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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성적표
등잔불 아래 숟가락 그림자 끔먹거리는 저녁 밥상.
4월의 반찬은 주로 묵은 짠지와 봄나물 풋것들이다. 오이지와 단무지는 장독에서 꺼낸 묵은지 식물성이고 달래간장과 쑥갓 새싹, 벌금자리 무침이 풋것 엽록소에 속한다. 냉이국은 남자들에게만 한 그릇씩 돌렸고 어머니와 누이들은 그냥 이맛살 맞대며 양푼 채 비벼 떠먹는 중이다. 저물녘, 대밭집 부엉이 울음이 문풍지 비집는 소리에 취한 탓이었을까. 가족들은 그때까지 고개 숙인 둘째 아들의 퉁퉁 부은 눈두덩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랬다. 소년은 불빛 아래서 5분 내내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맨 먼저 눈치 챈 건 아버지다.
“너……왜 그러니?”
때까치가 날자 감나무 삭정이 하나 투툭 떨어졌을 뿐인데, 묵묵부답 소년의 고개가 더 숙여졌다. 꽃샘바람 냉기가 다시 문풍지를 두들긴다. 춥다.
“왜 이런댜? 얘가.”
그제야 어머니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쓸어보려 한다. 소년은 끄윽끅 어깨를 떨다가 비통을 토하는 게, 고작.
“…… 6등 했슈.”
62명 중 6등짜리 성적표를 받고 억장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 점수를 위조하려고 손가락에 침발라서 지우려다가 구멍이 뻥 뚫려버린 성적표를 내밀어야 한다. 목에 메이면 숟가락이 안 넘어간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윗방 이불더미에 쓰러져 흥건히 젖도록 울면서 전의를 다졌던가. 아무튼 성적표는 그 후 1년이 지나 6학년 9월 서울 유학 직전까지 1등 숫자가 가장 많았고, 그게 소년의 성적표에 붙은 유일한 전성기 추억이다.
서울 전학 후, 첫 시험은 80명 중 11등이었다.
그 첫 시험 11등 성적표의 안도감이 아주 잠깐 나를 포근하게 했다. 왠지 서울에서는 천수만 촌놈의 성분답게 그 정도 석차가 어울릴 것 같았다.
‘서울 애들과는 원래 실력 차이 나는 게 당연하니까.’
‘서울은 으레 교실마다 올백(All 100)이 서너 명씩 있으니까.’
그렇게 예의를 갖추면 모든 게 용서되는 것이다. 게다가 북아현동 자취방에는 무서운 아버지가 안 계시므로 ‘사랑의 채찍’도 없었고 ‘1등 강박증’도 없었다. 찝찝한 마음과 ‘대한독립만세’의 혼재로 한 학기를 버텼다.
그러다가 중고생 문예지 『학원』 잡지를 만났다. 남산도서관 정기간행물 코너에서 읽었는데 더러는 철물점 아들인 석철이네 2층 다락방에서 묵은 잡지를 끄집어내기도 했다. 경이로웠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수준 높은 문장들이 죽순처럼 튀어나오는 것이다. 애독 코너 문예란에는 이미 리얼리즘으로 무장된 문학청소년들이 어둠의 배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난한 아버지와 불량 사춘기 아들의 재결합 스토리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이마빡 터지게 싸우던 부자지간이 신산의 곡절 끝에 이차구차 화해하는 장면이다. 결손가정의 화해 도구는 성적표와 밥이었다. 아버지의 일용직 취업 선물인 밀가루 한 부대와 ‘돌아온 탕아’의 6등 짜리 성적표가 행복하게 해후하는 게 마지막 소재가 된다. 예전에 내가 밥상머리에서 꺼이꺼이 울던 석차 6등이 다른 공간에선 가장 행복한 숫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아프고 미안했다.
