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사진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ㅣ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 3월 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등박문(伊藤博文)과 뒤 따러는 조동윤(趙東潤,1871-1923) 남작.
1919년 2월 9일 촬영.
▲고쿄 궁중삼전(宮中三殿)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나서는고종의 모습(1918년 1월 15일 촬영)
▲덕수궁 석조전 앞 기념촬영.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당시 고종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이날 기념촬영에는 이왕직 중추원 인사들,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軍警 고위층
들이 참가, 총 3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도자기에 휘호하는 영친왕.
▲사진기로 창경원 하마를 촬영 하는 영친왕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모자를 쓴 다소곳이 고개숙인 모습이다.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 이 겉옷을 들고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보낸 덕혜옹주가 日出소학교에서 일본학생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인듯 싶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옹주다.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1925년)
▲군복차림의 영친왕이 1918년 1월 25일 경성유치원을 방문한 모습이다.
(1918년 1월 25일 촬영)
▲영친왕이 조선 방문을 마치고 당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도쿄행 열차를 타기 직전 모습이다.
연미복 입은 수행원들과 함께 거수경례하며, 플랫폼을 걷고 있다.(1918년 1월 26일 촬영)
▲1919년 2월 9일 고종 황제가 승하한 창덕궁 함녕전에서 일본 왕가 장례의식인 봉고제(장례를
하늘에 알리는 의식)가 열렸다. 함녕전에 차려진 일본 신사풍의 제단 앞에서 황실유족과 일본 제관
들이 의식을 치르는장면이다. 왼쪽 문 바로 옆에서 힐끗 카메라를보고 있는 인물이 당시 총독 하세
가와다. <서울대박물관 제공[2006/05/26 15:27] 출처 : 인터넷 한겨레>
▲이승만 대통령이 그의 저서 '독립정신'(1910)에서 명성황후로 지명한
사진이다.
▲주한 이탈리아 공사 카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 우리나라에 왔던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등에 실린 사진이다.
- 호머 헐버트씨는 1906년 발간된 `한국 견문기'138쪽에서 `궁녀'라고 소개(왼쪽).
(오른쪽)독일 출신 작가의 사진첩에서 나온 것.'시해된 왕비'라는 뜻의 독일어(Die ErmodeteKonigin)설명이 붙어 있고, 대원군의 평상복 사진과 배경이 같아 일부에서는 명성 황후로 추정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890년대 초반 발간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영국 잡지화보 등에 '조선의 궁녀'라는설명으로 실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위의 왼쪽 사진 : 고종과 순종 모습이고,
오른쪽 : 독일어로 ‘Palastdame’(궁녀),
영어로 ‘Attendant on The King ofKorea'(조선 왕의 시종)로 기록됨.
아래 사진은 대원군이고, 오른쪽은 중국풍 복식 차림의 대원군 모습이다.
▲상중의 이건 연미복 입은 고종 황제 모습.
▲영녕전 참배 의식중인 영친왕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
이 있었다.
▲덕혜옹주와 선생, 동급생들의 기념사진
▲홍릉 입구의 홍살문 - 홍릉에 배치된 3조의 홍살문 중 하나로 현재는 전하지 않는 문이다.
▲융희황제(순종)의 장례식(국상)에 참여한 나인들 - 재궁의 봉안을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
이다.
▲융희황제(순종)의 국상 장례식으로 인산습의(因山習儀: 장례식 예행연습) 광경을 카메라
에 담고 있다.
▲남양주 금곡으로 향하는 인산(因山: 장례) 행렬
▲창경궁 인정전
창경궁은 조선왕조 태종 연간에 지어진이래 가장 오랫동안 국왕들이 기거하며 활동했던 궁
궐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7년 내전일
대에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 창덕궁의 모습을 담고 있다.
▲황실 가족사진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 21일 촬영된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
까지 자세히 엿 볼 수 있다.
▲석조전 오찬에 나아가는 고종 -가마에 탄고종이 영친왕 방문 기념오찬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영친왕이 이하계의 안내로 배에서 내리며 거수경례로 마중 나온 관민
들에게 답하고 있다.
▲총독 관저 내부로 들어어가는 영친왕.
영친 왕이 윤덕영 자작(오른쪽)과 총독부관리들의인사를 받으며 총독관저로 들어가고 있다.
▲남대문에 도착한 영친왕.
1918년 1월 13일 오후 9시경 남대문역에 도착한 영친왕이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
미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운현궁 양관
운현궁 내에 자리 잡은 양관은 일본인이 설계 시공한건물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의 저택으로사용되었다. 그 후 의친왕의 차남인 이우의소유였다가,해방이후인 1946년
에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게 되면서 현재 덕성여자대학교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
용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대표 적인 서양식 건물로, 영국인 기사 하아딩(G.R.Harding)의
설계에 의해 1900년 말 착공, 1910년 6월 완성되었다.
▲창덕궁 상궁들과 기모노 복장의 일본 여인들 모습.
한국사진계 선각자인 백오 이해선(1905-1983) 선생 탄신 100년기념으로 선생이 촬영
한 사진작품.
▲이방자 여사와 함께 받은 덕혜옹주의 생일상.
구한말 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 발견. 최진연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회장은그동안
미공개 조선 황실 사진을 공개. 1962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가 생일을 맞아 이방자 여
사와 함께 촬영된 사진이다.
▲오열하는 궁녀들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의 승하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황실의 궁녀들이 오열하고 있다.
▲구한말 기록된 비운의 왕족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덕혜옹주(左부터)
▲구한말 황족이 한자리에....왼쪽부터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윤황후, 순종,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진을 안고 있는 사무관 모습.
▲대원군의 62세 생일 기념 사진.
이 사진은 1882년 8월 한성관무처에서 62세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선포 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한 것으로 내가 한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1926년 4월 25일(음3월 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을 토하는 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흐른 때였다.
1907년(광무 11년) 7월 19일(음6월 10일)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 27일(음7월 19일) 경운궁(덕수궁)
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
(1906년 2월) 통감을 설치하고,국정을 간섭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낙선재에서, 1966년 2월 3일 73세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에 순종과 순명효황후와 합장돼 유일하게 한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이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행렬
▲어떤 의미를 지닌, 무슨 사진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곳인지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댓글 바라옵니다.
▲운현궁 양관
▲창경궁 국내부 사진
▲운현궁 양관 모습.
▲1926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 행렬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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