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타르 만타르(천문대)
산스크리트어로 마법의 장치 라는 의미가 있는 천문대는 뉴델리, 바라나시, 우자인, 마투라, 자이푸르, 5개가 있는데, 그 중 자이푸르에 있는 것이 규모가 가장 크단다. 18세기초 번왕국의 자이싱 2세에 의해 세워진 천문대로 일,월식을 고려한 과학적 계산에 의해 건축 되었다는데 1948년에 국가 기념물로 지정 되었단다 해시계 앞에 유독 사람들 이 많이 몰려있다. 해시계를 확인한 결과 분까지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있어 인도사람들의 천문에 관한 관심을 알 수 있었다
자마 마스지드 이슬람 사원
타지마할을 세운 샤자한의 최후 걸작품으로 델리에서 가장 큰 사원이라고 한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입장하는 사람은 뉴규든 신발을 신을 수 없어서 양말만 신고 입장이 가능하다. 또 여성은 본인의 옷외에 긴팔의 가운을 입어야 입장할 수 있다. 시원 내부는 붉은색 벽면과 흰색의 바닥이 대조를 이뤄서 뭔가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사원 내에서의 촬영은 비용을 내야하기 때문에 입구 앞에서.......
라지가트
이곳은 1948년 1월 31일 극우파 인도 청년에게 암살 당한 "마하트마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자 묘가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어서 무겁거나 어두운 이미지가 아닌 가볍고 밝게 관광을 할 수 있다.
저 멀리 검은색 대리석 제단이 간디의 화장터다. 제단 정면에는 간디가 최후로 남긴 "헤이 람"(오 ! 신이시여) 인두어로 새겨져 있다. 간디 기념 박물관에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인 간디에 관한 자료, 유품, 사진, 도서가 전시 되어 있다. 특히 항상 민중에 둘러싸여 있는 고독하고 고뇌하는 듯한 간디의 표정이 인상적이며 최후의 순간에 입고 있던 검소한 의복이 진한 감동을 주었다.
인도문
뉴델리 시내에 위치해 있으며 1차 세계대전과 아프칸 전쟁에서 전사한 9만명의 인도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 참 가슴아픈 전쟁의 비극을 돌아보는 아픔의 장소인데 지금은 관광지로 되어 버렸다. 이곳 지역은 그 옛날 전쟁이 주는 아픔을 잊은체 인도정치의 심장부가 되어 모든 관공서가 몰려있고 비교적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인도문의 높이는 약42m로 1931년 완성하여 1972년에는 인도독립 25주년을 기하여 불멸의 불이 점화 되었다. 인도문 앞에선 아직도 인도 병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시크교
사원흔히 힌두교 (Hinduism) 가 인도를 대표하는 종교라고 하지만, 시크교 (Sikhism)는 이슬람 교도들이 인도를 침략하여 들어간 후 이슬람교와 힌두교가 혼합 된 것이란다. 15세기 말 펀자브에서 '나나크'가 창설, 나나크(1469년4월15일생)는 현재의 파키스탄에서 출생한 인도 국적인이다. 구루의 종교라고도 하는데 구루는 신을 말하고 신은 모두 같다고 한다. 시크교는 10명의 시크교 지도자를 따르는 종교인데, 이 10명의 지도자는 1469년과 1708년 사이에 존재했던 인물들이며, 모두 인도의 펀자브 (Punjab) 주 출신이라고 한다. 위 사진은 사원 내부 중앙에 있는 시크교의 경전(시크교 구루 10명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인 “구루 그란트 사히브”가 놓여져 있는 곳에서....
여기서, “구루” (Guru)는 “신성한 지도자” 라는 뜻이다. 구루 나나크는 1469년에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주요 종교로 자리 잡았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만을 추려내고 단점은 배제하여 시크교를 탄생시켰다. 특히,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 (신분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육류를 섭취해도 된다고 허용했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교의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 차별주의적인 제도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남녀 평등을 강조했다. 시크교 사원은 발을 씼고 머리에 터번이나 스카프를 반드시 착용해야 입장을 할 수 있다.
시크교를 믿는 남자들은 푸른색이나 흰색 혹은 검은색 터번으로 쉽게 식별되는데, 터번을 두르는 것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과 함께 그들의 종교 관습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힌디어 시크는 “제자”를 뜻하는 단어다. 시크교인은 그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의 제자들이며, 열 명의 구루(나나크와 아홉 명의 후계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구루의 저술물은 시크교의 경전인 「구루 그란트 사히브」에 들어 있다. 시크교는 16세기 초에 구루 나나크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좋은 점을 뽑아 연합 종교를 이룩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단다. 터번을 착용한 시크교 신자와 함께...