그래봤자 학년이 올라가면서 석차의 압박감이 또 되살아났다. 이제는 1등 쟁탈전이 아닌, 교실 10등 진입을 위한 몸부림이 처절했으나 책을 잡는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이다. 텅 빈 자취방에서 책을 잡으면 머리가 하얘지면서 벽돌들이 후당후당 흔들리는 것이다. 시험 때마다 성적이 그야말로 시나브로 떨어졌다. ‘유리 항아리 안고 바위산에 오르는’ 느낌으로, 사막의 쇠똥구리처럼 낙상도 하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중3때, 15등으로 밀리면서부터 오로지 돌발 불행만 떠올렸다. 전쟁, 지구 폭발, 갑작스런 건물 붕괴, 치명적인 질병……좌우지간 자살을 빼곤 아무 상황이나 와르르 터져줘서 제발 나를 입시지옥에서 탈출시켜주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욱신대는 관절을 잡고 대학병원에 장기 입원하면서, 안도했다. 자, 이제는 3류 고등학교에 가더라도 명분이 서는 것이다. 그즈음 나에게 수학적 머리가 없음을 처음 알았고.
산수는 쉬운데 수학은 어려웠다. 이상하다. 친구들의 나이와 키, 몸무게, 전화번호나 번지수 심지어 세계 각국의 건국과 패망 연도까지 정확하게 외우는데, 이 숫자란 놈들을 곱하고 나누며 그래프와 시그마와 수열과 집합에 대입시키는 순간부터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질투가 많은 수학’. 그 수학만 포기했으면 고교시절이 평온했을 것이고 재수생의 길을 걷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교 3년 내내 주당 15시간 이상 수학에 매달렸으나, 그해 예비고사에서는 25문제 중 9문제를 맞췄을 뿐이다 4지선다형이니까 25%는 기본으로 먹고 간다면 두 문제쯤 더 맞추기 위해 고교 3년을 ‘수학과의 전투 모드’에 돌입한 것이다. 그 맞춘 놈 두 문제도 공식에서 뽑아내는 게 아닌 아날로그 타법이었다. x와 y 사이의 숫자를 구하기 위해 모눈종이와 볼펜심, 손가락 발가락을 죄다 헤아리면서 타종소리까지 지켜내던 식으로.
그렇다고 늘상 떨어지기만 한 건 아니다. 나는 시험을 여덟 번 봐서 네 번 떨어졌지만 또 네 번 합격했다. 그 50%의 확률에 ‘하느님은 견딜만한 시련을 주신다’며 ‘절망 속의 안도감’으로 자위하는 것이다. 이따금 큐피드의 행운도 있었다. 누워 있다가 홍시 깨물 듯, 입시 한 시간 전에 풀어본 문제가 앗! 시험문제에 등장하여 커트라인으로 턱걸이되기도 했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수학의 주관식 정답도 ‘에잇, 썅칼, 모르겠다’ 하며 그냥 ‘0’이나 ‘1’을 썼는데 그게 생뚱맞게 정답이 되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도 한동안 수학의 악몽에 갇히곤 했다. 수학이 전혀 필요 없는 인문계 국문학도 교육과정이 도대체 어색해서 발목에 사슬이라도 채워야 할 판이었다. 수학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과 가위눌림에 오래도록 시달린 것이다. 그 짓눌림 없는 ‘앙꼬 없는 찐빵’에 적응하느라 어리둥절했지만 어쨌든 두뇌에의 열등감이 대폭 삭감되었다.
샛길로 빠지는 느낌이지만, 내 친구 길몽이 이야기 하나.
그 70년대는 ‘예비고사’ 합격생에게만 4년제 대학 응시 자격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 시험에서 절반을 잘라내었고 다시 예비고사 통과자끼리 또 대략 몇 대 일 정도의 시험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반쯤 되는 학생이 일찌감치 자격미달 딱지를 붙이니, 예비고사 낙방자에게는 곧 성적이 중간 이하로 분류되는 하류학벌로 전락되는 것이다.
정확한 소식통에 의하면, 3수생 길몽이는 예비고사에서 떨어졌었다. 하지만 길몽이는 재빨리 모든 친구들에게, 자기는 예비고사를 합격했으며 본고사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여기저기 가짜 소문을 냈던 터이다. 친구들 역시 반신반의하면서 그런가 보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우리들은 길몽이의 위로 겸 궁금증 겸사해서 C대학 입시 직후 대학로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30분쯤 먼저 입시장 앞에 도착했는데 아!
