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 대부 행 호조참판(진)공 휘 흠 신도비명 병서
공의 휘는 흠이요 자는 위명이며 호는 금호다. 그 선 홍주여양인이다.
시조 진총후는 고려 예종조에 신호위대장군이었으며 인종 4년 1126년 이자겸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상장군이 되고 여양군에 득봉 시호를 문성으로 봉군지인 여양을 관향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세조: 준은 금자광록대부로 참지정사와 판병부사를 역임하였으며
3세조: 광수,병부상서공은 안서대도부사(현,황해도 해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푸시다 서하 임춘선생이 자기가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올린 계문에서 공을 문종에 비교했고 천자(임금,황제)가 한 세상에 만난것을 기뻐하고 조정에 공보다 나은 신하가 없다라고 칭송했으며
4세조: 휘온 예빈경 공은 중시조로 고려 강종조에 문과에 급제 한림학사와 예빈성경을 말년에는 공주목사와 나주목사를 지냈다.
5세조: 취는 성균 진사로 양주목사를 지내고
6세조: 영찬, 사온 직장공은 중계파조가 되시며 하계5파를 이루고 있다.
7세조: 인각이며 고려조 문서 응봉사 정자 종 7품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낙남하여 두문동제현과 함께 고려 수절신으로 망국신하의 절의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후학을 가르치는 데만 진력하시었다. 정자공파조다.
8세조: 복돌(복심)은 사중령동정으로 정자공이 조선왕조에 협력하지 않고 낙향하여 그 자손들마저 관직에 출사를 하지않아 회유정책으로 내린 벼슬이며 후에 문과에 급제 경연사경공으로 왕에게 강론하는 경연의 요직에 계셨음이 조선과환보에 등재, 세자 시강원 사경으로 세자를 시학한 학자이시다.
9세조: 장은 음직 예빈시 주부공으로 고조부이고
10세조: 효우는 동첨절제사겸 목포만호로 참판공 증조부요. 생 2남 장방은 맹경이요 차방은 중경인데 무과부장이다.
11세조: 맹경은 성종조에 등제 누천지 여산군수를 지냈고 정상청간하며 선이교화로 리.민(관원과 백성)이 함께 칭송한 현조로 광산구 삼도동 석문내 중록 사좌에 묘가 있으며 위로는 정자공파조와 함께 5위분이 동원에 모셔저 있다. 군수공은 공의 조부가 되며 배 영인 해남차씨로 6형제를 두니 고 4손의 자는 덕보요 호는 지암으로 의범 청숙 문행저세한 현조로 금강제현 기묘명현들과 음영주창 경상추중하며 전심 성학한 학자이다. 참판공 어머니는 함평이씨로 부는 시영이며 두 아들을 두니 장방은 관이요 자는 여명이며 차방은 흠으로 자는 위명이요 호는 금호로 가의 대부행 호조참판공이다.
배숙부인 함평이씨로 명한 양익공 종의후다. 공은 정미 1487년에 출생 경오 1510년에 중사마시에 진사가 되고 출천지 효자로 향도의 추천을 받아 계미 1523년에 온양현감에 특제되고 배 정조사 통사로 명나라 황실특사로 외교의 훈업이(조선왕조실록에) 등재 누배 호조참판으로 조정의 중심에서 현달한 치세가로 (조선환보에)등재되고 정사를 돌봄이 염결간중하여 리원(관원)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그 밝음과 덕을 흠모하였다. (사재 금성지) 부친 병환의 소식을 듣고 즉일(그날)로 달려와 상분혈지하여 조간 정성을 다하고 불탈애질 및 장후시묘 3년과 매일 새벽 성묘하기를 10년을 하루같이하다.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삼고 몸소 실행하여 후손의 귀감이 되셨고 도의와 풍류의 선계에 웅준하고 청려함이 함께하니 서설속에 핀 꽃과 같고 상운속에 피어나는 비단구름 같다.
