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 3. 2. 01:10
■ 은송처사 이공 행장(隱松處士李公行狀)
[생졸년] 1853년(철종 4) 09. 29~1913. 03. 21) / 향년 60歲
공(公)의 휘(諱)는 영우(英雨)요. 자는 문칙(文則). 성(姓)은 이씨이니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상조(上祖) 휘(諱) 알평(謁平)은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휘 제현(齊賢)이 계시니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으로 세상에 드러나 세상 사람들이 익재(益齋)선생이라 칭송하였다.
당시 종사(宗師-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스승)가 되어 여러 차례 시랑(侍郞-正四品)에 배수(拜授-除授) 되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휘 원(黿)이 계시니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이었고, 호(號)는 재사당(再思堂)이다.
김 한원당(寒暄堂)과 함께 점필재(佔畢齊)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禍)를 입었다.
그 후에도 벼슬이 이어져 휘 시발(時發)이 계시니 형조판서(刑曹判書-正二品)를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호(號)는 벽오(碧梧)이니 목릉(穆陵-조선의 제14대왕을 말함)의 명신이 되었다.
아들이 있으니 휘(諱) 경선(慶善)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正六品)을 지냈다.
남포현감(藍浦縣監-從六品)으로 나갔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니 병자일기(丙子日記)에 실려있다.
조정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리시고 예조참의(禮曺參議-正三品)에 증직(贈職) 하셨으니 바로 공(公)의 구대조(九代祖)이다.
휘 인형(寅炯)이 진사(進士)였고, 문장이 일찍이 이루어 졌고, 더욱이 글씨를 잘쓰셨다. 호는 사호어(沙湖漁)이다.
휘 준곤(峻坤)이 계시니 경학(經學-四書五經을 말함)에 뜻을 두었으나 일찍이 돌아가셔서 세상에 들어나지 못하셨다.
휘(諱) 성일(聖一)이 계시니 진사(進士)이고, 호는 죽창(竹窓)으로 바로 육대조(六代祖)이다.
오대조(五代祖)는 휘가 사유(思遊)요. 호가 돈와(遯窩)이니 문장으로 세상에 들어났으나 과거에는 끝내 급제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고조(高祖)의 휘는 후근(厚根)이고, 증조(曾祖)의 휘는 태영(泰榮)이다. 맏형 복영(復榮)은 아들이 없었다.
조부(祖父)의 휘는 규남(圭南)이니 두집의 독자로 큰집 뒤를 이었고 규남(圭南)의 차남(次男) 종기(鍾基)가 돌아와 생가 조부(祖父)의 뒤를 받들어 이어니 바로 선고(先考)이시다.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 兪氏) 치관(致寬)의 딸로 철묘(哲廟) 계축(癸丑 : 철종 4년, 1853)년 구월 이십구일 양전동(良田洞) 사제(私第 : 사저)에서 공(公)을 낳으셨다.
어려서 부터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뜻이 굳고 나이가 겨우 십오세(十五歲)에 사서(四書 :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능히 통하고 더욱이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건곤(乾坤 : 하늘과 땅)의 이치에 능통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당시 정사(政事)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처자를 거느리고 중가곡(中佳谷)으로 옮겨와 생산업(生産業)을 일삼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독서(讀書)에 전념 하였다. 집과의 거리가 한번 불러서 들릴만한 곳인 안산골에 정자(亭子)를 세웠다. 현판(懸板)을 은송정(隱松亭)이라 하여 바로 스스로의 호를 삼고 또한 늙어 죽을때 까지의 계획으로 삼은것이다.
본성이 온화하면서도 집안을 다스리는데는 엄격하여 법도가 있고 자손을 가르치는데 효성과 우애로써 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순종하여 어긋남이 없었으며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고 친족간에 화목하고 벗들과 신의가 있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다.
더욱이 그 선대를 추모하는데 정성을 다하여 경술년 족보를 편찬할때 그 힘을 보태었다. 저술한 시문이 많았으나 수습하지 못하여 불과 수편이 상자에 남아있으니 자손의 마음이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요. 계축(1913) 3월 이십일일 잘병으로 정침(正寢-집의 안체 방)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육십일(六十一)세이다.
그해 모(某)월 중가곡 안산(案山) 곤좌(坤坐)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선조 묘소를 따른 것이다. 부인은 성산전씨(星山全氏) 석일(錫一)의 딸로 여사(女史-학덕이 높은 부인)의 기풍이 있었으며, 공(公)보다 앞서 을사년(1905)에 돌아가시니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忠淸南道 錦山郡 濟原面) 내인후(內仁後-천내리) 팔암(八岩) 아래 진좌(辰坐-東南東)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사남(四男)이 있으니 장남이 상영(相永)이고 다음은 상렬(相烈). 상목(相穆). 상길(相吉)이다. 상영은 영천최씨(永川崔氏) 영숙(永淑)의 딸에게 장가 가서 삼남(三男) 이녀(二女)를 낳았다. 장남이 종희(宗熙)이고, 차례로 완희(完熙). 근희(根熙)이다.
딸은 성주인(星州人) 배한석(裵漢錫). 성주인(星州人) 도장섭(都章燮)에게 시집을 갔다.
상열은 순천박씨(順天 朴氏) 해수(海洙)의 딸에게 장가가서 일남(一男) 오녀(五女)를 낳았다.
아들은 경희(敬熙)이고 딸은 철성인(鐵城人) 이종억(李鍾億). 안동인(安東人) 김재석(金在石). 파평인(坡平人) 윤병정(尹炳政). 파주인(坡平人) 염성호(廉盛鎬). 평성인(平性人) 이권섭(李權燮)에게 시집갔다.
상목(相穆)은 고령박씨(高靈朴氏) 기호(基鎬)에게 장가가서 일남(一男) 일녀(一女)를 낳았다. 아들이 양희(陽熙)이고 딸은 풍산인(豊山人) 홍승규(洪承奎)에게 시집갔다. 상길(相吉)은 강진안씨(康津安氏) 기(璣)의 딸에게 장가가서 사남(四男) 이녀(二女)를 낳았다. 장남이 태희(台熙)이고 차례로 재희(載熙). 수희(秀熙). 월희(月熙)이다.
딸은 성산인(星山人) 전재구(全載龜). 벽진인(碧珍人) 이민두(李珉斗)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번거로움이 많아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공이 떠나신지 칠십여년에 그 끼친 바람과 남긴 운치가 지금 까지 존재하나 다만 어른들의 전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대략을 모으니 사행(事行)에 비슷하다라고 할만할 것이다.
그 후손들이 번성하고 모두다 순수하고 품위있게 직분을 수행하여 고가(古家)의 기품이 있으니 이 어찌 공께서 남기신 음덕(蔭德)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나도 방계(傍系) 후손된 자로서 공을 경모함이 깊고 여러자손이 선대를 위한 정성에 감동하여 위와 같이 삼가쓰서 훗날의 비문지을 군자(君子)가 채택하기를 기다리노라.
丁巳 一九七七年 五月 下澣(하한)
방손(傍孫) 춘희(春熙)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