그가 대학로 맞은편 만화가게 문을 열고 막 나와 힐끗 좌우를 두리번대다가 허둥허둥 교문 앞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땡땡’ 소리가 나자마자 아주 재빨리 몰려나오는 수험생 인파에 끼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교문쯤에서 피로한 표정으로 는적는적 나오는 걸 분명히 보았다. 진짜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몽이는 뒤늦게 찾아온 친구들에게 여유 있게 손도 흔들어주더니.
“C대학 시험 망쳤다. 홧홧홧,”
그가 먼저 웃었으므로 우리도 함께 웃었고, 특히 내가 제일 크게 웃었다.
“나는 이제 군대에 갈 거야.”
그러니까 그는 예비고사 낙방생이 아닌 C대학 불합격생으로 인식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C대학 앞에서 친구들을 만나자고 한 다음 알리바이를 세우기 위해 온종일 만화방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숨은 그림’으로 변신했던 벗의 모습이 아리고 쓰리다.
‘그래, 너는 예비고사 낙방생이 아닌 C대학 불합격생으로 남는 거야. 영원히.’
나는 위로 방문한 친구들에게도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고 술을 마셨고, 그의 눈시울이 젖는 걸 얼핏 보았고, 통금에 쫓겨 집에 왔던 것 같다. 땅에 묻었던 사연을 40년 지난 지금에야 털어놓는다. 이제는 천기누설이 아닌 그냥 유쾌한 에피소드가 될 수 있을까, 하며.
수학보다 훨씬 무서운 게 컴퓨터 연수였다. 연필로 쓰는 게 아니라, 커서와 키의 조합이어서 자판과 폴더에 붙은 각종 행렬의 내력에 적응이 안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피할 수 없는 게 21세기 공무원 시스템이다. 후배교사들의 도움으로 업무처리를 모면하긴 하나, 교직에 남아있는 한 더 이상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컴퓨터 연수를 불쑥 받는 척 했지만 내가 준비를 전혀 안한 것은 아니다. 연수 전에 미리 오픈 게임 독학을 시도했고 아무도 없을 때마다 몰래 설명서를 기웃대기도 했다. 마침내 컴퓨터 연수 60시간을 신청했고 가끔 복습도 해봤지만 결국 마지막 날 시험에서는 예상대로 꼴찌를 했다. 이듬해 또 컴퓨터 연수를 신청을 했다. 40명의 교사 중 나이 순서로 내가 4번이었다. 컴퓨터학과 재학 중인 알바생이 상주했으나 그녀는 가장 연장자인 1번 선생님 옆에 붙어있는 바람에 착한 교사 전용봉 선생님한테만 연신 부탁을 했다. 시험 볼 때는 얼떨결에 한 문제 곁눈질 커닝해서 40명 중 39등을 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으므로 당연히 한 번 더 신청하고 싶었으나, 엑셀 강사가 농담을 한답시고.
“예전에 3년 연속 컴퓨터를 수강하면서 3년 내내 꼴찌만 도맡았던 웬 늙으신 선생님이 있었어요. 대단하죠. 흐흐흐.”
윽, 그 농담에 비수처럼 가슴에 찔리면서 세 번째 연수는 포기했다.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적이 별로 오르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숫자 앞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노력한 만큼 성장이 보이는 사람은 참으로 축복스러운 것이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오래 노력해서 취득한 공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대가리 육질이 딱딱해서 지식이란 놈이 뚫기가 힘들 뿐 일단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오지도 않아서 영원히 저장될 수도 있다.
성수는 그림도 아주 잘 그리지만 날마다 공부만 하는 범생이 부류다. 한눈도 팔지 않았고 청소와 봉사활동, 헌신성과 노력 모든 걸 갖췄지만 안타깝게도 이과 계통 점수가 오르지 않았다. 비평준화 그 소도시는 학교별 등급이 나눠져 있었다. 그는 수험생 중 딱 네 명이 떨어지는 C등급 학교에 응시했다가 낙방생이 되었다. 나는 미달학교 면담을 통하여 면소재지의 D학교와 타시군의 E학교를 추천했지만 어머니가 설레설레 도리질쳤다. 그의 형이 그 학교에 입학했다가 토박이들한테 몰매를 맞은 상처가 깊게 남아있노라고 절망에 가까운 토로를 던졌다. 그렇다고 그 혼자 망망대해 외딴 섬처럼 재수생의 길을 걸을 수도 없지 않은가. 내년에 미술 특기생으로 도전하면 어떨까 상담하려던 참이었다.
