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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06.14
▲조선 제15대왕 광해군(光海君) 1575년(선조 8)∼1641년(인조 19).
■ 제15대 광해군(光海君)
조선 제15대왕 광해군(光海君 : 재위 1608~1623)의 휘(諱)는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김희철의 딸 후궁 공빈(恭嬪) 김 씨 소생이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조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동복형제이며 서출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서출 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비(妃)는 판윤 자신(自新)의 딸 유(柳)씨이다, 1608년에 즉위하여 당쟁(黨爭)의 폐를 알고 억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당쟁(黨爭)에 휩쓸려 대북파(大北派)의 흉계에 빠져 폐륜행위가 많았으며 정치도 이에 따라 문란해져서 이귀(李貴). 김유(金流).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에 의해 폐위되고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재위15년 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임진왜란 후의 사고(史庫)를 정비하는 등 내치에 힘썼고 밖으로는 국경방비와 외교에 힘써 후금(後金)이 명을 침범하자 명이 후금을 치기위해 출병을 요구하니 임진왜란 때의 내원에 보답 하고자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케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당부를 하여 명군이 패하여 강홍립이 항복함에 이러서도 본이 아닌 출병임을 해명하여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는 등 명과 금양 나라에 미움을 사지 않는 양단정책(兩端政策)으로 적절한 외교 방침을 표방 하였다.
▲조선 제16대왕 인조(仁祖) 1595년(선조 28)∼1649년(인조 27).
■ 제16대 인조(仁祖)
조선 제16대왕 인조(仁祖 : 재위 1623~1649)의 휘(諱)는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선조(宣祖)의 손자로 1595년 음력 11월 17일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추존왕 원종(元宗)과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군부인 구씨(인헌왕후) 사이의 장남으로 황해도해주에서 태어났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렬왕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40)능양도정(綾陽都正)에 수봉(受封)되었다가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군 되었다.
광해궁(光海君)의 폭정으로 1623년 서인의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괄(李适)· 최명길(崔鳴吉) 등이 일으킨 정변에 힙입어 경운궁(慶運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곧 광해군때 희생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㼁), 임해군(臨海君) 진(珒)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官職)을 복관 시켰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에게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1627년 청병(淸兵)의 침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당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형제국(兄弟國)의 의를맺고 화의하였고 1636년에는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거하다가 척화파(斥和派).주화파(主和派)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인조자신이 성을 나서서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淸依)를 입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어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두 왕자를 심양(瀋陽)에 인질로 보내었다.
1639년에는 청나라의 요구대로 삼전도에 대청황제 고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웠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인조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가 같이 합장된 릉이다. 인조 13년 1635년12월 9일 산후병으로 42세의 나이로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년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영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인조 15년 1637년 1월 30일 승하한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어 영조 7년 1731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인조의 친명배금정책과 호란
인조 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국력과 걸맞지 않은 무리수를 두는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정묘호란).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는데 조선측에서 반정이후 끝까지 친명배금정책을 고집했으므로 청은 어쩔 수 없이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병자호란은 광해군이 임금으로 존재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외교실패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결국 인조는 스스로가 책임지지도 못할 친명배금정책을 함부로 실시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또다시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게 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金集)·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姜嬪)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조의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扈衛廳)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御營軍)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京畿軍)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摠戎軍)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號牌廳)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供物)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三南)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稅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永定法)과 군역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北關)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유왕일수(留往日數), 매매총수(買賣總數)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조선 제17대왕 효종(孝宗) 1619년(광해군 11)∼1659년(효종 10).
■ 제17대 효종(孝宗)
조선 제17대왕 효종(孝宗 : 재위 1649~1659)의 휘(諱)는 호(淏). 자(字)는 정연(靜淵). 호(號)는 죽오(竹梧). 시호(諡號)는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다.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세자(世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있었다.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昭顯世子) 왕(炡)과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 : 孝宗)는 심양(瀋陽)에 인질로 8년간이나 머물러있었다.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가 변사한 후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이해 심양에서의 8년간의 굴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군비를 정비하고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등을 등용시켜 군정(軍政)에 힘썼어나 도중에 청의 힐문(詰問)으로 일시 중지 되었다.
그 후 흑룡 강으로 침입하는 러시아군을 물리치고자 하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원군을 보내어 나선(羅禪)을 정벌하기도 하였으나 안으로는 북벌계획을 버리지 않고 군복계량. 북벌준비를 계속하였고 호서(湖西)지방에는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감행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655년(농가집성(農家集成) 1656년 내훈(內訓) 1657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등이 간행되었으며 표류해온 네델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케 했다.
능은 영릉(寧陵)이다.