의덕학문으로 찬연한 문적을 남기고 계해 1563년 향년 77세로 서세하심에 나주 사기소 선고묘 아래 계좌에 영면 배 정부인 함평이씨도 동원에 모셨다.
장방 윤온은 1남 (개)로 성균관진사요. 차방(2남) 윤량은 무후되여 윤검의 장방중훼가 윤량후가 되다. 3남 윤공은 생2남 장방 준이며 차방 위이다. 4남 윤검의 자는 득지요 생 2남으로 장방은 윤량후로 출계 차방은 계훼로 무과급제하여 병절교위 행 용양위 우부장군이다. 5자 윤의는 생일남으로 언택이며 자는 춘기다. 6자 윤신으로 생일남 덕창이다. 공의 6대손 만재 호 봉동 예조좌랑이 행적을 갖추고 진사 강주영이 찬 한 행장을 참고하였다.
함평 참판공 문중의 앞날은 창대하리라 우리 문중의 자랑인 월계사는 전국 사림에서 일제히 공의로 발의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에 을미 1775년 월계사 사우를 건립 위패를 봉안하고 유림제로 춘 2월 중정일에 현조의 선정과 문적을 흠앙하며 봉향하니 호남 사림이 한자리에 모이더라
조선말 대원군의 추상같은 서원철폐령에도 월계사는 피해를 입지않으니 선업이 만세에 영원함을 자랑하더라 가의대부 행 호조참판공 휘 흠 금호선생 유고부록에 전하는 오언절구 우후영춘 및 우음 또 관사 후 등 주옥같은 시에서 조선왕조실록 계문에서 안회의 덕행 민자건의 효행 곽임종의 학덕 황숙도의 선업과 무를 겸비하였고 진퇴를 아는 군자였다. 진사 강주영이 시로 사례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청계골획우고산 학사유방재차간 세사무상 쇄차성 문풍불추 왕이환
함평 대각리! 산첩첩 물겹겹 하늘만이 월계사를 굽어 살피는 심산유곡에 참판공이 은거하신 깊은 뜻을 오늘에야 조금은 알겠노라.
회장 영호님 위원장 채언님 부위원장 남호님 도유사 막동님이 행장을 갖추어 비명을 청 하기로 일찌기 선조님의 시를 희찬 하던터라 굳이 글 못한다고 사양치 못하고 짓는 바이다. 후학은 붓을 잡음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오직 중용을 지켜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새로운 행장은 전고를 충분히 했고 학계에서도 추인 검토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여양진씨 상대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예빈경대종중 회장 영기님 수석부회장 양섭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현조의 문적과 행록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게 해 주신 참판공 문중회 회장 영호님 수비추진위원장 채언님 부회장 남호님 도유사 막동님을 비롯하여 성금하여 주신 후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뿌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교육의 장으로 후손으로써 긍지를 갖고 책무를 다하여 명문의 전통을 잇기 바라면서 나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숭조돈종을 간청하며 장래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 후세에 훌륭한 군자의 입언을 기다린다.
참판공 16대손 해송 옥수 근찬서
대각참판공 문중회 수비추진위원회
회장 15대손 영호
부회장 16대손 남호
추진위원장 15대손 채언
도유사 14대손 막동(용문)
총무 16대손 수환
감사 16대손 귀수
간사 16대손 수견
세재 병술 추양절 서기 2006년 9월 23일 수비
첫댓글 이상한 구절이나 문맥을 보시면 꼬리말 을 등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세조:공주목사를 공주지사로 수정 . 8세조 사적 맨끝에 사경공은 참판공의 백형이 되신다. (이하 9세조~12세조의 사적은 삭제). 9세 진흠 참판공사적:(生1487년은1427년생)으로. (1510년은1450년)으로.(1523년은1453년)으로 사적을 수정바람. >>비문 재구(再構) 부탁 합니다.^^사적 중간에 진흠 참판공은 세조 혜장대왕실록에 좌리 원종공신 3등에 록훈되다." 를 삽입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