다행히 그의 추가합격 소식이 불현 듯 날아와서 나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후보 1위였었는데 미등록자가 생기는 바람에 재빨리 등록한 것이다. 미남자에 만화도 잘 그리는 그의 이름자를 인터넷에서 가끔 만나기도 했다. 이제 곧 한반도에 그의 만화 돌풍이 뜨겁게 몰아치리라. 소망 절반 확신이 절반이다.
장숙이는 공부벌레다. (해마다 한두 명씩 그런 아이들을 꼭 만나게 된다.)
쉬는 시간이건 점심시간이건 온종일 책과 붙어 살았고 청소시간에는 비질을 끝내자마자 책속에 파묻힌다. 체육대회 때는 준비체조가 끝난 빈틈에 영어단어를 외웠고 중간에 잠깐 여학생 피구에 출전한 다음 또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다. 시험을 보면 전과목 중 한두 개만 틀렸고 이따금 올백을 때려 스승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한다. 그래서일까. 심술보 남학생들도 장숙이는 일체 건드리지 않는다.
서울로 소풍 가는 관공버스에서는 맨 앞자리에 혼자 앉아 수학문제만 풀었다. 에버랜드 소풍의 자유이용권도 모두 다른 아이들에게 주고 벤치에 쪼그려앉아 학습문제만 풀었다. 내려오는 길에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도 에버랜드 가는 버스에서 장숙이 옆자리에 앉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니 그런 포즈만큼은 스승과 제자가 한통속이다.
그녀는 한 때 나와 도대회 논술을 준비하기도 했다. 첨삭 도중 뒤로 갈수록 문장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해서.
“왜 여기부터 글의 문장이 깨지기 시작하지.”
“이때는 밤 두 시 반이거든요.”
뒤쪽 문장은 더욱 허술해서 맞춤법도 하나 틀렸다.
“거긴 세 시요.”
그러다가 아예 문장이 막혀버렸다. 조금 심하다고, 눈총을 줬는데도 박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
“네 시요. 여기서 끊어졌지요. 학교는 가야 하니까 책상에 엎어져 눈을 붙였죠.”
이제는 십 년이 지난 사연이니 그미는 지금 등 푸른 청춘이다.
이 순간 하필 2009년 OO교육청 일제고사 해프닝이 화면처럼 떠올랐을까. 전국 모든 학교가 동시다발로 일제고사에서 유독 OO군에서만 한 명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은 사건이다.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읍소재지가 매스컴의 중앙에 선 것이다. 그런 돌발 현상이 떠오르자 교육부는 즉시 분석을 통하여.
00교육장과 학교장이 자녀들의 학력은 학교가 책임지겠다고 학부모들을 설득하여 전 학교가매일 6시까지 방과후 학교와 보육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농어촌 학교의 가장 취약한 교과인 영어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지역교육청 주도의 영어체험학습센터와 생활관을 만들어 영어교육을 강화함. (중략)
문서를 통한 분석적 순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자마자 보수언론들은 ‘기회는 찬스다’를 외치며 ‘개발의 땀’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촌동네의 반란’ ‘강남보다 낫네’ 등의 기발한 제목을 뽑아내면서 ‘형설의 공 파이팅’을 외치며 예술적 극치를 이뤄내었다.
결국 이틀 후에 성적조작으로 판명되었다. 그도 상부 관청 몇 단계를 거쳐 조작된 것으로 판명되었으니 더 이상 말하기 부끄러워졌다. 그런 희극적 무대를 보면 나는 자꾸 눈시울이 젖는다.
지금은 6월 25일 63주년 아침.
