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선 못
만일 ‘추억의 비탈길’이란 용어를 단 한번만 사용하라고 한다면...
대구의 ‘영선 못 ’일대의 등하교 길을 꼽는데 주저하고 싶지 않다.
물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길이다.
그러나 추억 속에는 엄연히 살아 있고 오솔길의 환영을 만들어 내며 더욱 선명하게 뇌세포를 자극한다.
행정상의 주소로는 대구시 남구 대명동 2014번지 일대다.
지금은 못(池)대신 재래시장(市場)과 주택 등이 어수선하다.
누가 보아도 옛날만 못하다는데 동의한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2학년 중반까지 이 일대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저항 무방비상태에서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지다시피 하며 발걸음을 옮겼으니 어찌 보면 어린 마음에 지겹기도 하였으리라.
비 오는 날 우산을 써 본 기억은 없지만 신발에 물이 센다는 기억은 확실히 살아 있다. 진흙탕 길 신발 속은 엉망진창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나라사정이나 집안형편이나 신발 속이나 너무 닮았지 않나싶다. 밟고 갔다. 그저 앞만 보고 가는 게 최선이었다.
무릎이 터지든지 발가락이 튀어 나오든지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당시 ‘워카’란 놈이 등장한 듯함) 정해진 길로 무념무상으로 공부에만 열중하는 길 외엔 다른 잡념이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추측컨대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10Km다.
신천동에서 동인동 삼덕동 대봉동을 거치며 담 너머로 급우란 급우에겐 다 목청껏 소리를 치고 기별을 보내 마침내 일렬종대를 이룬다.
경북여고 담벼락을 어설픈 눈동자로 힐끔힐끔 곁눈질 해 가며
수도산(오포산) 비탈길을 돌아서 ‘영선 못’둑에 닿으면 학교에는 거의 다 온 셈이다.
이제 가파른 오르막 교문 앞에 버티고 있는 규율부만 통과하면 교실 까지 무난한 등교다.
사진(1)
사진(1)에서 ‘영선 못’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옛날 능인중고등학교다.
추억의 ‘영선 못’이다.
못 둑에 모인 사람들의 연령층으로 보아 집안에 무슨 행사를 마치고 나와서 모인 듯 하다. 옷으로 보아서는 겨울철 같고 차림새로 보아서는 아마 우리가 태어난 무렵 전후가 아닐까 싶다.
(못 뒤쪽으로 보이는 3층 건물의 능인학교는 붉은 벽돌색이었지 아마)
‘영선 못’의 물결 언저리에서 땅도 보았고 하늘도 보았다.
긴 등하교 길에 못 둑 저편에 포진한 낚시꾼 들을 쳐다보며 까까머리 백삼선의 건아들은 과연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문득 옛시조 한수가 회포를 때린다.
! ~ 저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釣臺)더냐
문왕은 어디가고 빈 대(臺)만 남았느니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 하더라 ~ !
세월무상이다. 가버린 세월이고 흘러버린 물이다.
문명의 발전으로 ‘영선 못’은 수리의 역할을 마감하고 주거지역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못을 메울 때 많은 양의 큰 물고기들이 수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가마니로 건져내었다고 하니 혹시 강태공의 후예들이 보았다면 매우 섭섭해 하였으리라.
매일같이 무거운 책가방을 둘러메고 물끄러미 ‘영선 못’을 쳐다보며
경고의 건아들은 꿈을 꾸었는가-! 세월을 낚았는가-!
많은 세월이 흘렀고 강산도 수차례 변했다.
세월의 잔영은 어디쯤 있는 역사의 증인인가?
문왕은 갔고 강태공도 가버렸다. 물 차던 제비도 가버렸다. 현장이 없어지고 말았다. 꿈을 꾸던 현장인가? 꿈을 깨던 현장인가?
과거가 없어진 건 당연할지 모르지만 추억이 없어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하다.
사진(2)
(사진2)는 지난 초겨울에 찍은 사진이다.
휴일 오후 조금은 추운 날씨다. 따끈한 해장국 에 소주 한잔을 염두에 두고 현장까지 쉽게 접근했다.
준비한 현장도면과 사진(1)의 방위를 맞추어 촬영지점을 잡아냈다.
웬걸? 남의 집 옥상에 낯선 사람이 올라가기가 어디그리 쉬운 일인가?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모양이다. 시장 한가운데다. 인근 돼지국밥집에서 이실직고를 하고 면접시험을 거친 후에야 겨우 도움을 얻어낼 수 있었다. 현장취재기자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듯하기도 하다.
능인학교 대신에 아파트촌(상아맨션)이 신기루처럼 하늘을 가린다.
강태공의 조대가 있던 자리는 어느 건물 콘크리트 밑바닥이 되었는지 대략의 위치마저 가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간략히 샷터를 두 번 누르고 마치 역사의 죄인이 된 심정으로 다닥다닥 어수선하게 붙은 시장건물을 탈출하다시피 벗어났다.
옛길을 더듬으며 10여분 걸어 그 옛날 경북고등학교 (지금은 대구고등학교) 비탈진 교문에 들어섰다.