바하이교의 사원(연꽃 사원)
바하이교의 사원(연꽃 사원)바하이는 어떠한 종교적인 명분보다는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감성과 이성에 더 주안점을 두고 포교하는 종교단체로서, 1844년 종교의 나라 인도에 들어온 후에 조용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종교이다. 그 영향은 델리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연꽃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사원 때문이다. 이 사원은 파리보즈 사바라는 건축가의 작품으로 1986년 지어졌다, 거대한 스물일곱개의 꽃잎은 콘트리트로 지었고 그 위에 그리스 대리석을 입혔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진 사원이며, 하얀 대리석으로 27개의 연꽃잎을 표현한 높이 35m의 건축물이다. 연꽃이 반쯤 핀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인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다.
델리를 둘러보고 우린 뭄바이로 가기 위해 뉴델리역으로...
뉴델리역에 도착하니 짐을 날라주는 붉은색 유니품을 입은 짐꾼들이 우루루 달려와서 포트비용을 마음대로 부르면서 흥정을 한다. 인도의 역들은 프렛홈에 계단이 많고 차시간도 일정하지 않고 출발을 몇분 앞두고 갑자기 프렛홈이 변경되기 때문에 포터를 이용하지 않으면 불편함이 많다고 하며 그래서 포트들도 먹고 산다고 한다. 포터들은 1인당 한꺼번에 가방을 2-3개씩 운반 해주고 차가 홈에 들어오면 선반 까지 올려 주어야 임무 완수란다. 내 트렁크 포터가 제대로 가지고 왔나 ?
뉴델리서 특급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서 15시간 후에 뭄바이근처 부사월역에 도착 예정이다. 최특급 침대열차라는 기차는 삐그덕 거리고 낡았으며 지져분하고 쥐와 바퀴벌래가 득실거리고 칸막이 커텐은 낡고 꼬질 꼬질...우리는 통로로 중앙으로 가로로 마주보는 3층으로 배치된 6인용 칸과 새로로 2층으로 배치된 4인실 칸을 배정 받았다.
아잔타 석굴
마하라슈트라주(州) 북서부 타프티강 지류의 만곡부(灣曲部)를 향한 구릉 중복에서 개굴된 29개의 석굴군(石窟群)이다. 인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 요지에 가까이 있으며 불교의 전파에 따라 BC 2세기경부터 개굴(開掘)되었고, 승려가 거주하는 승원(僧院)과 스투피(불탑)를 모신 당(堂)이 세워졌다. 당시 승려는 부피불교(部派佛敎)를 신봉하였으며, 불상(佛像)은 전혀 조각되지 않았다.
3세기 사타바하나왕조가 붕괴한 후 잠시 석굴의 개굴이 중단되었으나 5세기가 되자 바카타카 왕조하에 대승불교 신도가 대규모의 승원과 스투파를 모시는 당을 개굴하였다. 이때는 불상예배가 성행했기 때문에 스투파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을 안치하였고, 승원의 내당에도 불상을 모셨으며, 벽면에 많은 불상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들은 단정한 굽타 양식이다. 벽면에 그려진 회화는 불전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인도 회화 사상 유례가 없는 걸작으로, 그 양식은 중앙아시아·중국을 거쳐 한국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아젠타 석굴은 인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석굴은 데칸고원의 숲을 지나며 흐르는 와고라강 계곡의 높이 70m 암벽에 BC 2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계곡의 만곡부를 중심으로 말발굽 모양의 절벽 중간에 29개 석굴이 길게 들어선 형태로 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석굴 번호 매겨져있으며 그 석굴의 길이가 장장 1.5km에 이른다.