나는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 1교시 언어영역 부감독이다. 학생들은 성취도 평가에 관심이 거의 없지만 실제 수능시험처럼 감독관 서약서도 쓰고 교실 당 두 명씩 배치시켰으며 복도감독관도 있다. 감독관 주지 매뉴얼에 뜬 대로 실시간 인원수 변동사항도 교육청에 보고한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은 내신과 수능 어느 쪽에도 해당이 안 되는 이 제도에 관심이 없다. 당연히 커닝도 없는데, 상급관청만 다사다난하게 간섭할 뿐이다. 이튿날 C도 교육청 공문이 인터넷에 떴다. (2013.6.26.)
성취도 평가 가채점 결과를 부탁드립니다.
6월25일 성취도 평가 시험을 치르면 가채점을 해주시고(특히 학습 부진 예상 학생) 그 결과를 붙임 양식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선택형, 서술형 합해서 맞은 개수대로 학생수를 기록해주시면 됩니다. (특히 10개 이하는 정확하게 파악했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00지역 기초미달 제로 달성!!!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교장실에서 가채점했다고 증언한 교사들의 기사도 실렸다. 이는 일제고사 관련지침에서 공식적 금지 행위다. 시험 직후 ‘즉시 회송용 봉투에 답안지를 넣고 밀봉한다’라는 지침에 위배된 것이다. J교육청 관계자는, ‘학생들이 제대로 공부했는지 빨리 보고싶어 순수하게 가채점을 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믿어야 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킬킬대면, 그게 비극성 코미디다,
러시아의 쌍트베르그에 사는 ‘그레고리 페렐만’은 금년 45세의 수학천재다.
이미 중고생 시절에 수학과 물리올림피아드에서 만점으로 금메달을 수상했으니 그의 아이큐는 ‘측정 불가’다. 그즈음 미국의 부호 랜던 클레이가 세운 연구소에서 미해결 문제 7개를 내걸고 한 문제당 100만 달러의 상금을 내건 것이다. 그 중 프랑스 수학자 앙리 프앙카레가 내건 100년 간 아무도 풀지 못했던 문항도 포하되어 있다.
‘3차원에서 두 물체가 특정 성질을 공유하면 두 물체는 같은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는 1904년 프앙카레가 논문 ‘단일연결인 3차원 다양체는 구면과 같은 것인가’를 제기하면서 비롯된 것인데 ‘어떤 닫힌 3차원 공간에서 모든 폐곡선⌃)이 수축되어 한 점이 될 수 있다면 이 공간은 반드시 3차원 구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제다.
수학전투가 시작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적 천재들이 100년 간 매달렸다가 번번이 나가 떨어졌다. 패배의 홧병이나 공황장애로 쓰러지게 할 정도니 가히 천재들을 좌절시키는 악마적 코스다. 그 100년 난제를 페렐만이 해결했으니 수학계가 뒤집혀버렸다. 그러나 증명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 초청강연에서 전 세계 수학천재들이 쿠웨이 연구소에서 몇 시간 동안 강연을 받았는데도 판도라 상자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쿠웨이 연구소에서 인터넷 내용을 분석한 결과.
‘증명이 맞았다. 그러나 설명하긴 힘들다.’
물리학 개념이 동시에 들어있어서 더 어려웠다고 한다. 그 후 기자들이 그의 아파트에 우르르 찾아갔으나 판도라의 주인공은 항상 숨어있었다. 어느 누구도 만나주지 않다가 그의 석박사 지도교수가 찾아갔을 때만 간신히 안부 인사만 전하고 쏙 돌아갔을 뿐이다. 그는 벌이가 없으므로 여전히 가난하다. 교수도 연구원도 아닌 천재 학자는 지금 홀아비의 몸으로 바퀴벌레 기어다니는 노모의 아파트에 얹혀산다. 교직을 퇴임한 노모의 연금 30파운드(한화 5만4천원)가 그의 유일한 식자재 해결책이다.
클레이 연구소에서 그에게 100만달러(한화 12억원)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원하던 바를 해결했다. 더 이상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수학 저널에 논문을 싣는 게 수상 조건인데 페렐만이 끝내 거부한 것이다.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집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갔단다. 저녁 반찬거리를 장만하러 산에 오르는 그의 구겨진 운동화도 식물성 나무로 합체되는 순간이다.