. 앞으로 더 불어나겠지요. 참으로 작은 거인의 대단한 궤적이십니다.
자식들은 큰방 병풍 뒤에서 아직 더운 체온이 남으신 듯한 당신의 육신을 깨끗이 닦아드렸습니다. 생전에 당신이 손수 준비해 두신 수의를 경건한 마음으로 입혀드렸습니다. 명주 치마저고리와 버선을 입으신 소렴의 모습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전신을 일곱 등분으로 묶는 대렴을 하고 나니 눈물이 와락 앞을 가립디다.
이어 오동나무 관에다 옮겨 누이고 아버님 옆에 가실 징표로 열 아홉 살 시집 올 때 가져오신 혼서지를 베개 옆에 두었습니다. 아버님은 생전에 잔정도 없으셨고 무뚝뚝하셨지요. 아버님 곁에 가실 일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 곁에 나란히 누우시면 살아서 못 다 주신 정 도탑게 주실 겁니다. 바로 윗자리 할아버님 할머님께서도 예전의 시집살이가 아닌 늦게 온 며느리 귀여워 해주실 겁니다.
입관 절차를 마치고 상주들은 성복제를 올리고 아랫방에 빈소를 차렸습니다. 부음을 전하는 부고와 전화들이 바쁘게 오고갔습니다. 이웃과 친지들이 돕고 해서 음식 장만과 손님 접대의 손들이 부산했습니다. 집안이 넓고 여러 형제들의 든실한 조카들이 여럿이어서 시골집에서 장례 절차를 지내도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마침 덥기는 해도 궂은 날씨도 맑게 개어 주었습니다.
삼일장으로 정하고 장지는 선산의 아버님 곁이고 지관은 집안의 경험 있는 삼종 아저씨가 보았습니다. 상포계가 있기에 장지까지 운구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치산과 석물은 중장비가 하기에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큰 형님은 가시는 어머님의 마지막 이름표인 붉은 색 비단 명정에다 ‘유인능성구씨지구(孺人綾城具氏之軀)’라 썼습니다. 집안 몇 분들의 이름으로 조기도 만들었습니다.
형제가 다섯이라 각기 인연이 닿은 분들이 멀리서도 와서 조문을 해 주었습니다. 이 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쉴 시간을 뺏었나 싶어 상주로서 여간 미안하지 않았습니다. 이 빚은 세월 가면서 꼭 갚을 걱정이 앞섭니다. 예부터 난리가 나도 신주하고 족보, 그리고 상을 입었을 때 찾아준 분들의 ‘녹명록’은 짊어지고 뛰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요.
꼬박 사흘 간의 조문 행렬에 다녀가신 일가친척과 직장동료 선후배님들께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량없는 신세를 입었습니다. 접빈에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을 썼으나 인사가 더러 빠진 부분도 있지 않았나 싶어 염려가 됩니다. 상차림과 뒷설거지를 도운 여러 조카들도 고생 많았네. 그렇게 많은 집안 식구들이 모인 것이 처음인 조카들과 조카사위도 더러 있었을 걸세.
음력으로 칠월 초하루 아침. 당신께서 시집오신 이후 평생을 드나드신 안마당에서 꽃상여를 태워 발인제를 지냈습니다. 아마 당신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호사스런 사치였을 겁니다. 마을 뒷산을 오르기 전에 당신의 조카인 대구 사촌형이 노제 술잔을 올렸습니다. 이후 집안 형님이 꽹과리로 두드리며 인도하는 구슬픈 만가에 따라 북망산천으로 가셨습니다. 상주와 백관이 상여 새끼줄에 끼운 월강채 노자도 수월찮았습니다.