●효종의 가계도
인조--------------------인열왕후 한씨
│
17대 효종(孝宗)
∥
인선왕후 장씨
∥
∥--------------------18대 현종(顯宗)
∥ │
∥ 숙신공주
∥ │
∥ 숙안공주
∥ │
∥ 숙명공주
∥ │
∥ 숙휘공주
∥ │
∥ 숙정공주
∥ │
∥ 숙경공주
안빈이씨(경주인)
∥
∥------------------------숙녕옹주
∥
숙의김씨
∥
숙원정씨
▲조선 제18대왕 현종(顯宗) 1641년(인조 19)∼1674년(현종 15).
■ 제18대 현종(顯宗)
조선 시대의 제18대왕 현종(顯宗 : 재위 1660~1674)의 휘(諱)는 연(淵), 자는 경직(景直)효종의 아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고, 비는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병자호란 후 아버지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이 볼모로 가있던 심양(瀋陽)에서 출생 하였다.
1644년(인조 22) 귀국하여 1649년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이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1659년(효종 10) 즉위 후 효종의 상례(喪禮)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南人)이 주장하는 3년 설을 물리치고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設 :1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집권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인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유임시킴으로써 남인재기의 바탕이 마련되던 중 1674년(현종 15) 그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하여 대공 설(大功說 :9개월 설)을 주장한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서인이 온갖 방법으로 재기를 꽤함으로써 그의 재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태 해졌다. 함경도 산악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 1660년(현종1)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시켰으며, 1662년 호남의 산군(山郡)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다음해 경기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1668년 김좌명(金佐明)에게 명하여 동철활자(銅鐵活字) 10만여 자를 주조시켰고, 다음해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하고, 병비(兵備)에 유의하여 어영병제(御營兵制)에 의한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이다.
▲조선 제19대왕 숙종(肅宗) 1661년(현종 2)∼1720년(숙종 46).
■ 제19대 숙종(肅宗)
조선 제19대왕 숙종(肅宗 : 재위 1674~1720)의 휘(諱)는 순(淳), 자는 명보(明普),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1661년(현종 2년) 음력 8월 15일에 태어났다. 비(妃)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이다. 한때 희빈 장씨가 숙종의 비인 적도 있었다.
1667년(현종 8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674년 음력 8월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다. 즉위한 그해에 제2차 예송으로 남인 허목 등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설)을 지지하고 기년설(朞年說, 만 1년설)을 주장하는 서인을 배척하여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
숙종이 조선을 다스렸던 기간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때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파 대립 관계가 치열해지고, 1680년대에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이들도 서로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환국(換局) 정치가 주된 현상이 되었다.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許積)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許堅) 등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金錫胄)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균(昀)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심하게 대립하였다(1689년). 결국 서인들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희빈은 정비(正妃)가 되고 그녀의 아들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남인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인의 집권 기간도 오래 가지 않고, 후일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로 돌아갔다. 갑술환국으로 조정응로 돌아온 서인들은 당여인 폐비 민씨에 대한 대우개선을 요구했고, 숙중은 이를 받아들여 폐비 민씨를 창덕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돌연 민씨의 왕비 복위가 선포되고 당시 중궁이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되어 처소도 후궁 시절에 쓰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인현왕후는 1701년, 복위된 지 7년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인현왕후는 사망 직전 장씨가 다시 중궁에 복위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는데, 실제로 인현왕후 사망 이후 숙종은 장씨가 궁중에 무당을 불러들여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사사시킨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될 때 정호(鄭澔)가 소론 윤증(尹拯)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跋文)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重用)되었다.
위와 같이 숙종은 크고 작은 당파 싸움으로 약해진 왕권을 회복하고 세력이 강한 붕당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집권 정당을 수시로 교체시키는 환국을 실행하였다. 그 때문에 흔히 숙종의 치세를 일컬어 “환국정치”라고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숙종의 재위 기간에서만 정계가 한없이 치열하여 무려 3번의 환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신하들 간의 정쟁이 격화될수록 그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환국정치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은 우선 광해군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오던 대동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하게 되었으며,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정비를 하여 안정기를 구가하는 치적을 남겼다.
1718년 왕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케 하고. 1720년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이명을 불러 사관(史官)의 입회 없이 연잉군 금(昑)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뒤 사망했다. 이 유언은 훗날신임사화(信任士禍)의 화근이 되었다. 능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무덤 언덕 옆에 함께 잠들어 있다.
▲조선 제20대왕 경종(景宗) 1688년(숙종 14)∼1724년(경종 4).
■ 제20대 경종(景宗)
조선의 제20대왕 경종(景宗 : 재위 1720~1724),휘(諱)는 균(畇), 자는 휘서(輝瑞),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禧嬪) 장(張)씨이다.
