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선 학문과 지성의 전당, 상아탑이 상업주의로 물든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대학이 더 이상 고고한 이상주의를 고집할 수 없도록 내몰고 있다.
돈이 없으면 좋은 교수를 뽑을 수도, 교육시설에 투자도 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우수 학생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돈을 얼마나,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모든 대학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냉혹한 시장의 논리는 이제 대학들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지난 5월 말 ‘대학 교육력 향상 방안’을 발표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대학 총장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내놓은 대학지원 정책이다.
골자는 사립대학의 수익사업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것. 주식에 투자하든 사업을 영위하든 간섭하지 않을 테니 열심히 돈을 벌어라는 것이다.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재정확보가 가장 선결과제라는 것을 교육 당국의 수장도 인정한 셈이다.
■ 대학가 지배하는 시장논리
사실 국내 사립대의 재정 구조는 등록금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전체 예산의 약 70%가 학부모, 학생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학교법인의 재정이 취약한 대학의 경우 그 비율이 90%를 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반면 미국 사립대의 경우 재정에서 차지하는 등록금 비중은 평균 30%대에 불과하다.
문제는 국내 사립대 재정의 등록금 비중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소폭이나마 매년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쓸 곳은 많은데 별다른 수입원이 없다 보니 손쉽게 등록금에 의존하려 하는 것이다. 매년 신학기마다 학교-학생 간 등록금 갈등이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고 보조가 넉넉한 것도 아니다. 정부가 주는 교비 지원금은 2003년 기준 전체 사립대 재정의 평균 4.3%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2004년부터 산학협력단 제도가 시행된 이후로는 국고 보조가 대학별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연구비 지원 형태로 전환되고 있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학교들은 더욱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주목할 것은 사립대 법인의 학교에 대한 재정지원 비중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 법인의 수익사업에서 발생한 재원으로 학교에 보내는 법인 전입금 비율은 2003년 6.28%에서 2005년 3.28%로 크게 후퇴했다. 학교 운영 예산은 매년 늘어나지만 법인의 사업 수완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대학들은 교육부의 방침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지금껏 각종 규제 때문에 적극적인 투자와 사업을 벌이지 못했던 터에 그 족쇄가 풀렸으니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먼저 그동안 안정성이 담보된 은행에만 예치하도록 돼 있던 적립금을 보다 높은 수익률을 노릴 수 있는 주식, 펀드 등에도 투자할 수 있게 됐다. 사립대 적립금은 모두 5조 7,0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다.
현재 1,000억원 이상의 누적 적립금을 쌓아둔 사립대는 2005년 결산 기준으로 모두 10개 대학. 가장 많은 곳은 이화여대로 무려 5,421억원에 달한다. 이어 홍익대가 3,303억원, 연세대가 1,891억원으로 각각 2, 3위를 차지했다.
단순 셈법으로 요즘 황소 장세를 연출 중인 증시에 투자해 연 10%의 수익률을 올린다고 할 경우, 이화여대는 540억원 가량의 수익을 앉아서 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은행에 넣어둘 때보다 2배 이상의 높은 수입이다.
대학 내에 설치, 운영하는 학교기업의 경우에도 업종 제한이 대폭 풀려 숙박업, 주점업, 담배소매업, 노래방, 무도장, 게임업 등 20개 남짓한 업종만 빼고는 어떤 사업이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백화점, 쇼핑몰, 영화관 등 다중집합 상업시설도 대학 내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대학과 시장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빗장을 활짝 풀어준다 하더라도 대학들이 곧바로 새로운 수익창출 능력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대학 자체의 성격이 보수성, 안정성으로 대변되는 데다 전문성을 갖춘 사업 인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수익다변화 방안 찾아야
이와 관련, 교육인적자원부 사립대학지원과 최수진 사무관은 “학교와 달리 법인에게는 오래 전부터 수익사업 업종 제한을 대부분 풀어줬지만 실제 사업 내용을 보면 부동산 임대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며 “사학들이 전통적으로 부동산 자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경우가 많은 게 그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사립대 법인들이 안정적인 자산운용에 치중하는 관행 탓에 부동산 외에 다른 고수익 사업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 서울ㆍ수도권 주요 사립대 정관을 살펴보면 부동산 사업이 수익사업 리스트의 첫머리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건물 임대업은 때마다 현금 수입을 낳지만 막대한 규모의 토지 자산은 그저 장부상으로만 존재할 뿐 수익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사학진흥재단이 조사한 2006년 ‘수익용 기본재산 내역’에 따르면 전국 사립대는 1조 5,700억원 대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연 수익은 고작 63억원에 불과하다. 수익률로는 0.4%다.
