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 새번역>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절,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누가복음 12장 5절, 새번역>
바로, 그 마음은 ‘탐욕’입니다. ‘우상 숭배’라고 쓰고, ‘탐욕’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욕심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씀 드릴 것은 욕심은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욕심마저도 부정적인 이미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욕심과 탐욕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하고 순수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탐욕은 무엇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더’ 라는 비교급이 만들어 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탐욕이란 단어의 헬라어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에 대해서 깊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플레오넥시아’는 ‘더욱 더’라는 뜻의 '플레온'과 ‘갖다’는 뜻의 '엑소'가 합쳐진 말로서 기본적으로, ‘더욱 더 가지려는 억제할 수 없는 열망’ 이나 ‘우상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주로 ‘탐욕’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근본적인 개념은 물질적 소유를 더 가지는(having more), 더 받는(receiving more), 결국에는 더 원하는(wanting more)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아주 쉽게 한 마디로 말씀 드려 이 탐심이 왜 ‘우상숭배’라고 말씀 하셨는지를 보면 결국,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절제 없는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어떻게 하면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탐욕이라는 녀석과 Good Bye, 작별할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탐욕’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현재에 대한 충분한 만족’입니다. 결코 억지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심리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도 만족한다고 느끼면 만족하게 될 거야!’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현재를 바라보면서 행복하다는, 충분하다는, 나아가 감사하다는, 더 나아가 자랑까지 할 수 있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지금 내 현재에 대한 평가가 ‘행복이라는 만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새번역>
둘째, ‘불필요한 것들의 나눔’입니다. 탐욕은 가톨릭 교리서 1866항에 보면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지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악 중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탐욕은 ‘인색’이라는 단어 ‘Avaritia’ 와 함께 등장합니다. 저는 이 해석에 동의합니다. 탐욕은 남에게 베풀지 않고 재물 모으기에 급급하여 지나치게 인색함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기이 때문입니다. 그러니 탐욕과 작별하기 위해서는 그저 모으기에 급급했던 삶을 멈추고, 내게 충분하기에 불필요한 것들의 나눔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기로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이미 탐욕과 좋은 안녕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나눔이 상대방에게로 이어지게 될 때 탐욕은 어느새 기쁨이 되고, 나눔을 통한 뿌듯함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8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탐욕의 반대말 세 번째는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말은 결코 주문이 아닙니다. 아무런 믿음 없이 툭하고 뱉어 내는 고백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때 쓰이는 말이 아니어야 합니다. 멋있어 보이려고 쓰는 말은 더더욱 아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고백해야 하는 말입니다. 정말 잘 나가는 순간에도, 멈추어 서게 하실 때에도, 축복에서 돌연 절망의 순간으로 전환시키시더라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하박국 3장 17~18절, 새번역>
탐욕은 ‘신기루’와도 같습니다. 평생을 가도 ‘만족’이란 끝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탐욕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탐욕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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