비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호(浩)의 딸 단의王后왕후(端懿王后) 심(沈)씨이고, 계비는 함원(咸原) 부원군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 이다.
그는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원자로 봉해졌다가 1690년 3살 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김창집 등 4명의 노론파 대신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어머니인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 후,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자 장희빈은 다시 빈으로 강등되고 왕세자였던 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인계되어 그의 법적 아들이 된다. 왕세자의 사친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1701년 인현왕후 사망 후 사사되어 죽는다.
숙종이 그를 인현왕후에게 인계하였으나 그는 노론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이때 대개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었으며 때문에 소론과 노론 간의 권력 투쟁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1720년에 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은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다.
그때 경종의 나이는 이미 33살이었고, 숙종이 아파서 누워 있던 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숙종 대신 국정을 돌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정사를 처리하는 데는 서툴지 않았다. 경종은 재위 기간 4년을 병석에서 지내야만 했고, 노론과 소론의 정권 다툼으로 정치가 잠잠할 날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특별한 업적 또한 남기지 못했다.
이 시기에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종의 치세 중에 신임사화가 일어나 수백 명이 처벌받았다. 재위한 지 4년 2개월 만에 37살의 나이로 죽은 경종은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다.
능은 의릉이다.
▲조선 제21대왕 영조(英祖) 1694년(숙종 20)∼1776년(영조 52).
■ 제21대 영조(英祖)
조선 제21대왕 영조(英祖 : 재위 1724~1776)의 휘(諱)는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肅宗)의 차남이자 서장자(庶長子)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그는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의 소생으로, 왕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와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芿君)에 봉해졌는데,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그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왕세자는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한 것을 본 후, 병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대를 연잉군이 잇게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 이로 인해 왕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다.
1720년에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 뒤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노론인 김창집(金昌集)등이 왕세제 책봉을 상소하여, 소론인 유봉휘(柳鳳輝)등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연잉군은 왕세제 직위를 몇 번이고 사양했다. 그러다가 결국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이어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로 일시 정무를 담당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청정을 취소당했고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金一鏡)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 문유도(文有道)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1724년 음력 8월에 병약하던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즉위 후 거센 당쟁을 없애기 위한 탕평책(蕩平策)을시도, 당파싸움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52년간의 재위기간 중 사도세자건 이인좌의 반란 등 많은 어려움도 있었으나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제도적으로는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여 세제를 개혁하였고 압슬(壓膝). 낙형(烙刑). 난장(亂杖)등 악형(惡刑)을 중지 하였으며 신문고(申聞鼓)를 다시 두어 억울한 백성을 보호 하였다. 또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정화에도 힘쓰는 한편 군인들에게 조총(鳥銃)훈련을 장려하고 수어청(守禦廳)에 총포의 제작을 명령 하였으며 보진(堡鎭)의 토성을 수축하는 등 국방의 충실에도 힘썼다. 또한 왕은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발간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는 등 학문의 발전에도 기여 하였다.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은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가 66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 능을 아버지인 숙종(肅宗)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으나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正祖)는 당시 왕대비(王大妃)였던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의식하여 1776년 7월 27일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다.
▲조선국 제22대왕 정조(正祖) 1752년(영조 28)∼1800년(정조 24).
▲조선 왕실의 보첩인 《선원보첩(璿源譜牒)》에 있는 정조의 진짜 모습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정조의 어짐
조선국 제22대왕 정조(正祖) 1752년(영조 28)∼1800년(정조 24).
■ 제22대 정조(正祖)
조선 제22대왕 정조(正祖 : 재위 1776~1800)의 휘(諱)는 성(성)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로,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으로 호가 정해졌다.
1759년(영조 35년) 음력 윤 6월 22일 명정전(明政殿)에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음력 3월 18일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2월 2일 어의궁(於義宮)에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청풍 김씨(淸風 金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왕세손으로 동궁에 정립되었다.
1764년(영조 40년)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이며,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1775년(영조 51년) 10월에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전교하는데, 이때 홍인한 등 외척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때 홍인한이 영조에게 "세손은 나랏일, 이병판, 노소론을 알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는 유명한 '삼불필지론'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영조는 홍인한의 주장을 물리치고 군사를 동원하는 동원령인 순감군권을 넘겼고 세손은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반대하기 전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뜻임을 알리는 편지를 미리 보내기도 했다 한다.