반면 건물의 수익률은 8.4%를 기록했고 유가증권과 신탁예금도 각각 4%선의 수익률을 보였다. 눈에 띄는 것은 각종 수익사업체의 수익률이 10.2%로 수익용 기본재산 항목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창출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사학진흥재단 학교재정정보팀 박현철 팀장은 “국내 사립대의 수익사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저수익 재산의 비중이 너무 크다는 점”이라며 “이를 매각해 고수익 재산으로 바꿔 운용하는 게 훨씬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도 걸림돌이 없지 않다. 우선 토지 자산을 매각하게 되면 양도 차익에 부과되는 높은 세율의 법인세가 부담이 된다. 게다가 토지를 놀리지 않고 개발하려는 경우에도 그린벨트 등 규제에 묶여 불가능한 경우가 상당수다. 이러다 보니 사립대 법인들로서는 마치 계륵처럼 토지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투자 제약이 완화된 적립금의 경우도 공격적인 운용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한 사립대 재단 관계자는 “교육부가 주식투자의 문호를 열어줬지만 투자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학교의 몫”이라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실이라도 나면 누가 뒷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실제 사립대 법인 중에 수익용 기본재산을 주식에 투자하는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감안하면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 등으로 조성되는 적립금은 공익성이 더욱 커 아무래도 보수적 투자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일부 전문가들은 시대 변화에 맞춰 대학 고유의 강점이 발휘될 수 있는 틈새 업종을 수익사업으로 키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힌다.
건국대 법인 홍성용 기획부장은 “대학 수익사업은 어떤 업종도 할 수 있지만 막상 일반기업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되면 이기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경쟁이 적은 시장, 대학만이 잘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는 게 수익사업 성공의 대전제”라고 말했다.
국내 사립대 법인들이 등록금을 학교운영의 절대적인 돈줄로 삼는 현실과 비교하면 해외 유수 대학들의 재정구조는 부럽기 그지 없다.
세계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미국 하버드대는 2006년 기준 전체 재정의 36%를 투자수입으로 충당하고 있다. 반면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의 비중은 21%에 불과하다. 연구 지원금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도 20%나 된다. 정부 지원금이 17%, 각종 재단이 후원하는 돈이 3%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투자수입 부문. 하버드대는 무려 42조 1,000억원에 이르는 총 자산 가운데 34조원을 자산운용시장에서 굴리는 큰손이다. 이 돈은 최고 전문가들이 포진한 자체 전문운용회사를 통해서 불려진다.
투자 포트폴리오는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을 비롯해 상품, 부동산 등 실물자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연간 수익률은 대략 15% 정도 되는데 1/3은 대학재정으로 투입된다. 그 돈만 해도 1조원을 훌쩍 넘는다. 하버드대 1년 예산은 2조8,000억원 가량이다.
미국의 또 다른 명문인 예일대 역시 매우 안정적인 재정구조를 자랑한다. 예일대의 2006년 예산은 1조8,000억원. 이 가운데 등록금 비중은 겨우 12%밖에 안 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입이 딱 벌어지는 비율이다.
학교 예산의 절반 이상은 자산을 운용해 벌어들인 적립금 할당(31%)과 연구지원금(27%)이 채워주고 있다. 예일대의 총자산은 26조3,000억원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인 23조원을 유가증권 시장 등에 투자하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 와세다대와 함께 양대 사학으로 통하는 게이오대의 경우에도 등록금 비중은 26.8%에 그쳐 학생 부담이 적은 편이다. 등록금 의존도가 낮은 것은 다른 수입의 비중이 큰 덕분이다. 부속병원 수입이 24.2%나 되고 다양한 수익사업 등을 통해 얻는 잡수입도 29.5%에 달한다.
한국사학진흥재단 길용수 차장은 “우리나라에서 사립대의 자산운용에 대한 걸림돌이 많은 것은 대학 재단들이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한 탓도 크다”며 “앞으로는 경영을 잘하는 사립대에 대해서는 규제를 풀어 세계 수준의 재정구조를 확보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