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벽돌보다 무겁고 견고하다. 세월 위에 또 세월이 쌓이면 거대한 탑이 되거나 튼튼한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과거가 흐릿해지고, 오직 가까운 시일만 기억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무게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 친구보다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가 더 가깝게 느껴지고, 사회에서 만난 동료들이 더욱 친숙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건 기억의 야속함이 아니라, 단지 세월의 무게 때문일 뿐이다.
서교인의 밤, 마음의 고향을 이루다
이런 세월의 특성 때문인지, 초등학교 동문회의 활성화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요즘 같은 연말연시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생활은 끊임없는 인간관계의 연속인 탓에 참석해야 할 모임도 그만큼 많다. 그런데 기억도 아득한 초등학교 동문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열정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셈이다.
지난 12월7일 서울 공군회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송년회를 겸한 제2회 서교인의 밤이 바로 그것이다. 서교초등학교총동문회가 주최하고 서교초등학교가 후원한 이 행사가 특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학교가 올해로 개교한 지 5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는 안정근 총동문회장의 인사말로 시작됐는데, 그가 전한 인사말의 절반은 ‘감사’였다. 안 회장은 종합미디어그룹 시사매거진의 상임회장이자, 사단법인 한국스마트속기협회 회장으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렇듯 바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서교초등학교 총동문회에 쏟는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이번에 열린 제2회 서교인의 밤 역시 일정을 쪼개고 또 쪼개 열심을 다해 준비해 왔다고 했다. 동문회 전날에 이어 당일에도 폭설이 내려 길이 많이 미끄러웠다. 120여 석 남짓한 공간에 빈자리가 생길까 그는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인사말을 하기 위해 연단 위에 올라선 안 회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찬 동문들의 면면을 둘러보고는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동문회가 조직된 지 고작 1년 6개월 정도가 흘렀습니다. 올해로 개교 반백 년이 된 학교의 역사에 비춰보자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깊이만큼은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총동문회가 활성화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각 기별로 구성된 동문회의 활성화가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기별 동문회에 참석할 때마다, 혹은 기별 회장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늘 하는 말씀이지만, 기별 동문회가 있기에 총동문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껏 만나시고, 이야기 나누시고, 또한 우정을 다지시길 당부드립니다.”
안 회장은 초등학교 동문회는 마음의 고향이라는 말로 인사말을 맺었다. 세월이 흘러 환갑을 맞이한 나이에 초등학교 시절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애틋해진다고 했다. 이는 바쁜 일상 속에서 그가 총동문회 일에 한 치의 소홀함 없이 열정을 다 바치는 이유이기도 했다.
총동문회가 번영하고 발전해야 하는 이유
이어진 조성심 서교초등학교 교장의 인사말도 설렘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사회 곳곳에서 봉사와 헌신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문들 앞에서 오늘날의 서교초등학교를 대표해 인사말을 하게 돼 영광스럽다는 조 교장은 후배들의 교육여건 개선에 큰 도움을 준 안정근 총동문회 회장과 임원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말로 인사말을 열었다.
“어느덧 개교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학교가 개교했던 1962년 무렵은 국가재건으로 온통 분주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렇듯 개교의 의미가 남달랐던 덕분인지 2만 5,000여 명의 졸업생들은 사회의 곳곳에서 자랑스러운 서교인으로서 이 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과 역사 덕분에 1,200여 명의 후배들은 열심히 공부하며 꿈을 키워나가는 중입니다. 교사들과 교직원들 역시 이러한 꿈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개교 50주년을 맞이한 감회와 학교의 근황을 전한 조 교장은 ‘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날 참석한 동문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사실 초등학교 동문회가 없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특히나 연말에는 참석해야 할 행사들이 너무 많은 탓에 초등학교 동문회까지 챙기기에는 여력이 없다. 이는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반 백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온 서교초등학교의 역사가 동문들을 불러 모았다. 조 교장은 이를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에 비유했다. 나이가 든 후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뿌리에 대한 강력한 회귀본능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초등학교 동문회야 말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며, 아무런 조건과 이유 없이 동문들과 어울릴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 교장은 초등학교 동문회가 우리의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최고의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서교초등학교총동문회가 번영하고 더욱 발전해야 할 이유에 대해 아주 짧은 한 마디로 정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작고 어린 서교인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동문회에 참석하려면 더욱 번영하고 발전해야지요.”
빛나는 사람들, 빛나는 밤
이날 열린 서교인의 밤에는 모든 사람들이 별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난초 강희조 동문의 축시가 이 빛나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이끌기도 했다. 5회 졸업생으로서 호남요트협회와 조정협회 그리고 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청년회의소 회장 및 여수밥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욱성 동문이 자랑스러운 서교인상을 수상했다.
한국청소년봉사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불우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서교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두 아들을 귀국시켜 대한민국의 장교로 복무시킨 애국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여흥. ‘숭구리당당 숭당당’으로 친숙한 개그맨 김정렬 씨가 마이크를 잡고 동문들의 배꼽을 뽑았다 끼웠다 하며 흥을 돋웠다. 이에 각 기별 회장을 비롯한 동문들이 나와 세월과 추억이 가득 묻은 노래를 한 가락씩 뽑아내기도 했다.
이날의 여흥은 초대가수 난 연 씨의 축하공연으로 절정을 이뤘다. 허스키한 보이스에 싱그러운 미소가 돋보이던 그녀는 ‘서교인의 밤’에 불꽃놀이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랫가락에 반짝반짝 빛나던 서교인들은 서로의 어깨를 걸고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 사이로는 난 연 씨의 노래가락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