40여년 만에 찾은 대명동 고등학교 모교교문은 너무 감명적이다.
옛 모양이 절반쯤은 살아있다. 차츰 안으로 들아 갈수록 옛 모양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척박한 토양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곱게 피어 홍안의 소년들을 지켜보던 코스모스 군락은 이젠 야구장으로 바뀌었다.
겨울철에 점심시간 당번이 되면 큰 주전자로 뜨거운 엽차 물을 받으러 갔던 곳은 야구장에 예속된 부속건물이 되었고 그 옆 건물은 큰 규모로 대로에 접하도록 신축을 하여 ‘달구정사’란 당호로 대구고등학교 동창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학교 뒤편 큰 강당은 2~3층으로 나뉘어져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코스모스가 피었던 자리는 허공이라기보다는 어떤 진공 속으로 소멸된 듯하다.
(‘허공속의 진공’이라고 표현하면 느낌이 좀 애매해 지나?)
자, 그럼 옛날로 돌아가는 기억의 다리를 건너보자.
고교 합격자발표를 보러가던 날 드디어 치명적인 실수가 등장한다.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았으랴만 무작정 뛰어놀다가 그만 난데없이 한방 얻어터지고 만 셈이다. 골목길은 당시 사춘기 어린이들의 보배로운 문화공간이다. 낮이던 밤이던 정보와 지식이 격의 없이 교류되었던 산 교육장이다. 그 골목길의 한 친구와 합격자발표를 보러 같이 갔던 것이 그만 화근이 된다.
(이를 어쩌면 좋으랴-!)
섬뜩 하는 이질적인 섬광을 두 번 느꼈던 것이다.
한 사람은 합격이고 또 한사람은 낙방이다. 어안이 벙벙하다.
기쁘지만 기뻐할 수도 없고 슬프다고 해서 기쁨을 슬픔으로 대신할 수도 없는 묘한 감정의 굴곡이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합격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 친구는 그만 운동장 모퉁이 바위 옆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먼 산만을 바라본다.
아예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기뻐하실 부모형제를 보고 싶은 내 생각과는 정반대다.
그저 멍하니 같이 서 있는 수밖에 별도 대책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 후 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드무비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로는 성격상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춘기의 성격변화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후 그 친구는 어느 학교로 진학한지도 모르게 소문을 숨기고 골목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더니만 얼마 후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다.
입학을 한 후 그해 가을 그 친구가 머물었던 바위 옆에 핀 애잔스러운 코스모스는 영 잊을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의 기억 한 토막-
고3 봄(가을?) 소풍을 구미의 명산 금오산으로 갔었다.
폭포수 옆 야은 길제 선생께서 수도하던 동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돌아오는 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구미 역에서 열차가 대기하는 시간을 틈타 몇몇이 잠시 대오에서 이탈하였다가 마침 인근에 서성이던 군인들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할 뻔 하였다. 기겁을 하고 가까스로 대오에 합류하여 봉변을 면하긴 하였으나 뒷맛이 영 개운 칠 못하였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있는 학생들에게 그 군인들은 왜 적개심을 품은 것일까? 학생들이 군인들의 적이라니?
도망 오는 귓전에 들리는 그들의 내뱉는 말은 혐오감이 되어 뒤통수를 흔들었다.
“00학교 0들은 무조건 죽여라”
명문고교는 그들의 타도대상이었던 모양이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후-
경북고등학교 본관에는 더 이상 가슴 설레이는 합격자명단 발표가 나붙지 않았다.
평준화의 이름으로 ‘영선 못’에 묻히고 만 것이다.
선망의 상아탑 현장이 결국 강태공과 그 조대였단 말인가?
경북중학교는 아예 그 이름마저 공중분해가 되고 말았다.
망령으로 취급되어 도륙이 나고 말았다.
교육현장의 기대치가 부도가 나고 만 것이다.
‘영선 못’의 물은 한강으로 흘러갔다.
한강에서 다시 낙동강으로 흐르더니만 그만 망망대해로 빠지고 말았다. 그 바다에서 나룻배 한척이 육지로 들어와서 낙동강을 역류하여 다시 ‘영선 못’에 이르니 한 세대가 저물어 가나보다.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의 가슴과 자식의 얼굴은 별개의 것이란 사실 앞에 놀란다.
자식의 건강이 변태성 교육열에 희생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나라 잃었던 설음이 고작 이웃타도로 버티다니 너무 못났지 아니한가?
불타는 강이다.
지금 한강이 불타고 있다.
이제‘가난의 恨’도 흘러갔고 ‘문맹의 恨’도 바다를 넘어갔다.
그런데 왜 한강은 아직 불타고 있는가?
인간의 자격은 평등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능력은 동일할 수 없는 것은 아닐는지?
부모의 恨과 자식의 건강이 혼연일체가 될 날은 언제쯤 돌아오려나?
아-!
<그 이름도 꽃다운 경중의 건아>여-!
<무궁할 손 그 이름 경고의 건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