장지에서 조상께서 놀라지 마시고, 오늘 어머님을 이 자리에 모신다고 아뢰는 산신제를 올렸습니다. 이어 어머님께서 누우실 자리에 개토제를 지내고 포크레인으로 곽이 들어갈 만큼의 구덩이를 파서 상주들은 어머님을 안치하고 한줌 황토를 상복 옷자락에 싸서 눈물 방울과 함께 떨구었습니다. 어머님의 자리가 그렇게 아늑해 보였고 황토가 보드라워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어 듬직한 일꾼들의 능숙한 솜씨로 봉분이 만들어지고 주변까지 잔디를 잘 입혀드렸습니다. 저는 지쳐 안경을 벗어 놓고 잠시 쉬다 깜박하고 일어선 바람에 새로 산 안경테와 렌즈까지 어머님 산소에다 묻고 말았습니다. 눈앞이 흐리시면 막내의 안경으로 어둔 세상을 더 밝게 구경하십시오. 먼저 누우신 아버님과 어머님 무덤 앞자리 좌우에다 한 쌍의 망두석이 세워지니 치산이 끝났습니다. 상주들은 준비한 제물로 평토제를 지내고 잔디에 술잔을 뿌려주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텅 빈 가슴을 채울 길 없는 허망함이 엄습해 왔습니다. 큰형님은 부의금과 장례비용을 정산하여 형제간의 우애에 조그마한 틈이 없도록 마음을 써 주셨습니다. 어머님을 선산 몇 펑 잔디에다 묻고 내려온 막내아들은 막걸리 몇 잔을 연신 들이켰습니다. 간밤까지 어머님의 육신이 누우신 큰방 그 자리에 누운 막내아들은 지친 몸이지만 당신의 환영으로 쉬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습니다.
장례 이튿날 새벽에 어머님이 옮겨 누우신 산소자리를 살피러 형제들은 모두 같이 갔습니다. 잔디를 한 번 더 밟아 주고 내려와 아침 식후에는 온 가족이 나서서 집 근처 고추밭에 주렁주렁 매달려 빨갛게 익어 가는 고추를 하루종일 따 모았습니다. 상주가 많다보니 더러는 상복을 작업복으로 입고 일하기도 했습니다. 집안의 정리정돈 청소들도 마무리가 되어갔습니다.
삼우제를 지낼 제사 상차림으로 부녀들은 저녁까지 손길이 바빴습니다. 여름철이라 음식이 상할까봐 나물 같은 것은 당일 새벽에 준비를 해야했습니다. 새벽에 어머님의 빈소에서 삼우제를 지내니 마음이 더욱 허전했습니다. 이로써 생전 어머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대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아무리 잘 차린 제수음식이면 무엇하리오. 이제 당신의 육신은 가시고 없어 혼백만 남으시어 자손을 굽어살필 뿐이십니다. 불초자식이 향불을 피워 올려 드리는 삼우 술잔을 받아 드시고 이승의 남은 원을 털고 훨훨 터시고 저승으로 가시옵소서. 이날이 칠월 초사흘. 초승달을 타고 별빛 고운 여름 밤하늘로 가뿐하게 가시옵소서.
예전엔 백일 탈상, 일년 탈상, 삼년 탈상이 있었다지만 이렇게 짧은 기간 빈소에서 당신의 영정 치우는 것이 마음이 너무 아립니다. 당신은 자식한테 삼칠일은 물론 돌이 지나도록 젖을 물려 키워주지 않으셨던가요. 아무리 세태가 세태라지만 자식의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려진 것만 같은 허전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어머님 영정은 큰방의 아버님 곁에 걸어 모셨습니다. 삼우제 지낸 새벽에 일곱 남매와 며느리 사위들은 밤이슬이 내린 풀밭 길을 걸어 산소에 다시 올랐습니다. 산소로 오르는 언덕배기에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었더군요. 자식들이 엎디어 있는 이승과 어머님이 누워 계신 저승이 아직 실감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 혼백을 무덤 옆에다 살짝 묻어두었습니다.
첫댓글 막내를 두고 떠나신 슬픔이 더욱 아리어오는 듯 잔잔합니다...
그냥 울엇습니다. 마음이란 형체가없어서 따라 묻히지 못 하는 것인가 봅니다. 조문을 가지 못하여 너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