카이티야(성소)와 비하라(수도원)의 2가지 유형으로 구성된 이 아잔타석굴은 1819년에 호랑이 사냥을 하던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일행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1,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 장소가 처음으로 세계에 소개되었다. 현재는 인도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불교예술의 보고(寶庫)이자 건축·미술·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9개 석굴 사원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오래된 석굴 : BC 150년에 건설된 10번
2) 벽화가 있는 석굴 (6개) : 1, 2, 9, 10, 16, 17
3) 예불 성소 (Chaityagrihas, 5개) : 9, 10, 19, 26, 29
4) 스님이 거처하던 정사 또는 선방(Viharas) : 나머지 석굴들
엘로라 석굴
엘로라 석굴은 아잔타 석굴 보다 400년 뒤에 만들어진 석굴이다. 남쪽부터 제1굴에서 제12굴까지는 불교굴로 6∼7세기에 개굴되었으며, 제13굴부터 제29굴까지는 힌두교의 석굴이고, 최후의 5굴은 자이나교의 석굴로, 8∼10세기에 만들어졌다. 그 형식은 하나 하나 모두 다르다.
아우랑가바드의 북서 20km 지점에 있는 바위산 서쪽 사면에 석굴 34개가 2km에 걸쳐 파여져 있다.
신자는 아니지만 어렵게 온 신비의 석굴이기에 1불을......
굽타 왕조시대(6~8세기)의 것으로 불교·힌두교·자이나교의 사원들로서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암벽들을 파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도 1불을.....
엘로라는 600년~1000년까지 지속적으로 건축한 기념물로 이루어져 고대인도 문명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이 석굴의 앙상블은 인도 중세 시대의 예술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석굴을 처음 만들 때부터 규모가 큰 3 종교의 의견을 평화롭게 석굴에 반영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뛰어난 석굴은 탁월한 부조, 조각, 건축물을 보기 위해 찾을 만한 곳이다
엘로라 11번 석굴로 마치 목재로 건축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불교 사원이다
엘로라 석굴의 카일라사나타 사원(16번 석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를 파서 만든 길이 50m, 높이 29m의 카일라사나타 사원이다. 밖에서 보기엔 소규모인것 같은데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엄청난 공간에 입이 벌어지고 감탄사가 절로 나며 여러층으로 구성된 석굴이 신비롭기 까지하다.
힌두교의 신들과 전설적인 인물들이 정력적인 모습으로 광범위하게 새겨져 있으며, 대개가 선정적, 관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사원은 힌두 신(神) 시바를 위해 라슈트라쿠타스 왕이 통치하던 8세기에 세운 것이다. 엘로라 석굴중 제일 찬란한 16번만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위 사진은 시바신의 신전 본관.
화덕 속에 붙여서 구워내는 란<Nan>...
꼭 우리네 칼국수 반죽 같은것을 호떡 같이 넙적하게 해서 속에 아무것도 넣지않고 구웠는데 구수하고 맛있다. 반죽할때 우유 달결 각종 양념이 들어가 쫄깃히고 구수하다 . 발효는 시키지 않는다. 또 다시 먹고 싶다. 아마 서울에서도 인도 식당에 가면 있을것 같다. (뭄바이로 이동중 한 휴게소에서 란을...)
1995년 봄베이에서 뭄바이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현지인들은 "봄베이"를 고수하며 "뭄바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인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업 중심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 산업의 본고장이다. 인구는 1,900만 도시이다.
타지마할 호텔
106년 전통의 타지마할 호텔은 인도의 민족자본가이자 타타그룹의 창립자인 잠세트 타타가 영국 식민지배 시절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영국계 호텔 출입을 저지당한 후 인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지은 호텔로 뭄바이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영국식민지 당시 영국계 호텔들은 인도사람들을 비하하고 무시해서 호텔 앞에다 "인도원주민들과 개는 출입금지"라고 써두었다고 인도 가이드는 강조 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오히려 영국인들에게 할인 해택도 주었단다. 2008년 11월 29일 ‘인도판 9.11’로 불리는 뭄바이 동시다발테러가 마무리 된 곳이 바로 이 호텔이다. 저항하던 테러범 잔당이 이곳에서 사살됐다. 보도에 따르면 이 테러로 195명이 죽고 300명이 부상한 것으로 최종 집계 됐단다. 우측 건물은 타지마할 호텔 신관이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영국왕 조지 5세 내외가 인도를 방문한 기념으로 만들었으며,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뭄바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고, 앞에는 인도의 자존심인 타지마할 호텔이 있다. 이 문은 뭄바이시 봄베이만 아폴로 부두에 있다.
인도 최대의 경제 도시 뭄바이.... 인도 반도 서해안에 자리한 곳으로 인도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다. 뭄바이를 상징하는 인도문은 1924년 인도문 건축 당시만 해도 배가 최고의 장거리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인도를 입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뭄바이 항을 출입국 지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늘도 인도문 앞에는 행사를 하기 위해 이동식 의자가 준비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