그 이듬해인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83세로 승하하자, 음력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선왕의 뜻을 이어 탕평정치(蕩平政治)를 하고 왕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까지 하였으나 정치에 뜻이 없어 홍국영(洪國榮)에게 정치를 맡기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왕실연구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두어 국내의 학자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토론케 하고 서적을 간행케 했다. 또한 인쇄. 활자에도 뜻을 두어 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를 개량 하였으며 아버지의 억울한 참화를 못잊어 수원에다 새로 성(城)을 쌓고 소경(小京)으로 승격 시키고 내왕하였다.
이밖에도(흠휼전칙(欽恤典則)을 편찬시켜 형구제도를 규정시키고 (일성록(日省錄)을 집필케 하였다.
한때 천주교(天主敎)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으로 부터 들어오는 서적구입을 막은 일도 있었다.
본래의 묘호(廟號)는 정종(正宗)이였는데 1899년 정조(正祖)로 고쳤으며 능은 건릉(健陵)으로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옆이다.
▲조선 제23대왕 순조(純祖) 1790년(정조 14)∼1834년(순조 34).
■ 제23대 순조(純祖)
조선 제23대왕 순조(純祖 : 재위1800~1834)의 휘(諱)는 공(공)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동생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金潞)·홍기섭(洪起燮)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 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 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안동 김씨 일문은 풍양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인릉(仁陵)으로 왕비인 순원왕후와 합장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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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4대왕 헌종(憲宗) 1827년(순조 27)∼1849년(헌종 15).
■ 제24대 헌종(憲宗)
조선 제24대왕 헌종(憲宗 : 재위 1834~1849)의 휘(諱)는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 효명세자(익종:추존왕)와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 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자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재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민진용이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정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으며 1846년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군한 3척을 몰고 와 임금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외국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바로 이 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각 당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 썼다. 한편 헌종시대에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있었는데, 이를 기해박해라고 부른다.
당시 천주교는 1831년 천주교 조선대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 교구)가 승인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으나, 조정에서 천주교에 우호적인 안동 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조씨가 집권하여 대규모의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1839년, 모방 신부 등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선교사들과 유진길, 정하상등의 평신도들이 새남터에서 대거 처형되고, 1845년에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된서리를 맞았다.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1849년 6월, 2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경릉(景陵)이다.
▲조선 제25대왕 철종(哲宗) 1831년(순조 31)∼1863년(철종 14).
■ 제25대 철종(哲宗)
조선 제25대왕 철종(哲宗 : 재위 1849~1863)의 휘(諱)는 (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로 1831년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으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1849년 헌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곧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 즉위 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酒色)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재위 14년, 3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고양에 있는 예릉(睿陵)이다.
자료 :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무황제(光武皇帝 : 고종) 즉위식 때의 모습
▲광무황제 49세 때의 모습(光武皇帝四十九歲御容) - 채용신 작
▲조선 제26대왕 고종(高宗) 1852년(철종 3)∼1919년
■ 제26대 고종(高宗)
조선의 제26대왕 고종(高宗 : 재위 1863~1907).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휘는 희(熙),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비(妃)는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 민씨(閔氏).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12세의 나이에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 하였다.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대원군 집정 10년 후 친정(親政)케 됐으나 민씨 일족에게 실존을 빼앗겨 보수 및 쇄국 정책을 배척하고 일본 및 구미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정에 개화당이 득세하고 수구당과 알력을 발생하게 하는 한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사유람단을 파견 제반문물의 시찰. 군제의 개혁. 일본식 군사훈련 등의 실시로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야기 시켰다.
1897년 국호를(대한) 연호를(광무)라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거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을 주재시켜 외교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그날 한약이나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공개된 일본측 자료(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에 따라 고종의 독살설은 확실시 되고 있다. 능은 고종과 비 명성황후 민씨를 합장한 무덤으로 사적 제207호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에 소재한다.
자료 : 위키백과 참조
▲조선 마지막 왕 제27대 순종(純宗) 1874년(고종 11)∼1926년.
■ 제27대 순종(純宗)
조선 마지막 왕 제27대 왕 순종(純宗 : 재위1907~1910)의 휘(諱)는 척(拓)으로 1874년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이남으로 태어났으며 187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그 뒤, 1898년 김홍륙(金鴻陸)이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고종과 황태자였던 순종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맛이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여 치아가 모두 망실되고 며칠간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모략으로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며(고종 양위 사건)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순종은 자식이 없던 관계로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이 무렵 일본이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1910년 일제는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으며, 더불어 조선 왕조의 치세는 끝을 맺게 되었다.
이후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순종의 장례식1926년 4월 25일 53세를 일기로 붕어하였으며, 능은 유릉(裕陵)이다.
그의 장례식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3.1 운동처럼 확산되지는 못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5000년사 역대왕조실록 / ◇위기백과
광무황제 49세 때의 모습(光武皇帝四十九歲御容)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정조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