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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 산수유마을과
여주 신륵사를 다녀와서!
산수유 군락지가 이천의 새로운 봄꽃 구경의 명소로 등장했다. 이천 시내에서
여주 방면의 이포대교를 향하다 현방리에 이르면 도로 왼쪽으로 영원사라는
사찰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이천에서 가장 높은 원적산(563.5m) 아래 자
리한 영원사를 향해 가는 길은 송말리에서부터 도립리를 거쳐 경사리에 이르기
까지 산수유나무가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길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
어서 차량 두 대가 겨우 교차할 정도로 폭이 좁지만 구불구불한 이 길을 따라
원적산 자락을 향하여 조금만 가다 보면 이내 주변 풍경을 노란색 원색으로 물
들인 산수유꽃 군락과 마주친다. 전남 구례의 산동면 일원에만 산수유 마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도 이천에도 산수유마을이 있다는 사실에 여행자들은
깜짝 놀란다.대개 3월말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여 4월 10일 전후로 산수유꽃
은 절정의 모습을 보인다.
이천시에서는 이와 때맞춰 산수유꽃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 기간을 전후해서는
사진 애호가나 아마추어 화가들이 대거 몰려 그 아름다운 정경을 카메라와
스케치북에 담기 바쁘다.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산수유가 수령이 족히 1백년을
넘는다고 자랑스레 이야기 한다. 특히 도립리는 마을 전체가 산수유 군락지를
형성하고 봄철 마을 일대에 황홀경을 연출한다. 1그루만 있으면 자식 하나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는 나무가 바로 산수유이다. 또한 가을이면 산수유는 선
홍색의 열매를 맺어 또 한번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도립리 마을에서 영원사로
올라가는 산길 여기저기에도 산수유가 꽃을 피운다.
송말리에 들어선 원적산 영원사는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선덕여왕 7년(638)
해호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눈여겨볼 것은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좌상이라는 유물로서 본래는 영원사 대웅전 오른쪽 약사전에 안치
되어 있던 것을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목 위의 두상 부분 역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사찰이라 그런지 경내 분위기가
단아하기 그지없다. 이천 산수유군락 사이에 육괴정이라는 문화유적지가 다소
곳이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도립리에는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용트림하는
형상의 반룡송(천연기념물 제381호)이 있어 지나는 길에 한번 들러볼 만하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1982년 10월에 경기-이천-7로 지정된 보호수이다. 육괴정
(이천시 향토유적 제13호)은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낙향한 엄용순(嚴用順)이 도립리에 건립한 정자이다. 육괴정이란 이름
은 엄용순을 비롯하여 당대의 명현인 김안국(金安國), 강은(姜隱), 오경
(吳慶), 임내신(任鼐臣), 성담령(成聃齡) 등 6명의 선비가 시회와 학문
을 논하며 우의를 기리자는 뜻으로 정자 앞에 연못을 파고 6그루의 느티
나무를 심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6그루의 나무 중 3그루가 고사하여 나머지 3그루만 살아 있었는데 고사한
3그루를 대신하여 후손들이 새 느티나무를 다시 심었다. 처음 심었던
3그루는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었다.
출처:(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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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수라상(水刺床)
왕과 왕비의 평상시의 밥상.
수라상은 소주방(燒廚房 : 대궐 안의 음식 만드는 곳)에서 주방상궁이
차린다. 탕약(湯藥)을 드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아침수라 전에 미음
이나 무리죽을 먼저 올린다. 그런 다음에 상전에서 아침수라 올리는
시각을 알려오면 거기에 맞추어 아침수라를 대령한다. 수라상을 차릴
때에는 대원반·곁반·책상반 등 모두 3개의 상을 쓴다. 각 상에 올리는
내용물은 대원반의 경우는 은수저 1벌·은입사시 1벌·흰밥·미역국·
간장류·김치류·찬품류·토구 등이며, 곁반의 경우 기미용 은입사시 1벌·
금테를 한 상아저 1벌·팥밥·곰국·찬품류·빈 그릇 1개·빈 접시 2개·
냉수대접(여름에는 사기대접, 겨울에는 은대접) 등이다. 또한, 책상반
에는 퇴선간에서 끓인 조치·전골, 찜과 더운 음식을 받았다가 원반으로
올린다. 이밖에 냉수주전자·숭늉주전자·빈 접시 1개·휘건(고운 목아사
나 고운 무명)·첩뚜껑·행주·가위 등을 올린다. 수라상은 기본음식 외에
12가지 찬품이 올려지는 12첩반상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 이상
이어도 상관이 없으며, 찬물의 내용은 계절에 따라 바뀐다. 수라상에
올리는 기본음식과 12가지 반찬은 다음과 같다.
① 기본음식
: 밥(흰밥·팥밥)·국(미역국·곰국)·김치(섞박지·깍두기·동치미)·장
(초간장·초고추장·겨자즙)·조치(젓국조치·고추장조치)·
찜(갈비찜)·전골 등이다.
② 반찬
: 숙채(애호박나물·숙주나물·도라지나물 등 삼색나물)·생채(무생채)·구이
(너비아니구이·생선구이)·조림(조기조림·사태장조림)·전(민어전·뮈쌈)·
적(송이산적·사슬적)·자반(북어무침·장똑도기·대구포·어란·장포육)·젓갈
(새우젓)·회(육회·민어회)·편육·장과(삼합장과·오이통장과)·별찬
(육회·어회·어채·수란) 등이다. 수라상이 완전히 준비되면 방으로 가져간다.
대원반은 남에서 북으로 향하여 놓고, 곁반은 수라상의 동편에 약간 떨어져
나란히 놓으며, 책상반은 원반과 곁반 사이의 앞쪽에 기미상궁을 마주보도록
놓는다. 수라상을 방에다 준비한 다음에는 왕을 모시고 들어온다. 왕이 좌정
하면 은쟁반에 받쳐진 찬품단자를 들여와 왕에게 보이고 내어간다. 이어 왕이
사용할 수저를 냉수대접에 한번 헹구어 행주에 닦아 바친다. 그러면 곁반과
책상반 옆에 앉아 있는 기미상궁이 기미를 하고, 수라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왕이 음식을 들기 시작한다. 왕이 수라를 드는 동안에는 그날의 번인 3명의
궁녀가 책상반 위쪽에 일렬횡대로 양수거지하고 앉아 지켜본다.
『한국의 맛』(강인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7)
『한국민속대관』2(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0)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륵사(神勒寺)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
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
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
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
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
(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
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
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
(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
(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
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
(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
(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
(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
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
(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
(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
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
(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
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
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
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
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
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
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
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
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
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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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팔자 물팔자
추미림:작사
이재호:작곡
이성애:노래
산이라면 넘어주마 강이라면 건너주마
인생의 가는 길은 산길이냐 물길이냐
손금에 쓰인 글자 풀지 못할 내 운명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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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라며는 얼어주마 녹으라면 녹아주마
인생의 가는 길은 봄철이냐 겨울이냐
그 님도 참사랑도 믿지 못할 세상에
속는대로 속아보자 이럭저럭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